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열전(사마천)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30. 00:33
Ⅰ 사마천 - 하늘이 정한 역사서술가
사마천은 역사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생몰연대에 대해 정확히 알려지고 있지 않으나 사후 여러 문헌에 의하여 추측할 뿐 이다.
사마천은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태사공자서'와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報任安書), 그리고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의 '사마천전'이 주요 자료라고 할 수 있는데 한서는 위 두 글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으니 결국 주요한 자료는 <태사공자서>와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뿐 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에 사기의 각 편 끝에 '태사공왈(太史公曰)'로 시작되는 논평부분에 자신의 행적이 조금 실려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자료의 빈약함으로 인해 사마천의 출생 및 생몰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출생 시기는 기원전 153년,145년,135년 등 여러 설이 있으나 기원전 145년이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부터 2천140 여 년 전이고 前漢 경제(景帝) 중원(中元) 5년이다.
사마천의 생애를 살펴볼 때, 사실 사마천의 일생 전체가 사기의 저작을 위해 바쳐진 생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기는 곧 사마천의 땀과 눈물과 한이 얼룩져 있는 생애의 농축된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천의 생애를 사기 저작이란 관점에서 다음의 네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1) 탄생 후 저작 착수 이전까지의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을 닦기 위한 예비기
(2) 38세에 태사령이 되어 사기저술의 준비작업을 하고 이어 실제로 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한 시기
(3) 48세에 이릉(李陵) 사건에 연루되어 남근거세형인 궁형(宮刑)을 당하고 옥에 갇혀 집필이 중단되었던 시기
(4) 50세 경 출옥한 후 환관의 수장격인 중서령(中書令)이 되어 사기를 완성 시키게 되는 56세까지의 시기
태어난 곳은 하양(夏陽), 지금의 섬서성 한성현의 교외로, 보통 사마판(司馬坂)이라 불리는 부근이다.(이 근처에 황하의 나루터로 유명한 용문(龍門)이 있어 등용문의 고사가 생겨난 곳이기도 하다) 이 나루터 가까이에 용문산이 있고 그 아래 구릉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부친을 따라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살았다.
그의 선조는 대대로 태사(太史:사관)였고 그의 부친 사마담도 학문에 조예가 깊었기에 사마천도 부친에게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가 열 살 때 이미 고대문자로 된 경서를 암송할 수 있었고 좌전, 국어, 세본(世本)과 같은 역사문헌을 읽을 수 있었다.
선조가 태사였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던 부친은 마침내 한무제 때 태사령에 임명되었다. 수도 장안에 이주한 사마천은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孔安國)을 스승으로 하여 고문상서(古文尙書)를 배웠고, 당시 금문의 대가인 동중서(董仲舒)로부터 공양춘추(公羊春秋)를 배울 기회를 가졌으며 여러 학자들한테도 배웠다.
스무 살 되던 해 사마천은 2년간 천하여행에 나섰다. 이 여행은 부친의 강력한 후원 하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역사유적을 탐방하여 잊혀진 사람들을 찾고, 사람들을 만나 인정이나 풍속을 이해하는데 여정을 보냈는데 이는 뒷날 사기저술을 위한 치밀한 사전계획의 실행이었을 것이다.
사마천은 [태사공자서]에 자신의 여행기를 간략히 기록해 두었다.
"스무 살이 되어 남쪽으로 강(江), 회(淮)를 두루 다녔고, 회계산(淮稽山)에 올라보고 우혈(禹穴)을 탐방하였으며......공자의 유풍(遺風)을 보았다..... 양(梁)과 초(楚)를 지나 돌아왔다."
이 장대한 역정은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회음(淮陰)을 답사하여 [회음후열전]을 지었고, 설현(薛縣)에서 자료를 채집하여 [맹산군열전]을 썼으며, 주요 인물들의 옛집을 방문하여 많은 일화를 들을 수가 있어 [번역등관열전]을 기록할 수 있었다.
장안으로 돌아온 지 얼마 뒤 사마천은 낭중(郎仲)에 임명되어 벼슬살이가 시작되었다.
이 무렵 같은 직위의 동료인 이릉(李陵)을 만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뒷날 사마천의 운명에 커다란 운명을 미친 인물이다.
나이 서른 무렵에 사마천은 황제를 수행하여 산천에 제사하고 전국 각지를 유람할 수 있는 기회가 또 한번 주어졌다. 이 여행으로 사마천은 무제가 실시한 대외정책의 실상의 일단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지방에 대한 견문은 뒷날 [화식열전]을 쓸 때 크게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사마천은 부친이 사망할 때까지 중국의 거의 전 지역을 견문할 수 있었다. 한무제가 태산에서 봉선의식을 거행하던 중 부친이 병을 얻었다. 낙양으로 돌아 온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들었다.
..내가 죽거든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거라. 태사가 되면 내가 저술하고자 했던 것을 잊지 말아라...
사마담은 자신이 태사령으로서 완수하고자 했던 사기의 저술을 자기를 대신해 끝마치도록 아들에게 부탁하였던 것이다. 무제 원봉 3년인 기원전 108년, 사마천은 아버지의 직을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37세가 되던 해였다.
사마천은 그 후 역법개정을 맡게 되었고 이 역법개정을 계기로 본격적인 사기저술에 착수하고 작업은 기원전 99년 [이릉의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6년간 계속되었다. 사기의 저술은 기원전 104년, 사마천이 그의 나이 42세에 시작되었다.
뜻하지 않은 이릉사건으로 이릉을 변호한 것이 무제의 미움을 사 황제를 무고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마흔일곱 살이었다.
당시 사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돈 오십만 냥으로 감형 받는 것과 궁형을 받아 환관이 되는 것이었다.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사마천은 부친의 유언을 따르고 다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궁형을 자청하여 환관이 되었다. 부형(腐刑)이라 불리는 궁형은 사람이 당하는 모욕 가운데 가장 심한 형벌이었다.
궁형을 받은 후 삼년 째 되던 해에 연호가 바뀌어(太始元年) 대 사면령으로 옥중에서 석방된 사마천은 중서령에 임명되었고 사기의 집필을 계속할 수 있었다. 궁형의 치욕을 견디며 사기를 완성하여 후세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 치욕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일념으로 발분하여 사기를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가 거의 완성될 무렵인 기원전 91년, 그의 나이 55세에 친구인 임안(任安)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착잡한 심정으로 서한(報任少卿書)을 보내 지난날 자신이 옥에 갇히고 사기를 저술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은 심경을 고백하였는데, 편지 내용 중 有怨言, 下獄死라는 대목이 무제의 심기를 건드려 처형당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 처형당했는지,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실치 않다. 사기 완성 후 몇 년 더 살다가 딸을 출가시키고 나서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Ⅱ 한무제 시대
진(秦)에 이어지는 중국의 통일왕조(BC 202∼AD220).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8~22)나라에 의하여 잠시의 중단이 있어, 그 이전에 장안(長安)을 수도로 하였던 한을 전한(前漢:西漢), 낙양(洛陽)에 재건된 한을 후한(後漢:東漢)이라고 한다.
한왕조의 창시자는 진말(秦末)의 반란 지도자의 한 사람인 유방(劉邦:高祖)이다. BC 206년 진이 타도되자 반란의 통일적 지도자 항우(項羽)는 그를 한왕(漢王)으로 봉하였으나, BC 202년에 항우를 타도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라 장안을 수도로 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왕조는 기본적으로는 진(秦)나라의 국가체제를 계승하여 전국통치의 조직은 군현제를 기본으로 하였다. 그러나 한왕조의 수립은 진말의 난 이래의 여러 집단의 지도자와 유방 직속 부하들의 협력에 의한 것이어서, 유방은 이들 공신(功臣)과 그의 일족을 제후왕·열후(列侯)로서 각지에 봉건하였다. 한(漢)의 군현과 봉건 병치제도를 군국제(郡國制)라고 부르는데, 유방의 치세 중에 공신인 왕들은 모두 멸망하고, 왕은 결국 유씨 일족(劉氏一族) 출신자에 한하는 것이 한왕조의 정제(定制)가 되었다.
한편, 무제 시대에 한제국은 대외적으로 크게 영토를 확대하였다. 북방의 흉노에 대하여 초기에는 유화정책을 취했으나, 여러 차례 원정을 실시하여 그 세력을 고비사막 이북으로 물리쳤다. 동방으로는 한반도에까지 진출하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고, 또 남방으로도 출병하여 한나라의 영토는 안남에까지 미치어, 일남군(日南郡) 등의 9개 군을 설치하였다. 서방에서는 장건(張騫)의 원정을 계기로 서역(西域) 제국을 복속시키고, 중국과 서방과의 교통로인 이른바 '실크로드'가 개척되었다.
이와 같이 무제의 치세는 사상 최대의 대제국이 건설된 전성기였으나, 반면에 제국(帝國)의 모순이 표면화하기도 하였다. 특히 대규모의 원정, 토목 사업, 궁정의 사치 등으로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하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증세(增稅), 화폐제도의 개선, 소금·철·술의 전매제, 균수법(均輸法)·평준법(平準法)에 의한 상업관영(商業官營) 등의 재정정책이 취하여졌다. 이 정책은 재정의 불균형을 구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주로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어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었다.
따라서 소제(昭帝)·선제(宣帝) 시대에는 지방통치를 중심으로 한 내정의 안정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 무제의 장기에 걸친 독재적 통치기간 중에 3공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부 기관이 권력을 잡게 되고, 황제 측근자들이 정치의 실권을 잡는 경향이 생겼다. 특히 원제(元帝) 이후는 외척(外戚)·환관(宦官) 등 근신(近臣)이 항상 국정의 실권을 잡게 되어 궁정정치는 급속히 부패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외척(外戚) 왕망(王莽)이 8년에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하고 한왕조는 일단 멸망하였다. 왕망은《주례(周禮)》에 기록된 이상화된 주나라의 여러 제도를 현실화하려는 공상적이며 졸속한 개혁을 단행하였으므로, 정치적·사회적 모순이 폭발하고, ‘적미’등의 농민집단과 호족(豪族) 세력의 반란에 의하여 재위 15년 만인 22년에 멸망하였다.
【사회·경제】
한나라 때에 사회의 기초적인 구성원은 농민이었다. 그들은 오구가(五口家:다섯 식구)와 같이 소형의 가부장적인 가족을 구성하여 자영농업을 영위하는 소 농민이었으며, 군현제를 통하여 국가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그 거주구(區)는 군현제하의 이(里)이지만, 농민은 원칙적으로 모두 국가로부터 작위(爵位)를 받아서 이내(里內)의 신분질서를 형성하고, 그것을 매개로 하여 황제 지배하의 국가질서 내에 조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는 각종 조세·요역 등의 부담의 중압으로 농민층의 빈곤화가 진척되고, 이와는 반대로 호족층은 더욱 세력이 신장되어 대토지 소유자가 되고, 농민은 소작인이나 노비로 전락하여 그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상인·고리대금업자의 활약으로 이 농민층은 더욱 몰락하게 되었다. 상품생산과 판매에 종사하는 상공업자는 도시의 시(市:市場)라고 부르는 상업구역에서 영업하며 시적(市籍)에 등기되어 시조를 부담하고, 법률적으로는 농민보다 한 단계 낮은 신분적인 지위에 있었다.
최하층의 신분으로서는 관유(官有)·사유(私有)의 노비가 있어 이들은 매매의 대상이 되었다. 노비의 일부는 수공업 등에 사역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한대(漢代)의 많은 생산부문에서 노비가 직접적인 생산자의 주요부분을 차지한 경우는 적었던 것 같으며, 대부분은 가내의 잡용이나 기타 비생산부문에 사용되었다.
【문화】
한나라 문화는 춘추전국시대에 형성된 각 분야의 문화를 보다 발전시키는 동시에, 그 후 중국의 전통적 문화의 기본적 양식으로 형성된 것이 많아, 한나라가 중국문화사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매우 중요하다.
전한시대의 학자는 옛 경문(經文)의 복원(復原), 정본(定本)의 작성에 노력하여, 경전을 금문(今文:漢代의 書體)·고문(古文:先秦時代의 옛 書體)의 2계통의 경서(經書)로 성립시켰다. 후한시대에는 마융(馬融)·정현(鄭玄) 등의 학자에 의하여, 고전의 주석에 전념하는 훈고학(訓學)이 발전하였다. 사학(史學)에서 한대는 명확한 역사적 의식으로 편집된 사서(史書)가 출현했던 시대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는 그 대표작으로서, 이후의 중국 정사(正史)의 기본형식이 확립되었다. 과학적 지식의 분야에서도 진보와 그 체계화가 이루어졌는데, 유흠(劉歆)의 《삼통력(三統曆)》은 중국의 천문학·역법(曆法)의 틀[型]을 만들었으며, 수학의 저작으로서 《구장산술(九章算術)》, 의학을 체계화한 《상한론(傷寒論)》《황제내경(黃帝內經)》 등은 특히 유명하다. 문학 분야에서는 《사기(史記)》와 《한서(漢書)》가 한대 산문학(散文學)의 대표적인 거작이다. 운문학(韻文學)에서는 전국시대에 비롯된 초사(楚辭) 등의 흐름을 채택한 사부(辭賦)와, 궁정문학으로서 악부(樂府)의 양식이 나타났다.
Ⅲ 편년체, 기전체, 기사본말체(編年體, 紀傳體, 紀事本末體)
[편년체(編年體)]
사실(史實)을 연(年), 월(月), 일(日) 순서로 기록하는 서술 방식.
공자(孔子)의 "춘추(春秋)"가 그 효시이다.
송(宋) 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은 대표적 편년체 역사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국통감(東國通鑑)", "조선 왕조 실록(朝鮮王朝實綠)" 등이 편년체 역사서이다. (~절요, ~통감, ~실록은 모두 편년체)
[기전체(紀傳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비롯되었다.
사기는 본기(本記 황제의 업적), 세가(世家 제후의 전기), 서(書 제도 문물, 후대에는 지 志로 바뀜), 표(表연표), 열전(列傳 각 분야의 저명한 개인의 전기)으로 구성되었다.
이중 본기(紀)와 열전(傳)만 있으면 기전체의 기본 요건은 갖추게 된다. 따라서 기전체는 인물 중심의 종합적 역사 서술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 바 정사(正史)는 반드시 기전체로 편찬되어야 했으며, 이에 따라 기전체를 정사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사기", "한서(漢書)" 등 25사가 기전체로 편찬된 정사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삼국사기"와 "고려사"가 이에 해당한다.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사건의 명칭을 제목으로 내걸고 그 사건과 관련된 기사를 모두 모아 그 사건의 발단과 결말을 기술하는 방법이다.
편년체가 사건 발생 연대순 기록이라면, 기사본말체는 사건 경과 중심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남송(南宋)의 원추(袁樞)가 쓴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이 그 최초의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조선후기의 이긍익(李肯翊)이 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 있다.
Ⅳ 사기 열전 - 인간학의 백과사전
사기(史記)는 중국 漢나라 무제 때 역사가 사마천이 편찬한 책이다. 태사령(太史令)인 사마천이 적은 사서는 처음에「太史公書」(혹은 太史公記)로 불리었으나 위진(魏晋)시대에 와서「사기」라고 불리게 되었다.(삼국지위지의 왕숙(王肅)전기에서 사기라는 명칭이 나타나고 있다)
사기(史記)는 중국 최초 문명시대인 황제(黃帝)시대에서 전한 무제(前漢 武帝_시기까지 2,500 여년의 역사를 서술한 130권의 방대한 역사서이다. 사기가 씌어지고 난 후 2천년 동안 중국의 모든 역사서 중에서 가장 널리 읽혔던 책 중의 하나였다. 그 체제는 후사에 정사(正史)의 모범이 되어 왔다.
'사기(史記)'는 한편의 운대한 통사(通史)이자 세계사(世界史)이며, 동시에 종합사인 것이다. 이 때문에 사기(史記)는 시대의 변화와 여러 지역간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진행된 인간의 삶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제시함으로써 역사의 인과적인 이해뿐 아니라 사건과 현상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보편적인 원리의 문에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사기는「本記」「表」「書」「世家」「列傳」의 전 130권으로 되어 있다. 사기는 모두 52만 6천여자로 이루어진 방대한 역사서다.
· 본기 - 30권 역대 왕조의 변천을 서술한 연대기
· 표 - 10권 각 시대에 대한 역사
· 서 - 8권 국가의 제제도의 연혁과 변천을 기록
· 세가 - 30권 봉건 제후의 연대기
· 열전 - 70권 개인의 전기
열전(列傳)의 사전적 의미는 敍列人臣事跡傳於後世(인신의 사적을 서술하고 열거하여 후세에 전한다)이다. <사기>하면 열전을 떠올릴 정도로 사기의 대명사로 자리 매김 되어있고 분량도 제일 많다. 사마천의 명성을 빛내게 한 불후의 역작이 바로 열전이다.
열전은 시간적으로 첫 편에 나오는 백이와 숙제로부터 한무제까지 각양 각층의 인물 군이 망라되어 있다. 귀족, 관료, 장군, 유세가, 자객, 토호, 은자(隱者)와 군왕의 총애를 받았던 여인에 관한 열전도 있다. 뿐만 아니라 흉노, 조선 등 중국을 둘러싼 이민족의 풍속과 교화도 포함되어 있어 중국전체의 광범위한 역사를 다루고 있다.
사마천은 열전의 전(傳)이 의미하는 전기(傳記)가 생애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통상적인 의미와는 달리, 해당인물에 대한 특징적인 면모를 골라 기록했다. 이는 자신이 처한 특수한 입장에서 해당인물을 선정하고 자신의 역사관과 가치관에 따라 평가하고 해석한 독특한 인식에 기인 된 것이기도 하다.
그 가치판단과 인식의 기준은 도덕성과 선(善) 그리고 의(義)다. 그는 백이열전을 열전 서두에 올려놓고 자신의 논설과 심경을 대변하고 있다. 무릇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 것이 하늘의 도리이고 이치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또 「하늘의 뜻은 편애하는 일 없이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에 선다」(天道無親, 常與善人) 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하늘이 악한 사람 편에 서는 일이 많아, 과연 하늘의 도리라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天道是耶,非耶)을 묻고 있다.
이는 옳은 일 하려다 궁형까지 받은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하늘에게 묻고 이를 어찌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그는 백이와 숙제가 세상에 알려진 것도 공자에 의해서이고 안연이 공자의 칭찬을 받아 두드러진 것처럼 자신도 구차한 목숨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 있는 것은 세상에 사기를 내놓기 위함이고 사기로 말미암아 기구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놓아 평가받고 싶은 심정을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기는 또한 문학적으로도 빼어난 작품이며 같은 문장이라도 읽는 사람의 소양과 처한 상황에 따라 달리 나타나고 해석되는 고전이다. 뿐만 아니라 사기는 아무리 읽어도 싫증나지 아니하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하는 삶과 지혜의 보고(寶庫)이고 철학서이기도 하다. 총 130권 중 70권이 개인의 구체적인 성공과 실패를 추적한 개인전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만큼 사마천은 역사를 개인의 능동적인 활동의 집적으로 보았고, 개인의 禍福과 역사의 흥망성쇠를 개인의 도덕과 능력, 이것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능동적인 노력여하의 결과로 설명한다.
사기는 격동기에 산 인간과 온갖 인간관계를 설명한 책으로서, 그 속에 인간에 관한 모든 자료가 들어 있어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고 거울삼아 사는 방법과 지혜를 그 시대 인물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
Ⅴ. 인상 깊은 이야기
출전 : 관중열전
춘추 시대 초엽, 제나라에 관중(?∼B.C. 645)과 포숙아라는 두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죽마고우로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관중이 공자 규의 측근으로, 포숙아가 규의 이복동생인 소백의 측근으로 있을 때 공자의 아버지 양공이 사촌 동생 공손무지에게 시해되자 관중과 포숙아는 각각 공자와 함께 이웃 노나라와 거나라로 망명했다.
이듬해 공손무지가 살해되자 두 공자는 군위를 다투어 귀국을 서둘렀고 관중과 포숙아는 본의 아니게 정적이 되었다. 관중은 한때 소백을 암살하려 했으나 그가 먼저 귀국하여 환공이라 일컫고 노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아울러 관중의 압송(押送)을 요구했다. 환공이 압송된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제 한 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천하의 패자가 되시려면 관중을 기용하시오소서."
도량이 넓고 식견이 높은 환공은 신뢰하는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로 중용하고 정사를 맡겼다.
이윽고 재상이 된 관중은 과연 대정치가다운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倉弟實則 知禮節(창름실즉 지예절)]'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衣食足則 知榮辱(의식족즉 지영욕)]'고 한 관중의 유명한 정치철학이 말해 주듯, 그는 국민 경제의 안정에 입각한 덕본주의(德本主義)의 선정을 베풀어 마침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春秋)의 첫 패자로 군림케 하였다.
이 같은 정치적인 성공은 환공의 관용과 관중의 재능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이긴 하지만 그 출발점은 역시 관중에 대한 포숙아의 변함없는 우정에 있었다.
그래서 관중은 훗날 포숙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젊어서 포숙아와 장사를 할 때 늘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차지했었으나 그는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용렬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일에는 성패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벼슬길에 나갔다가는 물러나곤 했었지만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운이 따르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싸움터에서도 도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가 계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를 낳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이다 [生我者父母 知我者鮑淑牙].'"
출전: 열전 제76권 [평원군우경열전]
중국 전국시대 말인 B.C. 300년무렵부터 B.C. 250년 경까지는 진나라가 7웅 중 나머지 6국을 압도해 갔던 시기로, 이 시대는 춘추시대의 도시국가에서 전국시대의 영토국가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군주제에 의해 씨족제가 해체되면서 귀족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하층귀족인 선비들이 무수히 생겨났다.
이들은 대부분 지식인층으로 정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저마다 통치기술책을 가지고 패자가 되려는 각국의 군주들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이들을 유세객 또는 식객이라 불리었는데 군주에게 직접 접근이 용이치 않자 왕족이나 재상 등 권세가집에 머물면서 군주에게 추천되기를 바라며 정치적 야망을 꿈꾸던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영향력 있고 걸출했던 인물이 계명구도로 유명한 제나라의 맹산군, 조나라의 평원군,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으로 이들을 전국 4공자라 부른다. 이들은 대개 3천명이 넘는 식객을 거느렸다하며 이 식객들로부터 갖가지 술수와 지략, 사건들이 엮어져 나왔다.
평원군은 조나라 공자출신으로 이름은 조승이며 손님 접대하기를 좋아해 항상 그의 문전에는 수천 명의 식객이 들끓었다. 진나라에서 조나라 도읍인 한단을 공격해오자 조나라 왕은 평원군을 초나라에 보내어 원군을 청하도록 했다. 이에 평원군은 식객 중에 학문도 깊고 용기 있는 20명을 선발해 수행케 하기로 하여 그중 19명을 선발하였으나 나머지 한명을 아무리해도 뽑을 수가 없었다.
‘나의 문하에 식객들이 수천 명 있는데 인재들이 이다지도 없단 말인가?’
평원군이 적이 실망하고 있을 때 식객 중에 모수라는 사람이 평원군에게로 나아가 말했다.
“추천할 사람이 꼭 한명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모수가 자신을 추천하기에 기가 막힌 평원군은 모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대가 내 집에 온 지 얼마나 되었소?”
“3년입니다만…”
그러자 평원군은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무릇 현명한 자는 마치 주머니속의 송곳과 같아서 송곳 끝이 주머니를 뚫고 바깥으로 비어져 나오듯 금방 세상에 알려지는 법이오.
(夫賢士之處世也, 臂若錐之處囊中, 其末立見)
그런데 그대는 내 집에 3년간이나 지냈는데도 주위사람들이 당신을 한번도 칭송하는 소리를 들어보질 못했소. 이는 곧 그대가 능력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러니 이번 수행 길에 같이 갈 수가 없소.“
그러자 모수도 지지 않고 대답하였다.
“주인님께서 드신 비유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는 송곳이긴 하나 지금까지 주머니 안에 들어 있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일찍부터 주머니 속에 있었더라면 끝을 드러내는데 그치지 않고 아예 자루까지 주머니를 뚫고 나왔을 것입니다. 제가 청하는 것은 오늘에야 비로소 저를 주머니 속에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臣乃今日請處囊中耳)”
평원군은 할 수 없이 나머지 한사람을 모수로 채워 넣고 초나라로 떠났다. 처음 선발된 19명이 모수를 경멸했으나 초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초에서 취할 행동들을 의논하는 과정에서 모수의 지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에서 평원군이 합종의 필요성을 설득하였으나 진의 보복이 두려워 머뭇거리는 초의 왕 앞으로 모수가 달려가 특이한 방법으로 초왕을 굴복시켜 합종을 성사시켰으며 평원군은 그 후로 모수를 상객으로 우대하였다.
출전: 열전 제60권 급암정당시열전 [汲鄭列傳]
전한 7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 급암과 정당시라는 두 신하가 있었다. 급암은 거만하고 예의가 없어 사람을 앞에 두고 공격하여 허물을 용서하지 않았으나 깨끗하고 단정하여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한 자리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쫓겨났다.
정당시는 예의가 비르고 덕망 있는 사람들을 사모하여 손님을 대할 때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예로 맞이하였으며 청렴하여 항상 가난 속에 살았다. 이들 두 사람은 각기 현직에 있을 때에는 방문객이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나 중간에 파면되어 집은 가난하고 빈객들은 서서히 떨어져 나갔다.
사마천(司馬遷)은 말한다.
급암과 정당시 같은 현명한 사람도 세력이 있을 때는 빈객(賓客)이 열 배로 늘어나지만 세력이 없으면 그렇지 못하다. 하물며 보통사람이야? 有勢則賓客十倍, 無勢則否, 況衆人乎!
또 하규의 적공(翟公)은 이러했다. 처음에 그가 정위(廷尉)가 되자 빈객이 문 앞에 가득 찼지만, 면직되자 빈객은 문 밖에 참새그물을 쳐도 될 정도[門外可設雀羅]였다. 적공이 다시 정위가 되자 빈객들이 몰려들려고 하였다 그래서 적공은 대문에 이렇게 써 붙였다.
한 번 죽고 한 번 삶으로서 사귀는 정을 알고
[一死一生 卽知交情(일사일생 즉지교정)]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유함으로서 사귀는 태도를 알며
[一貧一富 卽知交態(일빈일부 즉지교태)]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해짐으로서 사귀는 정을 알게 된다.
[一貴一賤 卽見交情(일귀일천 즉현교정)]
출전: 열전 제15권 [맹산군열전]
전국 시대 중엽,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은 왕족으로서 재상을 지낸 정곽군(靖郭君)의 40여 자녀 중 서자로 태어났으나 정곽공은 자질이 뛰어난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 이윽고 설(薛) 땅의 영주가 된 맹상군은 선정을 베푸는 한편 널리 인재를 모음으로써 천하에 명성을 떨쳤다. 수천 명에 이르는 그의 식객 중에는 문무지사(文武之士)는 물론 '구도'(拘盜:밤에 개가죽을 둘러쓰고 인가에 숨어들어 도둑질하는 좀도둑을 말함)에 능한 자와 닭 울음소리[鷄鳴]을 잘 내는 자까지 있었다.
이 무렵(B.C.298), 맹상군은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으로부터 재상 취임 요청을 받았다. 내키지 않았으나 나라를 위해 수락했다. 그는 곧 식객 중에서 엄선한 몇 사람만 데리고 진나라의 도읍 함양(咸陽)에 도착하여 소양왕을 알현하고 값비싼 호백구(狐白(求밑에衣):狐(求밑에衣))를 예물로 진상했다. 소양왕이 맹상군을 재상으로 기용하려 하자 중신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전하, 제나라의 왕족을 재상으로 중용하심은 진나라를 위한 일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그래서 약속은 깨졌다. 소양왕은 맹상군을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원한을 품고 복수를 꾀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은밀히 죽여 버리기로 했다. 이를 눈치 챈 맹상군은 궁리 끝에 소양왕의 총희(寵姬)에게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그녀는 엉뚱한 요구를 했다.
"내게도 진상한 것과 똑같은 호백구(흰 여우 가죽옷)를 주시면 힘써 보지요."
당장 어디서 그 귀한 호백구를 구한단 말인가. 맹상군은 맥이 빠졌다. 이 사실을 안 '그도'가 그날 밤 궁중에 잠입해서 전날 진상한 그 호백구를 감쪽같이 훔쳐내어 총희에게 주었다. 소양왕은 총희의 간청에 못 이겨 맹상군의 귀국을 허락했다.
맹상군은 일행을 거느리고 서둘러 국경인 함곡관(函谷關)으로 향했다. 한편 소양왕은 맹상군을 놓아 준 것을 크게 후회하고 추격병을 급파했다. 한밤중에 함곡관에 닿은 맹상군 일행은 거기서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첫닭이 울 때까지 관문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일행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계명'이 인가(人家)쪽으로 사라지자 첫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동네 닭들이 울기 시작했다. 잠이 덜 깬 병졸들이 눈을 비비며 관문을 열자 일행은 그 문을 나와 말[馬]에 채찍을 가하여 쏜살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추격병이 관문에 닿은 것은 그 직후였다고 한다.
출전: 여불위열전
전국시대 말, 한(韓)나라의 큰 장사꾼인 여불위(呂不韋:?∼B.C.235)는 무역을 하러 조(趙)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에 갔다가 우연히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의 손자인 자초(子楚)가 볼모로서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 이 장사꾼의 머리에는 기발한 영감이 번뜩였다.
'이것이야말로 기화로다. 사 두면 훗날 큰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여불위는 즉시 황폐한 삼간 초가에 어렵게 살아가는 자초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귀공의 부군이신 안국군(安國君)께서 멀지 않아 소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실 것입니다. 하지만 정빈(正嬪)인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는 소생이 없습니다. 그러면 귀공을 포함하여 20명의 서출(庶出) 왕자 중에서 누구를 태자로 세울까요? 솔직히 말해서 귀공은 결코 유리한 입장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그렇소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오?"
"걱정 마십시오. 소생에게는 천금(千金)이 있습니다. 그 돈으로 우선 화양부인에게 선물을 하여 환심을 사고, 또 널리 인재를 모으십시오. 소생은 귀공의 귀국을 위해 조나라의 고관들에게 손을 쓰겠습니다. 그리로 귀공과 함께 진나라로 가서 태자로 책봉되도록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만약 일이 성사되면 그대와 함께 진나라를 다스리도록 하겠소."
여불위는 자기 자식을 회임한 조희(趙姬)라는 애첩까지 자초에게 양보하여 그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뒤 재력과 능변(能辯)으로 자초를 태자로 세우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자초가 왕위에 오르자[장양왕(莊襄王)] 그는 재상이 되었으며, 조희가 낳은 아들 정(政)은 훗날 시황제(始皇帝)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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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PR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