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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29. 00:00

백범일지(김구)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29. 00:00

1. 지은이

- 김구 (金 九, 1876-1949)
 

  踏雪野中去(답설야증거) 不須胡亂行(부수호란행)
  今日我行蹟(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자후인정)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백범 김구선생이 즐겨 쓰던 휘호-


1876(1세)   황해도 해주에서 김순영과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남
1887(12세)  양반이 되기로 결심, 과거를 위한 서당공부 시작
1892(17세)  과거 낙방, 관상 공부를 하여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
1894(19세)  황해도 동학농민군의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 공격
1896(21세)  치하포에서 일본군 육군 중위 쓰치다를 국모보수로 처단
1903(28세)  아버님 탈상 후, 황해도에서 교육사업 시작
1907(32세)  국권회복을 위한 신민회 가입, 황해도 총감으로 활동
1911(36세)  안악사건으로 옥살이
1915(40세)  출옥 후 농민계몽운동 전개
1919(41세)  3.1 운동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 경무국장, 내무총장 노동부총판, 국무령 역임
1931(56세)  한인 애국단 조직
1932(57세)  이봉창 윤봉길 의사 의거로 위기의 독립운동을 되살림
1940(65세)  한국광복군 조직, 전격적 군사활동 전개
1941(66세)  일본에 선전포고
1945(70세)  미군과 국내진입작전 준비
             일본의 조기 항복
             환국, 신탁통치 반대운동 주도
1948(73세)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지도자 연석회의 참석
1949(74세)  6월 26일, 친일파, 반통일 세력에 의해 서거

 

2. 옮긴이

-도진순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창원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현대사 전공의 소장학자로서, 백범 관련 글과 논문이 10여 편이 넘는 이 분야의 권위자로 오랜 기간 동안 백범에 관한 학문적 연구를 진행해왔으며 『백범일지』 출간을 위해 4년여에 걸친 집중적인 작업을 해오면서, 친필 원본은 물론 등사본·필사본·추가본과 수많은 출간본을 검토하고, 옛 문헌과 자료들을 수집·분석하는 등 새로 출간하는 [백범일지] 정본화 작업에 완벽성을 기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저서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이승만·김구 시대의 정치사>가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해방 직후 김구·김규식의 국가 건설론과 정치적 의미>, <백범일지의 원본·필사본·출간본 비교연구>, <백범 김구 시해사건과 관련된 안두희 증언에 대한 분석>, <휘호로 본 백범 김구, 그 삶의 궤적과 진> 등이 있다.


3. 목 차

  상권                                         하권                                나의 소원

인·신 두 아들에게                   하권을 쓰고 나서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2. 시련의 사회 진출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3. 질풍노도의 청년기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4. 방랑과 모색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5. 식민의 시련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6. 망명의 길                          6. 해방 전후의 대륙
                                           7. 조국에 돌아와서

                                         

4. 책 소개

<백범일지>는 김구가 이미 50대에 접어든 1929년 탈고했으나 정식 간행된 것은 귀국 이후이다. 1947년 12월 15일 국사원에서 처음 백범 김구선생의 아들 김신에 의해 초간 발행된 것을 필두로 오늘날까지 국내외에서 10여 본이 출판사를 통해 중간되었다. 보물 제1245호로 친필 원본은 백범 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에 보존되어 있다.

<백범일지>는 김구가 상해 이후 중경까지 27년간 임시정부 요직을 두루 지내며 틈틈이 써놓은 친필 원본이란 것과 임시정부의 1차 사료로서 독립운동사 연구와 위인전기 사료로 귀중한 자료이다.

<백범일지>는 원래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매일같이 사선을 넘나들던 백범 김구 선생이 어린 두 아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알리고자 쓰기 시작했다.

<백범일지>는 독립 운동가이며, 정치가인 백범 김구가 직접 쓴 자서전으로,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기의 상편은 1929년 백범 김구선생이 53세 되던 해에 상해임시정부에서 1년 정도 독립운동을 회고하며 국한문혼용체로 김인, 김신 두 아들에게 쓴 편지형식이다.

하편은 백범 김구선생이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의 두 차례에 걸친 항일거사로 인해 상해를 떠나 중경으로 옮겨가며 쓴 것으로 ‘3.1운동의 상해’, ‘기적 장강 만리풍’ 등의 제목 아래 민족해방을 맞게 되기까지 투쟁 역정을 기록하고 있다.

상, 하편 뒤로는 완전독립의 통일국가건설을 지향하는 선생의 민족이념정신이 잘 나타나 있는 ‘나의 소원’이 덧붙여져 있다.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부터 다시 조국에 돌아오기까지의 일대기를 상세히 기록한 <백범일지>는 백범 김구선생의 민족주의적 신념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실천에 옮겨졌는가 하는 행적과 인간적 면모가 피력된 자서전 형식을 띠고 있는 책이지만 오늘날에는 한 시대의 ‘귀감’으로서 그리고 ‘사상서’로서 읽혀지고 있다.


5. 내용 요약

나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5살 때 한학자 정문재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하고,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1911년 출옥하여 김홍량의 동산평 농장 농감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 무력 활동을 시작하여 결사단체인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였고,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의 일본 왕 생일축하식장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나는 난징에서 장제스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 일본 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으며,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사령관에 지청천을 임명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였고,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하다가 8·15광복으로 귀국하였다. 27년 만에 고국땅을 밟게 된 나는 귀국 후 38선 남쪽 지방을 순회하고 인천, 마곡사, 제주도, 부산, 진해 서부지방 등 나에게 의미가 깊은 여러 지역을 순회하였다.


6. 인상 깊은 구절

내가 이 책을 발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으로서 이다. '백범'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의 독립,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지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으로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 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나의 소원'은 이러한 동기, 이러한 의미에서 실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품은, 내가 믿는 우리 민족 철학의 대강령(大綱領)을 적어 본 것이다.                 

 


자료정리 : 박혜미 loveham1982@hanmail.net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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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