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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29. 16:45

에밀(루소)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29. 16:45

에밀(루소)
Ⅰ. 루소(Rousseau, Jean Jacques : 1712∼1778)

*프랑스 계몽주의의 대표적 사상가, 철학자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계공의 둘째 아들로 출생(1712년)
*어머니의 죽음(9일)과 아버지의 가출(10세)
*가출과 방랑 생활(16세)→바랑 부인과의 만남
*파리 생활과 백과전서 학파와의 교류(30세)
*테레즈와의 동거 생활(33세)
*현상 논문 "과학 예술론" 당선(37세)
*오페라 "시골 점쟁이" 상연(40세)
*"인간 불평등 기원론"출판(43세)
*교육론 "에밀"과 "사회 계약론"출판(50세)
  →파리 고등 법원의 체포령과 도피 생활
*볼테르의 "시민의 감정" 발표(52세)
  →루소가 자식 버린 사실을 폭로
*"참회록"저술(54세)과 테레즈와 정식 결혼(56세)
*1778년 요독증 재발로 사망(66세)


Ⅱ 시대배경-루이 15세

  - 루이 15세 Louis XV (1710.2.15~1774.5.10)
  루이 14세의 증손. ‘친애왕’이라 불렸다. 5세 때 왕위에 오르자 오를레앙공 필리프가 1723년까지 섭정하였다. 섭정 때에는 루이(14세)때의 전제에 대한 반동으로 자유와 해방감에 싸였고 언론이 활발해졌으며 신학 대신 철학이 일어났는데, 몽테스키외, 볼테르 등이 정부나 제도에 대한 공격에 선봉을 섰다. 이 시대의 모순은 그대로 다음 시대로 이어져 점차 프랑스를 혁명의 길로 몰고 갔다.


Ⅲ 에밀 - 자연으로 돌아가라

에밀은 그의 근본이념인 동시에 사색의 출발점인 본연의 인간, 즉 자연인의 실현에 대한 방법을 모색한 작품으로서, 새로운 인간에 대한 이념구축과 새로운 인간의 형성에 대한 이론적 탐구를 위한 작품이다.

<에밀, 또는 교육에 대하여>라는 원제가 말해주듯이 에밀은 이야기 식으로 쓰인 교육개혁론이며, 동시에 문명비평론이기도 하다. 그가 서문에 “독자는 교육론이라기보다는 어느 한 환상가의 몽상을 읽는 기분일 것이다.”라고 밝혀놓은 것처럼, 이 작품은 유토피아적 세계관, 비현실적, 이론적 성격을 풍기고 있다.

루소는 그의 <고백록>에서 “에밀이 완성되기까지는 20년간의 사색과 3년간의 세월이 필요했다.”고 회상하고 있는데, 그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오랜 세월동안 끊임없이 계속되어 온 것이다. 특히 루소와 그의 교육론과의 관계에는 매우 특이하고 역설적인 부분들이 있는데, 가장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은 전혀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 같은 교육의 결여야말로 그에게 교육론의 연구에 대한 소망을 품게 하였고, 자신이 받지 못했던 이상적인 교육과 교사의 상을 그려내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그로 하여금 교육론에 집착하게 한 동기는 유명한 기아(棄兒)사건이다. 그는 1746년, 6년 가까이 동거했던 테레즈 르 바쇠르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아이를, 낳자마자 차례로 고아원에 보내버렸던 것이다. 당시 사정으로 보아 그 같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루소 자신은 이에 심각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고, 그로 인해 에밀과 고백록을 통해 참회해보고 싶은 속죄의식을 느꼈던 것 같다.

요컨대 <에밀>은 교양소설 형식의 교육론이다. 이 작품 속에는 루소의 모럴리스트적인 성격이 나타나 있고, 지식 중심의 교육보다는 인간교육론, 체육, 인격도야를 포함하는 폭넓은 교육을 중시하는 사상과 정념교육을 중시하는 루소의 독특한 교육론이 피력되어 있다.

루소가 그의 평생을 통해 다루었던 주제는 너무나 광범위한 것이지만, 그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핵심적인 사상은 <에밀>에서와 같은 ‘인간회복’이었다. 인간은 자연상태 아래서는 자유롭게 행복하고 선량했으나, 인간 스스로고 만든 사회제도나 문화에 의해 부자연스럽고 불행한 상태에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다시 한 번 참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여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Ⅳ 인상적인 구절

자연을 보라. 그리고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따르라. 자연은 갖가지 시련으로 아이들을 단련시키고 일찍부터 고통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하나 둘씩 솟아나는 이는 그들에게 열을 주고 심한 복통은 경련을 일으킨다. 이런 고통을 이겨내는 아이들의 몸에는 저항력이 생겨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며, 그리하여 생명의 근원은 확고해진다. 이것이 곧 자연의 법칙이다.

끊임없이 고뇌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자기 생명을 보존하려는 노력 자체가 고통인 것이다. 다른 고통에 비하면 육체적 고통은 견디기 쉬워, 육체적 고통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절망을 낳는 것은 정신적 고통이기 때문이다.

부유한 아버지가 너무 바빠서 아이들을 돌볼 수 없다고 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는 자신이 맡아야 할 온갖 보살핌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버린 것이다. 돈만 아는 사람이여! 당신은 자식에게 돈으로 아버지를 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을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스승이 아니라 돈으로 산 고용인일 뿐이다. 그 사람은 당신의 아들을 곧 정신적 노예로 만들어놓을 것이다.

아이는 병 고치는 법은 몰라도 아프다는 게 어떻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이러한 것은 의술의 부족함을 메워주며 훨씬 더 좋은 성공을 거두게 한다. 이것은 자연의 기술이다. 동물은 앓을 때 말없이 견디면서 꼼짝 않는다. 병들었을 때 인간보다 나약한 동물은 없다.

우리가 아이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는 것은 아이를 겁쟁이로 만드느냐 아니면 용감한 아이로 만드느냐 하는 문제가 된다. 따라서 아이의 교육은 그 아이가 말할 줄 알고 알아들을 수 있기 전에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아이로 하여금 새로운 것들, 흉하고 징그럽고 괴상한 동물들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하기를 바란다.

아이에게서 서둘러 말을 시키는 데서 오는 가장 큰 폐단은, 아이들이 말하는 최초의 단어들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뜻도 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는 모르는 그 말들이 우리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아이의 어휘를 가능한 한 줄이도록 힘쓰라. 아이가 관념보다 많은 낱말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아이들을 말을 하기 시작하면 전보다는 덜 울게 된다. 이러한 진보는 당연하다. 즉 하나의 언어가 다른 말로 바뀐 것이다. 어린이가 말로써 괴로움을 표현할 수 있다면 구태여 고통을 울음소리로 표현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약 그 시기에도 아이가 여전히 운다면 그것은 주위 사람들의 잘못이다.

아이가 넘어져서 머리에 혹이 생기고, 코피가 나고, 손가락을 베었더라도 나는 당황한 모습으로 그의 곁에 달려가지 않고 잠시 동안 태연하게 있을 것이다. 이미 상처는 난 것이다. 아이는 당연히 참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당황하면 아이는 겁을 먹고 더욱 고통스럽게 느낄 것이다. 다쳤을 때 고통을 주는 것은 상처보다는 공포심인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는가? 그것은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의 욕망은 끊임없이 커져서 멀지 않아 여러분은 들어주고 싶어도 힘이 모자라서 들어줄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주거나 줄 수 있는 모든 도덕적 교훈은 대개가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선생님 그런 짓을 하면 안 돼.
아  이 왜 안 돼요?
선생님 그건 나쁜 일이기 때문이지.
아  이 나쁜 일이라뇨? 무엇이 나쁜 일인데요?
선생님 그건 네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야.
아  이 그런 일을 하면 무슨 나쁜 일이 생기나요?
선생님 말을 듣지 않아서 벌을 받게 된다.
아  이 그럼 남에게 들키지 않게 하지요.
선생님 누군가는 보게 돼.
아  이 나는 숨길 텐데요.
선생님 누가 너에게 캐어물을 거야.
아  이 그럼 나는 거짓말을 하지요.
선생님 거짓말을 하면 안 돼.
아  이 왜 거짓말을 하면 안 돼요?
선생님 그건 나쁜 일이니까.

만일 어학 공부가 그저 단순히 단어의 공부, 이를테면 그 낱말들을 나타내는 문자나 음의 연구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런 공부는 아이들에게 적합하다. 그러나 언어란 그 기호가 바뀌면 그것이 표현하는 관념도 바뀐다. 정신은 언어에 의해서 형성되고 관념으로써 이루어진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경향이라는 증거의 하나는, 모든 아이들이 유제품이나 과자나 과일 같은 식물성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 본래의 구미를 변질시키지 않고 아이들을 육식가로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동물들을 너 자신이, 즉 쇠붙이나 칼을 쓰지 말고 너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여라. 사자나 곰처럼 손톱으로 할퀴고 물어 뜯어서 말이다. 아직 열이 식지 않은 살을 먹고 그 뜨거운 피를 마셔라. 너는 감히 이빨 사이에서 살아있는 고기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용기가 없는가? 어리석은 인간아! 너는 동물을 죽여놓고, 그 다음에야 그것을 먹는다. 죽은 고기는 또한 너에게 소름끼치게 할 텐데, 너의 창자는 그것을 견뎌내지 못한다. 불로 모양을 바꾸어야 하고, 삶거나 구워야 하며, 양념으로 변모시켜야 한다.

어린이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면, 그의 호기심을 길러주는 데 필요한 만큼만 간단히 대답하라. 그리고 어리석은 질문으로 여러분을 괴롭히려는 것처럼 보일 때는 즉시 대답하는 것을 중단하라. 그때는 이미 어린이가 문제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질문으로 여러분을 굴복시키려는 의도인 것이다.


자료정리:장광익 gwangik@paran.com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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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