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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존 스틸 고든 : 월스트리트 역사가로 「USA 투데이」와  「월스트리트 저널」등 유수 언론에 경제칼럼을 쓰고 있다. 지은 책 중에 「해밀턴의 은총」, 「미국의 비즈니스」가 특히 유명하다. 앞의 책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알렉산더 해밀턴이 어떻게 미국경제 시스템의 초석을 놓았고, 그것이 후세의 경제와 금융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다룬 것이다. 뒤의 책은 남북전쟁 이후 미국 기업들의 흥망성쇠를 해박한 지식과 유려한 글솜씨로 정리한 걸작이다.

* 옮긴이 소개

강남규 : 1994~2002년 「한겨레」신문 경제부, 국제부 등에서 일했고, 버밍엄대학교에서 ‘money, banking & finance'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 책 요약

1. 인간성이 사라진 곳 - 월스트리트의 탄생

네덜란드 인들이 식민지로 개척한 뉴암스테르담(뉴욕의 옛 이름)은 뉴잉글랜드의 영국인들이 가장 탐냈던 천혜의 항구였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이 도시의 개척 초기부터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30년 동안 계속된 두 나라의 쟁탈전의 승패와 이 도시의 장래를 결정지을 중요한 사건 ‘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52)’이 발생한다.

네덜란드 식민지 뉴암스테르담을 지배하고 있던 군인 출신 총독 페테르 스토이베산트(Peter Stuyvesant)는 영국의 공격을 막기 위해 목책(Wall)을 쌓고 뉴욕을 방어하려 하지만, 결국 영국군들에게 점령되고 말았다. 이로써 네덜란드의 뉴암스테르담은 영국 왕 찰스 2세의 동생이자 왕위 계승자인 요크공 제임스의 생일 선물로 진상되어. ‘뉴욕’으로 이름이 바뀐다.

스토이베산트의 목책은 군대 이동 통로로 쓰기 위해 목책 안쪽의 폭 30여 미터 부지 일부는 당시 가장 시급한 문제였던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를 건설하는 데 요긴하게 전용되었다. 이 도로가 바로 현재의 ‘월스트리트’가 된 것이다. 네덜란드 인들이 뉴욕에 남긴 또 다른 유산은 17C 초반 미국 자본주의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점이다. 네덜란드 인들은 은행, 증시, 신용, 보험, 유한회사 등의 개념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자본주의 금융과 상업 시스템으로 발전시켰다.

기존의 유럽인들은 신대륙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교회를 짓고 신앙생활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에 비해 뉴욕에 도착한 네덜란드인들은 교회 보다는 상점을 먼저 열었다. 이 때문에 뉴암스테르담은 17C 100년 동안 교회가 없었던 ‘불신자의 도시’였다. 미국의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뉴욕은 사악하고 위험한 곳으로 비추어지고 있고, 반대로 뉴요커들에게 그들은 독선적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재미없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또한, 월스트리트는 지금과는 달리 그때에는 업타운에 속했고, 뉴욕은 금융도시가 아닌 상업도시로써의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흑인노예들과, 허드슨 강 주변의 밀 그리고 고래 기름등이 거래되는 부산하고 활기찬 항구의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뉴욕이 금융 중심의 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는 1772년 초 뉴욕으로 이민 온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해밀턴은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 정부의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신생국 미국의 재정 문제를 해결한다. 해밀턴은 신생 조국의 금융과 경제 질서를 세우기 위해 세 가지 일(해밀턴 프로그램)을 추진한다. 첫 번째는 연방정부의 재원 조달을 위해 안정적인 조세 제도를 확립하는 것. 두 번째는 연방과 주정부가 전쟁 기간 동안 무분별하게 발행한 지불각서나 채권을, 낮은 이자율과 긴 만기 채권으로 교환해 연방정부의 부담을 경감시킨다. 세 번째 통화량을 안정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조직으로서 중앙은행을 설립하는 것.

해밀튼 프로그램은 미국 금융 시스템의 신뢰성을 높였고, 안정적인 화폐 공급을 통해 통화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제고했다. 과거 금융시장의 위험과 불안에 익숙한 투기세력과 브로커 등 플레이어들은 해밀턴의 금융 시스템하에 기회와 수익을 안정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금융시장에 유동성을 풍부하게 공급했을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인들로부터 물려받은 각종 투기 기법들을 활용해 돈을 벌어들였다. 뉴욕과 월스트리트가 하나로 통일되면서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다.

2. 선한 인간은 악당과 구분되어야 한다 - 금융시장 형성기의 월스트리트

미국의 여명기에 뉴욕 브로커들은 다양한 상품 중개를 맡았다. 한 브로커가 주식매매를 중개할 뿐만 아니라 사설 복권 사업체를 운영하기도 했으며 보험 상품도 중개했다. 해밀턴의 프로그램에 따라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앞 다투어 발행한 채권과, 은행들이 발행한 주식 등 각종 증권의 공급이 늘어나 시장의 거래량도 급증했고, 증권브로커들의 수익도 크게 증가했다.

이 브로커들의 매매 체결은 주로 커피하우스에서 비공식적으로 이루어 졌으나 1792년 초 공식화 되는데, 뉴욕의 주요 증권브로커들이 모여 장외거래를 중단하고, 4월 21일부터 새로운 경매를 열기로 합의한다. 더 나아가 “주식을 중개하는 우리 브로커들은 어떤 주식을 매매하더라도 매매 대금의- 0.25% 이하의 수수료는 받지 않기로 엄숙히 서약한다.”고 맹세까지 한다. 바로 뉴욕 증시의 역사적인 문헌인 ‘버튼우드 합의서(Buttonwood Agreement : 뉴욕 증권거래소의 기원)'가 그것이다. 개인 증권브로커 21명과 증권브로커 사무실 3곳이 이 합의문에 서명했다.

그런데 월스트리트가 금융으로써 외부의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경위는 미국 금융 투기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윌리엄 듀이가 등장하면서부터 이다. 그는 공매도와 저가공세를 통해 그리고 공무원의 매수를 통해서, 뉴욕 증시뿐만 아니라 그 당시 뉴욕증시보다 더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던 필라델피아 증시에까지 흔들어 놓으며 증권투기를 벌인다. 이러한 증권투기는 증시 버블을 일으키고, 버블은 월스트리트를 금융 공황상태 직전까지 몰고 가게 된다. 윌리엄 듀이가 자신이 자초한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몰락하게 됨으로써 월스트리트는 패닉의 소용돌이에 빨려들었고 주가는 폭락했다.

해밀턴은 듀어 일당이 일으킨 증시의 패닉이 경제공황으로 이어지는 사태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 ‘월스트리트에 돈의 홍수를 일으켰다.’ 재무부가 연방정부 채권을 매입해 월스트리트에 긴급 유동성을 공급했을 뿐만 아니라, 은행들이 여신을 회수하지 않도록 조처했다. 이러한 해밀턴의 신속한 개입은 금융위기 상황에서 공황의 공포를 적절하게 통제하였지만, 해밀턴의 반대파인 제퍼슨파 정치인들에게는 도박꾼과 투기꾼을 구제해주는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이들이 미국 연방정부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 후에는 해밀턴의 ‘위기관리 시스템’은 붕괴했다. 그런데 제퍼슨파의 이러한 생각은 월스트리트 발전에 ‘역설적인 결과’를 낳는다. 월스트리트가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된 것이다. 결국 월스트리트는 자체 역관계와 규정에만 의지한 채 발전하면서 스스로 머니 게임의 룰과 절차를 만들어 낸다.

이 시기까지 미국 최대의 금융 중심지는 합중국은행이 자리 잡고 있는 필라델피아였다. 이후 미국은 영국과 전쟁을 벌이고, 전쟁 자금의 충당을 위하여 다시 채권을 남발하게 된다. 전쟁을 위한 다량의 채권 발행은 증시의 중심인 필라델피아의 증권거래소에서 주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이에 뉴욕 브로커들도 좀 더 조직화된 증권거래소가 필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 하고, 1817년 2월 25일 새무얼 비비(Samuel Beebe)의 사무실에 모여 7개 증권사 28명의 증권브로커들이 창립 멤버로써 ‘뉴욕 증권거래보드(The New York Stock & Exchange Board:이후에 설립될 뉴욕 증권거래소 The New York Stock Exchange의 전신이면서 월스트리트의 거리 자체 또는 잡다한 사설 증권거래소와 대비해 ’레귤러 보드Regular Board'라 불렸음)를 설립한다. 새로 설립된 거래소는 월스트리트 40번지에 들어선다.

* 해밀턴주의와 제퍼슨주의

해밀턴주의(Hamiltonianism)와 제퍼슨주의(Jeffersonianism)는 미국 역사의 전통에 결정적 쐐기를 박았으며, 시대를 거듭할수록 미국의 역사는 해밀턴주의와 제퍼슨주의는 끊임없는 사상적 투쟁과 타협을 반복했다. 강한 중앙정부와 중상주의를 주창한 해밀턴과 약한 중앙 정부와 중농주의를 주창한 제퍼슨의 차이점은 미국 사회의 강점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지역 분리를 조장하기도 했다. 이들은 문장력이라는 한 가지 공통점은 지니고 있었으나, 자라난 배경부터 차이를 보였다. 해밀턴은 영국령 서인도제도의 한 섬에서 이름 없는 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거의 반 고아처럼 생활하다 훗날 미국으로 건너와 현 콜럼비아 대학 본신인 킹스 대학(King's college)어세 수학한 후 독립 전쟁에 뛰어들어 워싱턴 장군에 의해 발탁된 반면 제퍼슨은 부유한 버지니아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 식민지 기간 동안 최고의 교육과 명성과 재산을 마음껏 누리며 성장하였다.

워싱턴 행정부에서 재무 장관인 해밀턴과 국무 장관인 제퍼슨은 번번이 이념적인 마찰을 빚었으며, 그들의 대결은 결국 미국 최초의 정당 정치의 씨가 되는 연방파와 공화파를 구성하게 하였다. 연방파의 주요 정치인은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머스 핀크니 등이고, 이들은 해밀턴의 주도에 따라 강한 중앙 집권적, 상공업 중심적, 그리고 귀족 엘리트 주도적 정치를 표방하고 나섰다. 제퍼슨과 매디슨으로 주도되는 공화파는 제임스 먼로, 제임스 매디슨, 에런 버, 조지 클린턴 등을 들 수 있으며 약한 중앙 정부, 농업 중심적, 그리고 귀족 엘리트 주도적 정치를 주창하였다.

해밀턴은 독립 전쟁 중에 워싱턴의 오른팔로 주요한 문서와 책자를 집필하고 미국 헌법 비준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명한 연방주의자 논고(Federalist Papers)의 대부분을 작성하였다. 그 후 그는 워싱턴 행정부에서 재무 장관으로 있으면서 강력한 정부에 의한 여러 가지 경제 정책을 입안, 실천하였다. 또 워싱턴 대통령을 그의 노선으로 끌어 들였다.

또한 그는 순전한 민주주의를 행사하는 것은 신생 미합중국에 위험한 제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강력한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중앙 정부 통제하의 민주주의를 원했다. 또 캘빈의 원리처럼 인간은 본래가 악하며 타락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홉스의 생각처럼 이기적이며 다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의 선천적 악성을 견제할 수 있고 방지할 수 있는 정부 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해밀턴은 국민들에게 전폭적인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오직 일정한 재산을 소유한 시민이 선거에 참가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 정부보다는 연방 정부에 더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 모든 이윤을 흡수해버리는 곳 - 본격적인 금융시장으로서의 월스트리트

월스트리트가 필라델피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본격적인 금융시장으로 발돋움 하게 된 경위에는 ‘이리운하’의 건설이 뒷받침 되었다. 이리운하는 1803년부터 12년 동안 뉴욕시장을 지낸 ‘드 위트 클린턴(De Witt Chinton)'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 운하는 19C 미국의 조악한 도로 혹은 철도 시스템 때문에 단절되어 있던 뉴욕과 그 주변의 물류 소통을 원활하게 해주어 미시시피 계곡의 물류가 이리 운하를 통해 뉴욕에 집중되게 해 주었다. 이리운하의 건설로 동부에 미국 내륙으로 들어가는 물류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되자, 뉴욕은 물류이동의 거점이 되었고, 엄청난 상업의 발전은 금융의 발전을 동반하게 되었다. 이리운하의 건설은 미국 해외 무역량의 9%만을 처리했던 뉴욕항의 역할을 62%까지 끌어올렸고, 인구 미국의 여론들은 “뉴욕이 미국 상업과 금융의 모든 이윤을 흡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리운하 개통으로 발생한 뉴욕의 인구와 상업 활동의 급팽창은 곧바로 월스트리트 증권브로커들의 급성장으로 이어졌다. 1820년대까지 증권, 면화, 보험 등 온갖 상품을 중개했던 브로커들은 이리 운하 건설로 월스트리트 뿐 아니라 보스턴, 필라델피아에 각종 증권 공급량이 늘어나면서 증권붐이 일자 증권만을 중개하는 브로커로 전문화된다. 또한 고수익과 급성장하는 미국 시장에서 기회를 엿보던 유럽 자본가들의 자금이 유입, 이리 운하 채권 등 미국 증권에 투자되어 증시의 호황에 일조했다. ‘폰지 파이낸싱(Ponzi Financing)’에 대한 뉴욕 주의 금지(1873)는 월스트리트의 증권거래에 대한 투명성과 건전성을 높여 주어 월스트리트가 미국 증시 가운데 지배적인 위치에 올라서는 데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뉴욕의 증시가 호황의 정점이었던 1835년 12월 16일 ‘3차 뉴욕 대화재’가 발생하면서, 뉴욕의 화재 보험사를 시작으로 뉴욕경제가 잠시 붕괴되는 아픔을 겪지만, 다른 지역의 경기는 여전히 호황이었기 때문에 증권브로커들이 파산에서 재기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미국 경제가 초호황을 구가하자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주의회 인가 은행들이 대거 설립되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은행들이 발행한 주식의 액면 총액이 4,820만 달러에서 1 4,920만 달러로 3배 증가하는 불균형이 발생하였고, 주의 은행법들은 날림으로 제정되면서, 은행의 재무 건전성은 엉망이었다.

더욱이 당시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중앙은행인 ‘합중국은행’의 폐지를 위해 합중국은행에 예치되어 있는 연방정부의 예금을 인출해 난립된 지방은행에 분산 예치를 시켰다. 뜻하지 않게 예금고가 늘어난 지방은행들은 앞 다투어 은행권을 남발했고, 때맞추어 불어 닥친 부동산 버블에 편승해 가장 유동성이 떨어진다는 부동산을 담보로 막대한 대출을 일으켰다. 잭슨정부는 투기현상을 잠재우기 위해 모든 토지 거래에서 은행권 대신 금이나 은만을 결제수단으로 삼도록 했다. 하지만 잭슨의 이러한 조치는 토지에 대한 투기의 열풍을 잠재울 뿐만 아니라, 토지 거래 자체를 일시에 중지시켜 버렸다. 은행권 보유자들은 일시에 은행권을 금과 은으로 지급할 것을 일반 시중은행에 요구하였고, 이에 덮친 격으로 연방정부에서는 시중은행에 분산 예치되어 있던 자금을 인출해 인구수를 기준으로 주에 배분하기 시작했다.

최고의 예금주였던 연방정부가 인출해가자, 은행권을 남발했던 잡동사니 은행들은 줄줄이 파산하기 시작했고, 이들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은 지방 기업들도 뒤를 이어 파산 행렬에 합류했다. 주가도 폭락했다. 또한 이때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이 금 유출을 막기 위해 이자율을 전격적으로 올려버려서 영국 경제가 순식간에 냉각되면서 미국 경제의 버팀목이었던 면화 수출까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호황이 역사상 최초의 경제공황으로 이어진 것이다. 1837년 초가을까지 파산한 미국 기업 비율이 전체 90%에 달할 정도로 상황은 심각해 졌지만, 미국 인구의 절대다수가 자급자족 형태인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반적인 경제 붕괴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금융시장의 패닉은 월스트리트 보다 필라델피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에 정치적, 경제적 중요도는 뉴욕에 비해 필라델피아에 중심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필라델피아에 더 큰 영향을 미쳤고, 게다가 펜실베니아 주정부가 2천만 달러의 채무를 이행하지 못해 원리금 지급을 거절하고 파산을 선언했다. 결국 월스트리트는 대화재와 금융시장 패닉, 경제 공황을 딛고 미국 금융시장의 상징이 된 것이다.

4. 더 비참한 몰락 외에는 - 남북전쟁 직전의 월스트리트

1837년 미국 최초의 경제공황 직후 월스트리트는 음울한 곳으로 변해 버렸다. 유럽도 심각한 경기 침체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주식과 채권에 대한 유럽 투자가들의 수요는 급감했다. 거기가 1842년 미국 9개 주가 채무불이행(default)을 선언하는 바람에 유럽 시장에서 미국에 대한 투자 열기는 더욱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이런 대공황 와중에도 미국경제는 철도의 건설로 질적인 변화를 겪었고, 그동안 운하가 부분적으로 해결하고 있던 미국 지역 간 교통, 물류 문제를 거의 완벽하게 해결했다.

철도는 19C 인류의 생활 리듬을 드라마틱하게 변화시켰다. 같은 거리를 운하나 마차를 이용하면 30일이 걸리던 것을 철도를 이용하면 단 3일 만에 완주하였다. 또한, 이리 운하를 이용한다면 단지 뉴욕과 오대호 연안 지역의 물류비용을 20분의 1수준까지 떨어뜨렸지만, 철도는 부설된 전 지역의 물류비용을 같은 수준으로 낮추었다. 지리적으로 산산 조각나 있던 지역 경제를 글로벌 경제로 통합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철도라고 할 수 있다.

철도와 함께 이 시기의 세계 경제와 월스트리트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킨 계기는 전보의 발명이었다. 증시브로커 등 금융시장 참여자들에게 정보는 돈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철도와 더불어 전보의 발명 및 확대는 금융투자의 확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주식, 채권, 금 등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자본은 여러 시장 가운데 가장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런던이 유럽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듯이 뉴욕이 미국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전신의 등장으로 미국 동부 금융시장에서 주요 시장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뉴욕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것은 1840년대에 전신이 등장하게 됨으로써 뉴욕증시가 미국 금융시장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모스가 1820년대 완벽한 전신 시스템을 완성했다면, 아마도 필라델피아가 이를 활용해 뉴욕의 지위를 차지했을 것이다.

뉴욕이 드디어 미국 경제의 중심지로 부상한 후 다시 증시에 불을 붙인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골드러시’ 때문이다. 골드러시는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최초로 금이 발견된 이후 그때까지 미국 동부에 집중되어 있던 인구가 서부로 분산되게 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당시 미국경제는 금본위제에 바탕을 두고 있었는데, 금본위제 하에서 은행은 은행권의 발행을 보유자금의 규모에 따라 결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국 내의 금의 발견은 은행권의 남발을 가져오게 된다. 많은 은행권과 채권의 발행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다시 한 번 미국의 호황을 이끌게 된다. 이 시기의 테마주는 광산업종과 철도 회사의 종목이 된다. 테마주를 중심으로 도를 넘어선 증서버블(Paper Bubble)은 유럽의 크림전쟁과 흉작의 여파가 잠잠해지면서, 미국 경제를 또 한 번 공황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한다.

1858년 공황이 월스트리트에 미친 충격은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수준이었다. 전체 985명의 절반이 넘은 브로커들이 파산을 선언했고, 디폴트된 채무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숫자인 1억 2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이 공황의 여파는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의 금융시장까지 휩쓸어 사상 최초의 국제적 금융공황을 발생시켰고, 뉴욕 레귤러보드 역시 사실상 휴장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 공황은 월스트리트 세대교체라는 부수적인 효과를 낳아,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전형적인 ‘이전투구’ 자본주의의 시작을 이끌게 된다.

5. 허영과 낭비의 시대가 왔다 - 남북전쟁기의 월스트리트

미국의 남북전쟁은 산업화 시대 최초의 전쟁이었다. 남북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경제 붕괴를 피하면서 전비를 조달하기 위한 갖가지 금융 기법을 ‘발명’해냈다. 이 과정에서 북부는 성공했고, 남부는 실패했다는 점이 전쟁의 결과를 결정지은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대규모 전쟁을 위한 자금 조달 방법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인데, 첫째, 세금인상을 하는 것이다. 남북전쟁 말기 연방정부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소득세를 부과하는 등의 방법으로 전비의 21%를 충당했을 정도이다. 둘째, 인쇄기로 증서화폐를 남발하는 것. 남북전쟁 중 북부와 남부는 불환지폐의 발행을 통해 각각 전비의 13%, 50%를 조달했다. 이러한 불환지폐의 남발은 월스트리트에서 금화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정부에서 불환지폐의 유통을 보다 활발하게 하기 위해 불환지폐의 유통을 강요했고, 일반인들 또한 유동성이 적은 불환지폐보다 금화를 보유하기 원했기 때문에 자본시장에서 금화가 사라진 것이다. 이렇게 금이 희귀해 지자 월스트리트에서는 자연스럽게 시세차익을 노리는 금 투기가 활발해 졌다.

세 번째, 전비조달 방법은 차입을 통해서이다. 차입을 위한 정부채권은 단순히 정부의 빚을 늘리는 역할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채권매입을 통해서 정부가 보유한 자금은 전쟁 물자를 만드는데 투입되기 때문에 시중에 막대한 양의 자본이 흘러들어가게 된다. 이 자본은 전장의 다급함과는 거리가 먼 사치와 향락을 부추기고, 증시는 채권의 매수자와 매입자의 시세차익을 노린 활성화가 이루어지게 한다. 월스트리트가 호황이면 어김없이 스타플레이어가 등장한다. 이 시기에도 새로운 얼굴들이 거리에 등장했는데, 몇몇은 축적한 부와 영향력 때문에 현대인들에게도 익숙해진 스타 플레이어들이었다. 존 토빈(John Tobin), 레너드 제롬(Lenard Jerome : 윈스턴 처칠의 할아버지), 프랭크 워드(Frank Worth : 다이애나 전 황태자비의 조상), 헨리 클루스(Henry Clews), J. P. 모건(Morgan), 제이 굴드(Jay Gould), 짐 피크스(Jim Fisk)등이 이 시대에 월스트리트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이다.

6.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 이리 철도 인수전쟁과 월스트리트 개혁

월스트리트 역사상 이리 철도와 같은 ‘미식축구공’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도한 부채, 제멋대로인 자본구조, 정치적으로 결정된 노선, 상습적인 법규 위반, 분식회계 이는 이리 철도가 안고 있는 문제점 가운데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이리 철도의 문제점은 ‘이리 전쟁’ 당사자들에게는 작전하기에 너무나 좋은 점이었고, 다른 월스트리트 플레이어들도 이런 점에 이끌려 이리 철도에 군침을 흘리기도 했다. 이리 철도의 투기 붐과 함께 새로운 첨단 장치인 주가표시기가 등장함으로써, 종목들의 주가를 매매와 거의 동시에 표시해줄 뿐 아니라 증권거래소 트레이딩 플로어에서 곧바로 전신망을 타고 가격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다. 이것은 비록 전신망은 보급 되었지만, 아직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큰 효용을 주지 못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당시 이리 철도의 투기 붐을 조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리 철도 투기는 월스트리트가 오늘날의 모습을 가질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리 철도 투기의 주인공은 코닐리어스 반더빌트(Cornelius Vanderbilt)와 다니엘 드루(Daniel Drew)였는데, 반더빌트는 영, 미 전쟁과 남북전쟁을 계기로 등장하여 의리와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인물이었던 반면, 드루는 ‘물타기 수법’등과 같은 온갖 수단과 법원의 매수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월스트리트 최고의 협잡꾼이었다. 이리 철도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투명하지 못한 자본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에 비해,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중요성은 매우 컸기 때문에, 브로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매우 관심이 높은 종목이었다. 이러한 점을 이리 철도 이사회의 멤버로 있었던 드루는 자신의 직위를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데 노력했고, 반대로 반더빌트는 센트럴 철도회사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드루의 행위를 막고 센트럴과 이리를 연결하여 기업으로서 주주의 이익을 높이는데 노력했다.

처음 반더빌트와 드루는 동맹을 맺었으나, 드루가 제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새로운 작전단을 구성해 이리 철도 주가 조작을 벌이기 시작한다. 당시 반더빌트는 이리철도의 경영권을 장악하기 위해 주식을 매입하는 중이었는데, 여기에 드루는 자신의 이리 철도 CFO 직함을 이용해 주식을 매도해서 저가공세를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드루의 저가공세에 대응하여 반더빌트는 판사를 이용해 드루의 직무를 정지시키고, 월스트리트에 나온 이리 철도 주식을 무차별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한다. 판사의 직무정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드루는 태연히 자신의 전환사채를 주식으로 전환하여 저가공세를 펼쳐 반더빌트를 궁지로 몰아가지만, 월스트리트에 동지가 많았던 그는 위기를 효과적으로 극복해 나간다.

반더빌트와 드루의 치열한 공방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드루의 불법적인 신주발행으로 이어진다. 드루가 발행한 신주 10만주는 어쩔 수 없이 반더빌트가 다시 매수하게 되지만, 드루와 그의 작전단은 보안관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허드슨 강 건너 뉴저지로 피신한다.  드루는 주변인들에 대한 배신을 자신의 주무기로 삼았던 만큼 결국 자신의 작전단들에게 축출을 당한다. 월스트리트 최고의 플레이어 두 명에 의한 이리 철도 주식의 소용돌이는 월스트리트에 증권매매 업무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를 키운다. 이것은 단순히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꾼 한명에 의한 증시의 변동을 최대한 억제하고 건전하고 합법적인 그리고 자신들 즉 브로커의 직업 안정성을 위해서였다.

당시까지 월스트리트에는 크게 레귤러보드와 오픈보드 두 거래소를 중심으로 군소 거래소가 난립하고 있었는데, 1869년 뉴욕 양대 거래소인 레귤러보드와 오픈보드가 전격적으로 합병을 단행하여 초대형 거래소를 출범시킨다. 합병거래소의 이름은 현재가지 이어지는 뉴욕증권거래소(NYSE : New York Stock Exchange)로 정하고, 이때부터 월스트리트 플레이어들은 이 거래소를 ‘빅 보드 Big Board’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빅보드는 단순히 합병거래소의 의미를 넘어서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강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기존의 거래소에서는 주식과 채권에 대한 매매만을 중개하였다고 한다면, 빅보드의 탄생은 이곳을 거치지 않고서는 기업의 주식이 원활한 수급을 보이지 못하므로, 일단 빅보드에 상장하는 것이 급선무가 되어, 금융이 산업을 지배하는 현상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빅보드는 증권브로커들에게도 엄격한 자격 규정을 적용해 사기꾼이나 다를 바 없는 주식꾼들이 거래소 회원이 되는 것을 막았다. 한마디로 월스트리트가 심각한 변화를 겪기 시작한 것이다.

7. 월스트리트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다 - 1873년 공황 전후의 월스트리트

드루의 축출을 단행했던 인물들 중에는 짐 피스크와 제이 굴드가 있었다. 이들은 드루의 축출 이후 이리 철도의 경영권을 쥐게 되었고, 월스트리트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다. 이들이 활약한 1860년대 후반에 유럽의 주요 국가와 미국은 금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남북전쟁 중에 발행한 불환지폐 ‘그린백’을 발행함으로써 약간은 금본위제에서 이탈한 상태였으므로, 미국의 달러와 금값은 정치적, 경제적인 조건에 따라 요동친 시기이다. 월스트리트의 플레이어들이 이 상황을 놓칠 리가 없었고, 가장 대담하게 도전한 자가 바로 제이 굴드였다. 하지만 제이 굴드의 무모한 ‘금투기’ 도전은 미국 역사상 가장 부패한 시기라는 오명을 남긴다. 그 당시 여론들은 ‘도금시대(The Gilded Age)'라 부를 정도로 정부 고위 관료의 스캔들이 난무하면서,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금융의 중심지인 월스트리트였다.

월스트리트에 ‘금투기’의 회오리가 몰아친 후 1830년대 호황을 이끌었던 철도가 아이러니하게도 1800년대의 월스트리트를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한다. 1873년 발생한 공황은 남북전쟁 중에 연방정부에서 발행한 채권을 일괄 인수해 일반 대중에게 유통시켜 대성공을 거둔 제이 쿡(Jay Cooke)으로부터 비롯된다. 제이 쿡 소유의 은행은 당시 ‘돈 먹는 하마’로 전락한 노던 퍼시픽 철도 건설 때문에 막대한 손실을 입고 있었다. 필라델피아의 제이 쿡의 은행은 미국 최고의 은행으로 평가받고 있었는데, 자금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예금 지급 거부를 선언한다. 제이 쿡 은행의 파산 선언은 마치 핵폭탄처럼 월스트리트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월스트리트의 주가 폭락은 대서양 해저에 깔린 전신 전화망을 타고 번져나가 유럽 증시의 주가도 폭락시켰다. 월스트리트가 세계 주요 금융시장으로 성장했다는 것이 파국의 순간에 증명된 셈이다. 연방 정부의 시장 개입 등으로 주가는 미약하지만 회복세를 보였다. 하지만 실물경제에 대한 증시공황의 여파는 심각하여, 불황은 이후 6년 동안이나 지속된다. 물론 이 불황기를 거치면서 월스트리트는 한 번 더 성숙해진다.

8.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만이... - J. P. 모건의 등장과 그랜트 부자 파동

늘 그랬던 것처럼 1873년 공황 뒤의 월스트리트에는 섬뜩한 고요만이 흘렀다. 주가가 폭락하고 거래량이 급감했으며, 월스트리트의 대표 종목이었던 철도 회사 주식의 가치는 1873~1878년 사이에 절반이 어디론가 증발해버렸다. 이 기간 동안 287개 증권브로커들이 파산을 선언해야만 하였고, 그 외의 수많은 증권브로커들도 자진 폐업을 했다. 하지만 1873년 공황 이후 경기가 최악의 상황을 맞아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미국 자본주의 체제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주가 회복을 기다리다 지친 유럽 투자자들이 미국 채권과 주식을 헐값에 내던지는 바람에 산업자본의 ‘미국화(Americanization)'의 기회가 되었고, 초창기에 유럽 자본으로 미국 철도를 건설했지만 유럽 투자자들은 철도가 완공된 뒤 수익은 한 푼도 얻지 못하고, 미국 철도망 건설에 도움만 주게 되었다. 이것 이외에도 공황은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던 수많은 기업들을 파산시켜 미국 경제의 불순물을 일시에 제거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자본가들은 살아남기 위해 경영과 투자의 효율성을 극대화해야만 했던 것이다. 경영과 투자의 효율성을 꾀한 대표적 인물은 J. P. 모건이 등장한다.

J. P. 모건은 월스트리트가 남북전쟁으로 초호황을 누리며 세계적인 금융의 중심지로 도약하는 시기에 ‘투자은행가’로서 등장한 새로운 금융 플레이어였다. 모건의 금융인으로서 성공요인은 돈이나 재산에 근거한 경제적 신용이 아니라 ‘품성’이었다는 점이 기존의 월스트리트 플레이어들과는 차별되는 점이다. 영국 런던 증시에서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그의 금융 플레이는 시작부터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대성공을 바탕으로 모건은 반더빌트가 실패했던 필생의 과업, 즉 뒤죽박죽인 철도 산업의 혁신과 투명화에 착수한다. 앞서 설명한 대로 미국 철도 산업은 50년 동안 무계획적으로 발전해왔으므로 혼돈 그 자체였다. 잡동사니처럼 널려 있는 지선망을 연결해 간선망을 구축하는 바람에 철도 회사의 구조가 난삽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상대적으로 높은 경영의 효율성이 유지되고 있던 반더빌트의 뉴욕 센트럴 철도와 펜실베니아 철도마저도 상대 지역에 철로를 보유하고 있어 치열한 요금 경쟁을 벌여야 했다.

모건은 이 두 철도회사의 경영진을 자신의 요트로 초대해 ‘코세 합의’를 도출함으로써 두 철도회사 간 합의를 도출해 낸다. 극적인 ‘코세 합의’로 모건의 명성은 월스트리트뿐 아니라 철도 산업계까지 자자해졌고, 그는 거물 플레이어로 급성장해 기업의 M&A 등 수익성 높은 사업들이 모건 은행에 집중되었다. 모건과 동시대 플레이어들은 선배 플레이어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도덕성, 투명서, 집중력 등을 보여주어 미국과 세계 경제에서 월스트리트의 위상을 다시 한 번 제고시켰다. 이렇게 모건과 동료 투자은행가들의 부상으로 월스트리트는 ‘기업하기에 적절한 곳’이라는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9. 모건 씨, 어떻게 하면 되죠? - 격동의 19C말 월스트리트

1873년 공황의 여파는 1890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미국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세를 보이고는 있었지만, 그 이전의 수준까지 달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여기에 회복 조짐을 무참히 짓밟아 버리는 사건들이 발생한다. 런던 증시가 런던의 대표적인 투자은행 베어링 브러더스의 파산과 함께 휘청거리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런던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미국 증시에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런던이 기침하면, 월스트리트는 몸살을 앓는다’는 월스트리트의 격언이 맞아 떨어진 셈이다.

또 다른 사건들은 ‘은화 논쟁(Silver Question)’과 인한 필라델피아 - 리딩 철도의 파산이다. 은화 논쟁은 미국 정부의 대책 없는 화폐정책 때문에 비롯되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은화와 금화를 생산해 내고 있었는데, 완전한 ‘금본위제’로 복귀를 위해 은화 주조를 중단하려고 한다. 금본위제 하에서는 화폐 주조가 제한되기 때문에 남북전쟁에서 그린백의 발행으로 발생된 인플레이션이 일시에 제거되고 디플레이션으로 접어들게 된다. 이것은 당시 채무자의 범주에 속하던 농민들의 부담이 가중되게 되어 농민들의 극심한 반대를 야기 시키고, 미국 정부에서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은화의 가격 고정 정책을 실시한다.

은화의 가격 고정 정책으로 인해 서부 지역 주들이 정부의 구매를 믿고 전례 없는 수준까지 은 생산을 늘리는 바람에 은값이 하락하기 시작해, 시장에서는 은의 명목가치보다 시장가치가 낮게 되어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인플레이션은 현물에 대한 즉, 금에 대한 수요를 촉발시킨다. 이는 미국 정부의 금 보유량이 급격히 줄어들게 되는 상황을 촉발시키게 되어 자칫 미국 정부의 파산상태까지 몰고 갈 수 있는 상황으로 발전하게 된다. 미국은 ‘금본위제’를 폐기하든가 아니면 국가적 디폴트를 선언하든가 하는 상황으로 몰렸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나선 것은 다름 아닌 월스트리트의 거물급 플레이어 J. P. 모건이었다.

모건의 등장은 국가적인 경제 사태를 거부가 해결해냈다는 것 이외에도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세계적 권력을 지닌 미국 대통령이 일개 월스트리트 플레이어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것은 월스트리트가 세계적 권력으로 떠오르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모건은 당시 대통령 클리블랜드와 대면한 후, 국가의 금 보유고를 늘리기 위해 유럽에서 1억 달러 어치의 금을 조달하고, 런던에서 조달한 파운드화를 들고 외환시장에 뛰어들어 달러를 사들였다. 모건의 필사적인 노력에 힘입어 1895년 재무부의 금 보유고는 1억 750만 달러를 넘어선다.(모건이 개입하기 전 재무부의 금 보유고는 900만 달러였다)

1890년대 월스트리트의 또 다른 특징 두 가지는 ‘주가 지수’의 출현과 전문적 ‘공인 회계사’의 출현이다. 1896년 5월 다우존스 철도평균지수(Dow Jones Railroad Average Index)와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Dow Jones Industrial Average Index)가 만들어졌다. 오늘날 증시에 관하여 알고 싶을 때는 당연히 주가 지수부터 물어보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각 종목의 종가에 대해서 알 수 있었을 뿐 전반적인 증시상황을 체크할 수 있는 주가 지수가 없었기 때문에 온도계와 같은 도구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찰스 다우(Charles Dow)가 고안해 낸 것이다. ‘공인 회계사’는 오늘날 기업 공개의 측면에서 매우 당연시 되고 있지만, 당시까지는 기업이 기업공개로 주주의 이익을 대변하기 보다는 경영진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기업의 재무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월스트리트가 개혁의 흐름 안에서 기업의 투명성과 건전성을 높여야 한다는 의식이 넓어져 ‘공인 회계사’라는 직업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10. 절대 증권거래를 중단할 수 없다! - 20C 최초의 위기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출범

1836년 월스트리트가 ‘뉴욕 증권시장’을 상징하는 말이 된 이후 남북전쟁을 계기로 ‘미국 증권시장’을 상징하는 말로 변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서면서 월스트리트는 더 큰 의미를 갖게 된다. 미국 밖에서는 세계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미국의 경제력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고, 미국 내에서는 남북전쟁 이후 공룡으로 자라나, 마침내 은행, 철도, 대기업의 금융 파워를 상징하는 메타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한 쪽의 힘이 강해지면 당연히 이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힘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러한 역할을 한 것은 토머스 제퍼슨과 앤드루 잭슨의 후예들인 좌파 정치인들이다. 이들은 유럽처럼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외치지는 않았지만 대신 경제에 대한 정부의 규제와 관리를 주장했다.

이렇게 좌파와 월스트리트의 대항아래 전 세계를 놀라게 하는 거대 기업이 출현하게 된다. 1890년대 후반 미국의 제조업을 이끈 것은 철강산업이었다. 당시 미국 정부의 1년 예산이 5억 2,500만 달러였는데 새롭게 합병되어 설립된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스틸(United States Steel)의 자본금은 14억 달러에 달했다. 거대 철강 회사는 카네기와 모건 그리고 카네기의 후계자 슈와브의 거래에 의해 설립되었다. 당시 대통령 루즈벨트는 좌파였는데, 그도 이렇게 거대한 기업체의 출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로 루즈벨트르 위시한 워싱턴 행정부는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1857년, 1873년, 1893년 미국에서 발생한 금융위기가 중앙은행의 부재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중앙은행의 필요성은 워싱턴과 좌파 정치인들의 굴욕감에서 발생되어 1913년 설립되게 된다. 1900년대 초 월스트리트에는 건전한 플레이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협잡꾼에 지나지 않은 플레이어들이 다수였다. 그중의 한 인물이 F. 어거스투스 하인즈였는데, 하인즈는 공매도를 남발하여 자신이 파산하는 것은 물론 주거래 은행이었던 머컨타일 은행의 예금 인출 사태를 유발시켰다. 머컨타일 은행의 예금 인출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 건전한 은행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상황이 일파만파로 커짐에도 연방정부에서는 바라만 볼 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때 ‘은화논쟁’을 종식시킨 모건이 월스트리트에 돈의 홍수를 일으켜 다시 한 번 이 위기를 극복해 낼 수 있도록 한다.

1907년 금융위기는 경제공황으로 번지지 않고 진화되었고, 다시 호황이 도래했다. 특히 이번 금융위기는 패닉 순간 구제에 나설 중앙은행을 보유하고 있지 못해 월스트리트 거물 ‘돈놀이꾼’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해야만 하는데 자존심이 상한 행정부 고위 관료들에게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6년 뒤 1913년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RS : Federal Reserve System)가 출범하여 미국 12개 지역에 설립되었다.

11. 이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 - 1차 세계대전기의 월스트리트

전쟁은 인간의 행동 가운데 가장 예측하기 힘든 사건이다. 전쟁의 발발 직후 알 수 없는 위험성 때문에 사람들에게 심리적 공황이 발생하여, 사회적 혼란이 초래되는데 월스트리트가 예외일 수는 없었다. 세계 1차대전의 발발 직후 월스트리트에는 자신의 재산을 은행이나 투자지에서 찾으려는 고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특히 영국과 유럽의 투자자들은 뉴욕증시의 주식을 처분하고 금 태환을 요구했다. 이것은 엄청난 거래물량의 증가와 증시의 하락으로 이어지면서 금 시세를 폭등시킨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결국 뉴욕 증권거래소의 휴장을 선택하게 한다.

하지만 1915년 9월 이후 유럽의 서부 전선은 교착 상태에 들어가 참호를 중심으로 너무나 소모적인 전황이 펼쳐지고 있었고, 개전 초기 썰물과 같았던 금 유출도 그 달을 계기로 멈춘 데 이어 이 해 말부터는 안전한 도피처를 찾아, 금이 미국으로 되돌아왔다. 이것은 세계 1차대전으로 인해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주곡과 같았다. 개전 초기 미국은 주요 수출품이었던 밀과 면화의 수출길이 막혀 어려움을 겪었으나, 전쟁의 장기화와 유럽지역의 농작물 작황이 최악을 면치 못하여 점차 대외수출에 큰 이익을 보았고, 전쟁 자금 조달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유럽 연합국이 시행하였기 때문에 산업적으로 금융적으로 큰 전쟁특수를 노릴 수 있었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이 진정한 승리자로 드러났다. 러시아는 전쟁 도중 혁명을 겪으면서 국가사회주의 체제인 소련으로 바뀌었고, 오스트리아는 제국이 해체되었으며, 표면상 전승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막대한 인명과 재산 손실을 입고 결국에는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12. 뉴욕 증권거래소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 대공황을 앞둔 월스트리트

인간이 만든 조직은 시간이 흐르면서 ‘내부자’들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1920년대 뉴욕 증권거래소만큼 내부자들의 이익을 최우선시 했던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뉴욕 증권거래소의 이 시기 회원권의 분포를 살펴보면, 절반은 거래소의 외부자인 ‘증권브로커’들이 보유하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거래소 내부자인 ‘스페셜리스트’와 ‘플로어 트레이더’들이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규정위원회 등 거래소 주요 조직의 임원과 간부직은 스페셜리스트와 플로어 트레이더 출신이나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스페셜리스트는 투자자의 매매 주문이 거래소의 회원인 증권브로커를 통해 트레이딩 플로어에 전달되면, 이를 체결해주는 사람이다. ‘증권브로커의 브로커’인 셈이다. 플로어 트레이더는 투자자의 매매 주문을 중개할 수 없고, 오직 자신의 돈만으로 증권 매매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들은 일반 투자자들이 접근하기 힘든 플로어에 상주하면서 주가 흐름에 대한 최신정보를 얻을 수 있고, 매매 수수료를 낼 필요도 없다. 또한 주식이나 채권을 언제든지 매입하고 처분할 수 있다. 그 당시에 뉴욕 증권거래소에는 ‘담합’에 대한 제도적 규제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담합으로 주가 조작을 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뉴욕 증권거래소의 내부자들이 자신들의 이익 실현을 위해 희생당한 대표적인 인물이 앨런 라이언이다. 앨런 라이언은 스터츠 자동차회사의 주식을 매집해 지배주주가 되지만 스터츠 자동차의 주식이 급등하자, 곧 주가 하락을 예상한 내부자들의 공매도가 이어진다. 라이언과 내부자들의 싸움은 여기에서 비롯되어 정상적인 매집 과정을 통해 주식을 모은 앨런 라이언과 내부자들의 지급 불이행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것은 월스트리트의 지금까지 관행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뉴욕 증권거래소에서는 내부자를 보호할 목적으로 스터츠 자동차의 상장을 폐기하기까지 이르러 외부에 대한 공신력을 잃게 된다. 이때 형성된 음습하고 이기주의적인 이미지는 1980년대까지 망령처럼 뉴욕 증권거래소를 괴롭히게 된다.

뉴욕 증권거래소가 이와 같은 담합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1920년대 미국 경제는 1차 세계대전을 발판으로 초호황을 구가하고 있었다. 이 당시 가장 각광받던 산업은 자동차산업 이었고, 이에 따라 관련 산업인 정유, 유리, 철강, 고무 산업을 비롯해 고속도로 건설, 자동차 수리업종들도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다. 또한 큰 전쟁을 치른 뒤 나타나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남북전쟁 직후와 마찬가지로 1920년대에도 풍미해, 흥청망청 돈을 쓰며 최대한 인생을 즐겼다. 하지만 아무리 거대한 경제적 호황도 언젠가는 피로 증세를 보이면서 종말을 고하기 마련이다. 1928년이 되자 지칠 줄 모르던 미국 경제가 피로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의 증시는 근간인 실물경제와 큰 괴리 현상을 보이면서 ‘나 홀로’ 상승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초대형 버블이 1929년 월스트리트 상공에 출현한 것이다.

13. 휘트니, 그 친구가? - 대공황기의 월스트리트

1930년대 대공황은 금융공황에서 시작하여 경제공황으로 이어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충격파를 던졌다. 대공황은 일반 투자자와 월스트리트 플레이어 그리고 무능한 정부의 경제정책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유발되었다. 일반 투자자 즉 미국의 시민들은 1920년대 초호황을 계기로 등장한 할부제도와 은행의 대출을 통해 남는 자금을 무분별하게 주식 투자에 유용했고, 월스트리트 플레이어들은 공황의 조짐이 보였음에도 호황의 분위기에 취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거기에 마지막 일격을 가한 것은 하버트 후버(Herbert Hoover)대통령의 무지한 경제정책이었다.

후버는 선거유세에서 ‘농산물 수입관세를 올려 미국 농가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고 대통령에 당선 이후 1929년 여름 임시 의회를 소집해 농산물 수입관세를 인상했다. 이 보호무역주의는 결국 당시 세계 최대 시장이었던 미국 시장을 봉쇄하는 것이 되어 영국이나 독일 등의 경제 침체를 불러왔다. 미국이 관세를 올리자 다른 나라들도 앞 다투어 관세를 올리기 시작해 순식간에 국제 교역 규모가 축소되었다. 전 세계의 경제활동이 위축되어 버린 것이다. 또한 후버는 대공황으로 몸살을 앓고 있던 1932년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은 세율 인상안을 의회에 제출하여 통과시키는 웃기지도 않은 일을 저질렀다. 1929년 고점을 기준으로 1932년 미국 GNP는 50% 가까이 줄어들어있었고, 실업률은 25%를 넘나들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정부의 재정균형을 위해 세율을 인상시킨다는 것은 불황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후버의 이런 경제정책에 대한 평가는 다음 대선에서 나타났다. 대선에서 후버를 제치고 루즈벨트가 당선된 것이다. 루즈벨트는 당선 직후 경기 부양책 및 금융체제 전반에 대해 개혁의 의지를 내보인다. 금융 분야에서는 월스트리트가 특히 개혁의 대상이 되었는데, 월스트리트의 감시기구로 SEC(증권거래위원회)를 설립하는 한편, 담합을 통한 주가 시세 조작을 불법화 하였다. 또한 설립된 SEC의 의장인 윌리엄 더글러스는 증권거래소 내부자들의 이익보다 투자자들의 이익을 우선하는 쪽으로 거래소 규정을 개정하였다. 이때의 개혁을 통해 2차 세계대전 이후 월스트리트는 또 다시 번영 시기를 맞아 1920년대 이전보다 더 큰 부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배분하는 창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14. 월스트리트는 더 이상 음험한 곳이 아니다 - 2차 세계대전~1960년대 월스트리트

2창 세계대전에서 1960년대 월스트리트는 고객 기반을 확장시킨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월스트리트 증권브로커들은 증권브로커 사무실로 표기를 하였으나, 찰스 메릴의 등장이후 본격적인 증권사로 거듭나 고객 기반이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넓어졌다. 1920년대에도 많은 대중들이 증권투기에 열성을 보였지만, 대공황 당시 아픈 기억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후 찾아온 호황에도 월스트리트를 멀리하여 그들의 자본을 끌어들일 필요성이 있었다. 그는 일반 대중들이 큰 잠재시장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전국에 지점망을 설치 소액 투자자들이 보다 손쉽게 주가 변동 상황을 파악하고 투자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찰스 메릴과 에드먼드 린치가 합병하여 만들어진 회사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메릴린치 증권사이다.

메릴린치 증권사는 당시까지 증권브로커 사무실이 친인척들에 의해 운영되던 것을 탈피하여 전문적인 투자 커미셔너들을 육성하였고, 그들에게 매달 일정한 보수를 지급 고객들에게 불필요한 주식거래를 종용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찰스 메릴은 평범한 사람들의 무지가 투자 활성화에 가장 큰 장애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광고를 통한 기초적 주식투자 매커니즘과 이에 따르는 위험과 보상을 간명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찰스 메릴의 메릴린치 증권사가 성공을 거두자 많은 증권브로커 사무실들은 메릴린치를 벤치마킹하여 월스트리트에 현대적인 증권사가 주류를 이룬다.

월스트리트의 고객 기반을 확장시킨 또 다른 영웅은 ‘벤저민 그레이엄’이다. 벤저민 그레이엄은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했고, 수학에 능통했으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비롯한 6개 국어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월스트리트에서 거래되고 있는 기업들의 각종 실적 통계와 정부의 경제 통계에 관심이 끌린 그는 이를 이용해 종목을 골라 투자하면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이로써 오늘날 일반화된 과학적 투자 분석이 최초로 월스트리트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레이엄의 이러한 과학적 투자방식은 일반 투자자들에게 투자에 대한 신뢰를 확보할 수 있게 해주어 고객 기반의 확장을 돕는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의 이러한 고객층의 확장에는 무엇보다도 예전 1920년대 자신들이 저질렀던 부정과 부패를 성공적으로 개선해 나갔다는데 밑바탕을 두고 있다.


자료정리:홍상호 ohon35@hanmail.net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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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