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문화(찰스 P. 스노우)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29. 00:01
1. 책 소개 및 구성
< 차 례 >
. 서문
. 두 문화와 과학혁명 (1959년도 리드 강연)
. 두 문화 : 그 후의 고찰
. 스테판 콜리니의 해제
. 참고 문헌
. 옮긴이 해제
- 스노우가 1959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두 문화와 과학혁명>이라는 주제로 한 리드강연과 그에 대한 해제로 구성
- ‘두 문화(The Two Cultures)’라는 용어는 스노우의 리드강연 이후, '인문학'과 '과학'간의 상호무지와 몰이해를 나타내는 말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의사소통의 단절을 주제로, 이러한 단절이 20세기 영국을 비롯한 서구문명이 직면한 가장 큰 장애물임을 지적
- 스노우는 강연에서 과학자들의 인문학적 소양 부족과 기초과학자들의 응용과학에 대한 편견 등 다양한 차원의 상호무지와 몰이해의 문제를 나란히 언급
- 하지만 그 보다 더 강조한 문제점은 서구 세계를 관리해 온 문학적 지식인들의 과학에 대한 무지
- '두 문화' 의 극복이 필요함을 주장
- '두 문화' 현상의 근본적 원인 : 영국의 뿌리깊은 '전문화 교육'의 전통
- '두 문화' 해결방안 : 교육, 두 문화를 두루 갖춘 인력이 양성될 수 있는 교육체제가 필요
* 반디북 http://www.bandibook.com
<두 문화와 과학혁명>이라는 제목으로 1959년 5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있었던 한 강연에서 과학자이자 문학자인 찰스 스노우는 조심스러우면서도 강렬한 어조로, 현대 서구 사회는 과학적 문화와 인문적 문화 사이의 단절이 매우 심각하며 이러한 두 문화 사이의 단절은 진정한 문화 자체의 발전에는 물론이고 정상적인 사회 발전에도 치명적인 장애가 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스노우의 강연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아직도 그에 대한 논쟁과 비판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과학문화와 인문문화의 조화가 얼마나 중요한 미래적 과제인가를 보여주고 급속한 속도로 지식 전문화에 매몰된 현대인들에게 문화적 보편성을 이애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2. C.P. 스노우 (찰스 퍼시 스노우, Charles Percy Snow)
- 영국 라이체스터, 1905년 10월 15일 출생
- 모범적인 학생
- 고전문법학교인 뉴턴학교(공립중학교)를 다님
고전이나 인문학보다는 과학에 소질을 보였고, 과학분야에 전력을 기울임
- 1925년, 라이체스터 대학의 화학물리학과 입학 수석으로 학부 졸업, 이학 석사 획득
- 1928년, 케임브리지의 크라이스츠 칼리지 물리학 박사과정, 연구활동
- 소설가로 활동
- 1959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의 리드 강연
- 1964년, 공업기술부 차관, 상원의원으로서 기술에 대한 정부의 대변인
- 1966년 4월 내각에서 물러나, 문학활동과 강연,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
- 1980년 7월 1일 작고
레스터 대학(라이체스터,Leicester University)을 거쳐 케임브리지에서 25세에 물리학 박사가 됐으며, 그곳의 크라이스트 칼리지(Christ's College)의 특별연구원(fellow)으로 분자물리학 분야를 1945년까지 연구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의 과학 담당관으로 활약했다. 또 이 기간 중 과학자들의 징집과 배치를 감독한 공로로 훈장을 받고, 1957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1964년에는 공업기술부 차관이 됐으며 상원의원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스노우는 1930년대부터 정식 소설가로서 활동하기도 했는데 1932년 탐정소설 '항해 중의 죽음(Death Under Sail)'을, 1934년 대학 연구원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연구(The Search)'를, 그리고 1940년부터 30년 동안에는 11권에 달하는 대하소설 '이방인과 동포(Strangers and Brothers)'를 집필했다.
3. 책 내용 <두 문화와 과학혁명>
1) 두 문화
2) 타고난 러다이트로서의 지식인
3) 과학혁명
4)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1) 두 문화
- 서구 사회의 지적 생활은 갈수록 두 개의 극단적인 그룹으로 갈라지고 있다.(14쪽)
- 문학적 지식인과 과학자 사이의 몰이해(15쪽)
한쪽 극에는 문학적 지식인이 그리고 다른 한쪽 극에는 과학자, 특히 그 대표적 인물로 물리학자가 있다. 그리고 이 양자 사이는 몰이해, 때로는(특히 젊은이들 사이에는) 적의와 혐오로 틈이 크게 갈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도무지 서로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도무지 서로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상하게 그들은 서로 상대방에 대해서 왜곡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태도는 아주 딴판인데 심지어 정서적인 차원에서도 별반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다. 과학자가 아닌 쪽의 사람들은 흔히 과학자를 성급하고 허풍이 심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16쪽)
비과학자들은 과학자가 인간의 조건을 알지 못하며, 천박한 낙천주의자라는 뿌리깊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한편 과학자들이 믿는 바로는, 문학적 지식인은 전적으로 선견지명이 결여되어 있으며 자기네 동포에게 무관심하고, 깊은 의미에서는 반지성적이며, 예술이나 사상을 실존적 순간에만 한정시키려고 한다.
- 과학자의 낙천주의(18쪽)
무엇을 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를 몹시 찾고 싶어 하는 성미의 소유자인 동시에 그것을 해낼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알 때까지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낙천주의야말로 과학자 아닌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다
- 문학인들은 사실 20세기 초의 예술과 반사회적인 감정의 가장 저속한 표현 사이에 어떤 연결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 있어서 비난을 받을 만큼 느렸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가운데 일부 사람들이 예술에 등을 돌리고 새로운 혹은 다른 길을 독자적으로 타개하고자 한 이유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19쪽)
- 전통적 문화(문학적지식인)와 과학적 문화(미래, 과학자), 문화의 양극화(23쪽)
우리는 지적인 사회를 통해서 물리학자의 세계로부터 문학적 지식인의 세계로 옮겨 가는 길목에서 온갖 색조의 감정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과학의 전적인 몰이해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 모든 것에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몰이해는 우리들의 생각보다는 더 광범위하게 전통적인 문화 전체에 비과학적인 기미를 풍기게 하며, 이는 흔히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반과학적인 전환점이 되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쪽 극에서 느끼는 공감은 다른 쪽에서 극의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과학자가 타고나면서 미래라는 것을 지니고 있다면 전통적 문화는 미래 같은 것에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반응을 보인다. 전통적 문화는 과학적 문화의 출현으로도 별반 상처를 입지 않고 여전히 서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양극화는 개인으로나 국민으로나 또 사회를 위해서나 막대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 비과학자들의 과학에 대한 무지(27쪽)
나는 전통적인 문화의 기준에서 볼 때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의 모임에 자주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들은 과학자들의 무지에 대한 불신을 표명하는 일에 상당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참을 수가 없었던 나는 그들 중에서 몇 사람이 열역학 제2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냐고 물었다. 반응은 냉담했고 또 부정적이었다. 나는 <당신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은 일이 있습니까?>라는 질문과 맞먹는 과학의 질문을 던진 셈이었다.
그보다 더 간단한 질문, 예컨대 <질량 혹은 가속도란 무엇인가?>(이 질문은 <당신은 읽을 줄 아는가>라는 질문과 동등한 과학상의 질문이다)라고 물었다면, 그 교양 있는 사람들의 열 명 중 하나는 내가 그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느꼈으리라고 믿는다. 이처럼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체계는 진보한다는데, 서구의 가장 현명하다는 사람 중의 대부분은 물리학에 대해서 말하자면 신석기 시대의 선조와 같은 통찰력 밖에는 없는 실정이다.
- 두 문화는 서로 만날 만한 곳이 없는 것 같이 보인다.(29쪽)
우리는 사상이나 창조의 핵심을 이루는 최상의 기회를 태만 때문에 놓치고 있다. 두 주제, 두 규율, 두 문화 ㅡ두 은하계까지도ㅡ의 총돌하는 지점은 반드시 창조의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이다. 정신활동의 역사에서 어떤 돌파구가 열릴 것도 바로 이 지점이었던 것이다.
두 문화에 대해서 서로 접촉하여 대화를 나누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기회는 말하자면 진공 상태 속에 있는 셈이다.
- 영국의 두 문화 현상(29쪽)
나는 앞에서 이 문화의 분리는 비단 영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모든 서구 사회에 존재한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이 현상은 두 가지 이유에서 영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유1. 교육의 전문화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
이유2. 사회의 형태를 고정화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문화의 분리라는 현상이 일단 시작되면 모든 사회적 세력은 그것을 고정화하려고 하며 그 정도도 더욱 더 늘어간다는 것이다.
- 영국 교육의 재고 필요(31쪽)
기존의 옥서퍼드나 케임브리지의 장학생 시험제도는 융통성 없고 고정된 영국 교육의 전문화를 야기. 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영국의 교육을 재고하는 일이다.
2) 타고난 러다이트로서의 지식인
- 러다이트(34쪽)
과학적 문화에 속하는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서구의 지식인들은 산업혁명을 이해하려고 힘쓰지도 않았고 원치도 않았으며, 또 할 수도 없었다. 하물며 그것을 받아들일 턱도 없었다. 지식인, 특히 문학적 지식인은 말하자면 타고난 러다이트들이었다.
* 러다이트:(luddite) 산업혁명 당시 기계가 실업의 원인이라고 잘못 생각한 데서 기계 파괴의 폭동을 일으킨 공장 직공들
- 과학자, 재능있는 사람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 미래
- 문학적지식인, 비과학자, 전통적 문화, 러다이트
- 산업혁명과 과학(35쪽)
거의 모든 재능 있는 사람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부를 낳게 하여 준 산업혁명에 되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전통적 문화는 산업혁명이 풍성해 질 수록 더욱 그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19세기 중엽부터 앞을 내다보는 사람들은 국가가 부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유능한 인재들에게 과학, 특히 응용 과학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전통적 문화는 이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한편 기초과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별반 이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아카데믹한 사람들은 산업혁명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지저시 칼리지의 늙은 코리 학장이 어느 일요일에 케임브리지로 달려오는 기차를 바라보면서 <주님이나 나에게도 저것은 유쾌한 광경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 산업화, 가난한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38쪽)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기회만 주어진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토지를 떠나 그들을 흡수해주는 공장으로 옮겨간다는 점에 있어서 이상하리만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 산업혁명의 혜택
(응용 과학이 의료 과학과 의료 간호학과 나란히 발전하기 때문에 인구가 크게 날어난다는 것, 이와 비슷한 이유에서 충분한 식량 확보가 가능하게 된다는 것, 산업 사회는 그렇게 하지 않고는 운영될 수 없기 때문에 누구나 일곡 쓸 줄 알게 된다는 것,) 즉 건강, 식량, 교육은 산업혁명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보급시켜 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병폐도 적지 않다...
- 우리는 과연 그러한 이들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를 이해하고 있을까? 옛날 산업혁명을, 그리고 또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새로운 과학혁명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이해해야 할 점인 것이다.
3) 과학혁명
- 산업혁명과 과학혁명(41쪽)
산업혁명 : 점차적으로 기계를 사용하게 된다는 것, 남녀의 직공들을 공장에 고용한다는 것, 영국의 주된 산업인 농업에 종사하는 노동인구를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고 그 제품을 판매하는 인구로 변하게 한다는 것
과학혁명의 시기 : 원자입자가 최초로 공업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때
- 기초과학과 응용과학, 산업에 대한 이해(43쪽)
대개의 기초 과학자들은 생산적인 공업에 대해서 한심할 정도로 무지하였고 지금도 그렇다고 해도 틀린 생각은 아니라고 본다. 기초 과학자와 응용 과학자를 동일한 틀 속에 일괄시키는 것을 허용한다고 해도 양자 간의 간격은 큰 것이다. 또한 기초 과학자와 기술자가 서로 상대방을 오해하는 수도 많다. 그들의 행동은 아주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대체로 기초 과학자는 기술이나 응용 과학상의 많은 문제들의 기초 과학의 문제처럼 지적으로 정밀하며, 그 해답들도 기초 과학에서처럼 만족스럽고 아름답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기초 과학자들은 만족스럽고 아름답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기초 과학자들은 본능적으로(그들의 본능은 아마 이 나라에서 어디서나 새로운 속물 근성을 찾으려 하며, 만일 없을 경우에는 새로운 것을 만들려는 열정으로 날카롭게 되어 있다) 응용 과학이란 2류 두뇌의 소유자에게 알맞는 직업이라고 생각해 왔다.
- 교육의 문제로 전환(46쪽)
내 마음은 다시 교육의 문제로 향하게 한다. 어째서 우리는 과학혁명에 대처하지 않는가,
- 영국, 미국과 소련의 교육체계(46쪽)
영국 : 소수의 엘리트를 훈련시키는 낡은 패턴, 전문 교육, 엄격한 교육
미국 : 넓고 일반적인 교육,
많은 수의 사람들이 구속을 받지 않고 창조적 의욕을 잃지 않고 있다
학위 과정에 들어간 후 엄격한 교육
소련 : 고등학교교육은 영국만큼 전문화되어 있진 않지만 미국보다 훨씬 힘든 과정
모든 학생이 과학과 수학 교육을 받음
대학 5년 과정 중 마지막 3년 과정에서 전문 교육 시행
- 영국의 1인당 1인의 영국인을 전문적인 수준으로 양성한다면 미국은 1.5인 소련은 2.5인 양성(과학자와 기술자를 합쳐서)
- 소련은 과학혁명에 대해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 소련의 대학 졸업 기술자의 2/3는 여성. 영국에서 여성을 과학적인 직업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는 것은 큰 잘못의 하나라고 본다. 이런 모양으로 우리는 인재의 축적을 반으로 절감시키고 있다.
- 기술자 경시(51쪽)
영국에서는 기술적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전문학교와 같은 제도에서 교육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에게는 열등학급이라는 레테르를 붙이고 있는데, 이보다 잘못된 생각은 없다. 우리는 종종 전문적인 의미에서 영국의 테크니컬 콜리지의 졸업생만큼 엄격한 교육을 받지 않았던 미국의 기술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 미국 기술자들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그 까닭은 대학 출신의 엔지니어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사귀는 데 있다고 본다.
- 영국의 운명, 과학혁명에 대한 이해와 교육이 필요(52쪽)
여러 선진국 가운데서 영국은 장차 가장 불안한 위치에 놓여있는 것 같다. 영국은 자급 자족 할 수 있는 인구의 2배나 안고 있다. 게다가 천연자원도 매우 적은데, 세계 다른 강대국에 비하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유산이 있다면 지혜라고나 할까.
- 우리가 했어야 할 일은 먼저 과학혁명을 이해하며, 자기 스스로를 충분히 교육하며, 남에게 본을 보여 격려해 주는 일이었다.
- 스스로를 교육하느냐 아니면 우리들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영국이 급격히 멸망하는 것을 바라보겠느냐 한다면 거의 옳은 표현이 될 것이다.
- 기존의 패턴을 타파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것을 수행할 수 없다고 나는 지금 확신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잘 안다. 그것은 이 나라의 거의 모든 사람들의 감정에 거슬린다.
- 역사적인 신화, 베네치아 공화국의 마지막 반세기(53쪽)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우연히 부(富)를 누리는 때가 있었다...
우리들이 이제야 분명히 느끼고 있는 것처럼 그들도 역사의 흐름이 그들과 맞서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길을 타개하려고 결심하였다. 그 결심이란 그들이 고정시켰던 패턴을 타파하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패턴을 좋아했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패턴을 좋아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그것을 타파할 만한 의지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 베네치아 공화국 : 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존속한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 과두 정치 체제를 유지하였다. 14세기에는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여 번영하였다. 16세기 이후 신항로의 발견으로 무역의 중심지가 대서양으로 옮겨 가면서 쇠퇴하여 1866년에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4) 부유한 자와 가난 한자
- 과학혁명의 주된 문제, 공업국과 비공업국, 빈부의 불균형(54쪽)
과학혁명의 주된 문제가 되는 것은 공업화된 나라의 국민들이 갈수록 부자가 되고 공업화가 뒤늦은 나라의 국민들은 겨우 현상 유지에 급급하다는 데 있으며, 따라서 공업국과 비공업국 사이의 격차가 날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규모에서 볼 때 이는 부자와 빈자의 격차를 이루게 한다.
-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55쪽)
부유한 나라로는 미합중국, 백인의 여러 공화국, 대영제국,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 소련을 들 수 있다. 중국은 어느 편이냐하면 아직 공업화의 언덕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으나 아마 넘어서는 중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가난한 나라들이다.
- 서구는 이 변혁을 위한 원조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난처하게도 서구의 그 분뢰된 문화를 가지고서는 그 변혁이 실제로 얼마나 큰 것인지, 특히 그것이 얼마나 빠른지를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 변화의 속도 증가, 가속도, 공업화 실현 가능(56쪽)
- 아시아나 아프리카 문제의 전문가들의 입을 통해서 지금도 듣는 것은<그네들은 우리의 수준까지 끌어 올리자면 족히 5백년은 걸릴걸, 뭐>라는 말이다. 이러한 말은 그야말로 무분별하며, 기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의 말이다. 그리고 흔히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은 구석기인도 5년 쯤이면 따라갈 수 있는 인간들이다.
- 인간이란 누구나 내일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놀라운 용기를 나타낸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오늘의 즐거움에 대해서 사람들은 별반 감격하지 않지만 내일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흔히 숭고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 오늘날의 중국과 같은 큰 나라를 완전히 공업화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과학자, 기술자, 기능공을 양성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된다. 의지와 짧은 세월이 있으면 된다. 과학을 습득하는 능력은 특정한 나라나 민족이 보다 뛰어나다는 근거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모든 나라나 민족이 모두 동등하다는 증거가 많이 있다. 전통이라든지 기술적인 배경 같은 것은 뜻밖에도 거의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과학혁명은 불가피하다.(59쪽)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격차 제거시킬 수 있다.
- 과학혁명을 위해 필요한 것, 자본과 사람(60쪽)
- 가난한 나라의 경우 자본은 밖으로부터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의 원천은 미국을 위주로 하는 서구와 소련이다. 원조 활동은 반드시 국가적인 규모에서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자본만큼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즉, 외국의 공업화를 위해서 자기 생애의 10년간을 헌신할 만한 유능한 과학자와 기술자가 필요한 것이다. (소련은 이러한 인적 자원 풍부, 영국은 현재 없으며, 미국도 별로 나을 것이 없다)
- 우리가 아직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이 기술자들은 과학적인 교육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교육도 받을 필요가 있다. 이 기술자들은 가부장적인 태도를 불식하지 않는 한, 그들의 업무를 수행해 나가지 못할 것이다.
- 슈바이처 등, 그들의 행동은 고귀한 것이었지만 그 태도는 가부장적이었다. 이제부터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인들이 환영하는 사람은 이런 부류의 유럽인이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사람은 같은 동료러사 함께 흙투성이가 되며, 알고있는 것은 모조리 전해 주고, 올바른 기술적인 일을 한 다음에는 돌아가는 그런 사람이다. 다행히도 어느 과학자에게서나 쉽게 찾아낼 수 있는 태도이다. 과학자는 다른 사람보다 인종적 편견이 적으며 그들이 갖는 문화는 그 인간 관계에 있어서 민주적이다.
- 과학혁명의 제 3요소, 완전한 교육 계획(자본, 사람, 교육)(62쪽)
- 이러한 세계적 규모의 과학혁명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기계 자본을 포함한 모든 자본의 확충, 과학기술의 인적 자원, 그리고 완전한 교육 계획이 필요하다(193쪽)
- 마지막 문단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시작할 때가 아닌가? 위험한 것은 우리가 이 세계에서 얼마든지 시간을 가진듯이 생각하는 교육을 받아 왔다는 데 있다.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은 아주 적다. 그처럼 적기 때문에 나는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두 문화 : 그 후의 고찰
- 순수 과학과 응용 과학(83쪽)
과학적인 과정에는 두 가지의 동기가 있다. 그 하나는 자연의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며, 또 하나는 자연을 지배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우주의 기원과 성질을 연구하는 우주진화론은 전자에 꼭 들어맞는 예가 된다. 그리고 의학은 후자의 전형적인 예가 된다.
- (117쪽~)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또 의사소통을 하지 않으려는 두 문화의 존재는 위험하다고 본다. 분열된 문화를 갖는 과학자들은 자기들에게만 통용되는 가능성에 대한 지식을 제공한다. 오늘날 우리는 절반에 그치는 교육(half-educated)에 만족하면서, 마치 몇 개 안 되는 단어 밖에 모르는 주제에 외국어를 들으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가 보아도 분명히 중대하다고 생각되는 정보를 들으려고 버둥거리고 있다. 교육의 변화만 가지고 우리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이러한 변화 없이는 우리들의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교육을 통하여... (118쪽)
궁극적으로 교육의 변화가 곧 기적을 낳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문화의 분열은 필요 이상으로 우리를 우둔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을 어느 정도는 손질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피에로 델 프란체스카나 파스칼, 괴테가 그들의 시대의 세계를 이해한 것 처럼, 우리들의 현대의 세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남성과 여성을 길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행운을 누리게 되는 날에는 우리는 많은 훌륭한 인재를 육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예술과 과학에 있어서의 풍부한 상상적 체험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며, 과학기술이 베풀어 주는 것, 그리고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다른 많은 인간들이 겪고 있는 제거시킬 수 있는 고난을 방치해 두지 않을 것이며, 또 일단 부정할 수 없는 책임이 밝혀지게 될때 그것을 무시하지 않을 사람들일 것이다.
자료정리 : 황아영 yayings@naver.com
출처: SPR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