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칸(젝 웨더포드)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30. 00:32
1. 책 소개
책의 목차
머리말 - 사라진 정복자
1부 - 초원의 공포정치:1162~1206
1장. 핏덩어리
2장. 세 개의 강
3장. 칸들의 전쟁
2부 - 몽골 세계전쟁:1211~1261
4장. 황금 칸에게 침을 뱉다
5장. 슐탄과 칸의 대결
6장. 유럽 원정대
7장. 왕비들의 싸움
3부 - 세계 인식의 대전환:1262~1962
8장. 쿠발라이 칸의 새로운 몽골 제국
9장. 팍스 몽골리카
10장. 환상의 제국
맺음말 - 영원한 푸른 하늘, 칭기스 칸
미주
용어해설
참고문헌
감사의 말
역자 후기
찾아보기
저자 : 잭 웨더포드 지음 / 정영목 옮김 출판사 : 사계절 출판사
<자료 출처 - 네이버>
2. 작가 소개
- 잭 웨더포드 ( Jeck Weatherford )
미국 미네소타 주의 매칼래스터(Macalester) 대학교 인류학과 교수이며, The History of Money,Savages and Civilization, Native Roots, Indian Givers 등을 지었다.
부족민 연구 전문가인 저자는 중국, 중동, 유럽을 연결하는 비단길과 세계 교역의 역사에서부족민이 차지하는 역할을 연구하던 중, 칭기스 칸과 몽골 제국이 동서 문명 교류에 끼친 영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 책을 위해 8년 동안 몽골 땅을 답사했고, 베이징의 자금성에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스탄불의 토프카피 궁전에 이르는 길을 다니며 고고학적 발굴 현장과 도서관을 찾아보고 학자들과 토론을 벌였다.
1998년, 서구 학자로는 최초로 칭기스 칸의 고향 부르칸 칼둔을 방문하면서, 그의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800년 동안 방문이 금지되었던 구역에 대한 현지답사를 통해, 그동안 풀지 못한 의문들을 풀 수 있었다. 800년 전의 칭기스 칸을 좀더 생생히 체험하기 위해 몽골 학자들과 함께 계절을 바꾸어 그의 고향을 방문했으며, 칭기스 칸이 유목민 생활을 했음을 감안하여 그의 이동 경로를 추측해‘이동의 고고학’탐사를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워싱턴 포스트」는 필자의 피와 땀이 담긴 이 책이 호머의『일리아드』에 비견된다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 옮긴이 정영목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화여대 통번 역대학원 번역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 신의 가면:서양신화’ ‘마르크스평전’ ‘저재 결혼 시키기’ ‘파라오의 역사’ ‘호치민’ ‘트로이 전쟁’등이 있다.
3. 작품의 시대 배경
작품에 등장하는 시대 배경은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중세시대에 해당 한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거의 동(東)아시아 전역을 지배한 몽골족의 왕국(1271∼1368). 칭기즈칸에 의해 구축된 몽골제국(蒙古帝國)은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초원에 정치적 기지를 두고, 대륙남방의 농경지대를 그 속령(屬領)으로 삼아 지배한 유목국가(遊牧國家)로, 속령으로부터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기적인 약탈로써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였다. 그러나 유목제왕(遊牧帝王)과 그를 둘러싼 유목봉건영주 층(遊牧封建領主層), 또는 유목민 지배층과 농경민 피지배층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 발생하여 제국은 끊임없이 동요되었던 시대이다.
이 시기 유럽은 십자군원정이 이루어지던 때이다. 십자군 원정은 1096년부터 1272년까지 일어났으며 십자군의 발원은 유럽이지만 전쟁의 장소가 중동 지역이므로 책에서도 잠깐 언급된다. 셀주크트루크가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되고 기독교전파로 개인 또는 단체가 성지 순례를 하였는데 회교인의 방해가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로인해 성도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하여 8차에 걸쳐 감행한 대 원정이다.
4. 등장인물과 용어해설
* 주요 등장 인물
칭기스칸 - 몽골 부족을 통일하고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하며 대몽골 제국을 형성한 테무진
부르테 - 테무진의 첫 부인이자 가장 중요한 부인
구육 - 몽골 제국의 대 칸(1246~1248) 우구데이의 아들
벡테르 - 테무진의 배다른 형제, 테무진에게 죽음을 당한 예수게이와 소치겔의 아들
우구데이 - 칭기스 칸과 부르테의 셋째아들
소르칵타니 - 톨루이의 부인이자 뭉케, 쿠빌라이, 훌레구, 아릭 부케의 어머니
아릭 부케 - 톨루이의 막내아들, 대칸 자리를 둘러싼 경쟁에서 형 쿠빌라이에게 패한다.
옷치긴 - 가족의 막내아들. 화로의 왕자.
옹칸 - 케레이트 부족의 통치자.
자무카 - 칭기스 칸의 안다.
카사르 - 칭기스 칸의 바로 아래 동생 장사인데 다 명사수였다.
쿠빌라이칸 - 칭기스 칸의 손자로 대 칸을 자처했다 중국에 원 왕조를 세웠다.
뭉케 칸 - 톨루이의 장남.1251부터 1259년까지 대 칸.
바투 - 주치의 아들로 1227년 러시아의 칸이 되어 1255년에 사망
소치겔 - 예수게이에게서 벡테르와 벨구테이를 낳았다.
주치 - 칭기스 칸과 부르테의 장남. 그러나 형제들에게 적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타이치우드 - 테무진 가족의 가까운 친척들이지만 테무진의 아버지가 죽자 이들을 버렸다.
텝 텡그리- 칭기스 칸 가족 내에서 불화를 일으킨 샤먼으로 테무게에게 죽음을 당한다.
투레게네 - 우구데이 칸의 부인. 1241~1246년 까지 몽골 제국의 섭정이었다.
후엘룬 - 칭기스 칸의 어머니. 메르키트족 칠레두의 부인이었으나 예수게이에게 납치당함.
훌레구 - 바그다드의 정복자. 페르시아의 일 칸국의 건립자이다.
* 용어 해설
게르 - 격자 틀 위에 모전을 덮어 만든 이동식 주택
델 - 몽골의 전통 겉옷
부르칸 갈둔 - 신의 산, 헨티 산맥에 있다.
안다 - 의형제. 테무진과 자무카는 안다였다.
구르칸 - 최고의 칸을 뜻하는 고대의 칭호
카라코룸 - 하르호린으로 알려져 있는 이곳은 몽골 제국의 두 번째 수도
쿠릴타이 - 공식 회의 , 보통선거를 하거나 전쟁등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 소집한다.
메르키트 - 현제 몽골과 시베리아 경계에 있는 셀렝게 강변의 부족
나이만 - 몽골 서부의 부족
위구르 - 현재 중국 서부에 살고 있는 투르크족
자다란 씨족 - 보돈 차르가 임신한 부인을 납치한 뒤 태어난 첫째아들의 후보
주르첸 - 중국 북부를 다스린 만주족 황금칸이 다스렸다.
5. 내용 소개
머리말 : 사라진 정복자
칭기스 칸은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워싱턴 포스트 -1989'
작가는 머리말에서「칭기스 칸의 유산」, 「몽고 초원에서 사라지다」, 「칭기스 칸과 세계사」, 「칭기스 칸을 둘러싼 편견」, 「몽골 초원에서 칭기스 칸을 만나다」라는 5개의 소제목으로 이 책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간략하게 언급한다. 또한 이 책은 필자와 동행한 연구팀이 실제 답사와 조사를 통해 쓰여 진 책이며 필자는 책의 내용이 칭기스 칸을 이해하고 그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1부 초원의 공포정치 (1162-1206)
「핏 덩어리」 그의 눈에는 불이 있고 얼굴에는 빛이 있다. '몽골비사'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정복자가 될 운명을 타고난 소년의 이야기는 몽골군이 1220년 부하라를 정복하기60년 전 유라시아의 광대한 내륙 지방의 가장 외딴 지역에서 시작된다. 몽골의 헨티 산맥이라는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약 3000m 정도에 불과한 산맥이 있다. 이곳은 아름다운 풍경을 가졌으나 날씨가 급변하고 건조한 곳이다. 아시아인 역법에 따르면 말의해인 1162년 봄 이 지역의 오논 강 옆에서 훗날 칭기스 칸이라고 알려지게 될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칭기스 칸의 어머니 후엘룬은 메르키트 부족의 칠두레라는 젊은 전사의 부인이었으나 사냥꾼들에게 납치가 되었다. 후엘룬을 납치한 남자는 미래 칭기스 칸의 아버지가 될 예수게이였다. 이곳 인간의 역사는 그가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끊임없이 갈등과 곤경으로 얼룩져 있었다.
예수게이는 후엘룬을 납치한 직후 타타르와 싸우러 나갔다가 테무진 우게라는 이름의 전사를 죽였다. 아들이 태어난 직 후 돌아온 예수게이는 아이의 이름을 테무진 이라고 지었다. 이들 유목민에게 이웃과 교역을 하고 싸우는 것은 삶을 순환에서 떼어낼 수 없는 한 부분이었다. 봄에는 새로 태어난 가축을 돌보고 여름에는 목초지를 찾고 가을에는 고기와 유제품을 말리고 겨울에는 사냥을 했다.
몽골족 에게 싸움이란 진짜 전쟁이나 지속적인 분쟁이라기보다도 생계를 위한 일상적인 약탈에 가까웠다. 같은 몽골부족이라도 남쪽 부족이 북쪽 부족보다 비단길의 교역도시들이 가까워 물자가 더 많았고, 무기도 더 좋았다. 따라서 그들을 이기려면 북쪽사람들은 더 빨리 움직이고 더 머리를 써야 하고 더 열심히 싸워야 했다. 테무진이 태어난 북방은 날씨도 더 나쁘고 풀도 부족하고 사람들도 더 거칠고 폭력적인 곳이었다.
테무진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몇 가지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아버지가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번은 다른 야영지로 이동할 때, 테무진을 남겨두고 가기도 했다. 어쩌면 예수게이는 첫 부인 소치겔에게서 낳은 아들 벡테르와 테무진 사이에서 터져 나올 갈등을 예감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를 집에서 내보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예수게이는 사돈 될 사람에게 선물로 줄 것이 말 한 마리밖에 없었기에 테무진을 몇 년 동안 일꾼으로 쓰고 그 대가로 딸을 내줄 가족을 찾아 테무진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그때 테무진의 나이는 9세에 불과했다. 신부를 찾아 가던 중 어느 집에 묵었는데 그 집에 부르테라는 딸이 있었고 머무르는 동안 둘이 좋아하는 것 같아 예수게이는 둘을 결혼시키기로 한다.
테무진을 남겨두고 돌아오는 길에 예수게이는 우연히 과거 자신이 공격했던 타타르족이 잔치를 하던 야영지를 지나게 되고 그 곳에서 독을 먹고 자신의 야영지로 돌아와 죽게 된다. 테무진이 임종을 보기위해 돌아왔을 때 예수게이는 이미 죽어있었다. 당시 이 가족은 타이치우드 씨족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타이치우드는 싸움과 사냥을 도와줄 예수게이가 사라지자 두 과부와 어린 일곱 자식이 쓸데가 없다고 판단했다. 오논 강의 가혹한 환경에서 아홉 명의 입이 몹시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결국 후엘룬과 아이들은 가족 외부로 밀려나게 되었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후엘룬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모자를 단단히 눌러쓰고 치마를 바짝 여미고 밤낮없이 먹거리를 찾아 강의 상, 하류로 뛰어 다녔다고 한다. 이들은 기아선상에서 거의 짐승처럼 살아갔다. 모두들 거친 삶을 살아가는 땅이었지만 이들은 거기에서도 초원생활의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아이에게 깊은 상처를 준 이 초기의 사건들이 그의 성격을 형성하는데 나아가 그가 권좌에 오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테무진은 그의 가족과 함께 비극을 견디며 초원지대의 엄격한 카스트 구조에 도전하고 자신의 운명을 주도하고 가족이나 부족보다는 신임하는 동료와 동맹을 맺어 이것을 일차적인 지지기반으로 삼겠다는 강한 결의를 굳히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테무진은 어린시절 주로 가족의 생존을 위해 있을 했다. 하지만 배다른 형 벡테르가 권위력으로 못살게 굴고 테무진의 사냥감을 가로채는 일들이 벌어졌다. 두 소년이사춘기에 이르면서 형제간의 경쟁은 더 심해졌다. 후엘룬은 이들의 갈등에서 가장인 벡테르의 편을 들었다. 몽골 유목민의 전통상 벡테르가 후엘룬의 짝이 될 수 있는 후보였고, 결국 가족의 모든 행동을 통제할 절대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는 테무진이 받아들일 수 없는 미래를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테무진과 그의 동생 카사르는 벡테르를 활로 쏘아 죽이게 된다. 어린 나이 테무진은 앞자리를 얻기 위해서라면 관습을 어기고 어머니에게 도전하고 설사 가족이라 하더라도 앞길을 막는 사람은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테무진은 보호자나 동맹자도 없이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제 이 사건을 구실로 타이치우드 씨족은 전사들을 보내 그들의 영토에서 살인을 저지를 테무진을 붙잡아 벌하고 그와 같은 일의 재발을 막기로 했다. 테무진은 잡혀서 목에 칼을 쓰게 되었고, 전쟁포로 하인들과 함께 노예생활을 하게 된다. 얼마 뒤 이 하인들은 테무진이 탈출할 때 목숨 걸고 도와주게 된다. 이를 보면 그에게 특별한 매력이나 능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테무진은 이 사건으로 깊은 감동을 받음은 물론이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불신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그의 씨족이 아니더라도 가족과 다름없이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을 믿게 되었던 것 같다.
1178년 테무진은 16세가 되던 해에 약혼녀 부르테를 찾아가 결혼하게 된다. 그는 부르테가 선물로 가져온 검은 담비외투를 이용해 아버지의 옛 우정을 되살리고 동맹을 맺어 자신과 점차 늘어나는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기로 한다. 아버지의 의형제 안다였던 옹칸을 찾아가 선물을 주고 유대관계를 맺었다. 이로써 옹칸의 보호를 받으며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옹칸은 테무진을 다른 젊은 용사들 보다 높은 지역 지도자로 이끌어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그는 그것을 사양하고 가족의 보호만을 보장 받길 원한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테무진은 자신의 작은 씨족의 지도자로 평생을 보내고 싶어 했던 것 같지만 몽골부족들의 공격과 반격이 이어지는 주변의 어지러운 세계는 그런 목가적인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테무진의 어머니를 빼앗겼던 부족인 메르키트족은 과거의 수모를 복수하겠다고 나섰다. 메르키트는 늙어버린 후엘룬이 아니라 테무진의 부인 부르테를 데려가 앙갚음을 했다. 옹칸과 맺어놓은 동맹은 테무진이 이 위기에 대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며 메르키트의 도전은 그가 위대한 칸의 길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세개의 강」 칭기스칸이 운명의 깃발을 들어올리자 그들이 나타났다.
메르키트 부대의 기습으로 아내를 빼앗긴 테무진은 부르칸 칼둔의 숲에 숨어있었다. 그는 풍습에 따라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이곳을 숭배하게 되고 기도를 드리게 된다. 테무진은 부르칸 칼둔에 숨어 사흘간 기도를 드린 뒤부터 그를 특별히 보호해 주는 이 산과 오랫동안 내밀한 영적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 산은 앞으로 그의 힘의 원천이 된다. 테무진은 이 숲에서 그의 평생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산에서 흘러나오는 세 개의 강은 테무진에게 각기 다른 행동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캐룰 강을 따라 남동쪽 하류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곳은 그가 초원생활을 하던 곳으로 아무리 많은 부인과 짐승을 다시 얻어도 다른 부족의 침략위험이 상존하는 곳이었다. 그가 태어난 오논 강을 따라 북동쪽으로 갈 수도 있었다. 숲이 많은 이곳은 안전하기는 했지만 가축을 기를 수 없어 사냥을 하며 근근히 살아가야 했다. 세 번째 대안은, 남서쪽으로 흐르는 툴라 강을 따라가 옹칸의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는 조용한 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메르키트의 침략으로 그런 삶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 추방당한 자로 궁핍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면 침략자들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면, 초원 지대 전사들의 위계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워야 했다.
테무진은 싸우는 쪽을 택했다. 툴라강을 따라 내려온 그는 옹칸의 지원을 받아 안다인 자무카와 함께 메르키트를 공격해 부르테를 구하게 된다. 메르키트 공격 이후 자무카와 테무진은 세번째 의형제 서약을 했다. 하지만 자무카는 가문의 지위가 높은 흰 뼈의 지위였고, 테무진은 검은 뼈의 지위였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테무진이 자무카를 지도자로 인정하고 난 뒤 테무진을 동생처럼 대하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씨족이 공동조상의 장남의 후손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가족관계를 통해 증명되었듯이 테무진은 열등한 지위를 참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계속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1181년 테무진은 19세에 자무카와 갈라선 뒤 스스로 전사들의 지도자가 되어 부하를 모으고 권력기반을 다지기로 결심한다. 1189년 27세의 테무진은 몽골족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칸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로 한다. 이 칭호를 사용하면 더 많은 부하를 끌어 들일 수 있고, 두 경쟁자 사이에 최종적 결판이 벌어질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가문이 자무카를 지지하고 있었다. 테무진은 옹칸의 봉신신분이었으며 그의 부족은 다른 부족에 비해 규모도 작았다. 따라서 테무진은 새 칭호가 옹칸에게 도전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자신의 충성을 재확인시키기 위해 그의 승인을 요청했다.
그는 젊은 시절 얻은 교훈을 원칙으로 급진적인 개혁을 시행하여 부족 내 새로운 권력구조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친족관계를 무시하고, 개인의 능력과 충성도에 따라 여러 부하에게 수많은 책임을 나누어 주었다. 테무진은 33세가 되던 해 1195년 외부침략과 대량약탈의 기회를 맞아 성공을 거두어 몽골족 사이에서 군사적 위엄이 높아지고 경제적 힘도 불어나게 된다. 다음해 겨울 옹칸과 테무진은 타타르 원정에 나섰다. 이 원정이 성공하고 그의 위상은 전보다 높아졌다. 그는 타타르 원정 시 함께 싸우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자신의 야영지를 습격한 주르킨족을 재판을 통해 처형했다. 이는 동맹자 사이의 의리가 중요함을 보여주려는 조치였을 뿐 아니라, 어떤 가문의 귀족에게도 특별대접을 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경고였다. 이어 테무진은 주르킨 땅을 점령하고 그 집단의 나머지 사람들을 자신의 씨족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유래 없는 조치를 취했다.
테무진은 가공의 친족관계를 이용하여 추종자들을 단결시킬 때 그런 행동이 상징적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실제적인 이익을 주기도 한다는 것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테무진은 주르킨 지도자를 모두 없앴다. 초원의 모든 관련된 씨족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분명히 했다. 테무진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보답을 해주고, 좋은 대접을 해준다. 그러나 그를 공격하는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전통적 생활방식을 개혁하는 테무진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귀족적인 씨족들 사이에서 자무카는 중심인물로 성장해 갔다.
1201년 자무카는 이런 씨족들의 지원을 받아 테무진과 옹칸 두사람 모두에게 도전했다. 테무진의 가족을 한때 아랫사람처럼 부렸고, 어린시절 그를 노예로 삼았던 타이치우드족도 자무카의 편에 섰다. 테무진은 타이치우드족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동안 자무카는 옹칸의 군대를 피해도망치고 있었다. 자무카는 초원의 먼 곳으로 달아나면서 새로운 동맹자들을 모으게 된다. 테무진과의 최종적 결전은 훗날의 일이다.
타이치우드를 물리친 다음해인1202년 옹칸은 테무진에게 타타르를 약탈하는 원정을 맡겼다. 테무진은 타타르 원정에서 오랫동안 초원을 지배해온 규칙을 완전히 다시 바꾸게 된다.
두 가지 혁신은 약탈을 조직적으로 하도록 명령하는 것과 습격과정에서 전사한 모든 병사의 과부와 고아에게도 일반병사와 똑 같은 몫을 주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정책에 소수의 귀족 씨족들은 불만을 품기는 했지만 그 정책은 즉시효과를 발휘했다. 이런 정책으로 테무진은 그의 통치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하면서 동시에 부하들의 충성심을 높였다. 이번에도 타타르 족을 자신의 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타타르 아이를 어머니의 양자로 들였을 뿐 아니라 그들과의 혼인을 장려하기도 했다. 큰 집단 둘을 하나의 민족으로 결합한다는 테무진의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혼인과 입양과 더불어 십진법에 따라 군대조직을 재 편성 했다. 그리고 테무진은 단일인종이나 부족이름을 사용하는 대신 점차 자신의 무리를 ‘모전벽의 사람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용어를 채택한 것을 보면 그가 초원지대의 모든 민족들을 통일할 야심을 품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칸들의 전쟁」 모든 부족이 하나의 색깔이 되어 그의 명령에 복종했다.
옹칸의 마지막이 멀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누가 그의 뒤를 이을 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테무진은 20년 이상의 투쟁 끝에 몽골족 대부분을 다스리게 되었지만 아직 경쟁자 자무카를 제압하지 못했다. 옹칸은 대체로 테무진 편이었지만 은근히 두 하위 칸들의 경쟁을 부추기고 있었다. 테무진은 옹칸의 딸과 자신의 장남 주치의 결혼을 요청함으로써 해법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옹칸은 아들 생굼의 말만 듣고 오만하게 결혼을 거부했다. 그러나 노쇠한 칸은 자신의 충동적 거절을 후회하고 테무진의 반응을 걱정하게 되었다. 옹칸은 이제 자신이 전투에서 테무진에게 맞서서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계략을 통해 테무진이라는 강적의 위협을 없앨 꾀를 세웠다.
옹칸의 결혼 승낙전갈을 받고 그에게 가던 중 그것이 계략임을 알게 된다. 테무진은 옹칸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게 되고 그는 이제 그의 능력을 최대로 시험하게 될 위기를 만난다. 테무진은 먹을 것도 없이 지친 몸을 이끌고 며칠간 달아나다가 진흙탕인 발주나 호숫가에 이르렀다. 부하들 가운데 불과 19명만이 남았으며, 다들 굶어죽을 판 이었다 .그 순간 불쪽에 야생마가 나타났고 이들은 말고기를 먹고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말은 몽골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명예로운 짐승으로써 어떤 행사의 의미를 엄숙하게 드높여 주는 역할도 하고 신의 개입이나 지원을 상징하는 역할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자기 등장한 말을 그들은 큰 자연적 인 징조로 여기고 단결하게 되었다.
테무진은 발주나에서 은신하면서 반격 계획을 세웠다. 테무진과 함께 발주나 맹약을 한 19명은 각기 다른 부족 출신이고 종교도 모두 달랐다. 이 사건은 친족관계, 인종, 종교를 떠나 상호 헌신적 의리에 기초하여 결집한 몽골 민족의 다양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옹칸은 테무진이 도망갔다고 생각하고 잔치를 벌였다. 이 틈을 노린 테무진은 갑자기 잔치상 앞에 나타나 사람들을 덮쳤다. 결국 기습이 성공해 옹칸의 부하들 다수가 테무진의 깃발아래로 들어왔다.
테무진은 다음 원정의 목표인 나이만에 소문과 대중 여론을 이용해 자기편의 사기를 북돋웠다. 테무진은 병력이 적었기 때문에 나이만과 전면전으로 붙을 경우 승산이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예측 불가능한 치고 빠지는 작은 전투로 나이만을 괴롭혔다. 산발적 공격으로 적을 유인한 뒤 호수대형으로 나이만군이 긴 줄로 대응하자 테무진은 뽀족한 끌의 형태로 대형을 바꾸고 공격해 얇아진 나이만 방어선의 한 지점을 최대 힘으로 꿀처럼 뚫고 들어갔다.
테무진은 혁신적 방법을 통해 전략을 항상 재구성했으며 전사들과 긴밀한 협동과 완전한 복종을 이끌어 냈다. 몽골군에게는 이런 말이 있었다 “그가 나를 불로 보내건 물로 보내건 나는 간다, 그를 위해간다” 이것은 새로운 몽골군의 이상을 보여주는 말이 아니라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말이었으며, 이 힘에 나이만은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
마흔 살의 자무카은 소수부하를 이끌고 야생동물을 잡아먹으며 추방당한 산적처럼 살았다. 1205년 절망에 빠진 자무카의 부하들은 자신들의 주군을 잡아 테무진에게 데려갔다. 의리를 높이 치는 테무진은 배신한 그 부하들에게 상 대신 죽음을 주었다. 테무진은 자무카에게 힘을 합칠 것을 청했으나 자무카는 죽음으로서 더 나은 친구가 되겠다고 말하며 명예로운 죽음을 청하게 된다. 이로써 귀족적인 자다란의 씨족은 사라지고 테무진은 현대의 서유럽정도 크기의 방대한 영토를 통치하여 몽골족을 통일하게 된다. 테무진은 “구르칸, 타양칸 같은 예전의 부족적 칭호를 거부하고 칭기스 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테무진은 인종적으로 다양한 이대 규모 부족 연합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칭기스칸의 대법령’을 발표했다. 그는 이법을 통해 수백년 동안 유지되어온 유목민 부족들의 관습과 전통을 강화했다. 동시에 자신의 새로운 사회의 기능에 방해가 되는 낡은 관행들은 없애버렸다. 그는 각 집단이 독자적인 영역에서는 대법령과 부딪히지 않는 한 고유의 전통을 따르는 것을 허용했다.
대법령은 일상의 모든 측면을 파고드는 대신 가장 문제가 많은 측면을 규제했다. 첫째로 여자의 납치를 금지하는 내용이었다고 전해진다. 납치와 더불어 몽골인을 노예로 삼는 것도 금지했다. 내적인 불화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간통을 금지하고 여자를 돈으로 사서 결혼하는 것도 금지했으며 가축을 훔치는 일을 금지했다.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으며, 칸의 자리를 둘러싼 다툼을 방지하기 위해 쿠릴타이에서 칸을 선출하도록 정했다.
법 집행과 그것을 지키는 책임을 가장 높은 수준 즉 칸 자신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식으로 칭기스 칸은 모든 개인 보다 법이 우위에 선다는 사실을 선포했다. 통치자를 법에 복속시킨 것은 그때까지 어떤 문명도 이루지 못했던 업적이었다. 이러한 법을 시행하기 위해 칭기스칸은 문자체계를 도입했다.
칸의 명령이 의도한 대상에게 신속하게 전달되는 통신 체계를 확립했다. 칭기스 칸은 평화와 번영이 그 나름의 문제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6년간 평화가 지속되자 음모와 자잘한 경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칭기스 칸의 권력이 강해질수록 부하들 사이의 불화와 집안의 불화가 심해졌다. 칭기스 칸은 우구르칸과 친족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남쪽 고비사막 너머에는 비단길을 따라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물자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런 물자 흐름의 불균형을 바로 잡고 자신의 군대를 다른 군대와 맞부딪혀 시험해 볼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2부 몽골 세계대전 (1211~1261)
칭기스 칸과 그의 후손들이 지구를 흔들다 술탄들이 쓰러졌다.
갈리파들이 넘어졌고, 카이사스들은 왕좌에서 떨어졌다.
「황금 칸에게 침을 뱉다」
칭기스칸이 48세가 되고 그의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지 4년이 흐른 1210년 말의 해에 주르첸(여진족의 금나라) 대표단이 몽골 야영지에 도착하여 새로운 황금칸이 즉위했음을 알면서 칭기스칸의 몽골이 속국으로써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칭기스칸은 그렇지 않아도 교역물자 때문에 주르첸과 전쟁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황금칸이 복종을 요구했으니 이제 공격할 구실을 얻은 셈이었다. 칭기스 칸은 1211년 봄 쿠릴타이를 소집해서 대 규모의 공개적 회의를 하고, 위구르와 탕구트와 동맹을 맺고 그들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주르첸은 인구 5000만으로 수많은 왕국들 가운데 두 번째로 큰 나라였다. 주르첸의 서쪽에는 탕구트 왕국, 위구르 왕국, 그리고 마지막으로 톈산 산맥에 카라키타이 왕국이 있었다. 칭기스 칸은 1207년 부타 1209년 사이에 전쟁 연습을 하듯이 여러 차례 습격하여 탕구트를 정복했었다. 그는 주변의 나라들을 먼저 점령하기 시작했다. 주르첸이 몽골군을 이기고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중국인 주민의 믿음을 부수어 버리려 했다. 1212 몽골족은 주르첸 땅 전체를 정복하지 못했지만 속국이 생기자 주르첸은 더 분열되었고 몽골 편으로 넘어오는 사람은 늘어났다. 몽골군은 영토 전체에서 전쟁을 했으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소요와 혼란을 이용해 온갖 교묘한 책략을 구사했다. 1214년 칭기스칸은 마침내 중도(베이징)에서 황금칸의 왕국을 포위 공격하게 되었다. 황금칸은 내부 분쟁을 심하게 격은 터라 몽골군에게 협상을 하기로 했다 . 칭기스 칸에게 공주를 아내로 주고 자신을 봉신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제 초원지대도 고립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칭기스 칸은 보급로를 조직하고 생산을 유지하고 물자와 사람의 이동을 조정해야 했는데 이 모두가 전례 없는 규모로 이루어졌다. 칭기스칸은 긴 주르첸 원정동안 문제를 발생 시킨 카라키타이 족에 대한 원정도 성공한다. 그는 이제 탕구트 위구르, 카라키타이, 북쪽 주르첸의 땅에 속국들을 두게 되었다.
1219년 군사 분야와 상업분야에서 수많은 업적을 쌓은 칭기스칸은 예순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칭기스 칸은 호라줌의 왕과 진지한 수호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징기스 칸은 호라줌의 술탄에게 사절을 보냈고 술탄은 의심을 털어내지 못해 주저하면서 조약에 함의했다. 하지만 술탄은 몸골족의 캐러벤을 쓸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칭기스 칸이 보낸 사절도 죽이는 등 도발적인 방법으로 칭기스 칸을 자극했다.
「술탄과 칸의 대결」
1219년 칭기스 칸은 서쪽으로 출발해 이듬해 봄에 호라즘샤에 도착했다. 4년에 걸친 원정에서 파리를 잡듯이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을 정복했다. 호라즘의 술탄은 무슬림 이웃들과 관계가 나빴을 뿐 아니라 , 국내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몽골군은 항복하는 이들에게는 정의를 약속하고 저항하는 자들에게는 파괴를 맹세했다. 칭기스 칸은 몽골군의 선정용 전단이나 다름없는 편지들을 보냈고 전투에서 죽은 사람의 수를 부풀려 소식이 닿는 곳 마다 공포를 실어 날랐다. 불과 원정 일년 후인 1221년 몽골관리들이 고려신민에게 그곳에서 생산되는 종이 10만장을 요구했다. 이 종이의 양은 제국이 커지면서 몽골의 기록 규모가 얼마나 빠르게 늘었는지 모여주지만 동시에 몽골이 자신의 역사를 쓰는 일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몽골군은 선전을 통해 공포를 자아내어 쉽게 적을 물리쳤다. 몽골군에게 항복한 도시들은 풍문에 듣던 무시무시한 이야기들과 비교할 때 그들의 태도가 온화하고 자비로운 것에 놀랐다. 결국 술탄은 친기스칸 전사들의 무자비한 추적을 피해 숨어들었던 카스피 해의 어느 작은 섬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4년간의 중앙아시아 정벌을 마치고 칭기스 칸은 후계자 선정 문제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인식하고 가족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주지, 차카타이, 우구데이등 칸의 아들들은 후계자 자리를 두고 싸우기 시작했다. 칭기스 칸은 자신의 사후에 제국을 유지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자식들 간의 분쟁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가운데 그는 긴 생애의 마지막 원정을 떠나게 된다. 그 대상은 외적 탕구트였다. 탕구트와 전쟁을 하기 위해 고비사막을 가로지르던 1226~1227년 겨울 잠시 발길을 멈추고 야생마를 사냥하던 중 부상을 입는다. 하지만 고향을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원정을 밀어 붙였다. 결국 원정의 최종 승리를 불과 며칠 남겨 놓고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유럽 원정대」
칭기스칸이 죽자 가족 쿠릴타이를 통해 선출된 우구데이가 취임했다. 1229년 즉위하자마자 그는 많은 난관들을 부딪치게 되고 많은 실수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와 는 다른 생각으로 제국을 통치하게 된다. 그는 칭기스 칸이 말을 타고 통치하는 것 즉 권력의 중심을 옮겨 가며 통치한 것과 달리 권력중심과 제국의 행정부를 고정시키려 했다. 그는 전형적 몽골방시의 궁을 짓기 시작했다. 이밖에도 물자를 낭비하며 1235년 결국 아버지의 부를 거의 모두 탕진해 버렸다. 몽골 제국이 살아남으려면 우구데이는 새로운 목표를 정해 전쟁을 해야 했다. 수베데이의 원정을 통해 러시아인에게 승리를 거두고 나서 12년 뒤 우구데이는 쿠릴타이를 통해 유럽 원정과 송나라 원정에 대해 논의를 했다. 결국 몽골군을 나누어 두 곳을 동시에 공격하기로 결정되었으나 이는 몽골제국의 역사에서 최악의 결정으로 꼽을 만한 것이었다.
송나라 원정은 집중력 분산과 수베데이의 부재로 실패를 했다. 반면 유럽원정은 가족의 여러 왕자들 사이의 오랜 다툼에도 불구하고 수베데이와 뭉케에 의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1241년 우구데이는 술에 취해 정신을 잃는 상태에서 죽었다고 한다.
「왕비들의 싸움」
몽골남자들이 전장에 머물며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느라 바쁠 때 여자들은 제국을 운영하였다. 우구데이가 대칸으로 재위하는 동안 술에 취하는 일이 너무 잦아 제국을 운영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제 1부인은 아니지만 유능한 투fp게네에게 행정권을 넘겨줬다. 1241년 우구데이가 죽자 투레게네는 공식 섭정이 되었다. 투레게네는 구육을 칸으로 선출하려 했으나 다른 가족의 정족수가 모이질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톨루아 가문과 소르칵타니등 제국의 중심에서 패군을 둘러싼 정치 투쟁이 계속되었고 결국 뭉케는 1227년 할아버지 징기스칸이 죽고 나서 거의 4반세기가 흐른 뒤 1251년에 대칸의 지위에 올랐다.
뭉케는 외교와 상업에 관심을 갖고 제국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그는 칭기스 칸이 미완으로 남겨두고 떠난 사업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송나라와 중동 아랍 국가들의 정복이었다. 뭉케는 사람, 동물등 제국의 자산 규모를 파악하기 위한 통계조사를 명령했다. 이 정보를 이용해 정책을 수립하고 지방에 대한 권력을 강화 했다. 뭉케는 동생인 훌레구와 쿠빌라이에게 양쪽 영토의 정복을 명령했다. 훌레구는 천일야화의 도시 바그다드를 비롯 아랍 세계를 정복했다. 몽골군은 불과 2년 만에 서쪽의 유럽 십자군과 동쪽의 셀루크 투르크가 200년 동안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어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쿠빌라이는 장시간에 걸쳐 송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 남부를 합병하려고 했다. 뭉케가 죽자 형제들은 또 다시 칸자리를 놓고 싸우기 시작했고 아릴부케가 대칸으로 선포 되었으나 쿠빌라이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결국 1264년 쿠빌라이가 제국을 지배하는 대칸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3부 세계 인식의 대전환 (1262~1962)
「쿠빌라이칸의 새로운 몽골 제국」
쿠빌라이 칸의 천재성은 그의 군대가 아무리 크고 그의 무기가 아무리 세련되었다 해도 단지 힘만으로는 중국 전체를 정복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데서 엿볼 수 있다. 그는 군사적 기술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좋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는 중국식 수도를 건설하고 중국식 이름을 채택하고 중국식 왕조를 창건하고 중국식 행정부를 수립했다. 그는 중국인처럼 보임으로써 중국을 통제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는 강한 군대와 훌륭한 선정이 중요하다고 인정했지만 그의 전략의 세 번째 요소를 꼽으라면 좋은 행정과 정책이었다. 그는 칭기스 칸의 법과 양립할 수 있도록 중국 법을 개혁했다. 몽골인과 중국인의 지지를 모두 얻으려는 심산이었다.
온건한 법으로 민심을 수습한 쿠빌라이는 제국 전역의 교역속도를 높이고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지도의 사용을 급격하게 확대했다. 또한 농민 약50만 가구를 사(社)라고 부르는 하나의 단위로 조직하여 새로운 사회제도를 건설하였다, 또한 대중문화도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쿠빌라이는 육지로 닿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곳을 장악하자 새로 정복할 땅을 찾아 바다로 눈을 돌렸다. 쿠빌라이는 일본을 여러 차례 대규모 병력으로 침공했으나 태풍과 해산전의 미숙으로 실패에 그쳤다. 그러나 이러한 몽골의 위협은 일본의 사회적 정치적 삶에는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 일본은 몽골의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화적 통일을 이루고 군국주의적 정부를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팍스 몽골리카」
몽골은 말을 탄 전사와 무시무시한 공성 무기를 보내는 대신 이제 겸손한 사제, 학자, 사절을 보냈다. 몽골정복의 시대는 끝났지만 ‘몽골평화’의 시대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훗날 서구 학자들은 국제적으로 평화와 번영이 확대되어가는 엄청난 변화를 인정하여 14세기를 ‘팍스 몽골리카’라고 명명했다. 이제 몽골인들은 평화로운 교역과 외교를 통해 이전에 무기의 힘으로 얻지 못했던 상업적 외교적 연결통로를 얻으려 했다.
쿠빌라이 칸 치세에는 몽골 제국이 ‘몽골회사’로 바뀌었다. 이시기 몽골 제국의 역참은 안내인 제공 까지 했으며 교역로를 통한 무역을 장려하여 여권과 신용카드의 기능을 합친 초보적인 유형의 신분증인 파이자를 나누어 주었다. 분배물자의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몽골이 전쟁할 때 쓰던 길은 점차 상업적 간선으로 바뀌어 갔다. 또한 그들은 대량의 물자는 배로 움직이는 것이 가장 좋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과거 일본 침공 때 조선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기에 그 지식을 상업 활동에 돌렸다. 그에 따라 몽골은 새로운 지역으로 무역을 확대하기 위해 중국 남부 봉신들에게 외국항구로 이주하여 교역기지를 설치하도록 장려했다. 몽골의 침략으로 페르시아와 이라크의 제조업이 대부분 파괴된 상태에서 새로운 교역로들이 개방되자 중국 제조업은 새로운 기회를 맞게 되어 크게 발달한다.
전통적인 제국들은 한 도시에 부를 축적했다. 모든 길은 수도로 통했고 늘 가장 좋은 것은 수도에 이르렀다. 한 도시가 제국 전체를 지배하다 보니 로마나 바빌론 같은 이름은 제국 자체의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몽골 제국에서는 주요한 도시 하나가 전체를 지배한 적이 없었다. 제국 내에서 물자와 사람은 늘 이곳저곳으로 이동했다. 몽골 당국은 차나 쌀 같은 중국의 전통적인 작물을 새로운 지역, 특히 페르시아나 중동으로 이식하는 일도 권장했다. 몽골은 더 나은 연장을 찾았으며, 그 결과 기능이 뛰어난 동남아시아의 삼각형 쟁기가 중국에 도입되어 널리 사용되기도 했다.
몽골 통치자들은 직물 교역이 이익도 많이 남고 외국과의 무역을 자극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농부들이 생산하는 비단, 면 같은 섬유들만이 아니라 가축에서 생산되는 여러 종류의 모직물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몽골 왕국은 페르시아와 아랍의 의사를 중국에 수입했으며, 중국 의사를 중동에 수출했다. 모든 형태의 지식은 상품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시기 역법, 수학, 역사, 인쇄술 등이 모두 발달 하게 되고 각 지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몽골은 제국을 정복하면서 전쟁 방법에서 혁명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보편적 문화와 세계체제의 핵을 만들어 냈다. 이 새로운 지구문화는 몽골 제국의 종언 이후에도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했으며, 이후 수백 년 동안 근대 세계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이 문화에는 원래 몽골이 강조했던 자유고역, 자유로운 교통, 지식 공유, 세속 정치, 여러 종교의 공존, 국제법, 치외법권 등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유럽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은 적은 없지만 여러 면에서 몽골의 세계체제로부터 가장 많은 이득을 얻었다. 유럽인은 몽골 정복이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교역, 기술 이전, ‘세계 인식의 대전환’에 따른 모든 혜택을 입었다. 랍반 바르 사우마 같은 몽골 사절의 방문을 통해 유럽인은 멀고 낯선 몽골인의 완전히 다른 관점을 알게 되었다. 몽골이 위대하다는 이미지는 1390년경 제프리 초서가 가장 분명하게 표현했다.
1332년 혼란과 경악과 고통이 도원경이라고 부르던 몽골의 여름 수도 상도의 쾌락의 궁전을 휩쓸었다. 몽골 사회를 위협한 것은 외적이나 반군이 아니었다. 두려움의 진원지는 훨씬 더 불가사의한 것, 그러나 그 결과는 도처에서 눈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 곧 역병이었다. 중국은 몽골 세계체제에서 제조업의 중심 역할을 했다. 따라서 중국에서 물자가 쏟아져 나가면서 병도 따라갔다. 이런 식으로 페스트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진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이 병의 진짜 원인이나 전염 경로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곧 도시 안팎의 교역이나 사람의 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인식하게 되었다. 외교사절단과 편지도 오가지 않았다. 몽골 운송체계의 가동이 중단되자 가톨릭교회와 중국 선교단의 연결이 끊겼다. 페스트는 유럽을 고립시켰을 뿐 아니라 페르시아와 러시아에 사는 몽골인을 중국이나 몽골과 차단했다. 페리시아의 몽골 통치자들은 이제 중국에 있는 자기 소유의 토지와 작업장에서 나온 물자를 얻을 수 없었다. 중국의 황금 가족도 러시아와 페르시아로부터 물자를 얻을 수 없었다. 각 지파 사이에 연결이 끊어지자 서로 맞물리는 소유제도도 붕괴했다.
페스트는 국토를 유린했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타락 시켰고, 교역과 공물을 차단하여 몽골의 황금 가족으로부터 일차적인 소득원을 빼앗았다. 몽골 제국은 사람, 물자, 정보가 제국 전체를 끊임없이 빠르게 돌아다녀야 생존할 수 있었다. 이런 연결이 없으면 제국도 없었다.
페르시아와 중국에서 몽골 사회는 빠르게 붕괴했다. 몽골의 통제 하에 있던 여러 나라에 토착 주민의 반란이 일어나 몽골인은 쫓겨나고 지방 엘리트가 정부를 장악했다. 고려, 러시아, 중국은 토착 왕조의 손에 정권이 넘어갔지만, 무슬림 영토들은 복잡한 이행 과정을 겪었다.
하지만 페스트, 상업체제의 붕괴, 반란 이후 몽골 제국은 무장해제 되었음에도, 반역자들조차 예 제국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 새로운 통치자들은 구체제의 장식과 환상에 매달려 자신들의 새로운 통치를 정당화 했다. 내부구조가 무너지고 몽골인이 모두 사라지고 난 뒤에도 몽골 제국의 외관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아주 많은 제국들이 정치에서부터 예술에 이르기 까지 몽골 제국의 환상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여론 역시 몽골 제국이 이제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완강하게 믿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 몽골 제국에 대한 믿음이 그 어느 곳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또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던 곳은 유럽이다. 몽골의 교통체계가 무너지면서 유럽인은 제국의 몰락과 대칸의 패배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작가와 탐험가들이 칭기스칸과 몽골인에게 공개적으로 찬사를 보낸 반면,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아시아에 대한 적대감을 조장하였으며, 그 중심에는 종종 몽골인이 놓여 있었다. 몽골인은 그 커다란 대륙에서 악하고 불완전한 모든 것의 상징이었다.
볼테르는 몽골인에 대한 근대인의 저주의 포문을 열었다. 그러나 칭기스칸을 이렇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덮어버리기는 했지만 볼테르의 진짜 목표는 프랑스 왕이었다. 다만 두려움 때문에 직접 비판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볼테르는 프랑스를 투사한 몽골이 모든 사악한 것을 대표하게 만들어놓았다. 다른 작가들 역시 금세 볼테르를 따라 몽골을 세계의 악의 상징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시아인이 열등하다는 가장 유해한 이론적 설명은 유럽의 철학자나 예술가 쪽에서 나왔다기보다는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태어난 새로운 지식인 종족인 과학자들에게서 나왔다. 19세기 내내 유럽에는 아시아인에 대한 공포가 쌓여갔다. 르네상스와 몽골 제국의 시대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칭기스칸은 인간 역사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 까지 격하되었다. 근대 유럽은 새로 발견한 식민지 정복의 힘과 스스로 내세운 세계 지배의 임무 때문에 아시아의 정복자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몽골을 아시아 문제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이것을 일본에서부터 인도에 이르기 까지 모든 몽골인을 정복해야 할 근거로 삼는 태도는 유럽의 정복과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칭기스칸과 몽골의 잔혹성은 문명화된 잉글랜드, 러시아, 프랑스의 식민주의자들이 아시아를 통치할 수밖에 없는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인 아시아의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칭기스칸에게서 새로운 영웅을 발견했다. 인도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새로운 세대의 아시아인은 유럽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 때문에 칭기스칸과 몽골에서 아시아 최고의 정복자를 보았다. 이것은 유럽의 우월성이라는 교조를 반박하는 생생한 증거였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칭기스칸이 새삼스럽게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는 묘한 일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선전과 이데올로기에만 이용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군사작전에도 응용되었다. 소련, 이론, 독일은 모두 새로 발굴된 몽골비사를 판독하고 , 번역하고, 해석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그 책에 중국과 러시아를 이길 수 있었던 몽골 군사전술의 비법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마지막으로 발악을 하던 1944년 부하라의 전 아미르 이자 칭기스칸의 후손 가운데 최후의 통치자였던 사이드 알림 칸이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25년 전쯤 젊은 시절 통치하던 도시에서 카불로 망명했다 알림 칸의 죽음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렇게 몽골제국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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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PR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