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김만중)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30. 00:37
1. 작가 소개
- 김만중 (金萬重, 1637~1692)
김만중은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소설가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서포)시호는 문효(文孝)이다. 1637년에 병자호란으로 피난 가던 배에서 출생하였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충렬공 김익겸의 유복자로 어머니 윤 씨 슬하에서 자라났다. 조선조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이기도하며,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 만기의 아우로서, 숙종 대왕의 초비인 인경왕후의 숙부이다. 그의 어머니 해평 윤씨는 흔히 맹자의 어머니와 비유되곤 한다. 자식 교육에 대한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소설가, 호는 서포, 조선조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이요, 병자호란 때 순결한 김익겸의 유복자로 태어나 오로지 어머니 윤씨의 남다른 가정교육에 힘입어 성장하였는데 그의 생애와 사상도 어머니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베 짜고 수놓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갔으나 학업에 방해가 될까 봐 어린 자식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서포의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1665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수찬 등을 역임하고 암행어사로 활동한다. 그러나 임금 앞에서 직언도 불사하는 강직성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金김’씨 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벌을 받기도 했다. 이후 예조참의로 복귀하여 대사헌을 거쳐 대제학에까지 오르는 등 7년간은 전 생애를 통한 황금기였다. 그러나 숙종이 정비인 인현황후를 폐비시키고 장희빈을 세우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남해에 유배당한다. 유배지에서 숙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쓴 것이 ‘사씨남정기’이다. 이러한 와중에 그의 어머니 윤씨는 아들의 안부를 걱정하던 끝에 병으로 죽었으나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남해의 유배지에서 56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구운몽」은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작품으로 허 균의 「홍길동전」과 함께 조선 중기의 본격적인 소설 문학을 확립한 작품이다. 한편 김만중은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 학관을 피력했지만, 「구운몽」의 경우 현재 한문 필사본과 한글 필사본이 모두 전해지고 있다. 「구운몽」이 애초에 한문으로 창작되었는지 한글로 창작되었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 다만 「사씨남정기」를 김만중의 종손인 김춘택이 한문으로 번역했듯이 「구운몽」역기 누군가 한문으로 번역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구운몽」, 「사씨남정기」, 「서포만필」, 「서포집」,「고시선」등이 있다.
< 연표로 본 서포의 삶>
1637(인조 15년) 병자호란으로 피난 가던 중 배 위세서 출생1652년(효종 3년) 진사 초시 합격. 연안 이 씨와 혼인. 1665년(현종 6년) 정시 장원 급제. 예조좌랑에 임명. 「단천절부시」를 지음.1667년(현종 8년) 정오품 벼슬인 문학에 임명.1668년(현종 9년) 교리에 임명. 수찬에 임명. 「의상질의」를 지음.1671년(현종 12년) 암행어사에 임명. 5언 절구 「암행시작」8수를 지음.1674년(현종 15년) 1월 27일 금성에 유배. 4월 1일 풀려남. 5언 고시 「기몽」외.1675년(숙종 1년) 호조참의, 동부승지에 임명.1679년(숙종 5년) 예조참의에 임명.1680년(숙종 6년) 우부승지에 임명.1681년(숙종 7년) 예조참판, 대사헌에 임명.1683년(숙종 9년) 도승지, 호조참판에 임명.1685년(숙종 11년) 예조판서, 지돈령부사, 좌참찬에 임명.1686년(숙종 12년) 우참찬, 판의금부사에 임명.1687년(숙종 13년) 선천에 유배됨.1688년(숙종 14년) 유배에서 풀려남.1689년(숙종 15년) 남해에 유배됨. 「사씨남정기」,「구운몽」,「서포만필」지음.1690년(숙종 16년) 모친인 윤 씨의 행장 「선비정경부인행장」을 지음.1690년(숙종 18년) 남해 유배지에서 사망.1702년(숙종 28년) 아들 진화가 목판본, 10권 2책으로 「서포집」을 편찬하여 발표.1706년(숙종 32년) 효행에 대한 정표가 내려졌고, 시호는 문효.
2. 시대 배경
서포가 살았던 숙종의 시기에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당파싸움이 가장 심했던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밖으로는 동아시아에서 청이 여러 정난들을 평정하고 세력권을 확대했으며, 청은 영국 등의 유럽 국가들과 무역을 시도하는 등 서방과의 문화적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던 시기였다. 숙종 시대에는 세계사를 살펴 주국과 서양과의 관계교류에 관심을 기울여야만, 조선시대에 영향을 끼진 중국 문화의 저변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연이어 일어났다. 안으로는 중전과 후궁들의 다툼이 가장 격했던 시대에 속한다.
붕당정치가 격했던 이 시기는 복장문제의 논쟁을 비롯하여 예론 정쟁이 심했던 시대에 속한다. 당파간의 분쟁도 치열하여 남인 세력에 축출 사건으로 경신환국이 발생했고 1689년에는 다시 남인이 세력을 회복하였다. 1688년에는 숙종의 첩이었던 장옥정이 왕자를 낳자 원자에 정호하려 했고 서인의 반대가 일어났다. 이 사건과 연루되어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계 들이 대거 상소를 올리자 많은 정치인들이 유배되고 송시열은 사사된다. 또,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인현왕후였던 중전 민씨가 폐위됨으로 이로 인해 희빈 장씨가 중전이 되고 왕자 균은 세자에 책봉된다.
김만중은 노론老論의 대표적 인물들 가운데 한사람에 속했다.
노론의 인물들은 송시열, 김만기, 김만중, 김석주 등이 있다. 장희빈을 옹호하던 남인南人의 실권 장악으로 1689년 희빈 장씨 소생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가 기사환국己巳換局이 발생하고 노론의 여러 인물들이 유배당하든지 죽음을 당하고 대거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 후, 5년 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이 다시 쫓겨나고 서인의 소론이 정권을 잡고, 1701년 무고의 옥이 일어나 남서 소론이 말려가고 노론이 대거 등용되면서 노, 소론이 대등한 세력을 형성하며 정국을 이끌어 나간다. 1694년에는 소론파의 폐비 복원운동으로 남인세력이 실각하는 갑술옥사가 일어나고 중전으로 올랐던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출되었던 민씨를 복원시켜 다시 왕비에 앉혔다.
왕비를 비롯한 여러 빈들을 거느린 숙종이 외척들의 어지러움으로 인해 당파의 갈등이 증폭 되자, 서포는 이를 파장 많은 물결을 제대로 치수하지 못한 중국의 음탕한 세 임금에 비유시켜 요몽을 거론한 바 있다.
또, 서포는 「서포연보」124쪽에서 그 당시 풍속의 어지러움을 탓하면서 “음란함은 차차로 변하여 찬탈을 하기에 이른다 하였습니다.”하고 그 당시 남녀관계의 무질서를 한탄하면서
"육 칠 년 이래로 진신들이 탐욕스럽기 그지없으며, 음란함이 풍습을 이루었고 당론의 폐단도 도한 요즘처럼 심한 적이 없으니, 이것이 다 난리가 생겨나는 바입니다."
하고 걱정했다.
그 당시에는 숙종의 첩실문제로 논란이 많았는데 이에 대한 상소와 언근이 발생하자 숙종이 이에 관해 직접 해명하는 사실에서 음란함의 문제는 얼마나 그 당시 도의 기준에서는 벗어난 일이었던가를 보여준다.
"아직도 후사가 없으니 후궁을 둔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다. 지난 봄 비망기에서도 이러한 뜻을 말하였으니 한성우가 틀림없이 모르지는 아니 할 텐데 감히 여색을 즐긴다는 말을 하고 효종대왕 때의 일을 말함으로 터무니없는 말은 하고 있으니 저가 인신으로 어찌 감히 이와 같은 말을 하는가?"
하면서, 그 당시 숙종은 첩을 두었던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였다.
서포는 이러한 당쟁의 와중에 인현왕후의 정실 위치를 옹호하다가 유배를 당하였다. 그는 ‘정실의 중요함을 주장’하고 부당하게 첩을 두지 않았던 효종과 현종의 예를 들어가면서 항변하였고, 또 폐비의 부당함을 도덕적으로 주장하면서 자신의 억울한 유배생활, 그 당시 역사적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작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시대에는 아직도 일부다처가 ‘도덕적 해이’로 생각되던 시기였다. 여성을 자연신체처럼 신성시하던 농경사회의 5000년 전통이 아직도 채, 사라지지 않았던 시기에 해당된다. 중국에서 도입된 성리학은 깊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 과도기의 시점이었기에 복식의 제도와 예에 대해 논쟁이 많았을 만큼, 실리에 맞지 않던 붕당정치는 서포에 의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서포를 첩을 두는 행위를 오랑캐의 이적 행위에 비유시켜 그 당시 진신들의 음란한 풍속을 탓하였고, 잉첩과 비첩의 논리를 이 소설에서 락유원의 협문과 원에만 노니는 부마로 비판했다. 무작위로 첩을 두게 되면 모두가 나의 어머니나 고모에 해당되는데 이는 천륜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나의 어머니에게 묻고 고모에게 묻는다.”고 했다. 그는 도덕적 해이를 불러일으키는 요색과 음란함을 암수와 아송의 체에다 비유시켜 말하기도 했다.
3. 작품의 줄거리
1) 등장인물 소개
성진 - 육관대사의 수제자로 비범한 인물. 속세에 미련을 두고 속세에 환생하여 팔선녀와 더불어 갖은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그것이 한갓 허망한 꿈임을 깨닫고 본 성을 발견한다.
육관대사 - 세상의 모든 일을 관통할 수 있는 도통한 중. 성진의 스승으로 성진의 번뇌를 성진으로 하여금 직접 벗도록 한다. 속세에 성진을 따라가 호승(胡僧)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팔선녀 - 성진과 함께 남녀의 정욕을 탐하고 속세를 흠모하다 인생무상을 깨닫는 인물들.
<꿈속의 인물들>
양소유 - 성실한 불제였던 성진이 여덟 명의 선녀와 만나고 잠깐 현세의 부귀영화를 생각한 탓에 스승인 육관대사에게 죄를 입어 인간 세상에 환생한 존재이다.
정경패 - 정 사도의 딸로 소유의 첫째 부인(영양공주)이다. 정숙하고 당돌한 성격으로 철저하게 규방을 지켜 비록 친척들이라 하더라고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이 많지 않을 정도로 당시 여성으로서의 윤리 규범에 충실한 여성이다.
이소화 - 황제의 여동생으로 소유의 둘째 부인(난양공주)이다. 온순하고 상냥한 성격으로 공주라고 해서 권세를 부리지도 않고, 양소유가 다른 처나 첩을 맞이하는 것을 거부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 주선할 정도이다.
진채봉 - 진 어사의 딸로 소유의 첩이다. 자유분방하면서도 가련한 분위기의 여성이다.
가춘운 - 정경패의 몸종으로 소유의 첩이다. 온순하면서도 나약한 분위기의 여성이다.
계섬월 - 낙양의 소문난 명기로 소유의 첩이다. 섬세하면서도 이지적인 분위기의 여성이다.
적경홍 - 낙양의 소문난 명기이자 계섬월의 절친한 친구이며 소유의 첩이다. 명랑하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를 갖춘 여성이다.
심요연 - 토번의 자객으로 소유의 첩이다. 대장부와 같은 용맹스러운 기질을 갖추었다.
백능파 - 동정 용왕의 막내딸로 소유의 첩이다. 고답적이면서도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여성이다.
2) 내용 소개
권지일(卷之一)
노존사(老尊師)는 남악(南岳)에서 묘법(妙法)을 강론하고
소사미(小沙彌)는 석교(石橋)에서 선녀를 만나다.
화음현(華陰縣)에서 규녀와 소식을 전하고
남전산(藍田山)에서 도인이 거문고를 전하다.
양천리(楊千里) 주루(酒樓)에서 계섬월(桂蟾月)을 선택하고
계섬월은 침상(寢牀)에서 어진 사람을 천거하다.
가짜 여자 도사가 정 씨 집안에서 지음(知音)을 만나고
늙은 사도는 과거 합격자 명단에서 어진 사위를 택하다.
권지이(卷之二)
꽃신을 시로 읊어 사랑을 고백하고
거짓 신선을 꾸며 첩의 인연을 맺다.
춘운이 거짓으로 신선도 되고 귀신도 되며
적경홍이 잠시 여자도 되고 남자도 되다.
금란직(金鸞直) 학사(學士)가 옥퉁소를 불고
봉래전의 궁녀가 아름다운 시를 빌다.
시첩(侍妾)이 의리를 지켜 주인과 하직하고
여협객(女俠客)이 칼을 들고 신방에 나아가다.
권지삼(卷之三)
백룡담에서 양소유가 귀병(鬼兵)을 쳐부수고
동정호에서 용왕이 잔치를 열어주다.
양 원수, 여가를 얻어 선가(仙家)의 문을 두드리고
공주는 미복으로 규수를 방문한다.
두 미인이 손을 잡아 같은 수레를 타고
장신궁에서 일곱 걸음 만에 시를 짓다.
양 상서는 꿈에 상계(上界)에서 노닐고
가춘운은 유언을 속여 전하다.
권지사(卷之四)
혼례 자리에서 두 공주가 빛을 발하고
장수 잔치에서 적경홍과 계섬월이 독보하다.
낙유원에 모여 사냥하며 춘색(春色)을 다투고
꽃수레를 타고 노닐며 풍광(風光)을 살피다.
부마가 벌로 금잔에 담긴 술을 마시고
성주(聖主)가 은혜를 베풀어 취미궁을 빌려주다.
양 승상은 높은 데 올라 멀리 바라보고
성진 상인은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다.
<줄거리>
중국 당나라 때 남악 형산 연화봉에서 서역으로부터 불교를 전하러 온 육관대사가 법당을 짓고 불법을 베풀었는데, 동정호(중국의 유명한 호수)의 용왕도 이에 참석한다. 육관대사는 제자인 성진을 용왕에게 사례하러 보낸다. 이때 형산의 선녀인 위부인(중국 진나라 때의 여선으로 형산에 있었다고 함)도 팔선녀를 육관대사에게 보내 모처럼의 법화에 참석하지 못함을 사과한다. 용왕의 우대로 술에 취하여 돌아오던 성진은 마침 돌아가던 팔선녀와 석교에서 마주치자 잠시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희롱한다. 선방에 돌아온 성진은 팔선녀의 미모에 도취되어 불문의 적막함에 회의를 느끼고, 대신 유가의 입신양명을 꿈꾸다가 육관대사에 의해 팔선녀와 함께 인간세상으로 추방된다. -(현실세계)
성진은 회남 수주현에 사는 양처서의 아들 양소유로, 팔선녀는 각기 진채봉, 계섬월, 적경홍, 정경패, 가춘운, 이소화, 심요연, 백능파로 태어난다. 양 처사(양소유의 아버지)는 곧 신선이 되려고 집을 떠나고, 아버지 없이 자란 양소유는 15세에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가던 중, 화음현에 이르러 진 어사의 딸 진채봉을 만나 혼인을 약속한다. 그때 구사량이 난을 일으켜 양 소유는 남전산으로 피난하였는데, 그곳에서 도사를 만나 음률을 배운다. 한편 진채봉은 아버지가 죽은 뒤 관원에게 잡혀 서울로 끌려간다. 이듬해 다시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가던 양 소유는 낙양 천진교의 시화에 참석하였다가 기생 계섬월과 인연을 맺는다. 서울에 당도한 양소유는 어머니의 친척인 두련사의 주선 하에 거문고를 탄다는 구실로 여관으로 변장하여 정숙하기가 이를 데 없는 정사도의 딸 정경패를 만나는 데 성공한다. 과거에 급제한 양 소유는 정 사도의 사위로 정해지는데, 정경패는 양 소유가 자신을 만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준 모욕을 갚는 다는 명목으로 몸종인 가춘운에게 선녀처럼 꾸며 양소유를 유혹하게 하여 결국 두 사람은 인연을 맺는다.
이때 하북의 세 왕이 역모하여 양소유가 절도사로 나가 이들을 다스리고 돌아오는 길에 계섬월을 만나 운우의 정을 나누는데, 이튿날 다시 보니 하북의 명기 적경홍이었다. 두 여자와 후일을 기약하고 상경한 양소유는 예부상서가 된다. 진채봉은 서울로 잡혀온 뒤 궁녀가 되었는데, 어느 날 황제가 베푼 환선시에 글을 덭붙여 곤욕을 치르게 된다. 황제가 이유를 물어 진채봉과 양소유의 관계를 알게 되어 이를 용서하고 황제의 누이인 난양공주는 후에 진채봉과 형제의 인연을 맺는다. 양소유는 어느 날 밤 난양 공주의 퉁소 소리에 호답한 것이 인연이 되어 부마(임금의 사위)로 간택되지만, 양소유는 정경패와의 혼약을 이유로 이를 거절하다가 투옥된다.
그때 토번 왕이 침범해 오자 양 소유는 대원수가 되어 출전한다. 진중에서 토번 왕이 보낸 여자 검객 심요연과 인연을 맺게 되고, 심요연은 자신의 사부에게 돌아가면서 후일을 기약한다. 그리고 양 소유가 진중에 장졸들이 죽어가고 방책이 없는 가운데 잠이 들게 되어 꿈을 꾸는데 꿈속에서 동정 용왕의 작은 딸인 백능파를 만나 인연을 맺는다. 그 동안 난양공주는 양소유와의 혼약에 거절을 당하여 실의에 빠진 정경패를 비밀리에 만나보고, 그 인물에 감복하여 의형제를 맺는다. 그리하여 정경패를 첫째 공주인 영양공주로 삼는다.
토번 왕을 물리치고 돌아온 양소유는 위국공에 봉하여지고, 영양공주, 난양공주와 혼인을 하며, 진 궁녀와 다시 만나는 가운데 그녀가 진채봉 임을 확인하게 되고 그녀를 첩으로 맞이한다. 양소유는 고향으로 돌아가 노모를 서울로 모시고 온다.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와 사흘 동안 연회를 베푸는데 소식을 알 수 없던 계섬월과 적경홍이 그곳으로 온다. 심요연과 백능파도 찾아온다.
양소유는 이렇게 2처 6첩을 거느리고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된다. 어느 날 생일을 맞아 종남산에 올라가 여덟 미인과 가무를 즐기던 양소유는 역대 영웅들의 황폐한 무덤을 보고 문득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 비애에 잠긴다. 이에 인생의 무상과 허무를 논하여 장차 불도를 닦아 영생을 구하고자 할 때, 호승(육관대사)이 찾아와 문답하는 가운데 긴 꿈에서 비로서 깨어나 육관대사의 앞에 있음을 알게 된다. -(꿈의 세계)
꿈의 양소유에서 본래의 성진으로 돌아오자, 성진은 이전의 죄를 뉘우치고 육관대사에게 가르침을 바란다. 팔선녀들도 찾아와 함께 가르침을 바란다. 이에 육관대사는
인위적인 일체의 법은
꿈과 환상 같고, 거품과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볼지어다.
하고 네 구절의 진언을 외워준다. 이에 팔선녀와 성진은 크게 깨닫고 이후에 연화도장 대중을 거느려 크게 교화를 베풀었다. 그리하여 여덟 비구니가 성진을 스승으로 섬겨 보살의 큰 도를 얻어 아홉 사람이 함께 극락세계로 갔다. -(현실 세계)
4. 작품 해설
<제목의 의미>
九(구) - 성진과 팔선녀를 의미한다.
雲(운) - 인생의 부귀영화가 구름과 같이 덧없다.
夢(몽) - 모든 것이 한 바탕 꿈이었음을 의미한다. (현실-꿈-현실)
<구운몽의 사상적 배경>
유교적 바탕 - 입신양명, 부귀공명 (당시 양반 사회의 이상적 인생관)
도교적 바탕 - 작품의 비현실적인 내용을 이루는 신선사상.
불교적 바탕 - 핵심적 바탕을 이루는 사상.
<구운몽의 창작동기>
당시는 오늘날과 달리 사대부가 소설을 창작하는 일이 대단히 부정적으로 인식되었으며, 소설 자체가 천대받던 시기였다. 그런데 김만중이 이러한 비판을 감수하고 굳이 소설을 창작한 데에는 어떤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어머니에 대한 서포의 지극한 효심과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의 굴곡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서포는 유복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각별했다. 그리고 비록 화려한 경력과 대단한 가문의 자손이었지만 조정에 대한 비판으로 인해 여러 차례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이 「구운몽」을 창작할 당시에도 서포는 평북 선천의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서포는 어머니 윤 씨 부인의 생일을 맞아 생이별의 눈물을 흘린다는 비장한 시를 남겼다. 그리고 서포는 한편으로 어머니를 위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복잡한 심사를 담기 위해 일체의 부귀영화가 모두 헛된 것이라는 주제의 글을 지었다고 한다. 그 글이 바로 「구운몽」이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5. 구운몽의 근원설화
<조신지몽(調信之夢)>
옛날, 신라 시대에 세규사란 절이 있어 그 절의 장원이 명주 날리군에 있었다. 본사에서는 중 조신을 그 절의 관리인으로 파견했다. 조신은 날리군의 그 장원에 와 있으면서 태수 김흔의 딸을 좋아하여 깊이 매혹되었다. 그는 누차 낙산사의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그녀와 의 결합을 남 몰래 빌었다. 이러기를 수년 간, 그사이 김흔의 딸은 이미 시집을 가 버리고 말았다. 조신은 관음보살이 자기의 비원을 성취시켜 주지 않음을 원망하며 슬피 울다 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김씨 처녀가 반가운 모습으로 조신에게 대사님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며 함께 살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조신은 기뻐하며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사십여 년의 세월을 살았고 자식이 다섯이 생겼을 뿐 나물죽마저 넉넉지 못할 정도로 집안에 남은 것이라곤 없었다. 가족은 먹고살기 위해 사방을 헤매 다녔다. 이렇게 십 년 간 초야를 두루 유랑했다. 그러다 명주 해현 고개를 지나가다가 열다섯 살 난 큰 아이가 굶어 죽었다.
그리고 남은 네 자녀들을 데리고 우곡현으로 와서 길 곁에다 띠 풀로 집을 얽어 살았다. f부부는 이미 늙고 병들어 열 살 난 딸아이가 돌아다니며 걸식을 했다. 그 딸아이마저 마을의 개에게 물려 눕게 되고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헤어지자고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해서 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막 돌아서려는 순간 조신은 꿈에서 깨어났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머리털이 하얗게 새어 있었다. 조신은 멍청이 넋이 나간 듯, 인간 세상에의 뜻이라곤 전혀 없었다. 이미 인간의 그 고뇌 생애에의 염증이 느껴짐이 마치 실제로 백년의 고생을 모조리 겪기라도 한 듯했다. 탐욕의 마음은 얼음이 녹아 버리듯 말끔히 가시었다. 조신은 관음보살의 성스러운 모습을 부끄러이 우러르며 참회를 금하지 못했다. 해현으로 가서 꿈속에서 굶어 죽은 큰아이를 묻었던 자리를 파 보니 돌미륵이 나왔다. 깨끗이 씻어서 그 부근의 절에다 봉안하고, 조신은 서울로 돌아가 절 관리의 임무를 벗었다. 그리고는 종적을 알 수 없었다.
<참고문헌>
「구운몽에 내포된 역학사상 탐구」,배영희, 2004, 민속원
http://www.kanggo.net
자료정리:곽미희 mihee1984@hanmail.net
출처: SPR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