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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

김기흥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회경제사로부터 설화에 이르기까지 고대사 전반에 걸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대중과 폭넓게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고구려 건국 사』(창비, 2002),『새롭게 쓴 한국고대사』(역사비평사, 1993) 등이 있다.

박종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역사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전통과 현대의 접목, 역사와 현실의 일체화를 통한 새로운 역사상 수립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지은 책으로『안정복, 고려사를 공부하다』(고즈윈, 2006),『5백 년 고려사』(푸른 역사, 1999) 등이 있다.

신병주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 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다. 규장각에 소장된 방대한 자료를 통해 선조들의 투철 한 기록정신과 품격 있는 왕실문화를 연구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조선 최고 의 명저들』(휴머니스트, 2006),『66세의 정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효형출판, 2001) 등이 있다.

2. 주요 내용

가. 고대의 제왕

▶ 한국 고대 국왕의 정치적 위상과 리더십

한국 고대 왕들의 정치, 사회적 위상은 정치 발전의 각 단계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국가체제가 완성되기 전의 왕의 위치는 각 부족의 연맹장의 지위로써 강력한 왕권도 갖지 못했고 국가체제가 완성된 후에는 비교적 정치적 위상은 굳건했으나 제도화가 미흡한 형편이라 왕의 자질에 따라 영웅적 면모를 보이거나 전제적인 통치를 행할 여지가 많았다. 즉 그들이 보인 리더십의 양상은 고려나 조선의 왕들이 보여준 것과 비슷하면서도 일부 이 시대에만 찾아볼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유리왕 고유리-국가의 기틀을 다진 제2의 건국시조

우리가 많이 아는 고구려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유리왕은 즉위 초기에 자신의 지지 세력이 거의 전무한 형편이었다. 그래서 초창기 적극적인 리더십을 보여주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측근세력을 확장하며 극기와 인내의 세월은 보낸다. 하지만 유리왕의 리더십은 재위 후반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는 일에서부터 두드러진다. 즉 그는 국제정세와 국가의 먼 미래까지 고려하여 수도를 천도했는데 천도는 현대에서도 어렵지만 그 당시에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고 또한 반발이 심했다. 심지어는 태자까지도 반대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유리왕은 태자를 자결케 한다.

여기서 우리는 유리왕이 국가 경영에 방해되는 경우 아들조차 단호히 처벌하는 확고한 결단력을 지닌 리더였음을 알 수 있다.또한 그는 새로운 수도지역에서 세 확장을 위해 무력보다는 유화정책을 사용하여 아주 손쉽게 그 지역을 차지한다. 그리고 토착민들의 신앙까지도 국가적 제사로 수렴하여 구 귀족세력과 신흥 세력의 융화를 모색한다. 이렇게 해서 유리왕은 고구려를 마을국가 수준에서 중국세력과 힘을 겨룰만한 강력한 고대국가의 토대를 마련한다.

●광개토대왕 고담덕-드넓은 영토를 개척한 웅지의 영웅군주

한국인이라면 다 아는 광개토 대왕은 용기와 군사적 지략을 지닌 인물이었지만 대고구려를 만들 수 있었던 기본 자질은 바로 큰 뜻과 통찰력을 갖춘 때문이다. 그의 집권 시기는 중국은 북조의 여러 나라들이 흥망을 반복하고 있었고 백제는 신라를 압박하며 낙랑, 대방 땅을 두고 고구려와 충돌하는 시기였다.

그는 즉위 하자마자 영락이라는 연호를 지었는데 여기서 그의 통치목표가 국가의 영원한 복락이었음을 알 수 있다.그는 신라를 압박하던 백제를 집중공략하고 신라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서 이들의 군사력을 견제하는 군사, 외교적 감각을 보여준다. 또한 대 중국 전략에서도 강력한 군사전략을 구사하면서도 이이제이 적 외교책을 구사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그는 고구려가 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원주민과 신 주민들 간의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개방적 태도를 취하여서 기존 원주민들만 하던 왕릉의 수묘 역할을 정복지의 신 주민들에게 맡긴다. 그리고 장수왕 이전에 평양의 경제, 문화, 역사적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는 통찰력을 보였다. 즉 확대된 국가의 수도로서 적합한 문화선진지역 평양의 가치를 알아본 것이다.

전쟁에서 광개토대왕은 스스로 전장에서 진두지휘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철저한 전략을 마련하여 작전에 임했다. 즉 각 전투의 필요와 조건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으로 가장 효율적이 전쟁을 펼쳤던 것이다.


●무령왕 부여 사마-백제의 총체적 위기를 해결한 경륜가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개로왕이 사망한 후 백제의 왕권을 극히 미약한 상태였고 무령왕의 즉위 전까지 여러 왕들이 개혁을 시도하다 귀족들에 눌렸다. 이런 미약한 백제의 왕권을 굳건히 한 인물이 바로 백제의 무령왕이다. 흔히 많이 들어본 무령왕릉의 주인공이 바로 이 사람이다.

그의 혈통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한데 아무튼 혈통적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고 추측되는 그는 40이 넘는 나이에 즉위하는데 그 전왕인 동성왕의 형으로써 그동안 국정에 참여함으로써 이미 정치, 경제적 실력을 충분히 갖췄다. 즉 그는 너그로운 성품으로 인심을 얻었고 결국 혈통상의 하자를 극복하면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경륜 있는 지도자답게 완급을 가려 정치, 군사적 난제를 풀었는데 먼저 동성왕을 시해한 백가세력을 단호히 처벌함으로써 국왕의 위엄을 보이고 귀족세력을 억압했다. 그리고 고구려와 말갈을 격퇴함으로써 외적의 침략에 어느 정도 대비하고 민생안전에 주력했다.

그는 즉위 전 상당기간 왜에서 거주함으로써 세련된 국제 감각을 갖췄는데 중국의 남조 양나라와 외교관계를 강화해서 대내외적 권위를 강화하고 중국문물을 적극 수입하여 백제 귀족문화를 한결 세련되게 했다. 또한 백제 자체문화를 발전시키는 한편 왜의 고대 문화 발전을 돕기도 했다. 이를 통해서 왜의 군사적 지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진흥왕 김삼맥종-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믿음의 인재 경영

진흥왕은 불과7세에 태후의 섭정을 받으며 즉위했는데 즉위전 부모가 모두 유명을 달리했다.그래서 그는 일찍부터 깊은 고독을 맛보았고 이런 고독은 통찰력을 높여주기도 한다. 그가 사려 깊었다는 사실은 우선 어린 나이에도 왕위를 지키면서 자연스럽게 친정으로 연착륙한 데서 알 수 있다.

그의 통찰력은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유역을 차지하는데 에서 알 수 있는데 여기서 동맹이었던 백제 성왕을 배신하는 면에서 진흥왕은 국익을 위해 과감하게 군사작전을 폈다. 특히 그는 신라의 운명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서해안의 당항 성을 확보함으로써 대중국 교류의 항구를 장악했고 이는 신라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는데 이를 장악함으로서 신라는 향후의 삼국 간 전쟁에서 밀리지 않고 당과 교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진흥왕은 국태민안의 전통적 통치이념을 보다 분명히 제시했는데 그의 재위 시 세워진 순수비들에서 그의 이념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 통합의 국가비전을 제시하여 신라의 진로를 설정하는데 소극적인 한 삼국에서 신라는 생존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이를 알아차린 진흥왕은 천하를 불법으로 통일하였다는 불교의 전륜성왕이데올로기를 받아들여 장차 동이세계를 통일 하고자 하였다.

그는 광개토왕과 같은 진두지휘하는 용맹한 영웅은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인재를 중시하고 잘 활용하였다. 화랑도 또한 그가 제도화했고 인재를 기용할 때도 포용적이어서 그가 등용한 인재들의 면면은 출신부터 다양했다. 즉 보수적인 진골귀족만이 아니라 가야 계 유민이라 어려 출신의 인재를 거리낌 없이 등용하여 신하들을 끝까지 신뢰했다. 이는 신하들이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신라가 후대에 화백제등의 협의적 정치풍토를 유지케 하는데 일조했다.

●선덕여왕 김 덕 만-여왕의 힘과 리더십

현대와는 다른 배경에서 등장했지만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성 왕으로서 국내외 어려움 속에서도 나름의 리더십을 발휘해서 주목받고 있는데 그녀는 진평왕의 딸로 성골의 남성이 없으므로 진평왕의 주장에 의해 즉위했다. 선덕여왕은 능력 있는 신하를 거느린 행운의 군주였고 그들을 적재적소에 잘 배치했다.

여왕이 대외, 군사적인 면에서 수세에 몰렸던 것은 사실이나 이는 그 당시 국제 관계에서 처한 신라의 처지 때문이지 여성이기 때문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오히려 여성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리더십의 양상이 있었는데 그것은 관인명민 즉 너그럽고 인자하고 현명하고 센스 있다는 뜻이다.

이런 성품은 흔히 성공한 여성리더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성품이다. 뛰어난 미모도 그녀의 리더십을 배가한 주요한 요소였는데 설화로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상사병으로 죽은 불귀신 애기에서 잘 들어난다.

그러나 그녀는 지나치게 불교에 치우친 종교 중심적 사고를 보여서 이런 현실 인식부족과 비전의 부재는 결국 측근 위주의 통치행태를 낳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재위 중 반란을 맞았고 그 와중에 임종했다.

●의자왕 부여의자-망국을 재촉한 자만심

삼천궁녀로 잘 알려진 의자왕은 실은 의롭고 인자한 왕이라는 뜻이다. 의자왕은 효와 우애를 다한 사람으로 평가 받았다.그는 왕자의 이름을 효라고 지을 만큼 효사 상에 투철한 면을 보였다. 삼국사기에서 그는 크게 용감하고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고 하여 의자왕은 고대의 제왕으로서 일단 성공할만한 자질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40대에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즉위하자마자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는데 먼저 귀족세력을 축출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신라를 공격하여 40여개의 성을 획득한다. 이런 초반의 성공들에 의해서 그는 자연스럽게 자만에 빠져 전제적인 국정운영을 하는데 그래서 성충과 같은 충신을 죽이고 왕의 가족이나 간신이라는 인적 장벽에 가로막혀 왕과의 대화가 거의 차단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제위 후반기로 갈수록 누구도 제지할 수 없는 왕권이 행사되면서 왕은 향락의 늪에 빠져 들었다.

행정과 시책을 볼 때 의자왕은 상당한 자제력을 가진데다 결단력과 추진력까지 갖춘 인물이었으나 넓은 시야나 장래에 대한 비전이 없는 근시안적 사고에 빠져 외교에서도 근시안적이었다. 당시에는 당의 국력이 막강하였는데 고구려의 국력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여 눈앞의 이익에 사로 잡혀 신라를 멸망의 입구까지 몰아붙였고 결국 신라로 하여금 당을 끌어들이게 하는 결과를 가져 왔던 것이다.

●신문왕 김정명-통합을 위한 결단과 추진력

부친인 문무왕 때의 삼국통일에 의해서 신문왕 때는 역사적 유산을 정리하는 한편 확대된 영토와 주민을 다스릴 임무가 있었다. 그러나 과거를 극복하는 과정에는 기성세력과 충돌을 피할 수 없는 법이었고 신문왕에게는 피를 동반한 결단이 요구 되었다.그는 먼저 삼국통합의 공신세력을 숙청하고 유교적 이념에 바탕을 둔 관료제를 강화했다.

신문왕의 통치는 자의적이거나 즉흥적인 게 아니라 체계를 갖추어 제도를 통해 이루어 졌다는데 특징이 있다. 신문왕은 무엇보다 삼국통합을 마무리하면서 고대 진골귀족들을 억압하여 관료로서 위치시키고 전 국토의 행정구역화를 실현하였다. 이로써 한국의 정치체제는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 군현제로 일대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나. 고려의 제왕

▶ 고려 국왕의 정치적 위상과 리더십

고려 시대의 국왕은 국왕권 자체를 초월적 지위로 보장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려왕조는 황제국 체제를 갖추었는데 이는 국왕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의도와 천하를 통일하였다는 강한 자부심이었다. 고려국왕은 조선에 비해 정책결정이나 정치개입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는데 이는 정치적집단의 수장이라는 고려국왕의 정치적 위상과도 관련이 있다. 그래서 개혁정치에서는 국왕들이 개혁을 주도했다. 또한 고려시대에 측근정치 또한 고려국왕의 정치적 위상을 알려준다.

●태조 왕건-포용력과 균형감각을 지닌 통합군주

태조 왕건의 리더십은 궁예의 리더십을 자양분으로 하여 길러졌다. 장년기인 42세에 즉위하였는데 왕건은 통합 전쟁 중에도 많은 예물과 겸손한 말로 자세를 낮추어 지방 세력을 달래고 설득하여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결혼 정책을 실시했다. 왕비의 출신 지역은 옛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여러 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즉 민심을 중시하는 포용력의 리더십이었다.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에서 민심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민심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신하의 간언을 따르고 참소하는 말을 멀리하고 ,때에 맞추어 백성을 부리고 요역과 부세를 가볍게 하여 농사의 어려움을 알면 백성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면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평안하게 될 것이다. 태조 왕건이 구사한 통합의 리더십은 민족통일과 지역갈등 해소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 오늘의 우리사회에도 타산지석이 된다.

●성종 왕치-국가 개혁 프로그램의 완성차

갓 스물을 넘길 때 즉위한 성종은 태조왕건과 광종이 단행한 개혁을 마무리 지어야할 책임이 놓여 있었다. 성종의 즉위 당시 고려정세는 광종의 개혁세력과 지방 세력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형세였는데 성종은 이 위기를 국왕으로서 권위를 확립하고 왕조 최고의 경영자로서 자신이 역량을 발휘할 기회로 삼았다.

먼저 정국돌파를 위해 언로를 틔우는 일에 착수하여 5품이 상의 모든 관료에게 국가 현안에 대한 의견을 올리게 했고 선두 주자는 최승로 이었다. 성종은 ‘시무28조’를 올린 최승로를 재상에 등용하고 그의 개혁안을 국정운영의 지침으로 활용했으므로 성종의 리더십은 최승로의 개혁안에서 읽을 수 있다.

최승로는 철저하게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정치를 주문하였는데 왕권과 신권, 불교와 유교, 외래문화와 토착문화의 공존을 위해서는 그것을 유지할 균형추가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선진적인 법과 제도의 수용이었다.

성종은 최승로로 상징되는 유교관료집단과 고려의 고유한 풍속과 제도를 유지하려는 서희로 상징되는 정치세력을 동시에 끌어안는 조화와 균형의 리더십으로 성국을 운영하였다. 이는 성종만이 가질 수 있는 리더십이었다.

●숙종 왕옹-난국돌파를 위한 부국강병책

인주 이 씨의 외척세력에 대한 쿠데타로 집권한 숙종당시의 고려 사회는 그야말로 위기의식이 만연해 있었고 그가 이를 극복한 대안으로 남경으로의 천도를 내건다. 그러나 이 천도론은 숙종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이때 그의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의 제안으로 화폐주조와 유통 책을 실시하였다.

이 시책은 화폐사용을 통해 국가가 유통경제를 장악하고 유통과정에서 문벌은 권세가나 대상인들이 민을 수탈할 가능성을 방지하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왕권을 강화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또한 여진 정벌을 위해 편성한 별무반은 국왕 권을 강화하고 전국의 군역자원을 국가가 직접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숙종은 왕조의 최고 경영자로서 외척의 기세를 누르고 통치기반을 확고히 다지면서 나라 안팎의 위기를 일거에 타개하기 위해 부국강병이라는 공리 주의정책을 아젠 다로 제시한 것이다.

●의종 왕현-왕권의 신성성을 추구한 비운의 국왕

이자경의 난과 서경 묘청의 난으로 인해 왕실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김부식 등의 문신관료들의 입지는 크게 강화된 상태에서 19세에 즉위한 의종은 예민하고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먼저 의종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편년통록’을 편찬했는데 여기서 태조 왕건 이전의 왕실세계를 정리하였고 고려왕실의 기원을 당나라 왕실에 연결시키고 풍수지리, 도참사상 등과 결합시켜 왕실과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하였다.

제위 중반이래. 의종은 유교보다는 풍수지리설, 불교,  도교 등의 고려의 전통사상을 자신의 리더십을 뒷받침할 이념으로 내세웠다. 이는 유교중심의 문신관료집단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의종에게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하였다. 즉 국왕의 측근세력인 환관과 내시, 친위세력인 무신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정국은 정치 세력 간에 조화와 균형을 이루지 못한 채 파행을 거듭하다가 무신정변이라는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조화와 균형을 상실한 최고 경영자의 독단과 독선이 어떤 결과를 낳는가를 의종의 리더십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충선왕 왕장-내치에 어두운 실패한 이상군주

최초의 혼혈 왕이었던 충선왕은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였다. 충선왕은 세계제국 원나라의 앞선 제도를 받아들여 재정위기를 타개하려 했다. 재정개혁과 함께 제도 개혁 면에서도 철저하게 원나라의 기준을 삼아 제후국으로서 고려의 위상을 확립하려했다. 이런 행위를 통해 원의 제후국으로 고려의 위상을 정립함으로써 왕권 및 고려 왕조의 안정을 보장받으려 한 것이다. 즉 단순히 원나라에 대한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일단 억누르고 배울 것은 배우자는 냉정한 이성의 리더십을 지향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역대 국왕가운데 세계화를 추구한 최초의 국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충선왕의 주된 관심사는 왕권과 직결된 원나라 정국의 동향이었고 재위 중 많은 시간을 원나라에서 보낸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충선왕은 고려의 정치현실에 너무 무관심하였다. 그는 한국역사상 유일하게 전지정치를 펼쳤는데 국왕이 직접내치를 하는 게 아니라 귀국하는 대신 측근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담은 교서를 국내에 전달하여 왕 노릇을 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내치를 한 측근신하들이 사리사복을 채웠고 충선왕의 외치는 이런 내치의 실패로 물거품이 되었다.

●공민왕 왕전-현실에서 실패한 미완의 개혁가

도덕적 결함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공민왕은 22세에 국광으로 즉위하였다. 그 무렵 공민왕은 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회복해야 할 과제와 함께, 부원세력과 국왕 측근의 불법적인 행위로 고통 받아온 백성을 구제하고 날로 악화되는 나라 살림살이를 넉넉하게 해야 하는 내정개혁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공민왕은 이런 역사 과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정도로 대세를 읽을 줄 아는 탁월한 리더십을 지닌 군주였다.

그는 반원개혁과 내정개혁을 왕조존속과 왕권강화를 위한 지름길이라고 인식하였다. 공민왕을 지지한 세력은 많았는데 자신이 정국을 직접 장악하고 필요에 따라 여러 유형의 세력을 등용시켜 난국을 수습하는 형태는 측근에게 의존하여 그들의 비리와 불법, 정치적인 독주를 허용한 이전의 국왕들과는 다른 리더십이다. 그것은 적재적소에 인물을 기용하여 정국을 돌파하는 치밀한 용인술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기존 정치질서와의 조화가 전혀 없어서 결국 개혁정치에 실패하고 신하에게 시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러나 그가 추구한 개혁의 방향은 뒷날 이성계일파가 시도한 개혁의 모델이 되었다. 즉 단기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성공한 개혁이 공민왕의 개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민왕은 개혁에 대한 분명한 비전과 뛰어난 리더십을 지닌, 한국사에 몇 안 되는 군주의 하나로 평가받을 만하다.

다. 조선의 제왕

▶ 조선 국왕의 정치적 위상과 리더십

고대나 고려의 왕들에 비하면 조선의 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지 못했다. 제도가 그만큼 정비되면서 왕을 견제하는 장치도 적절히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정치사에서 왕권과 신권의 문제는 결국 왕권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행사하느냐에 따라 갈등의 양상을 보이기도 하고 조화를 이루기도 하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 왕위계승은 적장자원칙인데 실제로 거의 실현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태종 이방원-권력 일원화를 추구한 냉혹한 군주

조선의 건국에 큰 역할을 한 이방원은 정도전의 신권중심주의와 갈등했고 1398년 왕자의 난을 기회로 이방원의 승리로 태종으로 즉위한다. 태종은 강력한 왕권 중심주의를 펼쳐서 육조직계제의 단행, 전국의 수령 파견, 호패법 실시, 신문고 설치, 청계천 공사 등의 정책을 시행한다. 태종은 성리학 중심의 국가이념 확립과 국가재정 강화를 위해 불교와 사원에도 칼을 들이댔다. 또한 한양으로 재 천도함으로써 500년 조선의 기틀을 확립했다.

수많은 악역에도 불구하고 태종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왕으로 평가를 받는데 는 후계자에 대한 결단이 한 몫을 했다. 바로 맏아들 양녕대군을 세자로 임명하였다가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후계자로 지명한 부분이다. 태종은 국왕의 자리는 장자세습이라는 원칙보다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제 겨우 반석에 올려놓은 조선 왕조가 굳건히 뿌리를 내리려면 충령과 같은 능력 있는 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세종 이도-함께하는 정치의 표본

한국인이 모두 존경하는 세종이 이룬 찬란한 민족문화의 성과들은 나열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러나 함께하는 정치야 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세종시대의 리더십이다. 자신이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였음에도 세종은 독단적으로 정국을 운영하지 않고 전국의 인재를 불러 모아 이들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공법이라는 세법을 정할 때 17만 명에 이르는 백성들에게 여론 조사를 한 것이나 천민출신의 과학자 장영실을 발탁한 것 등은 포용적 리더십의 대표격이다. 세종은 조선이 나갈 국정의 방향을 자주, 민본, 실용으로 삼았다. 사실 세종은 개인적으로 불우한 측면이 많았는데 가족을 먼저 세상으로 보내고 불교에 관심을 보인적도 있고 각종 질병이 평생 따라 다녔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최고 통치자로서 역량을 쏟고 역사적 책무를 다한 세종은 고통 속에서도 최선의 성과물을 후손에게 남겨주었기에 그 모습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광해군 이혼-명분보다 실리를 택한 현실주의자

조선에서 연산군과 더불어 왕의 칭호를 받지 못한 불우한 광해군은 현재 역사하계에서 가장 이슈가 되는 인물이다. 과거에 폭군이라는 이미지보다는 현실주의자로서 모습이 부각되고 재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세자로서 직접 의병모집을 진두지휘하는 군사전략가로서 자질을 보여주었으나 어렵사리 왕으로 즉위한다.

광해군의 즉위는 영창대군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에 대한 정치적 보복을 예고하는 것이었는데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를 함으로써 정치적 부담을 없애려고 했지만 오히려 이것은 광해군의 씻을 수 없는 도덕적 죄상이 되어 인조반정의 실마리를 주고 폐위되고 만다. 그래서 인조 반정 후 광해군은 패륜아로 왕호를 박탈당하는데 이는 승자의 역사에 의한  것이고 실상 광해군의 평가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패륜아라는 어둠과 반대로 전란의 상처회복이라는 빛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토지를 복구하고 민생의 부담을 덜어주는데 공을 들였고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전후 문화 복구 사업에도 힘을 쏟아 전란당시 소실한 책들의 편찬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외교정책에서 단순한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여 명나라와 후금사이에서 적당히 중립정책을 견지함으로써 최대한의 실리를 추구한다. 이는 이후 인조시대와는 확연히 구분되는데 인조는 명분을 내세우다가 결국은 삼전도의 수치를 당하게 된다.

도덕적 결함이 있었지만 현재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포악한 군 주상에서 실리외교를 수행한 현명한 군주라는 쪽으로 선회하고 있다.
다만 광해군 정권의 실패에서 비록 개혁의 방향이 옳다 하더라도 정국 운영방식이 독선적이라면 더 큰 반동을 야기할 수 있음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효종 이호-실현 불가능한 목표, 북벌

인조의 청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즉위하게 된 효종은 자신의 의도이던 아니던 북벌의 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즉 효종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 형인 소현세자와 아버지 인조의 갈등, 바로 북학과 북벌을 둘러싼 갈등 때문이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즉위 후 반청척화파를 등용하여 북벌을 국가의 주도 이념으로 설정하였고 송시열을 불러들여 북벌의 이념을 널리 전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작 송시열등을 위시한 산림들은 북벌자체보다는 북벌을 위한 준비단계에서 내수(內修)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백성들이 그간의 전쟁에 지쳐 전쟁에 회의적인 점도 북벌정책의 크나큰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효종은 북벌을 실현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재위 10년 만에 승하한다.

군사적 힘이 뒷받침되지 않은 현실에서 북벌을 국가의 주요 이념으로 설정한 효종의 선택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볼 수 있다. 효종시대 북벌추진은 운명적인 역사 상황 속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고독한 국왕의 길을 보여준다.

●숙종 이순-붕당정치기를 돌파한 강한 카리스마

숙종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이 당시는 조선 왕조에서 당쟁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시기이다. 서인과 남인의 정권교체와 함께 엄청남 정치보복이 수반된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은 숙종대의 치열한 정치사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치열한 당쟁 속에서도 왕권은 흔들림이 없고 오히려 왕자신이 정치적 대립을 이용한 측면이 크다.

숙종은 정치사 굴곡 속에서도 장기 집권하면서 굵직한 업적들을 남겼다. 숙종은 성리학의 의리 론과 명분론을 철저하게 조선에 구현함으로써 도덕국가, 문화국가를 지향한 면이 뚜렷한데 그러나 숙종은 이념만을 추구한 왕이 아니었다. 숙종은 상평통보의 유통과 같이 실리적인 경제개혁을 단행하여 상업과 유통경제가 균형 있게 발전할 기틀을 마련했고 국방강화에도 주력했다.

숙종은 정치, 경제, 문화의 측면에서 영조, 정조가 황금기를 연출할 수 있게 그 바탕을 마련한 왕이었다.

●영조 이금-왕조의 중흥을 이끈 뚝심의 추진력

조선시대 가장 오래 집권한 영조는 조선 후기 정치, 문화의 중흥 기 였다. 영조는 당쟁의 대립에서 어렵사리 왕에 오름으로써 당쟁의 폐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인식했다. 영조가 바라는 나라는 당쟁이 종식되고 국왕이 중심이 되어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나라였다. 그래서 그는 당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탕평책을 실시하는데 이는 왕이 스스로 탕평파인 세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또한 영조는 조선시대 어느 왕보다도 서민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였는데 영조의 어머니가 후궁출신이어서 어렸을 때 사가에서 지낸 경험이 영조의 건강을 유지시키는 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균역법, 청계천 공사 등 영조가 서민 위주의 경제정책을 펴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의 가족사는 평탄치 못하는데 그의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인 비정한 아버지로서 우리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
어쨌든 영조는 52년간 장기 집권하면서 조선 후기 정치, 문화중흥의 기틀을 단단히 다졌고 정조에게 후계자를 물려줌으로써 조선의 역사에서 성군으로 꼽힌다.

●정조 이산-개혁군주의 실천과 좌절

정조는 정치적 불안한 위치에서 어렵사리 왕이 되었고 죄인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벗기 위해 정치역량을 집결시켰다. 정조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왕권의 강화를 추진하였는데 이는 성왕 론이라는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정당화되었다. 성왕 론은 국왕을 정치의 핵심 주체이자적극적인 정치가로 보는 입장으로 부정적인 붕당 관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국왕중심의 개혁정치를 강력히 추진한 의지를 비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으로 규장각을 설치하고 당파나 신분에 구애 없이 젊고 참신한 인재들을 규장각에 모았다. 또한 금난전권을 폐지하면서 시전상인들의 독점적 상권을 뺏어서 경제활동을 촉진 시켰으며 화성을 새롭게 건설하면서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하면서 자주 화성에 행차하며 근위대인 장어영을 대동하여 왕권의 강함의 대내외적으로 과시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적극적인 개혁정치를 추구하였지만 영조 대 이후 권력의 중심부에 포진한 노론 벽파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독살설이 나도는 의문사로 갑자기 죽게 된다. 정조의 죽음으로 그가 추구한 개혁정치는 미완성으로 그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의 사후 개혁정치는 후퇴하고 역사상 세도정치기라 불리는 불운의 시대가 왔다.

3. 맺음말

모든 리더십의 기본요소는 통찰력과 식견, 용기와 추진력 나아가 고결한 성품과 공정성, 성실성 여기에 신뢰감과 포용력을 가능한 한 두루 갖추어야 한다. 하지만 각 제왕들은 각기 다름대로의 시대적 배경이 달랐고 또한 거기에 필요한 리더십 또한 달랐다.

자의적 권한을 행사할 여지가 많았던 고대 왕 들의 영웅적인 리더십이 무령왕이나 진흥왕과 같이 나라를 흥하게 하는 경우도 있고 의자왕과 같이 망국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강한 카리스마의 남성적 리더십이 있는 반면 선덕여왕처럼 부드럽고 인재를 길러내는 여성적 리더십도 있다.

고려나 조선시대에서 지방 세력이나 신권과 왕권과의 대립 속에서 여론을 중시하고 정치 세력 간 조화와 균형을 이룬 리더십도 있고 강한 통찰력과 추진력을 갖추었지만 포용력이 부족하여 실패한 리더십도 있다.

리더십도 역사와 더불어 시대 혹은 해당 시기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구조에 의해 규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사한 시기에 같은 정치 구조 속에서 살았지만 왕의 자질이나 참모들의 공헌 여하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을 유념하여야 한다.

이 책이 완벽한 리더십의 모델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시대적 요청에 따라 제시되는 리더십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제왕들에게 각기 요청되는 시대적 배경을 보면서 현시대에 요구되는 리더십의 모습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통찰력을 키우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자료정리 : 이상윤 terranlee@gmail.com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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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