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산문선(연암 박지원)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30. 00:39
1. 시대적 배경 - 조선 후기 사회
“천하 사람들이 편안히 앉아 글을 읽을 수 있게 한다면, 천하가 무사할 것이다.” -연암 박지원
조선 후기 사회(18세기 중반~19세기 후반) -지배질서가 붕괴되고 민중이 성장하던 시기- 는 임진왜란(1592년~1598년)과 병자호란(1636년~1637년) 등 거듭된 변방 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전 국토가 황폐화 하게 된 상태였다. 정치 사회 경제 등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동이 일어나고 있던 시대였다. 이 시대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부분 백성들의 최저 생계가 어렵던 시기였다. 따라서 백성들이 사회체제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하거나 반감을 불러일으킬 소지를 마련해 주었고 이러한 무관심과 반감은 곧 기존 정치 지도층에 대한 저항의식을 높여주었다. 결국 기존 질서에서의 이탈(은둔)이나 또는 변혁(반항)의 계기가 되었다.
둘째, 농민의 생존자체의 위협은 당시 정치 참여에서 소외된 계층의 정치의식을 높여주었다. 17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전후 복구의 뚜렷한 증거는 특용작물의 재배와 경지면적의 확대로 나타났고, 생산력의 증대로 화폐경제가 발달되었으며, 임금노동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도시 인구의 증가와 시장경제의 확대를 야기 시켰다.
- 시장경제의 확대 = 시장을 통한 농민들의 대화의 기회를 늘려줌 → 불만을 조직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었음을 의미 → 농민의 정치의식이 높아짐.
- 수공업의 발전 = 수공업자를 임금을 받고 일하는 자유인으로 변신시킴 → 자유인의 수 증가
→ 정치참여를 의식하는 계층의 확산.
셋째, 신분계층의 두드러진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로 종전의 서민 또는 노예계층이 양반이나 서민 신분으로 몰락하는 하향적 과정이 동시에 일어났다.
- 상향적 경우 : 신분제와 토지소유제의 연결이 와해 → 서민 대지주가 생기고 평민 이하의 계층이 양반이나 소농민보다 우세한 경제력을 가짐 → 노비제도의 붕괴현상이 나타남.
- 하향적 경우 : 권력다툼에서 패한 양반들 → 생계유지를 위하여 하층업종에 종사하거나 남의 고용인이 됨→ 사회적 지위 하강 → 기존질서에 대한 반감이 심해짐.
넷째, 지도층의 백성들에 대한 지도력이 미약하였다. 전후 계속되는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지도층이 이미 실질적으로나 명분상으로 지도력의 발휘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거기다 국가의 재정은 바닥이 난 채로 백성들에게 뚜렷한 대책을 제시하지 못했고, 각종 혁명 저항세력에 대하여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2. 사상적 배경 - 실학사상의 출현
- 실학은 왜 일어났는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 후기에는 백성이 가난에 시달리고 극히 일부의 지주가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대다수의 농민들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농업기술이 발전하고 한 사람이 맡을 수 있는 경작 면적이 크게 늘어나자 점차 소작지마저도 얻기가 어려워졌다. 여기에 군수와 아전들의 횡포는 농민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농민들은 이듬해 심을 종자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식량까지 빼앗기기 일쑤였다.
이러한 때 당시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새로운 반성이 일어났다. 이 시기는 성리학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때였다. 우주와 인간을 탐구하는 철학도 중요하고 삼강과 오륜을 펼치는 예학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당시의 현실을 이겨 나가기 위해서는 무언가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와 같은 생각이 실학자와 실학을 낳게 했다.
-실학의 발전과정 및 실학파들의 사상적 특징
우리나라의 실학사상은 대개 율곡 이이로부터 시작해서 이수광과 유형원을 거쳐 이익 홍대용 박지원 등을 거쳐 정약용 김정희 등에 의해 이룩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는 서경덕 이황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 성리학을 대성시킨 학자로서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하였다. 경세치용이란 학문은 세상을 다스리는데 실익을 증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이는 <성학집요>에서
물을 퍼내려는 사람은 반드시 그 근원을 깊게 하니, 그 근원을 깊게 하는 것은 물을 퍼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도 도리어 그 물을 버리고 퍼내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것은 어떤 행위가 있으면 실효를 거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그는 십만양병설 등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리를 정확이 판단하고 실용함에 이르고자 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실학사상이 후기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지봉 이수광(芝峰 李受;光, 1563~1628)은 율곡 이이에 이어 실학사상을 고취한 학자이다. 이수광은 그의 저서인 <지봉유설>을 통해 중국문화뿐 아니라 서구의 문물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도는 백성이 날로 사용하는 사이에 있으니 여름에는 갈옷을 입고 겨울에는 갖옷을 입으며,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는 것이 곧 도이다. 이것을 벗어나서 도를 말하는 것은 그르다.
라고 하면서 멀리서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가운데서 진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실학사상은 17세기 유형원에 이르러 체계적인 학문으로 나타나게 된다.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1622~1673)은 유학 본래의 정신에 충실하려고 했던 전통적인 학적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당시 정계는 대단히 부패했고 그가 14세 되던 해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그는 32세 때 벼슬을 버리고 저술을 하며 학문에 평생을 바쳤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반계수록>에서 그는
"왕도정치는 백성의 산업을 제정하는데 있고 백성의 산업을 제정하는 것은 경계를 바르게 하는 데 있다. 후세에 왕도가 실행되지 않는 것은 모두 토지제도가 무너졌기 때문이요, 마침내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히고 생민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옛적의 정전법은 지극한 것이다. 토지의 경계가 한 번 올바르면 만사가 모두 제대로 시행되어 백성은 항구한 생업을 튼튼히 가지게 되고, 병정은 수색하여 모으는 폐해가 없고 귀천 상하의 여러 계층이 각각 그 직분을 얻지 못함이 없다."
라고 하고 있다. 즉 그는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왕도(王道)를 해야 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민산(民産)을 다스려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토지의 경계를 바르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18세기에는 이익을 중심으로 하는 성호학파와 박제가 등을 중심으로 하는 북학파가 나타나 실학의 학파적인 면모를 확립하게 된다.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은 이이와 유형원의 실학사상을 계승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도 유형원과 마찬가지로 바람직한 정치는 왕도정치를 펴는 데 있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토지경계를 바르게 실시하여 빈부를 고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적인 해결이 되어야 이상적인 선왕의 다스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호전서>를 보면
"학문을 하는 사람은 생활방도를 잘 꾸리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다. 생활이 어려워지면 학문을 하는 길에 지장이 있다. 선비는 마땅히 농사로 생활대책을 삼아야 하며, 장사는 비록 말리를 쫓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의리를 잃지 않게 한다면 역시 나쁠 것이 없다."
고 하여, 학문을 하는 사군자도 마땅히 산업에 종사하여 생계를 지켜야 하고, 상업이 비록 하찮은 것이지만 의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불가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의 토지제도의 불공정성을 지적하여
"부유한 자의 전지는 밭두둑이 잇달아 있지만,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만한 땅도 없기 때문에 부유한 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기만 한다. "
고 하며, 백성들 누구나 토지를 가져야 한다고 하는 균전론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익은 천문 역법 등 서양 과학지식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천주교의 윤리적 내용에 긍정을 했다.
이익의 성호학파가 성호 남인을 중심으로 형성이 되었다면 다른 한편 노론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청나라를 왕래하면서 그 문물의 영향을 받아 실학사상을 발전시킨 북학파가 있다.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容, 1731~1783)은 청조의 서양의 과학지식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북학파의 선두가 되었고 전통적 질서의 근원적 개혁을 추구하였다. 홍대용은 지구 자전 설을 내세울 만큼 자연과학적 사유를 심화시켰다.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은 청조 문물을 수용함으로서 생산기술과 유통에 관한 개선을 촉구하면서 특히 소설을 통하여 전통적 질서의 모순을 폭로하고 비판하여 실학사상을 문학적 형식으로 발현시켰다.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 1750~1805)는 서얼출신 이지만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동 했으며 북학의를 저술하여 북학파의 실학사상을 정리하였다.
성호학파가 유형원을 계승하면서 토지 및 행정 기구 등 사회제도의 개선에 치중했다는 경향에서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라고 한다면, 북학파가 상공업의 유통과 일반 기술의 발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라고 칭하기도 한다.
19세기에 들어서면 정약용과 김정희 등에 의해 실학파의 철학적 기반이 확립된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은 유형원과 이익의 성호학파의 영향을 받고, 북학 및 서학을 섭취하여 당시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으며, 사회제도의 전면적인 재검토를 주장했다. 다산 정약용은 <속유론>에서
"참 선비의 학문은, 본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외적을 물리치고 재용을 넉넉하게 하며, 문에 능하고 무에 능한 것, 이 모두 해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 어찌 옛 사람의 글귀나 따서 글을 짓고, 벌레나 물고기 등류의 해설을 하고, 소매 넓은 선비 옷을 입고서 예모를 익히는 것만이 선비의 학문이라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며,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했다.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1786~1856) 는 실사구시의 학문적 태도로 실학사상의 이념적 원리를 제시했고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김정희는 종래 실학자들이 유학을 근본으로 하되 정치 사회면의 합리적인 개선이나 경제면의 이용후생 등 대체로 경세치용적 측면으로 흐른데 비해, 고증학을 기반으로 실증을 통해 경학의 진의를 밝히고 이를 실천하고자 하는 실사구시적 성격을 띄었다.
-실학의 의의와 한계
중농적 실학사상과 중상적 실학사상은 모두 다 당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방법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둘 간 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중농적 실학사상이 ‘우리가 가진 빵을 서로 잘 나누어 먹자’ 는 것이라면 중상적 실학사상은 ‘우리가 먹을 빵을 늘려가자’ 는 것이다. 분배에 힘을 기울이면 빈곤의 평등이 될 수가 있고 성장에 힘을 기울이면 빈부의 차이가 커질 수 있다. 이렇듯 분배와 성장의 문제는 조화시키기 어려운 문제임에 틀림없다.
실학자들은 나름대로의 처지에서 문제 해결의 방법을 주장하였으나 그들 대부분이 몰락 남인이거나, 권력을 잡고 있었다 하더라도 낮은 지위의 관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권력자들에 의해 무시되어 이론과 주장에 그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3. 작가소개 -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
“책을 대하면 하품도 하지 말고, 책을 대하면 기지개도 켜지 말고, 책을 대하면 침도 뱉지 말고, 만일 기침이 나면 고개를 돌리고 책을 피하라. 책장을 뒤집을 때 손가락에 침을 바르지 말며, 표시를 할 때는 손톱으로 하지 말라.”
- 박지원의 생애
그의 가문은 노론의 명문세신이었지만, 그가 자랄 때는 재산이 변변치 못했다. 그는 청렴했던 조부의 강한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으며 1752년 이보천의 딸과 결혼했다. 그의 처삼촌이며 이익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던 홍문관교리 이양천 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3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 전념, 경학 · 병학 · 농학 등 모든 경세실용의 학문을 연구했다. 특히 그는 이미 18세 무렵에〈광문자전 廣文者傳〉을 지었으며 1757년〈민옹전 閔翁傳〉을 지었고, 1767년까지〈방경각외전 放閣外傳〉에 실려 있는 9편의 단편소설을 지었다. 이 시기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이 극히 날카로웠으나, 사회적 모순은 대체로 추상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과거에 뜻을 끊고 1786년 서울의 백탑(지금의 파고다 공원)으로 이사했으며, 그를 중심으로 한 ‘연암 그룹’이 형성되었다. 많은 제자들이 그의 밑에서 지도를 받았고, 새로운 학풍을 이룩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북학파실학’이었다. 문학에서는 당시 이덕무 · 유득공 · 이서구 · 박제가가 4대시가(四大詩家)로 일컬어졌는데 모두 박지원의 제자들이었으며, 이서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얼 출신이었다. 1780년 에는 청(淸)의 베이징[北京]에 갔다. 5월 25일에 출발해 8월 1일부터 9월 17일까지 베이징에 머물렀고, 10월 27일 서울에 돌아왔다. 이 여행에서 청의 문물과의 접촉은 그의 사상체계에 큰 영향을 주어 이를 계기로 그는 인륜 위주의 사고에서 이용후생 위주의 사고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는 귀국한 이후〈열하일기 熱河日記〉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였다.〈열하일기〉는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호질 虎叱〉·〈허생전 許生傳〉등의 소설도 들어 있고, 중국의 풍속 · 제도 · 문물에 대한 소개 · 인상과 조선의 제도 · 문물에 대한 비판 등도 들어 있는 문명비평서 였다. 특히 자유분방하고도 세속스러운 문체와 당시 국내에 만연되어 있던 반청(反淸) 문화의식에의 저촉 때문에 찬반의 수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1786년 처음 벼슬에 올랐으며, 1800년 양양부사가 되었고, 1805년 69세의 일기로 죽었다.
- 박지원의 경제사상
“글을 읽고서 실용을 모를진대 그것은 학문이 아니다. 학문이 귀한 것은 그의 실용에 있으니, 부질없이 인간의 본성이니 운명이니 하고 떠들어대고 이(理)와 기(氣)를 가지고 싸우며 제 고집만 부리는 것은 학문에 유해롭다”
그는 학문에서 귀중히 여길 것은 실용(實用)임을 강조하며, 학문의 초점을 유민익국(裕民益國)과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맞추었다. 유민익국의 요체로서 생산력의 발전을 급선무라고 인식하고,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서는 북(北), 즉 청에서 선진 기술을 배울 것을 주장했다.
그는 생산력을 복구·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생산도구의 개선과 영농법의 개량, 농업시설의 복구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방책을〈과농소초〉에서 제시하고 있다. 또한 관개수리사업의 복구·발전을 강조하면서, 저수지를 구축해 수차(水車)와 기타 수리시설을 광범위하게 이용할 방책을 제시했다. 또한〈과농소초〉의 뒤에 부록으로 첨부한〈한민명전의〉에서 토지제도의 개혁안을 제기했다.
토지소유관계의 개혁안으로서 한전법을 제창했는데 전국의 토지면적과 호구를 조사하여 1호당 평균경작면적을 국가가 제정 하고, 누구든지 그 이상으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법률적으로 제한하되, 이 법을 시행하기 이전의 토지소유는 인정하고, 새로운 매입은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하면 수십 년이 못 가서 전국의 토지는 고르게 나누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그는 국가가 확고한 화폐정책을 실시하여, 상평통보의 발행을 합리적으로 조절할 것과 은을 화폐로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또 생산품이 전국적 규모로 유통되지 못하기 때문에 수공업도 농업도 발전하지 못하므로, 우선 교통을 발전시켜서 생산품이 전국적 규모로 유통되도록 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광범위하게 수레와 선박을 이용하여 국내 상업과 외국무역을 촉진할 것도 제기했다.
4. 작품 소개 - 연암집[燕巖集](연암 산문선)
총 17권 6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1901년 김택영이 9권 3책으로 간행한 바 있으나, 이것은 본집(本集)의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저자의 아들 종간(宗侃) 등이 편집해 두었던 57권 18책의 필사본을 바탕으로 1932년 박영철 이 17권 6책으로 발행하였다.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들어도 때에 따라 귀가 따갑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경우가 있지만, 글을 읽는 경우에는 그 소리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연암문학’ 20여년 만에 한글 완역]
-경향신문 2005년 4월 12일자-
‘조선시대 최고의 산문작가’ 연암 박지원의 문집이 사제간의 20여년에 걸친 노력 끝에 온전히 번역됐다. 한학자 고 우전 신호열 선생과 한문학자 김명호 성균관대 교수는 ‘연암집’을 우리말로 옮긴 ‘국역 연암집’ 제2권을 최근 출간했다. 고전국역기관 민족문화추진회가 전2권으로 펴내는 ‘국역 연암집’은 제2권에 이어 오는 10월쯤 제1권이 출간되면서 마무리될 예정이다. 그동안 연암의 글은 북한의 홍기문, 남한의 이익성·이가원 등에 의해 선집 형태로 번역됐으나 완역본이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국역 연암집’은 연암 사후 200년 만에 선보인 완역본이라는 점 이외에 국내 최고의 한학자와 연암 연구자의 공동작업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우전 신호열 선생(1914~93)은 생전에 고 이가원·임창순·성낙훈 선생 등과 함께 손꼽혔던 한학의 대가. 민족문화 추진회 교수로 재직하며 ‘완당집’ ‘하서집’ ‘퇴계시’ 등의 국역서를 출간했으며, 이승만 정권 때에는 이대통령이 장제스 대만 총통에게 보내는 한문 편지를 기초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한학자였다. 공역자인 김명호 교수(52)는 ‘열하일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박지원 문학 연구’ 등의 저서를 낸 연암 연구의 권위자이다.
*올해 연말쯤에 완역본이 나올 예정
-연암집의 구성
연암집 총 17권 중
1~7권은 산문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중 4권은 시로 이루어져 있다. 1권 말미에는 전(傳) 1편이 있는데
이것이 <열녀함양박씨전>이다.
8권은 방경각외전(放瓊閣外傳)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자서>에 이어,
<마장전>, <예덕선생전>, <민옹전>, <광문자전>, <광문전 뒤에 쓰다>, <양반전>, <김신선전>,
<우상전>이 실려 있다. 그리고 <역학대도전>과 <봉산학자전>은 분실되어서 목차로만 실려 있다.
9~10권에는 편지글, 비문, 제문, 잡서 등이 수록되어 있다.
11~15권에는 열하일기(熱河日記) - 여기에는 <호질>과 <허생전>이 포함되어 있다.
16~17권에는 과농소초(課農小抄)가 실려 있다.
-연암집의 내용
* 마장전(馬埋傳)
말 거간꾼이나 집 주름이 손뼉을 치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는 짓은 신뢰를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콧잔등까지 부채로 가리고 좌우로 눈짓을 하는 것은 거간꾼들의 술책이다.
옛날 가슴앓이 하는 이가, 아내를 시켜 약을 달이게 했는데 양이 많았다 적었다하니 노하여 첩을 시켰더니, 그 양이 항상 적당하였다. 그 첩이 마음에 들어 몰래 엿보았더니, 많으면 땅에 버리고 작으면 물을 더 붓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 첩이 양을 맞추는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 것은 좋은 말이 아니요, 남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하는 것은 깊은 사귐이 아니요, 정이 얼마나 깊은지를 드러내는 것은 훌륭한 벗이 아니다.
송욱과 조탑타, 장덕홍 세 사람이 광통교 위에서 벗을 사귀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탑타가 말하기를,
“아침에 포목을 사려고 온 자가 있었는데 포목을 골라 혀로 핥아 보기도 하고 공중에 비쳐 보기도 하면서 값은 부르지 않고 주인에게 먼저 부르라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나중에는 둘 다 포목은 잊어버린 채 포목 장수는 갑자기 먼 산을 바라보며 구름이 나왔다 흥얼대고, 사러 온 사람은 뒷짐을 지고 서성대며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있더군요.”
하니, 송욱이 말하기를,
“너는 사귀는 겉모습만 보았을 뿐 사귀는 도는 보지 못했다.” 고 하며
“너는 남과 더불어 교제할 때, 첫째, 상대방의 기정사실이 된 장점을 칭찬하지 말라. 그러면 상대방이 싫증을 느껴 효과가 없을 것이다. 둘째, 상대방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깨우쳐 주지 말라. 장차 행하여 거기에 미치게 되면 낙담하여 실망하게 될 것이다. 셋째, 사람 많이 모인 자리에서는 남을 제일이라고 일컫지 말라. 제일이란 그 위가 없단 말이니 좌중이 모두 썰렁해지면서 기가 꺾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귀는 데에도 기법이 있다. 첫째, 상대방을 칭찬하려거든 겉으로는 책망하는 것이 좋고, 둘째, 상대방에게 사랑함을 보여 주려거든 짐짓 성난 표정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셋째, 상대방과 친해지려거든 뚫어질 듯 쳐다보다가 부끄러운 듯 돌아서야 하고, 넷째,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를 꼭 믿게끔 하려거든 의심하게 만들어 놓고 기다려야 한다. 또한 열사는 슬픔이 많고 미인은 눈물이 많다. 때문에 영웅이 잘 우는 것은 남을 감동시키자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기법은 군자가 은밀하게 사용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처세에 있어 어디에나 통용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였다.
탑타가 덕홍 에게 그 뜻이 어려워 수수께끼와 같다고 하니 덕홍이 말하기를,
“네까짓 게 어찌 알아? 잘한 일을 가지고 책망하면 이보다 더한 칭찬은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보니 노여움이 생기는 것이요, 꾸지람을 하는 과정에서 정이 붙는 것이므로 가족에 대해 이따금 호되게 다루어도 싫어하지 않는 법이다. 친한 사이일수록 거리를 둔다면 이보다 더 친한 관계가 어디 있겠는가. 술이 거나해지고 밤이 깊어 취기를 타서 슬픈 심사를 자극하면 누구든 뭉클하여 공감하지 않는 자 없다. 그러므로 사람 사귀는 데에는 상대를 이해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즐겁기로는 서로 공감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고 한다.
다시 탑타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충(忠)과 의(義)로써 벗을 사귀면 어떻겠는가?” 라고 묻자,
덕홍이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기를,
“가난한 놈이란 바라는 것이 많아 한없이 의를 사모한다. 왜냐하면 아득한 하늘만 봐도 곡식을 내려 주지 않나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한 자는 아낄 것이 없기 때문에 충심을 다하여 어려운 것도 회피하지 않는다. 왜냐면 물을 건널 때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지 않는 것은 떨어진 고의를 입었기 때문이다. 충이니 의이니 하는 것은 빈천한 자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부귀한 자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탑타가 발끈하여 말하기를,
“내 차라리 세상에 벗이 하나도 없을지언정 군자들과는 사귀지 못하겠다.” 고 한다.
골계선생은 우정론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 사이의 사귐에 있어서는 떨어진 틈이란 것이 있다. 무릎을 맞대고 함께 앉아 있다 하여 반드시 밀접한 사이가 아니요, 어깨를 치고 소매를 붙잡는 관계라 하여 반드시 마음이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사이에도 틈은 있게 마련이다. 성안후와 상산왕은 사귐에 있어 조금의 틈도 없이 너무나 절친하게 지냈으므로, 그들 사이에 한번 틈이 생기자 누구도 그들을 위해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중히 여길 것은 틈이 아니고 무엇이며, 두려워할 것도 틈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므로 사람을 잘 사귀는 이는 먼저 그 틈을 잘 이용하고, 사람을 잘 사귈 줄 모르는 이는 틈을 이용할 줄 모른다.
따라서 아첨을 전하는 데에도 방법이 있다. 몸을 정제하고 얼굴을 다듬고 말을 얌전하게 하고 명예와 이익에 담담하여 상대와 사귀려는 마음이 없는 척함으로써 저절로 아첨을 하는 것이 상첨 이다. 다음으로 바른말을 하여 자신의 속을 드러낸 다음 그 틈을 잘 이용하여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는 것이 중첨 이다. 말굽이 닳도록 조석으로 문안하며, 그 사람이 하는 말마다 다 좋다하고 칭송한다면, 처음 들을 때에 좋아하지만 오래 들으면 도리어 싫증이 난다. 이는 하첨 이다.
송욱과 탑타는 길에서 걸식을 하고 덕홍은 저자에서 미친 듯이 큰 소리로 노래 부르고 다니면서도 오히려 말 거간꾼의 술수를 부리지 않았거늘, 하물며 군자로서 글 읽는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창애에게 답함(편지)
보내 주신 문편을 양치질하고 손을 씻고서 무릎을 꿇고 정중히 읽고 나서 말하오. 그대의 문장이 몹시 기이하다 하겠지만, 사물의 명칭이 빌려 온 것이 많고 인용한 전거가 적절치 못하니 이 점이 백옥의 티라 하겠기에 노형을 위하여 아뢰는 바요.
문장을 짓는 데에는 법도가 있으니, 이는 마치 송사하는 자가 증거를 지니고 있고 장사치가 물건을 들고 사라고 외치는 것과 같소. 아무리 사리가 분명하고 올바르다 하더라도, 다른 증거가 없다면 어찌 이길 수가 있겠소. 그러므로 문장을 짓는 사람은 경전을 이것저것 인용하여 자기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오.
<맹자>에 “성은 다 같이 쓰는 것이지만 이름은 독자적인 것이다.” 라고 했듯이,
또한 “문자는 다 같이 쓰는 것이지만 문장은 독자적인 것이다.”라고 하겠소.
*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선귤자 에게 예덕선생이라 부르는 벗이 한 사람 있다. 그는 똥을 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지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를 엄 행수라 불렀다. ‘행수’란 막일꾼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에 대한 칭호요, ‘엄’은 그의 성이다.
자목이 선귤자 에게 따져 묻기를,
“세상의 이름난 사대부들이 선생님을 따라 노닐기를 원하는데 선생님께서는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 엄 행수라는 마을에서 가장 비천한 막일꾼은 왜 선생님께서 자주 덕을 칭송하여 벗하기를 청하는지 부끄럽습니다.” 하니,
선귤자가 웃으면서,
“무릇 시장에서는 이해관계로 사람을 사귀고 면전에서는 아첨으로 사람을 사귀지. 따라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세 번 손을 내밀면 누구나 멀어지게 되고, 아무리 묵은 원한이 있다 하더라도 세 번 도와주면 누구나 친하게 되기 마련이지. 그러므로 이해관계로 사귀게 되면 지속되기 어렵고, 아첨으로 사귀어도 오래갈 수 없다네. 훌륭한 사귐은 꼭 얼굴을 마주해야 할 필요가 없으며, 훌륭한 벗은 꼭 가까이 두고 지낼 필요가 없지. 다만 마음으로 사귀고 덕으로 벗하면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도의로 사귀는 것일세. 위로 천고의 옛사람과 벗해도 먼 것이 아니요, 만리나 떨어져 있는 사람과 사귀어도 먼 것이 아니라네.
저 엄 행수란 사람은 밥을 먹을 때는 끼니마다 착실히 먹고, 아침이면 개운하게 일어나 마을로 들어와 뒷간을 청소하지. 똥을 긁어 가도 염치에 손상이 가지 않고, 그 이익을 독차지하여도 의로움에는 해가 되지 않으며, 욕심을 부려 많은 것을 차지하려 해도 남들이 양보심 없다고 비난하지 않는다네.
그는 남들이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면, 목구멍에 넘어가면 다 마찬가지인데 맛을 따져 무엇 하겠느냐고 대꾸하고, 반반한 옷을 입으라고 권하였더니 넓은 소매를 입으면 몸에 익숙하지 않고 새 옷을 입으면 더러운 흙을 짊어질 수 없다고 하더군. 엄 행수와 같은 이는 아마도 ‘자신의 덕을 더러움으로 감추고 세속에 숨어 사는 대은’ 이라 할 수 있겠지. 엄 행수는 지저분한 똥을 날라다 주고 먹고살고 있으니 지극히 불결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가 먹고사는 방법은 지극히 향기롭다고 할 수 있네.
선비로서 곤궁하게 산다고 하여 얼굴에까지 그 티를 나타내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요, 출세했다 하여 몸짓에까지 나타내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니, 엄 행수와 비교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는 거의 드물 걸세. 그래서 나는 엄 행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예덕선생이라 부르는 것일세.” 하였다.
종형에게 올림
사람들이 심한 더위와 모진 추위를 만나면 그에 대처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옷을 벗거나 부채를 휘둘러도 불꽃같은 열을 견뎌내지 못하면 더욱 덥기만 하고, 화롯불을 쪼이거나 털배자를 껴입어도 한기를 물리치지 못하면 더욱 떨리기만 하는 것이니, 이것저것 모두가 독서에 착심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요컨대 자기 가슴속에서 추위와 더위를 일으키지 않아야 하겠지요.
편지 중에서
시골 사람이 서울 맵시를 내 봤자 결국 촌놈이오. 비하자면 술 취한 사람이 아무리 정색을 해 봤자 하는 짓이 취한 짓뿐인 것과 같으니, 이걸 꼭 알아야 하지요.
* 광문자전 (廣文者傳)
광문이라는 자는 거지였는데 거지 아이들이 그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로 삼고, 소굴을 지키게 한 적이 있었다. 하루는 날이 추워 거지 아이들이 다 빌러 나가고 한 아이만이 병들어 따라가지 못했다. 조금 뒤 그 아이가 추워 떨자 광문이 불쌍하여 밥을 얻어 왔는데 먹이려고 보니 죽어 있었다. 거지 아이들이 돌아와 광문이 그 애를 죽였다고 의심하여 그를 두들겨 쫓아내었다. 그는 어느 집으로 들어가 떨어진 거적을 달라 하여 그것을 가지고 떠난다. 이상하게 여긴 집주인은 그 뒤를 밟아 멀리서 바라보니, 거지 아이들이 시체 하나를 끌고 와서 다리 밑으로 던져 버리는데, 광문이 다리 속에 숨어 있다가 떨어진 거적으로 그 시체를 싸서 공동묘지에 묻어다 주는 것 이였다.
그 집주인은 광문을 의롭게 여겨 약국을 운영하는 어느 부자에게 소개시켜 주고 고용인을 삼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가 문을 나서면서 자주 뒤를 돌아본다. 광문이 돈을 훔친다고 의심을 한 것이다. 하지만 며칠 뒤 처조카가 돈을 가지고 와 돌려주며 광문의 무고함은 밝혀진다. 이에 그 부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광문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칭찬을 하고 다닌다. 그 이야기는 사대부들에게 까지도 전해지고 광문은 옛날의 훌륭한 사람들과 같다는 이야기까지 듣게 된다.
광문은 남들이 장가가라고 하면 “잘생긴 얼굴은 누구나 좋아하는 법이다. 그러나 사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비록 여자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나는 본래 못생겨서 아예 용모를 꾸밀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였다. 하지만 서울 안에 명기들이 아무리 곱고 아름다워도, 광문이 성원해 주지 않으면 그 값이 한 푼어치도 못 나갔다.
* 양반전(兩班傳)
정선 고을에 한 양반이 있었는데 어질고 글 읽기를 좋아해서, 군수가 새로 도임하게 되면 반드시 인사를 차렸다. 그러나 너무 가난하여 곡식을 빌려 먹다가 그 빚이 천석에 이르렀다. 관찰사가 고을을 순행하면서 그 사실을 알고 그 양반을 잡아 들였다. 그때 그 마을에 사는 부자가 양반의 신분을 사고 그 환곡을 갚아 준다.
군수는 그 양반에게 다음과 같은 증서를 작성해 준다.
“양반이란, 비루한 일 끊어 버리고, 옛사람을 흠모하고 뜻을 고상하게 가지며, 오경이면 늘 일어나 유황에 불붙여 기름등잔 켜고서, 눈은 코끝을 내리 보며 발꿈치를 괴고 앉아, 얼음 위에 박 밀 듯이 <동래박의>를 줄줄 외워야 한다. 세수할 땐 주먹 쥐고 벼르듯이 하지 말고, 냄새 없게 이 잘 닦고, 긴 소리로 종을 부르며....”
이에 부자가 어처구니없어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
“양반이라는 것이 겨우 그것뿐입니까? 제가 듣기로는 양반은 신선 같다는데, 정말 이와 같다면 너무도 심하게 횡령당한 셈이니, 원컨대 이익이 될 수 있도록 고쳐 주옵소서.”
하므로, 마침내 증서를 이렇게 고쳐 만들었다.
“양반으로 불려지면 이익이 막대하다. 농사, 장사 아니 하고, 문사 대강 섭렵하면, 크게 되면 문과 급제, 작게 되면 진사로세. 일산 바람에 귀가 희고 설렁줄에 배 처지며, 방 안에 떨어진 귀걸이는 어여쁜 기생의 것이요, 뜨락에 흩어져 있는 곡식은 학을 위한 것이라. 궁한 선비 시골 살면 나름대로 횡포 부려, 이웃 소로 먼저 갈고, 일꾼 뺏어 김을 매도 누가 나를 거역하리. 네 놈 코에 잿물 붓고, 상투 잡아 도리질하고 귀얄수염 다 뽑아도, 감히 원망 없느니라.”
부자가 그 문서 내용을 듣고 있다가 혀를 내두르며,
“그만두시오. 그만두시오. 참으로 맹랑한 일이요. 장차 나로 하여금 도적놈이 되란 말입니까?”
하며 머리를 흔들고 가서는, 종신토록 다시 양반의 일을 입에 내지 않았다.
술을 조금 마시다
새소리는 여리고 느리게 묵은 취반은
문 앞에서 들리고 넉넉하고
꽃 그림자 천천히 양쪽 귀밑털에
섬돌을 올라오네 새 흰머리 빛나누나
손자를 본 날이라 고요한 속에 도로
술 맛이 더욱 진하고 일거리 찾노니
관직을 벗은 때라 남을 위해 만시를
몸이 가볍네 쓰는 거로세
* 호질 (虎叱)
범은 착하며 성스럽고, 싸움 잘 하고, 인자하고 효성스럽고, 슬기롭고도 어질고, 영웅 스러우며 날래고, 세차고도 사납기가 그야말로 천하에 대적할 자 없다. 하루는 범이 창귀 들을 모아 놓고 분부를 내리되,
“오늘도 벌써 해가 저무는데 어디서 먹을 것을 취한단 말이냐.” 했다.
모든 창귀 들이 서로 다투어 가며 범에게 말하기를,
“일음과 일양을 ‘도’라 하옵는데, 저 유학자들이 이를 꿰뚫으며, 오행이 서로 낳으며 육기가 서로 이끌어 펼쳐 주옵는데 저 유가들이 이를 조화시키나니 먹어서 이보다 더 맛 좋은 것이 없으리라.”
범이 이 말을 듣자 근심스럽게 낯빛을 고치고 얼굴을 바꾸면서,
“아는가, 저 ‘음’ ‘양’이란 것은 한 기운에서 나와 죽고 사는 것에 불과하거늘, 그들이 둘로 나누고 있으니 그 고기도 잡될 것이요, 오행은 각기 제 바탕이 있어서 애당초 서로 낳는 것은 아니거늘 이제 그들은 억지로 자(子), 모(母)로 갈라서 짜고 신 맛으로 나누어 놓았으니 그 맛이 순수하지 못할 것이요, 육기는 제 각기 행하는 것이어서 남이 이끌어 퍼 줌을 기다릴 것이 없거늘 이제 그들은 망령되고, 사사로이 제 공을 세우려 하니, 그것을 막는다면 어찌 딱딱하여 가슴에 체하거나 목구멍에서 역겹지 않는단 말이냐.” 하였다.
그 무렵 벼슬을 좋아하지 않는 체하는 선비하나가 살고 있으니 그의 호는 ‘북곽 선생’ 이었다. 그는 새로 책을 엮은 것이 일만 오천권이나 되어서 천자가 그의 학덕을 가상히 여기고, 제후들은 그의 이름을 사모하였다.
그리고 그 고을에 ‘동리자’ 라는 예쁜 과부가 하나 있었다. 천자가 그의 절개를 갸륵히 여기고 제후들은 그의 어짊을 연모하였다. 동리자는 이렇게 수절 잘하는 과부로 알려졌으나 실은 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각기 다른 성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은 동리자와 북곽 선생이 마주 앉아서 연정을 나누는데, 그 꼴을 본 다섯 아들이 말하기를,
“나는 들은즉 ‘여우가 천 년을 묵으면 변신하여 능히 사람의 모습으로 둔갑한다는데 그놈이 필시 북곽 선생
으로 변신한 것 아닐까.”
하고 다시금 서로 의논하여 일을 꾸미기를,
“나는 듣건대 ‘여우의 갓을 얻은 자는 천금의 부자가 되었고, 여우의 신을 얻은 자는 대낮에도 그림자를 감출 수 있고, 여우의 꼬리를 얻은 자는 남에게 예쁘게 보여 누구라도 그를 기뻐한다.’ 하니 우리 저 여우를 잡아 죽여서 나눠 가지는 게 어떨까.”
하고 다섯 아들이 들이 닥치자, 북곽 선생은 혼이 나서 뺑소니를 친다. 남이 알아볼까 허래 벌떡 뛰어가다가 거름 구덩이에 빠지고, 범을 만나게 된다. 북곽 선생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첨하자 범은 그 자리에서 그를 꾸짖는다.
“내 들은즉 유학자 ‘유(儒)’란 것은 아첨할 ‘유(諛)’와 통한다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무릇 천하의 이치야말로 하나인 만큼 범의 성품이 나쁠진대 사람의 성품도 역시 나쁠 것이요, 사람의 성품이 착할진대 범의 성품도 착할지니....(중략)...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도청 놈들은 밧줄이며, 도끼 따위를 만들고 그 나쁜 짓들은 막을 길이 없건마는, 범의 집에는 본시 이러한 악독한 형벌이 없으니 이로써 본다면 범의 성품이 사람보다 어질지 아니하냐.
무릇 제 것 아닌 것을 가져가는 것을 도둑이라 하고, 남을 못 살게 굴고 생명을 빼앗는 것을 흉적이라 하나니, 너희들이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팔을 걷어붙이며, 눈을 부릅뜨고 함부로 남의 것을 빼앗고 훔쳐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심지어는 돈을 형이라 부르고, 장수가 되기 위해서 그 아내를 죽이는 일 까지도 있은즉 이러고도 인륜의 도리를 논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범이 아직 표범을 먹지 않음은 차마 제 겨레를 해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범이 노루나 사슴을 먹는 것을 헤아려 보아도 사람이 노루와 사슴을 먹는 만큼 많지 못할 것이며, 범이 마소를 먹는 것을 헤아려 보아도 사람이 마소 먹는 만큼 많지 못할 것이며. 그 서로 잡아먹기로도 가혹함이 뉘라서 너희들보다 더할 자 있겠느냐.” 했다.
이에 북곽 선생이 머리를 조아리며 살려달라고 하는 사이 범은 벌써 어디론지 가버리고 없었다.
때마침 아침에 밭 갈러 가는 농부가,
“선생님,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이 벌판에서 절하시옵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북곽 선생은,
“내 일찍 들으니 ‘하늘이 높다 하여도 머리를 어찌 안 굽히며, 땅이 비록 두렵다한들 발소리를 조심해서 걷지 않을 소냐’ 하였다네.”
하고는 말끝을 흐려버렸다.
중옥에게 답함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은 애초에 듣지 말아야 할 것이요, 발설 말라 하면서 하는 말은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니, 남이 알까 두려운 일을 무엇 때문에 말하며 무엇 때문에 들을 까닭이 있소? 말을 이미 해 놓고 다시 경계하는 것은 상대방을 의심하는 일이요, 상대방을 의심하고도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오.
편지 중에서
말세에 처하여 사람을 사귈 때는 마땅히 상대방의 말이 간략하고 기운이 차분하며 성품이 소박하고 뜻이 검약한가를 살펴보아야 하며, 절대로 마음속에 계교를 지닌 사람은 사귀어서는 안 되고 뜻이 허황된 사람은 사귀어서는 아니 되지요.
세상에서 떠드는 ‘쓸모 있는 사람’이란 반드시 쓸모없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떠들어 대는 ‘쓸모없는 사람’이란 반드시 쓸모 있는 사람이지요. 천하가 안락하고 향리에 아무런 사고가 없는데, 참으로 쓸모 있는 사람이라면 무엇 때문에 재기를 드러내고 정신을 분발하면서까지 경솔히 남에게 보여 주려고 애쓸 까닭이 있겠소.
성지에게 보냄
그의 말이 비록 터무니없이 거짓되어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라도 미리 거짓말이라 단정하지 말고 일단 믿을 만한 말이라고 인정해 주는 것이 어떨는지요? 비유하자면 마치 거짓말쟁이가 꿈 얘기 하는 것과 같아서, 참이라고 믿어 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거짓이라고 이를 수도 없는 게 아니겠소. 다른 사람의 꿈속이라 한 번 달려 들어가 볼 수도 없으니 말이오.
* 북학의서(北學議序) - 조선 정조 때 박제가가 淸(청)의 풍속과 제도를 두루 시찰하고 쓴 기행문<북학의(北學議)>에 대하여 연암 박지원이 쓴 서문(序文)
학문의 길은 다른 길이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가는 사람이라도 붙잡고 물어야 한다. 심지어 동복이라 하더라도 나보다 글자 하나라도 더 많이 안다면 우선 그에게 배워야 한다. 자기가 남만 같지 못하다고 부끄러이 여겨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면, 종신토록 고루하고 어쩔 방법이 없는 지경에 스스로 갇혀 지내게 된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한쪽 구석 땅에서 편벽된 기운을 타고나서, 발은 대륙의 땅을 밟아 보지 못했고 눈은 중원의 사람을 보지 못했고, 나고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제 강역을 떠나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학의 다리가 길고 까마귀의 빛이 검듯이 각기 제가 물려받은 천성대로 살았고, 우물의 개구리나 밭의 두더지마냥 제가 사는 곳이 제일인 양 여기고 살아왔다. 예는 소박한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누추한 것을 검소하다고 여겨 왔으며, 이용후생의 도구는 날이 갈수록 빈약해져만 갔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배우고 물을 줄을 몰라서 생긴 폐단이다.
진실로 법이 훌륭하고 제도가 아름다울 진대 장차 오랑캐에게라도 나아가 배워야 하거늘, 하물며 그 규모의 광대함과 문장의 찬란함이 아직도 삼대 이래 고유한 관례를 보존하고 있음에랴.
우리를 저들과 비교해 본다면 한 치의 나은 점도 없다. 그럼에도 단지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튼 것만 가지고 스스로 천하에 제일이라고 하며 “지금의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내가 북경에서 돌아오니 재선(박제가)이 그가 지은 <북학의> 2편을 보여주었다. 그는 나보다 먼저 북경에 갔던 사람이다. 그는 농잠, 목축, 성곽, 주거로부터 붓 등을 만드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눈으로 헤아리고 마음으로 비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물어보았고,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배웠다. 시험 삼아 책을 한 번 펼쳐 보니, 나의 일록(열하일기)과 더불어 조금도 어긋나는 것이 없어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았다.
아, 이것이 어찌 우리 두 사람이 눈으로만 보고서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진실로 비 뿌리고 눈 내리는 날에도 연구하고, 술이 거나하고 등잔불이 꺼질 때가지 토론해 오던 것을 눈으로 한 번 확인한 것뿐이다. 요컨대 이를 남들에게 말할 수가 없으니, 남들은 물론 믿지를 않을 것이고 믿지 못하면 당연히 우리에게 화를 낼 것이다. 화를 내는 성품은 편벽된 기운을 타고난 데서 말미암은 것이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원인은 중국의 산천을 비린내 노린내 난다고 나무란 데 있다.
편지 중에서
남에게 청하는 것과 남에게 주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싫은가 물어보면, 누구를 막론하고 청하는 것이 싫다 할 것이오. 만약 남에게 주는 자의 마음이 실로 남에게 청하는 자의 마음만큼이나 싫다면, 사람치고 남에게 주는 자가 없으리다. 그런데 지금 나는 청하지 않고서도 매우 후하게 받았으니, 그야말로 그대는 남에게 주는 것을 즐기는 분이 아니겠소.
잡저 중에서
부모가 병이 나면 일과를 폐하고, 재계를 할 때는 일과를 폐하고, 상을 당하면 일과를 폐한다. 친구의 상사에는 아무리 멀어도 학업을 같이 하던 사람이면 달려가 조문하고 일과를 폐한다. 일찍이 어려움을 함께 겪은 사람의 상을 만나면 탄식하고, 조문을 가야할지 주저되는 경우를 만나면 탄식하고, 새로 알게 된 사람이면 탄식한다.
* 열하일기(熱河日記)중
가을 7월 15일 신묘일, 맑다. 내원과 태의 변관해, 주부 조달동 등과 더불어 새벽 소흑산을 떠나 중안포 까지 삼십 리를 와서 점심을 먹었다. 또 앞서 떠나 구광녕을 지나 북진묘를 구경하고, 달빛을 띠고 사십 리를 가서 신광녕 에서 묵었다. 북진묘를 구경하느라고 이십 리나 돌아서 길을 갔으니 , 모두 구십 리를 걸은 셈이다.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이 참으로 이 적을 물리치려면 중화가 끼친 법을 모두 배워서 우리나라의 유치한 문화부터 먼저 열어야 한다. 밭 갈기 누에치기 그릇 굽기 등으로부터 공업 상업에 이르기까지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의 집들은 온통 벽돌만으로 짓는다. 벽돌은 길이가 한 자요 넓이가 다섯 치인데 두 장을 가지런히 놓으면 네모 반듯 하며 두께는 두 치인데 한 틀에서 찍어낸 것이다. 그 쌓는 법인 즉, 한번은 세로로 한번은 가로로 놓아 저절로 괘 모양이 되게 하고, 종잇장 같이 얇게 회를 먹여 겨우 맞붙도록 하여 맞붙은 흔적이 실낱 같다. 회를 개는 법은 굵은 모래를 섞어서는 안 되고 찰흙 역시 꺼린다.
* 책 읽는 법에 관해서
글 읽는 법은 일과를 정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질질 끄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 많이 읽으려도 말고, 속히 읽으려도 말라. 읽을 글줄을 정하고 횟수를 제한하여 오로지 날마다 읽어 가면 글의 의미에 정통하게 되고 글자의 음과 뜻에 익숙해져 자연히 외게 된다. 그러고 나서 그 다음의 순서를 정하라.
잘 아는 글자라고 소홀히 하거나 쉽게 여기지 말고, 글자를 달리듯이 미끄러지듯이 줄줄 읽지 말며, 글자를 읽을 때 더듬거리지 말며, 글자를 거꾸로 읽지 말며, 글자를 옆줄로 건너뛰어 읽지 말라. 반드시 그 음을 바르게 읽어야 하며, 반드시 그 고저가 맞아야 한다.
책을 베개 삼아 베지도 말고, 책으로 그릇을 덮지도 말며 권질을 어지럽히지 말라. 먼지를 털어 내고 좀 벌레를 없애며, 햇볕이 나는 즉시 책을 펴서 말려라. 남의 서적을 빌려 볼 때에는 글자가 이상한 데가 있으면 교정하여 쪽지를 붙여 주며, 종이가 찢어진 데가 있으면 때워 주며, 책을 맨 실이 끊어졌으면 다시 꿰매어 돌려주어야 한다.
부모가 부르면 책을 덮고 바로 일어나며, 손이 오면 읽는 것을 멈추되 귀한 손님이 오면 책을 덮는다. 밥상이 들어오면 책을 덮되 반쯤 읽었으면 그 횟수는 끝마치며, 밥 먹고 나면 바로 일어나 천천히 거닐고, 밥이 소화되고 나면 다시 읽는다.
마치 부모의 명을 들으면 머뭇거리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친구와 더불어 약속을 하면 곧바로 실천할 것을 생각하듯이,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글 읽는 방법이다.
자료정리:범상진 bum6093@hanmail.net
출처: SPR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