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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 소개

- 프레더릭 더글러스 (Douglass Frederick )

본명 Frederick Augustus Washington Bailey. 메릴랜드 출생. 흑인 여자노예와 백인 남자 사이에서 노예로 태어났다. 1832년 볼티모어에서 일하면서 문자를 익히고, 1838년 도망하여 성을 더글러스로 바꾸었다.

1841년 매사추세츠주(州)의 낸터컷에서 개최된 노예제 반대대회에서 연설한 웅변을 인정받아 노예제 반대협회의 연사로 고용되어 영국 등지로 강연여행을 다녔다. 그 후 자유흑인이 되었고, 1847~1860년 뉴욕에서 노예제 반대 신문인 《노스 스타 The North Star》를 발행하였다. 1877년 컬럼비아 특별구 경찰서장, 1889년 주(駐)아이티 공사 등을 역임하였다.


2. 미국 노예 제도의 간략한 역사

영국의 식민지인 미국 땅에 흑인이 처음으로 발을 디딘 것은 1619년 8월이었다. 20명의 흑인이 버지니아 주 제임스타운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노예가 아니라 일종의 계약 하인이었다. 이들은 보통 7년 정도였던 계약 노역기간이 지나면 모두 자유인이 되었다. 이들의 노역은 대서양을 건너는 뱃삯으로 여겨졌다.

유럽의 가난한 백인들도 계약 하인으로 식민지에 미국에 왔다. 백인과 흑인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백인은 자발적으로 온 것이고, 흑인은 강제로 끌려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17세기까지는 미대륙에서 흑인은 많지 않았다.

17세기가 끝나가면서 많은 수의 농장이 있었다. 대규모 농장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농장주들은 계약하인보다 비용이 적게 들고 인디언보다 유럽의 질병에 강한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수입했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주로 남부로 실려 갔지만 일부는 북부로도 갔다. 북부에서 노예가 가장 많았던 주는 매사추세츠와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이었다.

독립전쟁이 발발할 때쯤 북부의 6개 주에는 약 1만6첨 명의 흑인 노예가 있었고, 미국 전체적으로는 약 50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산된다.  북부는 날씨와 지형 상으로 남부와 같은 대농장 형성이 어려웠기 때문에 독립전쟁 이전에 노예들은 농장이나 조선소, 공장에서 숙련, 혹은 비숙련 노동자로 일했다. 반면 농업이 중심이었던 남부에서 노예들은 가장 값싸고 믿을만한 노동력이었다.

노예들은 집단 노동 방식과 개별 임무 방식, 두 가지로 운영되었다. 집단 노동은 주로 남부에서 이루어졌는데 많은 수의 노예들이 십장의 감시를 받으면서 들에서 함께 일하는 방식이다. 개별 임무 방식은 노예 한 명마다 일을 따로 주는 방식으로 주로 북부에서 많았다.  남부에서 노예가 집단 노동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대단히 큰 혜택이었다.

영국 법에는 노예의 지위에 대한 규정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지 미국은 자체적인 노예법을 만들었다. 노예법은 주마다 달랐지만, 일반적으로 노예에게는 민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같은 범죄라도 백인보다 훨씬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식민지 미국에는 백인용 법전과 흑인용 법전이라는 두 개의 법체계가 공존했다.

미국의 남부 인들과 일부 북부 인들은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 몇 가지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로 성서에 있는 몇몇 구절이 노예제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른바 노예제도는 성서적으로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이들이 내세운 구절은 창세기 8장 18~27절에 나오는, 햄은 전통적으로 흑인이란 뜻을 갖고 있다고 믿었는데 힘의 후손은 노예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디모데 전서 6장 1절을 비롯해 베드로 전서 2장 18절, 에베소서 6장 5~9절, 골로새서 3장 22절~ 24장 1절을 여기에 이용했다. 이에 대해서 더글러스는 햄의 검은 피부가 저주의 증거라면 백인의 피부색과 거의 비슷한 혼혈인은 왜 운명적으로 노예가 되어야 하는가 반문했다.

두 번째로 노예가 없어지면 미국 경제가 타격을 입는다는 일부 노예주들의 주장이다. 영국은 서인도의 대농장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했지만 경제는 붕괴되지 않았다.

세 번째로 흑인은 지적으로 열등하고 따라서 백인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는 비유럽 인들을 식민화해서 문명화시키고 기독교화 시키는 것이 백인이 숙명적으로 타고난 부담이라는 주장이다. 일부 백인들은 흑인을 노예로 삼은 것은 아프리카인들을 보호하고 문명화시키는 수단이라고 합리화하려 했다. 이에 대해서 더글러스는 노예제도가 아무런 지적혜택을 가져오지 못했다고 통렬하게 반박했다. 노예 제도 폐지론자인 로이드 개리슨도 인종과 관계없이 어떤 사람이든 노예로 전락되면 모든 논리적 능력을 상실한다는 실례를 제시했다.

네 번째로 많은 남부인들은 노예 제도에 대해서 낭만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노예제도는 우아하고 고상한 남부식 생활 방식의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옛 남부의 이런 이미지는 현재까지도 남아있고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대중문화를 통해 강화되었다.
더글러스는 노예가 노래를 부르는 것은 즐거워서가 아니고 슬프기 때문이라고 증언함으로써 노예는 노예임을 즐거워한다는 남부인의 잘못된 생각에 일침을 가했다.

독립전쟁이 끝날 무렵 자유 흑인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독립전쟁에서 식민지 미국 군대에 합류해 영국과 맞서 싸운 5천명의 노예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독립이후 북부 주들은 흑인에 대한 일괄적인 해방을 단행했다.
19세기 중반까지 노예제는 미국의 첨예한 정치현안이었지만 북부의 노예제도 폐지운동은 몇 개의 분파로 나뉘어 남북전쟁 발발 순간까지 통합되지 못했다.

개리슨 진영은 하느님의 법에 따라 당장 노예를 풀어주라고 주장했다. 자유당은 노예의 지위를 정치제도 안에서 해결할 것을 주장하면서 개혁을 요구했다. 자유당에서 갈라져 나온 ‘자유의 땅’당은 노예제도 폐지를 당헌으로 유지하되 기존의 노예주는 제외하고 연방에 새로 들어오는 주와 준주에서만 노예제도를 금지하자고 주장했다.

도망 노예법은 노예제도를 놓고 분열된 연방을 유지하려는 마지막 노력이었다. 하지만 이 법은 남부와 북부 사이를 더욱 갈라놓았다. 1845년 북부 위그당과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민주당원, ‘자유의 땅’당은 위스콘신 주 리폰에 모여 새로운 정당인 공화당을 창당했고, 1860년에는 에이브러햄 링컨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

남부 주들은 연방에서의 분리 이탈로 대응했다. 1861년 2월 남부 11개 주는 제퍼슨 데이비스를 남부 연방의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1861년 4월 남군은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포트 섬터를 공격함으로써 노예를 둘러싼 지루하고 첨예한 남북 대결은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서유럽 국가들은 19세기 중반이 되면서 대체적으로 노예제에 반대했다. 영국 식민지에서는 1834년 노예제도가 금지되었고, 프랑스 식민지에서는 1848년에 금지되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전쟁(남북전쟁, 1862~1865)으로 노예문제를 해결했다.


3. 더글러스의 생애

프레드릭 더글러스는 1818년 즈음에 메릴랜드 주의 터커호에서 노예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 아이잭 베일리와 할머니 벳시 베일리의 손에 자랐고 조금 커서는 노예주인 앤소니 선장 집에서 자랐다. 그가 글을 접한 것은 여섯 살쯤 되었을 때, 앤소니 선장은 더글러스를 볼티모어에 있는 친척인 휴 올드의 집으로 보냈는데 거기서 휴의 아내인 소피아에게 처음으로 글을 배웠다. 휴의 반대로 소피아는 글공부를 가르치는 것을 중단했지만 더글러스는 동네 아이들을 선생 삼아 공부를 계속했다.

1826년 주인인 앤소니 선장이 죽자 다시 메릴랜드 주 시골로 돌아갔고 재산 분배 과정에서 토머스 올드의 노예가 되었다. 토머스 올드는 고분고분 복종하지 않는 더글러스를 노예 길들이기로 악명 높은 에드워드 코비에게 1년간 대여하였다. 코비의 학대에 시달리던 더글러스는 그에 저항했고 처음으로 승리의 달콤함을 맛보았다.

코비와의 대여기간이 끝나자마자 더글러스는 다시 윌리엄 프릴랜드에게 대여되고 여기서 그는 다른 노예들과 첫 탈출을 감행했지만 계획이 사전에 새나가는 바람에 실패했다.

우여곡절 끝에 옛 주인 휴 올드의 주선으로 조선소에서 방수 기술을 배웠고 이를 기반으로 돈을 주고 자유 시간을 사면서 부분적으로 독립했다. 완전한 자유인을 꿈꾸던 그는 1838년 9월 3일 자유 흑인 애나 머레이의 도움으로 마침내 탈출에 성공했고 머레이와 결혼해 뉴 베드퍼드에 정착했다.

1841년 더글러스는 낸터컷에서 열린 노예제도 폐지 집회에 참석하는데 여기서 당시 노예제도 폐지운동가로 이름이 높은 존 A. 콜린스와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을 만나면서 또 다른 전기를 맞았다. 콜린스로부터 유급 연사로 활동해 달라는 제의를 받았던 것이다. 강연 활동은 원래 3개월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연설이 인기를 끌면서 4년으로 늘어났다.

1845년 더글러스는 그 동안의 연설을 바탕으로 자서전을 발간했다. 자서전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번역 출판되었다.

식자들의 높은 평가와 대중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자서전은 노예 제도 지지자들로부터 진위성을 의심받았다. 정식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노예가 그렇게 뛰어난 글을 썼을 리 없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일부에서는 노예 제도 폐지 운동가들이 대신 썼다고 의심했다. 그는 자신의 지적능력을 입증하기 위해서 또 다시 연설을 해야 했다.

자서전이 유명해지면서 도망노예를 잡는 사냥꾼들에게 체포될 위험이 높아지자 영국으로 건너가 2년 동안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연설 활동을 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노예제도 폐지에는 동조하면서도 노예들의 열악한 환경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영국에서 법적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주인인 토머스 올드가 7백11달러 16센트를 내면 자유를 팔겠다고 제의했고, 더글러스의 영국인 친구 두 명이 이 돈을 지불했다. 1847년 더글러스는 법적으로 완전한 자유인이 되어 미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이후 그는 노예 제도 폐지 운동가들과 거리를 두었다. 덜 세련되게 얘기해야 진짜 노예출신처럼 보인다는 백인 운동가들의 나팔수가 되기도 싫었고 너무 온건한 개리슨의 방식에 찬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점차 노예해방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리적 저항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봉기도 배제하지 않았다. 때마침 1859년 존 브라운이 이끄는 흑인 노예들이 봉기에 필요한 무기를 확보할 목적으로 하퍼스 페리에 있는 무기고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봉기는 뒤에 남부군 총사령관이 되는 로버트 E. 리 대령에 의해 진압되었다. 더글러스는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지만 캐나다로 피신했고 같은 해 11월 다시 영국으로 건너갔다.

6개월 뒤 딸이 사망하자 귀국한 더글러스는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의 대통령 선거 유세를 도왔다. 그는 링컨을 “이전의 어떤 대통령보다 조국과 인류에 공헌할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북군이 흑인 병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력한 설득작업을 펼쳤고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링컨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흑인으로만 구성된 54연대와 55연대를 조직했다. 더글러스의 두 아들도 흑인연대에 입대했고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다른 흑인병사들처럼 사살되었거나 노예로 팔려갔을 것이다.

1846년 10월 그는 남북전쟁 이후 흑인의 미래를 논의한 뉴욕 주 시러큐스 집회에 참석했다. 여기서 흑인 모두에게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인종 차별적 백인은 물론 개리슨 진영의 노예제도 폐지 운동가들도 이 안에는 반대했다.

1865년 4월 14일 링컨 대통령 암살 사건은 연방주의자들을 단결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연방의회는 수정헌법 13조와 14조를 통과시켰다. 이로써 미국 시민은 미국의 영통서 태어난 모든 사람으로 명문화되었고 따라서 흑인도 법적으로 미국 시민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인디언은 미국 시민에 포함되지 않았다.

더글러스는 남북전쟁이후 공화당 후보의 대통령 선거를 돕는 한편 흑인 참정권 운동을 계속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실패가 잇따랐다. ‘The New National Ear’라는 신문을 창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또 자유 노예를 주 고객으로  설립된 은행의 경영을 맡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심각한 경영악화에 직면한 은행 이사들은 더글러스를 은행장으로 영입하면 흑인 고객을 끌어들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은행 파산이후 그는 생활 때문에 다시 연설을 시작했고 인기를 누렸다.

정치적으로는 공화당 지도자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1871년에는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으로부터 지중해의 소국 산토도밍고 합병문제를 조사하는 임시위원으로 임명받았다. 더글러스는 아메리칸 드림의 신봉자였고 합병이 되면 산토도밍고 사람들이 미국의 혜택을 입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정치권이 반대에 부딪히면서 산토도밍고 합병이라는 그랜트 대통령의 야심은 꺾이고 말았다. 더글러스는 정열적으로 그랜트 대통령의 재선 유세를 도왔기 때문에 공직임명을 기대했으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1877년에는 워싱턴 D.C. 연방 보안관으로 임명되었다.

1882년 8월 더글러스는 44년간 인생의 동반자였던 아내 애나를 잃었다.
그의 주변에는 백인을 포함해 여성 친구들이 많았다. 백인 여성 친구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는 여권 운동가였고 이들은 여러 면에서 노예제도 폐지 운동가와 뜻을 함께 했다. 대표적인 여성 참정권 운동가로는 수잔 B. 앤소니가 있었는데 그녀는 더글러스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바쳤을 정도로 절친했다.

부인이 죽고 1년 6개월 뒤에 더글러스는 백인 여비서였던 헬렌 피츠와 재혼했다. 백인 여성과의 재혼은 많은 흑인과 백인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이에 대해 미국에서 백인과 흑인의 성적인 관계는 언제나 존재했으며 자신은 다만 이를 결혼으로 합법화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1888년 더글러스는 벤저민 해리슨의 대통령 선거 유세를 도왔고 해리슨은 대통령에 당선되자 더글러스를 아이티 주재 미국대사로 임명했다. 대사 임기가 끝난 뒤에 더글러스는 저술과 강연으로 말년을 보냈고 1895년 2월 20일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4. 인상 깊은 문장

가슴을 찢는 듯 한 이모의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새벽잠을 깬 적이 적지 않았는데, 주인님은 이모를 들보에 묶어놓고 맨살이 드러난 등에 말 그대로 피범벅이 될 때 까지 채찍을 휘둘렀다. 피를  뒤집어쓴 이모가 어떤 말을 해도, 어떤 애원을 해도,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피에 굶주린 냉혹한 마음은 꿈쩍하지 않았다. 비명이 크면 클수록 채찍질은 거세졌고 피가 가장 많이 흐르는 곳을 가장 오랫동안 때렸다. 비명을 지르게 하려고 채찍을 휘둘렀고, 입을 다물게 하려고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질을 할 힘이 없을 때가 되어서야 피가 엉겨 붙은 쇠가죽 채찍을 멈추었다.

-주인인 앤소니 선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조잡하고 음이 맞지 않는 이런 노래의 깊은 의미를 노예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 역시 노예들의 무리 안에 있었기 때문에 무리 밖에 있었으면 보고 들었을 것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노래에는 끔찍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노래는 소란스러우면서도 길고 낮게 가라앉았다. 거기에는 기도가 숨 쉬고 있었고 짓누르는 고뇌로 끓어 넘치는 영혼의 흐느낌이 있었다.
곡조 하나하나는 노예제에 반대하는 증언이었으며 쇠사슬에서 해방시켜달라고 하느님께 비는 기도였다. 그 거친 선율을 듣고 있노라면 언제나 기분이 우울했고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미어졌다.

-노예들이 일을 하며 부르는 노래에 대해 말하며

검시관은 치명적인 구타가 사인이라고 판정했다.
소녀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죽임을 당했을까.
사건이 있던 날 밤 소녀는 힉스 부인의 아이를 돌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만 잠이 들었고 아이가 울어댔다. 소녀는 며칠 전부터 제대로 잠을 못 잤기 때문에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방에는 힉스 부인도 함께 있었는데 소녀가 굼뜨게 움직이자 침대에서 뛰쳐나와 벽난로 옆에 있던 참나무 몽둥이를 집어 들고 소녀를 때려 코와 가슴뼈를 부서뜨렸다.
이 끔찍한 살인 사건을 접한 동네 사람들이 조용히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사건은 동네를 시끄럽게 만들었지만 살인자를 처벌할 정도는 아니었다.

-노예였던 외사촌의 죽음을 이야기하며

“검둥이에게 하나를 양보하면 열을 달라고 한다. 검둥이는 주인에게 복종하고 시키는 대로 일하는 것 외에는 알면 안 된다. 세상에서 가장 착한 검둥이도 글을 알면 버릇이 없어진다. 지금 저 검둥이에게 글을 가르치면 마음대로 부릴 수가 없게 된다. 다시는 순종하지 않는다. 당장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그런 노예는 주인에게 쓸모가 없다. 노예에게도 좋을 게 없다. 만족을 못하니 불행해진다.”

-더글러스에게 글을 가르치는 아내에게 남편인 올드가

이건 내가 목격한 일인데 주인님은 몸이 불편한 젊은 여자 노예를 옷을 벗겨 묶어놓고 무거운 쇠가죽 채찍으로 어깨를 후려쳤다. 뜨거운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고 피비린내 나는 짓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곤 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누가복음)”

-신을 빙자해 노예를 때리는 주인을 얘기하며

연휴는 노예 제도의 가공할 사기극과 죄악, 비인간성의 일부이다. 표면적으로는 노예주들이 선의로 만든 관습이지만, 단언하건대 그건 노예주의 이익을 위해 창안된 것이며 억눌린 노예들을 상대로 펼친 가장 끔찍한 사기극의 하나이다. 노예들에게 연휴를 준 것은 그 기간 동안 부리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나마도 해주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휴가 끝날 때도 처음처럼 술 마시고 노는 분위기를 바라는 노예주의 마음이 그 증거이다. 저열한 향락에 빠뜨림으로써 노예들이 자유에 염증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노예들이 순결한 자유를 요구하면 사악한 노예주들은 노예들의 무지를 이용해 겉에는 자유라고 씌어 있지만 안에는 더러운 쾌락이 들어 있는 가짜 처방약을 내놓았다.

-크리스마스 기간의 연휴에 대해서

“작별: 버지니아의 엄마 노예가 남부로 팔려가는 딸에게” 의 일부


미국의 시인이며 노예폐지론자 존 그린리프 휘티어의 시

갔네, 갔네, 팔려갔네
축축하고 외진 벼 자라는 습지로
더러운 벌레가 물어대는 곳으로
열병 귀신이
내리는 이슬을 독으로 채우는 곳으로
뜨겁고 습기 찬 공기 속에서
창백한 햇살이 이글거리는 곳으로
갔네, 갔네, 팔려갔네
버지니아의 언덕과 호수에서
축축하고 외진 벼 자라는 습지로
비통하여라. 나여, 도둑맞은 내 딸들이여!

-늙은 할머니를 버리는 노예주를 이야기하며


자료정리:박정인 jos6494@empal.com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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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