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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 소개

  - 사뮤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년 4월 13일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 프로테스탄트 중산층 가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3년 베케트는 더블린에 위치한 명문 Trinity 대학에서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하여 학위를 취득한다. 이때 단테를 처음 접하게 되고 연극과 영화의 세계, 특히 익살스런 미국 영화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예술가와 문학가들의 모임에 자주 드나들게 된다.

1928년 작가는 파리로 건너가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 Superieure)에 영어교사로 2년간 근무하고, 여기서 아일랜드의 위대한 소설가인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를 알게 된다. 1930년 아일랜드로 돌아온 작가는 그 다음해에 교사직을 사임하고, 집필에 몰두한다. 작가는 이 기간 동안 시, 수필, 단편 소설, 첫 장편 소설인 『머피(Murphy, 1938)』를 출간하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베케트의 삶은 마지막 파리에 정착할 때까지 아일랜드, 런던, 파리를 오가며, 마치 떠돌이와 같은 생활을 한다. 이 기간 동안 작가는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 어려움을 겪는다.

2차대전 발발 후 아일랜드에 머물고 있던 작가는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한 후,  프랑스로 건너가 레지스탕스 조직에 뛰어든다. 1942년 동지들이 독일 군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겨우 피신한 작가는 미 점령지역인 보끌뤼즈(Vaucluse)에서 농부로 변장하여 생활하면서, 영어로 된 마지막 소설을 쓴다.

전쟁 후 1946년과 1948년 사이, 작가가 파리에 머문 시간은 빈곤한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 시기이다. 이때 작가는 세편의 소설과 두 편의 희곡을 집필하는데 이 중 한편이 바로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이 기간은 또한 작가에게 작품 활동을 위한 언어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1956년까지 베케트는 모든 작품을 먼저 프랑스어로 집필하고, 그 후 자신이 영어로 번역하였다.

1953년 바빌론(Babylon)극장에서 상영된『고도를 기다리며』는 충격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앞서『몰로이(Molloy)』와 『마론은 죽다(Malone meurt)』두 소설을 집필하면서 거의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작가는 기분전환을 위해 자유롭고 편안한 마음으로『고도를 기다리며』를 구상한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이 작품의 놀라운 성공에 오히려 불편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 성공은 작가의 나머지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4년 후 또 다른 희곡 『승부의 종말(Fin de partie)』은 그의 명성을 재 확인시켜준다. 1956년 영국으로 돌아온 작가는 『아름다운 나날들(Oh! les beaux jours, 1960)』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희곡작품을 출간한다.

한편 작가는 『왜 이것이(Comment c'est, 1960)』그리고 『초토화시키는 자(Le Depeupleur, 1970)』와 같은 중요한 소설을 프랑스어로 계속하고 라디오를 위한 몇몇 연극 작품을 비롯하여 TV와 『필름(Film, 1964)』이라는 영화를 위한 시나리오를 남긴다. 1969년 베케트는 노벨문학상을 수여 받고 그 후 이따금 짧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긴 하지만 거의 은퇴한 삶을 누리다 1989년에 숨을 거둔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한 인간 조건을 표방하고 있다. 베케트는 플롯과 언어적인 측면에서 기존의 전통을 포기하고 새로운 연극 구조를 만들었다. 지금까지 신뢰해왔던 이성은 참혹하고 거대한 전쟁을 겪으면서 무력하고 절망에 빠져있는 이 세계를 구출할 수 있는 어떤 전망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미 인간이 통제할 능력을 잃어버린 이 세계에서 베케트의 극적 세계는 인간상황의 극단적인 부조리를 통찰한 작가의 극적이미지이기도 하다. 


2. 시대 배경 - 제 2차 세계대전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유럽,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의 연합국과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전체주의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세계적 규모의 전쟁. 이 전쟁은 파시즘과  민주주의, 제국주의와  민족 해방 투쟁이라는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29년에 비롯된 세계 경제 공황은 온 세계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그러한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미국은 뉴딜 정책을 실시하였고, 영국과 프랑스는 관세율을 높이는 등의 방법으로 자기 나라의 경제적 이익을 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자본주의 경제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했던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은 심각한 경제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럴 즈음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았고, 독일은 경제 위기와 사회 혼란을 틈타 히틀러가 정권을 잡아 독일 재무장을 선언하고 나섰다. 한편, 일본은 대륙 침략 전쟁을 일으켜 만주 지방을 점령한 다음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 그와 같이 식민지를 가지지 못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대외 침략으로 경제적 위기를 벗어나려 꾀한 데서 세계 대전 발발의 위기는 높아 가고 있었다.

1939년 8월에 독일이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다음 그해 9월에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이에 맞서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폴란드 침공에 이어서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이어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쳐들어갔으며, 1940년 6월에는 프랑스의 파리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다시 1941년에 독소 불가침 조약마저 어기고 폴란드 동부,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 독소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편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대륙 침략을 시작한 이래로 차차 미국과의 사이에 이해관계가 얽혀 대립 관계에 있던 중 1941년 12월 8일에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미국과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태평양 전쟁은 동남아시아 각지로 퍼져 가서 1942년 2월에는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2년 여름 이후 연합국 군대는 총반격을 시작하여 1943년에는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군에 큰 타격을 입혔고, 영미 연합군은 시칠리아 섬을 거쳐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여 1943년 9월에 이탈리아를 항복시켰다. 그리고 1945년 5월에는 영국, 미국, 소련이 베를린을 점령함으로써 마침내 독일은 무조건 항복하였다. 한편 8월에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였고, 소련이 일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무조건 항복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엄청났다. 5천만 명이 사망하였는데, 소련인들 만 2천만 명 이상이나 희생되었다. 이 전쟁은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영국이나 미국을 향하여 유럽을 떠난 계기로 작용하였다. 수백 개의 도시가 파괴되었는데, 그 중 일부는 유서 깊은 도시였다. 베를린 에서는 단지 5%의 건물만이 온전하였고, 드레스덴, 함부르크, 뮌헨, 프랑크푸르트의 70%가 파괴되었다.

이 전쟁은 또한 두 초강국인 미국과 소련의 존재를 부각시켜주었다. 이 두 국가는 유럽의 운명과 다음 40여년 동안의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세계는 이제 원자탄을 보유하게 되었다. 세계는 또한 악마 같은 존재인 히틀러를 경험하였다. 많은 제국주의적 제국들이 몰락하였고, 홀로코스트라는 엄청난 사건도 있었다. 지적인 영역과 예술 세계에서 유럽의 전쟁은 두 번째의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를 낳게 되었는데, 실존주의는 이러한 "잃어버린 세대"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부조리극이란?

부조리극은 현대문명 속을 살아가는 현대 인간의 존재와 삶의 문제들이 무질서하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소재로 삼은 연극 사조이다. 실존주의와 초현실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제2차 세계대전 뒤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부조리극은 사실주의적인 전통 연극기법 대신 소위 '反 연극(앙티테아트르)'의 기법을 통하여 부조리한 상황을 제시한다.

'반연극기법'이란 극중에서 등장인물이 자기동일성을 잃고, 시간-공간이 현실성을 잃고, 언어가 그 전달능력을 상실하는 등 연극 그 자체가 행위의 의미를 해체당하는 부조리를 만들어 부조리성을 강조하는 기법이다. 이 기법을 통해 부조리극은 관객에게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목적없이 세계를 표류하는 존재""라는 사상을 전파한다

유진 이오네스코(Eugene Ionesco 1909~1994)의 <대머리 여가수> <왕은 죽어가다> 및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의 <고도를 기다리며>, 에드워드 앨비(Edward Albee 1928~ )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는가>, 해롤드 핀터(Harold Pinter 1930~ )의 <생일파티> 등이 대표적이다.

빈약하고 모호한 무대를 배경으로 누더기차림에 멜론 모자를 쓴 한 등장인물이 우스꽝스런 몸짓을 하며 깜짝 놀란다. 「해야 할게 아무것도 없어.」, 이 말은 그가 뱉는 첫 번째 말이다. 이 대사는 처음부터 이 작품에는 이야기의 진행이나 흐름이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극에 대한 흥미와 기대를 저 버리고 무료함 속에 빠져들게 한다. 즉 전통적인 플롯의 원칙인 전개, 위기, 해소와 같은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작품은 주인공이 처해있는 상황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야기의 흐름은 우스꽝스러운 동작과 언어들로 형성된 순환적인 구성을 하고 있다. 이 사실은 곧 사건을 중심으로 극적상황이 발전되고 변화할 수 있는 동기 유발이 전혀 없음을 뜻한다.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사실주의를 거부하고 있다. 이야기 구성은 견고하지 않고 통일성도 없다. 또한 비정상적이고 있을 것 같지 않은 상황을 배가하여 만들어 간다. 이는 부조리한 현실뿐만 아니라 광란의 세계를 환기시킨다. 이 극에 등장하여 인물들은 심리적 거부감도 없고 과거도 없다. 단지 불안전한 위상과 불분명한 신분을 지닌 낙오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수사학적인 우아한 언어 대신에 무의미한 객담과 흔해빠진 말들만 늘어놓고 있다. 특히 럭키의 수다는 소름끼친다. 하지만 이 극을 조금 물러서서 보면 이 작품이 지닌 독창성을 잘 판단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연극을 하나의 세계로 간주할 만큼 진보되어 있다. 무대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투영하는 장소로써 유일하고 구체적인 창조물이다. 이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것은 있는 그대로 간주되고, 마치 감각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인간의 경험으로 간주돼야 한다.


4. 내용 요약

- 1막
막이 오르자 저녁 무렵 한 그루 나무가 서 있는 시골 오솔길이 무대 위에 보인다. 에스트라공이 자신의 신발을 힘겹게 벗으려고 애를 쓸 때 블라디미르가 등장한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듯한 대화가 두 인물사이에 오고간다. 대화의 관점은 옮겨져 이 두 인물은 어떤 고도와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음을 기억한다. 하지만 만날 장소, 날짜, 그리고 고도의 의도가 무엇인지 확실히 생각나지 않는다.

고도를 기다리며 이 두 주인공은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는데 지쳐버린다. 두 사람은 시간을 보내면서 잠을 자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이내 화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스스로 목을 매 볼까 하는 공상을 한다. 에스트라공은 블라디미르와 함께 고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당근을 맛본다.

이 때 무시무시한 비명이 울리면서 다른 한 쌍의 인물이 무대에 등장한다. 주인인 포조는 짐을 가득 짊어진 럭키의 목에 줄을 묶고 그 끝을 잡고 있다. 포조는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이라고 소개하고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잠시 한담하며, 쉬어가기 위해 멈추어 선다. 포조는 사실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는 말로 자신과 자신의 노예관계를 설명한다.

그리고 석양의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가련할 정도로 애를 쓰고 있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에겐 혼란과 지루함을 더할 뿐이다. 포조는 이 두 사람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럭키로 하여금 올가미 춤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하도록 하고, 사색하도록 명령한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은 오히려 럭키의 엉뚱한 독백을 강제로 멈추게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그 후 포조와 럭키는 두 인물에게 작별을 고하고 무대를 떠난다. 곧 이어 한 소년이 등장하여 블라디미르에게 오늘 저녁에 고도씨는 오지 못하고, 내일 확실히 올 것이라고 전한다. 이제 두 사람은 밤을 보내기 위해 몸을 숨기려 간다.

- 2막
다음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 하지만 전 날에 벌거벗고 있던 나무에 몇 개의 잎이 달려있다. 블라디미르가 무대에 등장하고, 노래를 부른다. 이어 무대에 등장한 에스트라공은 매일 밤 반복하여 두들겨 맞는 일에 화를 낸다. 곧이어 이 두 사람은 서로 화해를 하고, 지난 시간들과 전날에 있었던 일을 기억해 내려고 애쓴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은 과연 전날과 같은 장소에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1장에서와 같이 이 두 주인공은 먹고, 자고, 신발을 신으려고 애를 쓰고, 모자를 서로 교환하고, 포조와 럭키의 흉내를 내며 논다. 에스트라공이 무대에서 나가려는 순간, 깜짝 놀라 다시 돌아온다. 잠시 이리저리 살펴본 후, 두 사람은 서로 다투고 이내 화해한다. 그리고 체조를 하듯이 몸을 움직이고는, 하늘의 가호를 빌면서 나무의 모습을 만든다.

이 순간, 다시 포조와 럭키가 등장한다. 하지만 포조는 장님이 되어있다. 럭키는 넘어지고, 그 상태에서 포조를 끌고 간다. 오랫동안 고심하고 난 뒤, 에스트라공은 그를 도우려 하지만, 넘어지고 만다. 그리고 블라디미르 역시 그 뒤를 이어 넘어진다. 네 사람은 서로서로 뒤죽박죽 엉겨버린다.

겨우 사태가 수습이 된 뒤, 포조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또한 럭키는 벙어리였다고 주장한다. 언제부터 럭키가 벙어리가 되었냐는 질문에 포조는 화를 내고, 럭키와 함께 무대를 떠난다. 다시 둘만 남게 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포조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포조가 혹 고도는 아닐까, 이 모든 것인 한낱 꿈이 아닐까하는 의문에 휩싸인다.

전날과 같이 소년이 무대에 등장하고는 자신은 이 곳에 결코 온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전날과 똑같은 메시지를 남기고 퇴장한다. 전날처럼 이 두 인물은 자살을 해 볼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이 행하는 시도와 행동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다시 밤을 지내기 위해 몸을 피해야 하고, 다음 날 다시 돌아와야 한다.


5. 제목이 주는 의미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사용된 제목은 독자에게 작품을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 않다. 이 작품의 제목은 한 인물을 지칭하고 있고, 이 인물의 특징은 누군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무대 위에 이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제목은 작품이 주는 첫 번째 도발적인 요소이다. 즉, 존재하지 않는 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를 가지고 작품의 주제를 만들어 낸 것이다.

<기다림>이 주는 의미는 인내하고 감수하겠다는 뜻으로 수동적인 태도이다. 그리고 작품의 제목 중 <기다리며>가 주는 이미지는 현재 계속하여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진행중인 기다림은 작품 속에서 특별한 사건 없이 밋밋하게 이야기가 전개될 것임을 전제로 한다. 이 것이 이 작품의 두 번째 도발적인 요소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호기심을 끌기보다는 별 다른 사건 없이 실망감만 느끼게 될 것을 암시한다.

작품 속에서 <고도를 기다린다>라는 표현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두 등장인물인,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대화 한 대목을 살펴보면, 「-가자구. - 갈 수 없어. - 왜? - 고도를 기다려야 해. -맞아.」그리고 다른 한 대목은 「이제 무얼 하지? -고도를 기다려야해. -맞아.」 이 두 대목은 작품의 핵심적인 주제가 들어 있다.

모든 상징적인 해석을 떠나,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는 고도라는 인물이 작품 속에 지닌 역할이 무엇인지 밝혀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즉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바로 인간이 살아 숨쉬고 있고,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동시에 인간이 목적을 가지고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도라는 존재는 인간 행동과 존재하는 의미를 일깨워준다. 고도의 존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무언가 아직 할 수 있고, 또한 만들어 낼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두 인물은 극이 진행되는 도중에 서로 다투기도 하고, 그리고 곧이어 화해한다. 이 두 인물에게 <고도를 기다린다> 는 고정된 목표는 유일하게 합의되어 있어 어떤 갈등과 대립도 야기하지 않는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래, 이 거대한 혼란 속에서 한 가지 일은 명백해, 우리는 고도가 오는 것을 기다려야해.」이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모든 현실은 질서가 다시 잡혀나가는 것처럼 보이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 기다림은 정반대의 기능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기다림의 의미가 작중 인물들로 하여금 착각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떠나자. -안돼,」이 대화에서 보듯이, <기다림>은 두 극중 인물로 하여금 영원히 떠나지 못하고 계속 반복되는 생활 속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을 정당화시킨다. 이러한 이미지는 현실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의 상황과 동일한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고도를 무의미하게 기다린다는 것은 운명의 모든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6. 고도, 그는 누구인가?

부조리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은 <무의미한>세계에 속한다. 이 인물들의 행동과 몽상에는 통일된 의미를 추출해 낼 수 없다. 또한 부조리 작품은 작가의 내면적인 감정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고도를 기다리며』이 작품에서 고도의 의미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지만, 이 <기다림>은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기다림에 관한 분석은 무엇이 작품 주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작중 인물에게 끼치는 작가의 영향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면 가능한 것이다. 비록 등장인물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아무리 모호하고 부조리하더라도, 이들의 말과 행동은 작가의 철학적인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전반적인 의미는 하나의 가정, 즉 신이나 혹은 구세주가 올 수 있다는  가능성에 모든 희망을 걸고서, 실의에 차있는 인간의 비극적인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대화 「-그리고 만일 온다면? -우리는 구원되는 거지.」에서와 같이 고도의 모습은 구세주로 나타난다. 황폐하고 무미건조한 세계에 살고 있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인류의 두 표본으로 비쳐진다. 신의 은총만이 이들의 영원힌 반복되고 있는 고통스런 삶과 무의미한 행동을 멈출 수 있다. 이 때문에 두 인물은 신의 메시지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

하지만 작품에 표방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면 고도를 신과 동일시 할 수 없다. 등장인물 스스로 신과 고도가 엄연히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다. 에스트라공은 직접 신을 찾으며 자비를 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이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 여기서 구세주는 분명히 고도가 아닌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고도는 비록 거의 신과 같은 전능한 이미지를 갖고 있긴 하지만 등장인물의 의식 속에서 만들어진 선량한 인물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이 오히려 작품을 더욱 문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고도의 모습은 사회 속에서 살면서, 가족, 친구, 은행 구좌 그리고 염소와 양들을 가지고 있는 한 인물로 정의 할 수 있다. 「오늘 저녁 아마 고도 집에서 잘 수 있을지도 몰라. 짚단위에 습기 없이 따뜻하고 배를 채우고서 말이야.」에서 볼 수 있듯이, 고도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정신적인 구원자이기보다는 오히려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이다. 절실한 구원의 대상인 신이 아니라 부유한 소유주라는 이미지를 고도는 가지고 있다.

2막에서 블라디미르 역시 포조가 고도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1막에서 에스트라공이 블라디미르에게 포조와 럭키가 고도에게 손발이 묶여 감금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질문을 할때, 포조는 럭키를 무대 뒤에 남겨 둔 채 등장한다. 이런 상황은 고도가 포조가 아닌가 하는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2막에서는 에스트라공이 신이 그를 보고 있는가 하고 혼자 말을 할 때, 포조는 실명한체 무대위로 등장한다.

특히 성질이 사납기도 하고 가소롭기도 한 포조의 출현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단순한 삶에 개입한 유일한 사건이다. 포조는 이 두 인물에게 지루한 시간을 빨리 보낼 수 있게 해 준다. 이런 포조의 역할은 고도의 역할과 거의 유사하다. 포조의 출현은 비록 기다림을 만족시켜주거나 어떤 의미를 주진 못하지만, 두 주인공에게 즐거움을 주고 이들이 지닌 공허함을 채워준다.

이는 마치 고도가 강등 당한 신의 모습이라면 포조는 고도의 풍자적인 모습이다. 고도는 등장인물들이 찾아 헤매는 인물보다 항상 지나치거나 아니면 무엇인가 부족한 인물로 나타난다.

<고도는 과연 존재하는가? / 고도란 인물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고도라는 인물은 작가의 짓궂은 장난일 가능성이 있다. 현실적으로 작품 속에서 고도의 존재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관객은 고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도 설정할 수 있다. 왜냐면 「-너 거기 없었잖아? -난 신경을 쓰지 않았어.」에서와 같이 고도를 만났던 기억 속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에 관해 구체적이고 납득할 수 있는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고도의 이름마저 오락가락 한다. 메시지를 가져오는 소년의 등장은 일단 고도가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소년은 고도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고도의 수염 색깔이 회색인지 흰색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물질적인 증거의 부족은 고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하고 의심케 한다.

포조가 바로 이 작품에서 주인 격인 고도가 아닐까하는 의문을 충분히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가정을 반박할 근거도 없다. 소년은 항상 포조가 지나고 난 뒤에 등장한다. 이 때문에 현실적으로 가진 것도 없고 약간 미친 듯이 보이는 두 인물에게 기다림과 희망을 계속 심어주기 위해 포조가 소년을 보내지 않았을까 의심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자비심 때문인지, 아니면 놀리기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작품 속의 두 주인공은 부조리한 세계에 둘러싸여 위협을 느끼고 있다. 이 때 광기야말로 인간의 마지막 피난처일 수도 있다. 고도의 인물이 짓궂은 장난으로 인해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가정은 이러한 주제와 맞물려 가능하다.

고도는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고도는 바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존재와 의식을 지칭할 수 있다. 고도(Godo)의 이름은 그래서 또 다른 파생어, 즉 구두(godillots)와 헌 구두(godasses)를 암시한다. 막 초기에 항상 구두 때문에 주인공은 실랑이를 벌린다. 이와 같이 작품 속에 드러나는 신발의 중요성을 고려하면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이 이름은 에스트라공의 애칭이면서 동시에 고지식함을 의미하는 고고(Gogo)에게 하나의 함정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음성학적인 관점에서 고도(Godo)는 고고(Gogo)와 디디(Didi)의 합성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 때문에 고도라는 인물은 고고와 디디 두 사람의 거의 파멸하다시피 한 의식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 일 수 있다.

더욱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고도는 언어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에스트라공이 블라디미르에게 고도 곁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라고 할 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인물들의 역할 분배를 책임진 배우 혹은 작가로서 자신들의 입장을 표방한다. 작중 인물들의 역할 분배는 단지 언어의 유희일 뿐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또한 이 규칙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고도를 환기시키는 상황들을 정확히 분석할 때, 고도의 모습은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진행됨에 따라 윤곽이 드러난다. 즉 고도는 등장인물들의 언어에 의해 단지 탄생된다. 반대로 임으로 만들어진 고도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존재의 의미와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런 가정을 통해 고도가 지닌 의미를 다양하게 고려할 수 있다. 즉 고도는 어떤 막연한 존재를 기다리면서 그냥 붙여 놓은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면 대상도 없이 누군가를 기다릴 수 없기 때문이다. 대상이 없는 이름은 내용물이 없는 껍데기일 뿐이다. 작품 속에서 고도의 이름은 또한 고대(Godet)란 단어를 연상시킨다.

이것은 ‘채워지지를 기다리는 용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고도는 다양한 모습으로, 때로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띨 수도 있다. 즉 의식이 용기에 담아내고자 하는 모습이다. 예를 들면, 고도는 구원이나 행복, 혁명, 선지자, 고용주, 밤 혹은 죽음일 수도 있다. 이런 고도의 무한한 의미 때문에 관객들은 이 인물 속에 관객 자신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구현시킨다. 그리고 각각의 관객들이 만들어낸 고도의 모습은 작품의 의미와 유사한 모습을 지닐 뿐이다.

관객이 만들어낸 고도의 모습은 종교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정치적이거나, 역사적인, 혹은 심리적이거나 철학적인 의미를 띌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은 명확한 비유를 지닌 작품이기보다는 복잡한 신화들을 지니고 있다. 고도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기다림>의 대상이다. 그리고 이 기다림의 효과는 끝없이 삭막한 우주 속에 인간이 계속 존재할 수 있는 이유를 연장시켜준다.  


자료정리 : 이진희 likethewell@hanmail.net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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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