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의(박제가)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29. 15:47
1. 저자에 관하여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 1750. 11. 5 ~ 1805. 4. 25]
- 본관 : 밀양
- 자 : 차수(次修)·재선·수기
- 호 : 초정(楚亭)·정유·위항도인
- 주요저서 : 《명농초고》 《정유시고》 《유정집》
그는 본관이 밀양이고, 우부승지를 지낸 박평(1700 - 1760)의 서자로 1750년 11월 5일에 태어나 1805년 4월 25일에 죽었다. 당파로는 소수당파인 소북에 속했으며,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하고 활동한 서울내기라고 할 수 있다. 박제가는 보통수준에 불과한 문인이 아니라 18세기 후반 시단에서 최고의 명성을 누린 대작가였다. 이덕무∙유득공과 더불어 종래의 조선 한시와는 다른 참신한 시를 창작하였고,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 큰 인기를 누린 최고의 시인으로 군림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에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등 과 함께 건연집(巾衍集) 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었다. 1778년에는 사은 사채제공(蔡濟恭)을 따라가서 이조원(李調元)등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고 돌아왔다. 후에 청나라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하여 북학의(北學議) 내 외편을 저술하였다.
북학의 내편에서는 생활도구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 사회제도의 모순점과 그 개혁방안을 다루었다. 1779년에는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받아 13년간 규장각 내∙외직으로 근무하였다. 1786년 왕명으로 당시 관리들의 시폐(時弊)를 시정 할 수 있는 구폐책(求弊策)을 올리게 하였는데, 그가 진언한 소는 주로 신분적인 차별 타파와 상공업을 장려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790년에는 정사(正使)황인점(黃仁點)을 따라 두 번째 연행(燕行)길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서 다시 왕명을 받아 연경에 파견되었다. 이는 원자(元子:뒤의 순조)의 탄생을 축하한 청나라 황제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하여 정조는 한낱 검서관이었던 그를 정3품 군기사정(軍器寺正)에 임시로 임명하여 별자(別咨)사절로서 보낸것이었다.
1798년에는 북학의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응지농정소(應旨農政疏)를 정조에게 올렸는데 진소본북학의(進疏本北學議)는 이때 작성된 것이다. 1801년(순 조1)에는 사은사 윤행임(尹行恁)을 따라 네 번째 연행길에 올랐으나 돌아오자마자 동남성문의 흉서 사건에 혐의가 있다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805년에 풀려났다.
박제가는 시·그림·글씨에도 뛰어난 재질을 보였는데, 청대(淸代) 사고전서 (四庫全書)계열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대련형식(對 聯形式)을 수용해왔다. 글씨는 조선말기의 서풍과 추사체의 형성에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또한 그림은 간결한 필치와 맑고 옅은 채색에 운치와 문기(文氣)가 짙게 풍기는 문인화풍의 산수 인물화와 생동감이 넘치는 고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그의 유작으로는 대련글씨, 시고(詩稿), 목우도(牧牛圖), 의암 관수도(倚巖 觀水圖), 어락도(魚樂圖), 야치도(野稚圖)등이 있다. 저서로는 북학의, 정유집, 명농초고(明農草藁)등이 전해지고 있다.
2. 북 학 의
≪맹자≫ 등문공상의 진량의 고사에서 나온 말, 남방에 있는 자가 문화가 발달한 중국 북방으로 가서 선진 문물을 배웠다는 의미다. 즉“북학의”는 조선의 학자가 문화가 발달한 중국에 가서 선진 문물을 배웠다는 말이다.
■ 북학(北學)의 의미
□ <맹자>“나는 중화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교화하였음은 들었어도, 오랑캐로 해서 (누가) 변하였다함은 듣지 못하였다. 진량은 (남쪽의) 초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주공과 중니의 사상을 좋아하여 (북쪽의) 중국에 가서 북학을 하였다.”
□ 북학은 중국을 배우는‘중국학’이지만 그 의미에 주의해야 한다.
□ 중국학의 내용은 주공과 공자(孔子,仲尼)의 원초유학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것.
□ 중국과 조선의 관계 : 청은 두 차례 조선을 침략(정묘;병자)한 만주족의 나라.따라서 적대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이후의 한일 관계와 유사성이 있음.
□ 박제가의 선택오랑캐의 나라인‘청’에서 무엇을 배우겠는가? 라는 것이 당시 지배층의 분위기였다.하지만 청나라의 우월한 문물은 배워야 한다는 것은 그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문화적인 자존심과 북벌로 표출되는 적개심을 아울러야 했다. 그러므로 실제 청의 문물이지만“주공;공자의 사상으로 호도된 중국을 배우자.”라고 각색하여 표현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북학”은 그에 합당한 적절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 서적에 대하여
책의 구성 : 북학의 내편 외편 / 진소본 북학의
□ 북학의 내편 : 대체적으로 중국 여행을 통해서 확인한 문명세계에 대한 보고가 주축.
□ 북학의 외편 : 북학의 이론을 설명하는 글이 주축, 개혁 의지의 표출.
□ 진소본 북학의 : 농업개량을 지향한 농서로서의 성격이 중요성을 지님
※ 내외편이 20대 후반에 완성. 젊은 나이에 저술이 가능한 것은 서얼 지식인층의 문화적 사상적 그룹에서 활동한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문예그룹 백탑시파에서의 활동하였다.
■ 담겨진 내용들 - 북학론에 대하여
□ 사상적 특징 : 기존사회의 고착된 폐쇄성, 봉건성의 해부와 파괴
이용후생이 되지 않은 한 어떠한 도덕적 이념적 세례도 허구임을 설파
□ 내용적 분류
- 농업의 개량 : 농기구의 중요성, 전반적인 농업 기술의 개량을 주장
- 공업의 진흥 : 농업의 개량 -> 공산품의 개량 / 수레, 배, 주택, 벽돌의 예
- 상업의 장려 : 농업과 아울러 상업의 중요성 설파 / 무역의 장려(對 중국)
- 국방에 관하여 : 수레, 배, 벽돌 등은 국방에도 관계가 있음을 주장, 병기의 개량
3. 책속에서의 외침
학문의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모르는 것이 나타나면 길가는 사람이라도 붙잡고 물어보는 것, 그것이 올바른 학문의 방법이다. 어린 종이 나보다 한 글자라도 더 아는 것이 있다면 예의염치를 불문하고 그에게 배울 것이다. 남보다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여 자기보다 나은 자에게 묻지 않는다면 종신토록 아무런 기술도 갖추지 못한 고루한 세계에 자신을 가두어버리는 꼴이 되리라.
- 책의 서문에서, 박지원 연암이 쓰다. -
만나기 어려운 것은 성스런 군주이고, 아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눈앞에 닥친 절호의 기회입니다. 현재 천하는, 동으로는 일본으로부터 서쪽으로는 서장(티베트), 남쪽으로는 과왜(자바섬), 북쪽으로는 할하에 이르기까지 전쟁 먼지가 일지 않은 지 거의 2백 년입니다. 이것은 지난 역사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에 온힘을 다하여 국력을 키우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에 변고라도 발생할 때 우리도 더불어 우환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직책을 맡은 신하가 태평성대를 아름답게 꾸밀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신은 그것을 염려합니다.
-‘병오년 정월에 올린 소회’, 책 뒷면에서
자료정리 : 양태종 bigbell811@naver.com
출처: SPR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