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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29. 16:56

자유론(존 스튜어트 밀)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29. 16:56

1. 작가 소개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1806~1873)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제임스 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주입식 교육을 피하고 어떤 문제든 혼자 힘으로 생각하고 해결하도록 아들을 가르쳤다. 밀은 세 살 때 아버지에게서 그리스어를 배웠고 여덟 살 때 라틴어를 배웠으며 열세 살 때는 경제학을 공부했다. 열일곱 살이 되던 1823년에 동인도회사의 통신 심사부장인 아버지의 조수로 임명됨으로써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독창적 사상가로서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이후 그는 엄격한 공리주의적 이성 제일주의의 문제점을 깨닫게 되면서 아버지의 철학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사색과 분석뿐만 아니라 수동적인 감수성이 능동적 능력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러 능력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음악, 시, 미술 등으로 관심의 폭을 확장했다.
공리주의를 주장한 인물로 유명한 제레미 벤담을 도와 만든 <판례의 합리적 근거>(전5권)를 시작으로 저술 활동에 관여하기 시작한 그는 1838년 첫 저서인 <논리학 체계>를 쓰기 시작해 1843년에 출판했다. 1848년에는 <정치경제학 원리>를 발표했는데, 이 책은 부인 테일러와 함께 준비해 결실을 거둔 첫 책이다.
1859년에는 그의 저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자유론>을, 2년 뒤에는 대중 민주 정치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비판한 <대의제 정부에 대한 고찰>을 발표했다. 이후 사회윤리로 관심을 돌린 그는 <공리주의>,<여서의 종속>등을 집필했다. <종교에 관한 에세이 3편>과 <사회주의론>은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그는 1865년에 웨스트민스터 유권자들의 권유에 따라 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의정활동을 펼치던 그는 다음 선거에서 낙선한 이후 프랑스로 건너갔다. 부인이 묻힌 아비뇽의 별장에서 집필과 식물 연구에 힘쓰던 그는 1873년에 세상을 떠났다.


2. 내용 요약

(1)머리말

흔히 말하는 ‘자유 의지’를 다루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이 책은 그보다는 시민의 자유 또는 사회적 자유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이 책에서 사회가 개인을 상대로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성질과 그 한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자유의 기본 영역으로 다음 셋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내면적 의식의 영역이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적이거나 사변적인 것, 과학. 도덕. 신학 등 모든 주제에 대해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양심의 자유, 생각과 감정의 자유, 그리고 절대적인 의견과 주장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 사람들은 자신의 기호를 즐기고 자기가 희망하는 것을 추구할 자유를 지녀야 한다. 각각의 개성에 맞게 자기 삶을 설계하고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갈 자유를 누려야 한다.
셋째, 이러한 개인의 자유에서 이와 똑같은 원리의 적용을 받는 결사의 자유가 도출된다. 다시 말해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그리고 강제나 속임수에 의해 억지로 끌려온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성인이 어떤 목적의 모임이든 자유롭게 결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정부 형태를 가지고 있든 이 세 가지 자유가 원칙적으로 존중되지 않는 사회라면 결코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자유를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유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하고 또 유일하게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는 자유이다. 우리의 육체나 정신, 영혼의 건강을 보위하는 최고의 적임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각 개인 자신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자기 식대로 인생을 살아가다 일이 잘못돼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런 결과는 맞이하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게 되면 다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길로 억지로 끌려가는 것보다 궁극적으로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이다.

지금 우리는 사회가 설정한 성공의 기준에 맞춰 살도록 강하게 종용받고 있다. 그것은 우리와 무관하지만, 그에 대한 사회적 입력이 여간 심한 것이 아니다. 국가가 모든 시민들의 육체적. 정신적 삶 전반에 걸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정치 공동체의 규모가 커진데다, 무엇보다도 세속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가 분리된 까닭에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 법이 지나치게 관여할 수 없다. 그러나 사회의 주도적인 흐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에 대한 도덕적 억압의 기제는 훨씬 강력해졌다. 특히 사회적인 문제보다 오히려 개인 각자의 고유한 문제에 대한 억압이 더 심해졌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는 여론, 심지어 법의 힘을 통해 개인에 대한 사회 통제를 과도하게 확대하려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사회의 힘을 강화시키는 반면 개인의 힘은 축소시켜나가는 이런 부정적인 변화는 절로 사라질 일이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 점점 더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우연하게 인간의 본성이 되어버린 최선의 감정과 최악의 감정 가운데 일부가,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성향을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행동 지침으로 받아들이도록 강력하게 강요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경향은 워낙 강해서 인간 감정의 힘이 줄어들면 모를까, 그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불행하게도 그 힘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따라서 이런 불행은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인간의 도덕적 현신이 일어나지 않는 한, 오늘날 세상 돌아가는 상황에 비추어 볼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고 말 것이다.

(2) 생각과 토론의 자유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생각을 억압한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행위가 현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류에게까지 악을 저지르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의견이 옳다면 그러한 행위는 잘못을 드러내고 진리를 찾을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설령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의견을 억압하는 것은 틀린 의견과 옳은 의견을 대비시킴으로써 진리를 더 생생하고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대단히 소중한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낳는다.

이 두 측면에서 각각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으므로 하나씩 따져볼 필요가 있다.
첫째, 권력을 동원해서 억누르려는 의견이 사실은 옳은 것 일 수 있다. 그 의견을 짓밟으려는 사람들은 물론 그것을 부인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특정 의견이 잘못되었다는 확신 아래 다른 사람들이 들어볼 기회조차 봉쇄해버린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스스로 완전하다고 전제하지 않는 한 일체의 토론을 차단해버릴 수는 없다. 사람들이 흔히 이런 착각에 빠진 탓에 자기와 다른 생각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현실적인 문제에 관한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분명히 옳은 것이라고 확신하는 어떤 의견이 실은 그들도 인정하는 바로 그 사실, 즉 인간의 판단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신의 독자적인 생각에 자신감이 없으면 없을수록 일반적인 의미의 ‘세계’의 완전함에 암묵적인 믿음을 가지고 더욱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각자가 직접 부딪히고 경험하는 것, 즉 정당, 집단, 교회, 계급 등이 모여 이 세계를 구성한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바르게 이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귀속감을 느끼게 되는 집단이 하찮은 사건으로 인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에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숱한 논리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볼 때, 시대가 개인보다 더 나을 것 없음은 시대 그 자체가 증명해준다. 각 시대는 수많은 의견을 잉태하는데, 시간이 지나다보면 그런 의견들이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우스꽝스럽게 여겨지는 경우도 많다. 과거의 현재에 의해 부정되듯이 현재는 미래에 의해 번복될 것이다. 그래서 현재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생각들 가운데 상당수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폐기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인류가 벌전 시켜 온 생각이나 일상적인 행동의 역사를 놓고 볼 때, 우리의 삶이 더 나빠지지 않고 지금 이 상태로나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인류가 이런 상태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인간 정신의 한 특징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적 또는 도덕적인 존재로서 인간이 보여주는 모든 자랑스러운 것들의 근원, 즉 자신의 잘못을 시정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이렇게 된 것이다. 인간은 토론과 경험에 힘입어 자신의 과오를 고칠 수 있다. 경험만으로는 부족하다. 과거의 경험을 올바르게 해석하자면 토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잘못된 생각과 관행은 사실과 논쟁 앞에서 점차 그 힘을 잃게 된다. 그러나 사실과 논쟁이 인간 정신에 어떤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그 정신 앞으로 불려 나와야 한다.

어떤 사람의 판단이 진실로 믿음직하다고 할 때, 그 믿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의 비판에 늘 귀를 기울이는 데서 비롯된다. 자신에 대한 반대 의견까지 폭넓게 수용함으로써, 그리고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어떤 의견이 왜 잘못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줌으로써, 옳은 의견 못지않게 그릇된 의견을 통해서도 이득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는 어떤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상이한 의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나아가 다양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그 문제를 이모저모 따져보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현명한 사람 치고 이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지혜를 얻은 사람은 없다. 인간 지성의 본질에 비추어볼 때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지혜를 얻을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다른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는 것이 우리의 판단에 대한 믿음을 튼튼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는 소크라테스라는 한 개인이 법률 당국과 대중 여론을 상대로 의미심장한 싸움을 벌였던 사건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그 이후 등장하는 모든 도덕철학자들의 원조이자 원형으로, 특히 탁월한 영감의 소유자인 플라톤과 합리적 공리주의를 개척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으로 기억한다. 2,0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그의 명성은 오히려 더 높아만 가고 있다. 그러나 아테네 사람들은 이 위대한 인물을 법정에 세운 뒤, 불경과 부도덕이라는 죄목 아래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나라에서 공인하는 신들을 부인했다는 이유로 불경죄를 덮어씌운 것이다. 사실 그를 고소한 자들은 그가 아예 어떤 신도 믿지 않는 다고 비난했다. 소크라테스는 또한 그의 철학과 강좌를 통해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부도덕하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런 혐의에 대해 법정은 어느 모로 보나 성실한 심리를 펼친 뒤 소크라테스의 유죄를 확정했다.
분명히 말해 진리가 언제나 박해를 이기고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는 주장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하나의 상식이 되다시피 했지만, 역사적인 모든 경험이 입증하듯이 사실은 유쾌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새로운 주장을 펴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들 이야기 한다. 그러나 자화자찬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우리가 아직 법의 이름으로 가하는 박해의 구습에서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 아니면 적어도 그 생각의 표현을 금지하는 법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경우에 법적 처벌이 가해지다보니 언젠가는 생각의 자유를 완전히 억압하는 날이 되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전혀 터무니없이 들리지 않을 정도이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아주 고약한 형태의 법률적 박해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중의 마음이 앞으로도 계속 이런 상태를 유지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과거 오랫동안 사람들은 법적 처벌을 한번 받고 나면 사회적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이런 현실적인 두려움이 너무 컸기 때문에 영국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의견을 자유롭게 공표하기가 어려웠다. 다른 여러 나라에서 법적 처벌을 유발할지도 모르는 생각을 털어놓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던 것이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여론이 법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지닌다. 밥벌이를 잃는 것은 물론, 자칫하면 철창에 갇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직접적으로 못되게 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고약하다.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셔야 했지만. 그가 남긴 철학은 하늘의 태양처럼 높이 떠올라 온 인류의 지적 세계를 찬란하게 밝히고 있다. 그 옛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오늘날에는 기독교가 우람하고 가지 넓은 거목으로 성장해, 그렇고 그런 다른 교리들을 압도하고 있다. 우리의 사회적 불관용은 사람을 죽이거나 어떤 생각을 뿌리째 잘라버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관용 앞에서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모습으로 위장하게 된다. 또는 사람들에게 자기 생각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꺼리게 된다. 영국의 경우, 10년 또는 세대 단위로 따져보면 이단적인 생각의 입지가 눈에 띄게 크게 위축되거나 반대로 강화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처음 발상지를 중심으로 사상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쉬지 않고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태를 대단히 만족스럽게 여긴다.
기존 질서의 큰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지성 세계가 평화를 누리도록 해주는 편리한 방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지적 화평을 위해서는 인간 정신의 도덕적 용기를 모두 희생시켜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저 상식적인 것을 따라가는 사람이나 진리를 멋모르고 추종하는 사람만 남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은 이미 존재하는 큰 원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일들, 다시 말해 굳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자명한 소소한 구체적 문제들에 자신의 생각과 관심을 집중시키게 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자유롭고 거침없이 생각의 날개를 펴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자기 의견을 갖는 것은 지성과 판단력 개발에 도움이 된다. 지성을 단련시키는 데 가장 중용한 변수를 꼽으라면 단연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의 근거를 학습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각자 무엇을 믿든지 간에, 그것이 자신이 반드시 정확하게 알지 않으면 안 되는 주제라면, 적어도 상식적 수준에서 제기되는 비판에 대해서는 제대로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생각의 차이가 생기는 분야에서는 상반된 두 의견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다음에 진리를 찾아야 한다. 심지어는 자연과학에서도 동일한 사실에 대해 다른 설명이 제기될 수 있다. 그래서 지동설 대신에 천동설을, 산소 대신에 플로지스톤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 왜 다른 주장이 진리가 될 수 없는지 증명해 보여야 한다. 이것이 증명되고 그 증명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의 근거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도덕이나 종교, 정치, 사회관계, 그리고 삶에 관한 문제 등 무한히 복잡한 주제를 다룰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그저 자기가 전공하는 분야에 대해서만 아는 사람은 실은 그 분야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사람이 제시하는 논거가 상당히 탄탄하고 따라서 다른 사람이 쉽게 공박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자세히 알고 그 장단점을 꿰고 있지 않으면 왜 자신의 주장이 더 타당한지 설명하기 어렵다. 이럴 경우 아무 판단도 하지 않은 것이 차라리 더 합리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권위 있는 전문가의 말을 따르거나, 보통 사람들이 하듯이 가장 마음이 끌리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상대방의 주장을 경청하더라도,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론가들이 그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나름대로 각색해서 정리한 근거를 듣게 되면 별다른 효과가 없게 된다. 그러면 진정한 토론이 불가능해진다.

상대방이 왜 그런 주장을 펴는지 그 핵심을 알기 어려운 것이다. 실제 그런 생각을 하고 있고 온 힘을 다해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강조하는 내용 가운데 가장 그럴듯하고 가장 설득력 있는 부분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의 진실을 가려내기 위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움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대하는 진리를 결코 얻을 수 없다.
도덕과 인간의 문제에 대해 진실한 지식을 얻으려면 이런 자세가 필수적이다. 진리는 세상의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런 진리를 찾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도덕과 인간을 둘러싼 각종 문제에 대해 모든 사람이, 심지어 악마의 편에 선 것처럼 보이는 사람까지도, 자유롭게 온갖 논리를 동원해서라도 자기주장을 펼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사안이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다면서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인 악습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의 절반은 그런 버릇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어떤 작가는 “확정된 결론은 깊은 잠에 빠진다.” 고 말했는데, 정말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인간의 역사가 발전하면서 더 이상 논쟁과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이론은 당연히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가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인간의 행복이 결정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심각한 문제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의문이 줄어든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가 확정되어가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잘못된 의견이 그렇게 확고해지면 위험하고 나쁜 영향을 주겠지만, 참된 생각이라면 그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우리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입장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한 진리에 대해 더 생생하고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그 진리가 보편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이런 소중한 기회를 잃게 된다면, 그로 인해 얻는 것도 있겠지만 잃는 것도 만만치 않다.
오늘날에는 긍정적인 진리를 찾아내기보다는 이론상의 약점이나 실천상의 과오만 지적하는 부정적 논리를 좋지 않게 보는 것이 하나의 시대적 조류가 되고 있다. 이런 부정적 비판은 궁극적인 결과의 측면에서 본다면 확실히 보잘것없다. 그러나 이것은 이름값을 하는 모든 긍정적인 지식이나 확신을 획득하는 데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더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사람들이 이제 다시 그런 부정적 논리에 체계적으로 숙달되지 않으면 위대한 사상가가 나오기 힘들다.

다양한 견해들이 우리에게 이득을 주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를 아직 이야기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가지 가능성만 검토해왔다. 기존의 통설이 틀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와 다른 의견이 진리일 수 있다. 또는 통설이 진리일 경우, 그 반대 의견은 오류일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진리와 오류 사이의 논쟁은 진리를 보다 분명히 이해하고 또 깊이 깨닫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이다.
그러나 서로 대립하는 두 주장 가운데 하나는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틀린 것으로 확연히 구분되기보다는, 각각 어느 정도씩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이럴 때 통설이 채우지 못하는 진리의 빈곳을 채울 수 있도록 그 통설에 도전하는 이설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감각을 통해 확인할 수 없는 주제에 관한 대중의 주장이 흔히 진리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거의 또는 전혀 없다. 그런 주장은 상황에 따라 진리를 더 많이 또는 더 적게 담고 있기는 하나 부분적으로만 옳을 뿐, 대체로 과장되고 왜곡되어 있다. 이단적 주장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억압받고 무시당한 진리들 가운데 일부이다. 이런 주장은 자신을 억눌러온 족쇄를 벗어나 통설 속에 들어 있는 진리와 화해를 모색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적으로 간주하여 일전을 벼르면서 자신만이 유일 진리하고 선포한다. 인간 정신이 언제나 일면성으로 넘쳐났고 다면성에 대한 관심은 그야말로 예외적 상황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후자의 경우가 더 빈번하게 발생했다.

따라서 사상 혁명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진리의 한 부분이 떠오르면 다른 부분은 사라지는 경우가 흔하다. 진보라는 것도 진리를 새로 덧붙이기보다는 대부분의 경우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진리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개선도 기본적으로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진리에 대한 욕구가 더 커지고 그것이 시대의 필요에 더 잘 부응한다면, 그것이 바로 개선인 것이다. 다수가 받아들이는 의견이 비록 올바른 기초 위에 서 있을지라도 이처럼 부분적인 진리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런 통설이 빠뜨리고 있는 진리의 어떤 부분을 구현하는 다른 모든 생각은, 그것이 아무리 많은 오류와 큰 혼돈을 초래하더라도, 마땅히 소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사람들이 억지로라도 양쪽 의견을 모두 듣게 되면 언제나 희망이 있다. 그렇지 않고 오직 한쪽만 듣게 되면, 오류가 편견으로 굳어지고 반대편에 의해 거짓으로 과장되면서 진리 자체가 진리로서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네 가지 분명한 이유 때문에 다른 의견을 가질 자유과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인간의 정신적 복리를 위해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내용을 다시 한번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첫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모든 의견은, 그것이 어떤 의견인지 우리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진리일 가능성이 있다. 이 사실을 부인하면 우리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음을 전제하는 셈이 된다.
둘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일정 부분 진리를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일이 아주 흔하다. 따라서 대립하는 의견들을 서로 부딪치게 하는 것만이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셋째, 통설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렵고 진지하게 시험을 받지 않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 진리의 합리적 근거를 그저 하나의 편견과 같은 것으로만 간직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네 번째로, 그 주장의 의미 자체가 실종되거나 퇴색되면서 사람들의 성격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선을 위해서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 채, 이성이나 개인적 경험에서 그 어떤 강력하고 진심어린 확신이 자라나는 것을 방해하고 가로 막으면서, 하나의 헛된 독단적 구호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3) 개별성 : 행복한 삶을 위한 중요한 요소

이제부터는 똑같은 이유에서, 그에 따르는 모든 위험과 불확실성을 본인 스스로 책임지는 한, 다른 사람에게서 일체의 물리적. 도덕적 방해를 받지 않고 각자 생각대로 행동하는 자유가 필요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진다는 단서는 두말할 것 없이 매우 중요하다.
행동하는 것이 의견을 가지는 것처럼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옳지 못한 행동을 하도록 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의견의 자유도 무제한적으로 허용될 수는 없다.
어떤 종류의 행동이든지 정당한 이유 없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강압적인 통제를 받을 수 있으며, 사안이 심각하다면 반드시 통제를 받아야한다. 나아가 필요하다면 사회 전체가 적극적으로 간섭해야한다. 이렇게 되면 개인의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받게 된다. 그러나 그저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일에 대해 자기 스스로의 기분과 판단에 따라 행동한다면, 각자가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책임 아래 남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기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     

인간이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 유익하듯이, 삶의 실험도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각자의 개성을 다양하게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 누구든지 시도해보고 싶다면, 자기가 원하는 삶의 양식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실천적으로 증명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에게 중대하게 연관되지 않는 이에 대해서는 각자의 개별성이 발휘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원칙을 지켜나갈 때 부딪히게 되는 가장 어려운 문제는,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수단에 대한 이해 부족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에 대한 보통 사삼들의 무관심이다. 만일 개별성의 자유로운 발달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특별한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고, 문명, 지식, 교육, 문화 등과 같은 용어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요소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그런 모든 것들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요조건임을 깨닫는다면, 자유를 가벼이 여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개별성이 중요하다는 것은 안다. 문제는 개별성에 어느 정도 가치를 부여할 것인가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다른 사람을 따라하기만 하면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기가 살아가는 방식에, 그리고 본인이 관심을 기울이는 일에, 자기 자신의 판단에는 고유한 특성을 최소한 어느 정도는 반영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확인된 결과에 대해 알고, 또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젊은 시절에 가르침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적당히 나이가 들어 경험을 자신의 방식대로 이용하고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자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조건이라고 하겠다.
사람의 지각, 판단, 특이한 감정, 정신 활동 그리고 심지어 도덕적 선호와 같은 능력들도 오직 선택을 거듭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단련될 수 있다. 그저 관습이 시키는 대로 따라하기만 하는 사람은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무엇이 최선인지 구분하는, 또는 가장 좋은 것에 대해 욕망을 느끼는 훈련을 하지 못하는 셈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자기 자신의 분명한 이성적 판단에 따라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이성은 튼튼해질 수 없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입장을 취한다면 이성이 오히려 약화되고 만다. 그리고 만일 자기 자신의 감정이나 성격과 다른 방향으로 행동하게 되면, 그것은 감정과 성격을 적극적이고 활기 넘치게 하기보다는 소극적이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큰 요인이 된다.

인간의 욕망이 너무 강해서 나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양심이 약한 것이 문제이다. 어떤 사람의 욕망과 감정이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하고 더 다양하다는 것은, 분명히 말하자면 인간으로서 타고난 자질이 더 풍부하고 따라서 남보다 나쁜 일을 더 많이 할 수도 있지만, 대체로 그보다는 좋은 일을 할 가능성이 더 큰 셈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강력한 충동이란 곧 정력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정력은 나쁜 데 이용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게으르고 무덤덤한 사람보다는 정력적인 사람이 좋은 일도 더 많이 할 수 있는 법이다. 사회는 이런 일을 유도하여 영웅을 배출할 수 있는 터전을 헐어버리지 않음으로써 할 일을 하고 필요한 이익도 보호하는 것이다.
누군가 자기 고유의 색깔을 띤 강렬한 충동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굳센 의지의 통제 아래에 둘 수 있다면, 그는 정력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아직 초기 발전 단계에 있는 사회에서는 이런 힘들이 사회가 규율. 통제할 수 있는 한도보다 더 강력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자발성과 개별성이 지나쳐 사회적 규율을 유지하는 데 애를 먹는 때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한 충동을 가진 사람들을 통제 규칙에 복종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큰 문제였다. 그래서 교황이 황제들과 힘겨루기를 했듯이, 각 개인의 성격을 통제하기 위해 삶의 구석구석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명분 아래 법과 규율이 개인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가 개별성을 훨씬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의 충동과 선호의 과잉이 아니라 반대로 그런 것의 결핍이 인간 존재를 위협하는 시대가 되었다. 과거에는 지위가 높거나 세력이 강한 자들이 힘이 넘친 나머지 법과 제도에 끊임없이 저항했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에서는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에서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모두가 적대적인 시선과 가공할 만한 검열의 위협 속에 살고 있다.
그 결과, 다른 사람에게 관계되는 일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조차, 개인이나 가족을 막론하고, 자신이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자기 성격과 취향에 맞는 것은 무엇인지, 또는 어떻게 해야 자신의 타고난 최고. 최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고 최대한 키울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자신의 위치에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와 비슷한 신분의 사람, 또는 경제적 여건이 비슷한 사람이 주로 무엇을 하는지, 자기보다 높은 위치의 사람이 즐겨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한다. 이는 관습적인 것을 빼고 나면 그들에게는 따로 자기 고유의 기질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 정신 자체가 굴레에 묶여 있는 것이다. 재미삼아 하는 일도,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먼저 살피고서 따라하고, 군중 속에 묻혀 들어가기를 좋아한다. 선택도 그저 사람들이 흔히 하는 것 가운데 고르는 데 국한된다. 독특한 취미나 유별난 행동은 범죄처럼 기피 대상이 된다. 자기 자신의 타고난 성질을 따르지 않다보니 마침내 따라야 할 각자 고유의 성질까지 없어지게 된다. 그들이 지닌 인간 능력들은 시들고 죽어버린다.

인간은 개인에 따라 서로 다른 것들을 획일적으로 묶어두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아래 잘 가꾸고 발전시킴으로써 더욱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다. 각자의 개별성이 발전하는 것과 비례해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되며, 또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도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자기 존재에 대해 더욱 충만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각 개인이 이처럼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면, 개인들이 모인 사회 역시 더욱 의미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지금 까지 개별성이 발전과 같은 것이고, 오직 개별성을 잘 키워야만 인간이 높은 수준의 발전에 이르게 되거나 또는 이를 수 있다고 강조했으니, 이제 이쯤에서 내가 주장하는 바를 정리할까 한다.
자유를 열망하지 않고 자유의 향기에 자신을 맡기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발전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자유를 향유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도 지적 측면에서 무언가 이득을 얻게 되리라는 사실을 더욱 자세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
나는 그들이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배울 것이 있으리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우리 삶에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고 한때 진리였던 것이 이제 더 이상 진리가 되지 못하는 때를 간파하는 사람만 소중한 것은 아니다. 남이 하지 않는 관례를 처음 만들고, 더욱 발전된 행동과 더 수준 높은 취향과 감각을 선보이는 사람도 필요하다.

최고의 이론과 관례라는 것들도 너무 쉽게 도식적인 것으로 전락하는 경향이 있다. 비잔틴 제국이 보여주듯이 문명자체가 죽어버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천재는 언제나 소수일 수밖에 없다. 이는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언제나 변함없을 진리이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살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천재는 오직 자유의 공기 속에서만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다. 만일 천재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강한 성격에 힘입어 자신들을 둘러싼 족쇄들을 깨뜨려버릴 수 있다면, 이들이야말로 자신들을 평범함 속에 가두어버리는 데 실패하고 만 사회를 위한 푯대가 될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아무도 천재의 중요성과 그들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 문제에 무관심하다. 나는 이런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이에 대해 힘주어 강조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천재에 대해 아주 좋게 생각한다. 생각과 행동의 독창성에 대해 칭찬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그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독창성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독창적이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독창성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여기서 천재 같은 사람이 자기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갈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저 그런 정도의 능력밖에 갖지 못한 다수 보통 사람들의 주장이 점점 압도적인 힘으로 온 세상을 지배하는 요즘 같은 때에는, 널리 통용되는 의견의 잘못을 지적하고 시정할 수 있도록 뛰어난 사상을 지닌 사람들의 개별성이 더욱 발휘되어야 한다. 소수의 뛰어난 사람이 대중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자유롭고 거리낌 없이 행동하고 살아가도록 장려되어야만 한다.

오늘날에는 무언가 남과 다른 것을 일절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여론의 전제가 심하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색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그러한 전제를 부셔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강한 성격이 충만할 때 거기에서 남다른 개성이 꽃핀다. 그리고 한 사회 속에서 남다른 개성이 자유롭게 만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일반적으로 그 사회가 보여주는 탁월한 재능과 정신적 활력 그리고 도덕적 용기와 비례한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에는 극히 일부 용기 있는 사람들만이 그런 개성을 발휘할 뿐이다. 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중 여론은 조금이라도 개별성을 발휘하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는데, 현재 그것이 흘러가는 방향에는 한 가지 특성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지적인 면뿐만 아니라 취향도 덤덤한 편이다. 그들은 취미나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대한 욕구가 그리 강렬하지 않기 때문에, 관례를 벗어난 것은 기피하려 하고, 다른 사람이 관습과 어긋나게 행동하려 들면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관습의 전제가 곳곳에서 인간의 진보를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로 등장하면서, 관습보다 더 나은 것을 지향하는 기질을 끊임없이 박해하고 있다. 개선의 정신과 자유의 정신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개선을 원치 않는 사람에게 개선을 강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선을 가능하게 만드는 절대적이며 영원한 유일한 요소는 자유이다. 자유가 허용되는 곳에서만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독립적인 개선의 요소가 뿌리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전 원리는, 그것이 자유 또는 개선에 대한 애착 가운데 어떤 형태를 띠든, 관습의 횡포에 적대적이다. 관습의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포함하지 않으면 발전 원리라고 할 수 없다.

사람들을 똑같게 만드는 것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우선 이 시대의 정치적 변화가 그것을 부추긴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끌어 올리고 높은 사람들은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유사성을 촉진시키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국을 포함한 다른 자유국가에서 여론이 국가를 움직이는 중요한 변수로서 절대적으로 확실히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모두가 평등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대중들도 나름대로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적극적인 생각이 확산되면서 정치 일선에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대중의 의지에 맞선다는 생각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그 결과 통념을 뛰어넘으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그 어떤 사회적 후원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대중이 수로 밀어붙이는 것에 대항하면서 대중과 다른 자신만의 생각이나 경향을 지키려는 강력한 사회 세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모든 이유들이 서로 합쳐져서 개별성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인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것이 비록 상황을 더 낫게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다들 똑같은 것보다는 낫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사정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사람들을 아직 완벽하게 하나로 묶지 못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개별성의 중요성을 환기시킬 수 있는 최적의 시기이다.
우리 삶의 획일적인 하나의 형태로 거의 굳어진 뒤에야 그것을 뒤집으려 하면, 그때는 불경이니 비도덕적이니, 심지어 자연에 반하는 괴물과도 같다는 등 온갖 비난과 공격을 감수해야 한다. 사람들은 잠시만 다양성과 벽을 쌓고 살아도 순식간에 그 중요성을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4) 사회가 개인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의 한계

사회에서 보호받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이 혜택을 받은 만큼 사회에 갚아주어야 한다. 또 사회 속에서 사는 한, 다른 사람들과 공존하기 위해 일정한 행동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런 행동 규칙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첫째, 다른 사람들의 이익, 즉 명시적인 법 규정 또는 암묵적인 이해에 따라 개인의 권리로 인정되어야만 하는 특정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둘째, 각자는 사회를 방어하는 데 또는 사회 구성원이 공격이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데 필요한 노동과 희생 가운데서 자기 몫을 감당해야 한다. 이런 의무를 거부하는 개인이 있으면 사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강제할 수 있다.
어느 누구의 어떤 행동이든 다른 사람의 이익을 부당하게 침해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사회가 그에 대해 사법적 권한을 가진다.
다른 사람과 관계되는 행동이라면 대부분의 경우 일반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개인 고유의 문제라면 그 사람의 개별적 자발성에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본인이 최종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 물론 다른 사람의 충고나 경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이런저런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실수라는 것도, 타인이 보기에 그에게 이익이 되는 듯해서 당사자의 뜻을 무시한 채 어떤 일을 강제할 때 발생하는 손실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 대해 품고 있는 유쾌하지 않은 우리의 기분을, 그 사람의 개별성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개별성을 발휘한다는 차원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드러낼 권리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의 행동거지나 대화 내용이 주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것 같으면, 그를 조심해야 한다고 주위에 알려주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며 어떻게 보면 의무일 수도 있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만 문제가 되고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의 이익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어떤 행동과 성격 때문에 무언가 감수해야 하는 불이익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비우호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데 대해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뿐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남에게 해를 주는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달리 취급할 수밖에 없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 정당한 권리 없이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고 타격을 입히는 것, 거짓으로 또는 표리부동하게 사람을 대하는 것, 불공정하게 또는 관대하지 못한 방법으로 남에게 이득을 얻는 것, 심지어는 다른 사람이 위험에 빠져 있는데 이기적인 마음에서 모른척하는 것 등, 이 모두는 도덕적 비난 또는 심각할 경우에는 도덕적 징벌이나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직접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그런 행동을 유발하는 기질도 비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잘못하면 혐오감으로까지 번질 수도 있는 비난의 대상이 된다.

잔인한 기질, 악의적이고 나쁜 천성, 모든 정념 가운데서 가장 반사회적이고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할 질투, 위선과 불성실 그리고 별것도 아닌 일에 화를 곧잘 내는 것, 옳지 못한 대접을 좀 받았다고 지나치게 분노를 느끼는 것, 다른 사람에게 위세 부리기를 즐기는 것, 자기 몫 이상을 얻으려고 욕심을 부리는 것, 남을 깎아내림으로써 만족을 얻는 자존심, 특히 자기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생각하고 모든 문제를 자기 입맛대로 결정하는 이기심 등은 모두 부도덕한 것으로 나쁘고 혐오스러운 성격을 만든다. 이러한 것들은 앞에서 말한 자기에게만 관계되는 결점과는 다르다. 이런 결점은 당사자가 비교적 어리석다거나 인간적 존엄과 자존심을 결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될 수 있기는 하나,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를 위반하지 않는 한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본인 스스로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주변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규칙을 위반했다면, 사회는 모든 구성원들을 보호해야 하므로, 그에게 응징을 가해야 하고 명백한 징계의 표시로 고통을 주어야 하며 그 처벌이 충분히 무겁도록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행동이 다른 개인이나 공공에게 명백하게 해를 끼치거나 아니면 해를 가할 위험성이 분명할 때, 그 행동은 자유의 영역에서 벗어나 도덕이나 법률의 적용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순전히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행동을 했지만 그 결과 공직에 있는 어떤 사람이 자기 할 일을 제대로 못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사회적 범죄를 저지른 셈이다. 그저 술에 좀 취했다고 해서 벌을 받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군인이나 경찰이 근무 시간 중에 술에 취하면, 이런 행위는 처벌 대상이 된다.

적지 않은 수의 구성원들이 장기적인 계획 아래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그저 어린아이들처럼 산다면, 이런 일에 대해서는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 사회는 구성원들을 교육시키는 이런 모든 막강한 힘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다수 의견을 내세워 지배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이나 경멸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은 반드시 자연적으로 처벌을 받게 하는 힘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에 덧붙여, 사회가 개인의 사적인 문제에 대해서까지 명령하고 복종을 요구하는 권한이 필요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사회가 순전히 개인적인 행동에 대해 간섭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런 간섭이 잘못된 곳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사회적 윤리나 타인에 대한 의무 같은 문제를 놓고 공공 여론, 즉 압도적 다수의 의견이 가끔씩 틀리기는 하지만 옳을 때가 더 많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문제에 대해 자신들의 이익, 그리고 어떤 특정한 행동 양식이 실제로 실천에 옮겨질 경우 자기들에게 어떤 영행을 미칠지에 관해서만 판단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다수 의견이라 하더라도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관계되는 행동에 대해 하나의 법으로서 군림하는 의견은, 옳을 때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틀리는 경우도 많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행동은 전부 자신에게 해를 주는 것으로 생각하며 극단적인 거부감을 숨기지 않는다. 마치 몹시 완고한 신자가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감정을 무시한다고 비난을 받자 오히려 그들이 이상한 의식과 교리를 고집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무시한다고 반박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회적 권리’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모든 면에서 각 개인은 마땅히 해야 할 바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모든 사람이 이를 요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사회적 권리를 지닌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비록 사소한 것이라도 어기면 그것은 곧 나의 사회적 권리를 침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자유에 대한 어떤 형태의 침범도 정당화되지 못할 것이 없다. 의견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마음에 비밀스럽게 담아두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유에 대한 그 어떤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다. 유해한 어떤 생각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순간 ‘연대’가 나에게 허용한 사회적 권리가 전부 침범 당하게 된다. 이 주장은 모든 사람이 각각 상대방의 도덕적, 지적, 심지어는 신체적 완성에 대해서까지 깊은 이해관계를 가지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 자신의 관점에 따라 그 완성의 정도를 판단 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5) 현실적용

이 책에서 내가 주장하는 원리들이 정부가 하는 여러 가지 일이나 도덕 문제와 관련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려면, 우선 사람들이 구체적인 현실 문제에 대한 토론의 기초로서 그 원리들을 더욱 폭넓게 받아들여야 한다.

첫째, 각 개인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이해관계에 해를 주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칠 때 사회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떤 사람의 행동이 불만스럽거나 옳지 않게 보일 때, 당사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도록 정당하게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충고, 훈계, 설득 또는 상대해주지 않고 피하는 것뿐이다. 
둘째, 다른 사람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당사자가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 또 사회가 사회 전체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것 같으면, 그런 행동에 대해 사회적 또는 법적 처벌을 가할 수 있다. 
우선,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힐 때, 또는 손해를 입힐 가능성이 있을 대만 사회의 간섭이 정당화되기는 하지만. 그런 간섭이 언제나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사람이 살다보면 합법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그러므로 합법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아픔이나 상실감을 줄 수 있고, 또 그들이 충분히 희망을 걸어봄직한 일들을 무산시키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너무 많이 몰리는 직종이나 경쟁시험에서 성공을 거두는 사람, 그리고 서로 원하는 대상을 놓고 다툰 결과 선택을 받는 사람은 모두 상대방의 패배를 통해, 그리고 상대방의 소득 없는 노력과 실망에 반해서 과실을 따게 되는 것이다. 결과가 어떻든 각자가 이런 방식으로 자기가 원하는 목표를 방해받지 않고 추구하는 것이 인류 전체에 이익이 된다. 달리 말하면, 사회가 경쟁에서 진 쪽을 편들어 결과를 무효 처리 할 수 있는 법적 또는 도덕적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경쟁에서 이긴 쪽이 사회 전체의 이익과 어긋나는 방법을 쓴 경우에만 간섭할 수 있는 것이다.

한 국가의 가치는 궁극적으로는 그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들의 가치이다. 국민을 자기 손으로 좌우할 수 있는 온순한 앞잡이로 만들려고 하는 국가는 비록 그것이 국민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국민이 위축되어 있다면 어떠한 위대한 일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국가가 모든 것을 희생시켜 이룩해 놓은 완전한 관료 기구도 그 기구의 원활한 운행을 기하기 위해 배제해 버린 바로 그 활력의 결여 때문에 결국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3. 생각해 볼 문제

☞밀은 한 사람이라도 전체에 대한 반대 의견이 있다면 그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리석은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를 막아야 하는지 아니면 그대로 두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정부의 역할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사회는 행복한 사회라고 자유주의자들은 말한다. 이러한 관점이 복지 국가를 지향하는 국가에서는 어떤 문제점을 갖는지 우리 주변의 사례를 통해 생각해 보자.


4. 인상 깊은 글귀

- 사상 혁명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진리의 한 부분이 떠오르면 다른 부분은 사라지는 경우가 흔하다. 진보라는 것도 진리를 새로 덧붙이기보다는 대부분의 경우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진리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 사회에서 보호받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이 혜택을 받은 만큼 사회에 갚아주어야 한다. 또 사회 속에서 사는 한, 다른 사람들과 공존하기 위해 일정한 행동규칙을 준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 다른 사람이 믿으니까 자기도 믿는 경우도 그렇지만, 그저 어떤 일을 다른 사람이 하니까 따라한다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자기 자신의 분명한 이성적 판단에 따라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이성은 튼튼해질 수 없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입장을 취한다면 이성이 오히려 약화되고 만다.

- 지혜의 화신으로,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이름이 드높은 훔볼트Wihelm von Humboldt가 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에 대해 독일 바깥에서는 그 뜻을 아는 사람조차 드물다. "인간의 목적, 또는 막연하고 덧없는 욕망이 아니라 영원하거나 변함없는 이성은 우리에게, 각자의 능력powers을 완전하고 전체적으로 일관되게 최대한, 그리고 가장 조화 있게 발전시킬 것을 명령한다." 그러므로 그는 "각자의 개별성에 맞게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모든 사람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특히 다른 사람을 이끌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그 목적을 향해 언제나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료정리:곽미희 mihee1984@hanmail.net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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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