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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 소개

제임스 버크 (James Burke)북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탈리아에서 영이(英伊)사전을 편찬하던 중 우연히 방송 일을 접한 그는 BBC, PBS 등에서 과학, 역사, 시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들을 제작해 격찬과 함께 수많은 상을 휩쓸었다.

그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세계를 읽는 독특한 시각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3백여 대학에서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와 컴패니언북을 교재로 채택하고 있다.

그는 복잡한 과학사에서 연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사소한 사건이나 사물들을 연결, 기술사의 발전 과정에 숨어 있는 근원을 추적해 그 상관관계를 명쾌하게 파헤친다. 그가 제작 중 유명한 것으로는 "커넥션 Connection 1,2" 시리즈와 "우주가 바뀌던 날" 등이 있다.  

현재 런던에 거주하면서 '애틀랜틱 먼슬리' '사이언티픽 아메리카' 등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2. 책 속으로
  
- 저자 서문

“과거의 어느 시대에나, 신화에 근거를 둔 것이건 혹은 연구 결과에 근거를 둔 것이건 간에 사람들은 우주가 어떻게 작동하는 가에 대한 그들 나름의 명백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시대건, 지식의 중요부가 변화하면 그들이 가진 세계관도 언젠가는 바뀌었다. 이 책은 이러한 변화의 순간들을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까지 이어 내려오면서 현대인들의 생활을 이루는 기본 요소가 된 중요한 제도나 사고 방식이 세계관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 책의 목차
  1) 그것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2) 중세의 갈등
  3) 원근법은 철학이다
  4) 지식의 축적과 기억의 소멸
  5) 하늘로 쏘아올린 대포알
  6) 산업혁명의 진실
  7) 의사들은 그때 무슨 일을 했을까?
  8) 시대가 기다리던 진화론
  9) 새로운 물결
10) 변화는 계속된다.
 


3. 내용 요약
 
- 고대 그리스에 기원을 둔 합리주의와 그 영향

서양에서 현대적 기술이 생겨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끊임없이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수단들을 생산해 내는 방향으로 움직였다는데 있다.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지만 사회의 안정을 위해 사용한 과거의 다른 사회들과 달리, 사회를 부단히 개혁하는데 이용한 서구인들의 합리적 사고방식은 이오니아인들은 불리한 환경(농업 생산성악화, 내륙진출의 한계)의 극복과 생존을 위한 본능적 생의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바빌론의 천문학을 향해술로 이용하였다. 이와 같은 예를 통해 그들의 실용주의적 성향을 볼 수 있다.

- 신앙과 이성의 갈등, 그리고 삶의 지속성

생명, 우주에 대해 경외감이고 수동적으로 살아가던 중세인 들에게 잊혀졌던 그리스와 아라비아의 과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의 논리체계가 이슬람 학자들을 통해 소개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의 사람들은 “이해는 오직 믿음으로부터 온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이제 “믿음은 오직 이해로부터만 온다.”고 말한다.

1277년 로저 베이컨은 이런 주장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무기형을 선고받고 투옥된다. 변화는 이미 시작 되었다. 아라비아 세계로부터 지식은 홍수처럼 밀려오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에 유럽 곳곳에 대학이 설립된다. 자유롭고 합리적인 자연 탐구, 이성과 믿음의 충돌은 여기서부터 시작 되었다.


- 계산하는 이성과 자연과학 

흑사병의 창궐로 유럽은 황폐해 졌다. 수에 밝고, 미신을 믿고, 감정적이고, 이기적이었던 이탈리아는 흑사병의 습격으로부터 빠르게 회복할 수 있는 이상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탈리아 피렌체 인들은 ‘아라비아의 최신 기법’을 이용한 회계시스템으로 엄청난 돈과 재화를  관리할 수 있었다. 

메디치 가(家)를 중심으로 피렌체는 급성장 하는데, 그들은 부유해 질   수록 고대 공화정 시대의 로마와 비교·연구를 시작한다. 그 결과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완성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초기 르네상스주의 사상가들은 원근법적 기하학에 눈뜬다. 원근법, 기하학이 등장하자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물도 측량할 수 있게 되었다. 물리적 형태를 드러내는 표현도 가능해졌고, 건축술에도 크기에 따른 비례가 적용되어졌다.

새로운 측정 방법이 퍼지면서 행성들을 측정하는데 멈추지 않고, 배에서 부두까지의 거리를 재는 방법, 지구의 알려지지 않은 곳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는 등 향해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 지식의 축적과 기억의 소멸

“15세기 잔다르크가 죽었다는 소식이 콘스탄티노플까지 전해지는데 18개월이,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소식이 베네치아에 전해지는데 한 달이, 로마에는 두 달이, 유럽 다른 지역에 전해지는 데는 석 달이 걸렸다.” 중세인 들이 하루 동안 갈 수 있는 여행 거리는 평균 11킬로미터, 지도도 없었고, 길도 거의 나 있지 않았다.

다른 여행자로부터 얻은 정보조차 다른 계절, 상황에서 여행한 것이라면 제한된 가치밖에 없었고, 강물의 흐름이 바뀌고, 여울이 깊어졌으며, 다리가 무너지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이런 이유로 방언을 쓰는 마을 사람들은 80키로미터 밖 에 사는 사람들의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사람들간 인적, 물적 교류는 거의 없었고, 양피지· 가죽의 수량은 제한되어 있었기에 기억법이 필수적이었다. 때문에 경험이 풍부한 노인이 공경 받는 사회였다.

14세기 끝 무렵 종이 가격이 4백 퍼센트가 내려가고, 제지 공장들이 많이 생겨남에 따라 종교 개혁의 목소리도 커져갔다. 교회는 오랫동안 성직 매매나 수상쩍은 행위들로 비난 받았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읽고 쓸 줄 아는 성직자들이 대량 해고 되었다. 이들은 필경 작업소에 고용되었다. 안경이 개발되고(안경은 14세기 개발, 한 세기 만에 일반화 되었다.) 종이가격이 떨어지자 책에 대한 수요도 증가했다.

성장하기 시작한 사업상의 업무를 다룰 필경사들의 수가 부족했고 그들의 임금은 엄청나게 높아졌다. 경제 성장은 벽에 부딪힌 것처럼 보였다.

1450년대 귀금속이 많이 나는 남부독일 광산지대에서 그 해결책이 나왔다. 그 지역은 천문, 향해 기기의 주 생산지였으며, 최고 수준인 시계 공들이 대부분 그 지역에 살고 있었다. 전문보석 세공인들과 금 세공인들이 갑옷에다 귀금속을 입혔고, 정교한 장난감을 만들어 냈다. 이들 도시는 금속을 다루는 작업에 고도로 숙련된 사람이 많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요하네스 구텐베르그였다.

인쇄술은 외부 세계와 다양한 접촉을 가능케 했으며 직접적인 만남 없이도 정보를 교환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색인은 정보 교환의 주요 원천인 상호 참조를 가능케 했다. “사실”이 탄생 했으며, 그와 함께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익숙한 전문화와 대리경험이 생겨났다.

인쇄술이 발명된 직후부터 유럽인에 끼친 영향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지식의 확산과 더불어 고대 신비문서들이 부정확한 채로 다량으로 인쇄 되어 혼란을 주었고, 교회가 인쇄술을 이요하면서 면죄부를 수천 장이나 복제해 미켈란젤로 등에게 작업을 의뢰하는데 비용을 마련하였다. 이는 종교개혁의 불꽃을 당긴 루터에게 영향을 준다.

- 근대 과학혁명의 의의

종교개혁은 급속도로 전 유럽을 휩쓸었다. 귀족, 지식인이 종교개혁 선봉에 섰다. 교회 역사상 최대의 위기 국면을 수습하기 위해 트렌토에 왔던 고위 성직자들은 강력하게 대응해 나갔다. 교구마다 학교를 세우고, 사제가 되려면 시험을 보아야, 종교재판을 강화하고, 금서목록이 주기적으로 갱신되었다.

농민들을 위해 공의회는 그들의 신앙생활을 좀 더 매력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즉 교회에 가면 종교를 더 가깝게 느낄 수 있게 했다. 교회의 전체적인 설계와 장식은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 볼 때 천장화가 그려진 돔에 의해 색의 소용돌이와 장식물들이 강조되어 찬상처럼 보일 수 있도록 꾸몄고,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재료와 색으로 꾸며진 빛, 구름, 휘장, 성상 이 모든 것이 교회를 극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르네상스시기의 균형 잡힌 비례는 혼란스러운 형태와 색채에 자리를 내주었다. 16세기 들어 율리우스 달력에 11일 오차가 생겼는데, 이것은 신학적인 문제였다. 구원을 얻으려면 부활절과 같은 기념일을 잘 챙겨야 했는데 이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코페루니쿠스는 이 문제는 근본적인 세계관 즉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론(우주는 행성들이 운행하는 일련의 동심 수정체 천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맨 바깥쪽의 천구에는 별들이 고정되어 있다. 하늘을 관찰하면 천체들은 끊임없이, 그리고 변함없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들이 부패하고 사멸하는 지구와 달리 천체는 완전하고 손상되지 않는다고 했다.

지구와 천체는 전적으로 다른 세계로, 우주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원동자인 신에 의한 신의 직접적인 개입이 그 체계를 유지시키는 데 필수적이었다. 즉 우주의 중심에 있는 지구와 인간은 모두 신이 자신이 모상에 따라 만든 것 이다.)에 치명적 오류를 주장한다.(이때 피타고라스와 아리스타르코스를 인용. 이단의 책임을 회피한다.)

코페루니쿠스는 태양이 지구의 궤도 중심이 있다고 주장함으로 우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인간은 더 이상 만물의 중심이 아니었다.
행성과 사과는 중력이라는 힘에 종속되어있고 수학법칙에 따라 자연을 연구하고 발견함으로 자연을 조작하는 일이 가능해 졌다. 뉴튼은 사물의 운동을 예측할 수 있는 등식을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근대 과학이 탄생한다.

- 근대 의학과 생물학 그리고 근대인의 삶

“살아 있는 환자의 신체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므로, 약은 겉으로 나타나는 증상에 따라 목록을 작성한 일련의 분류 체계에 의존하였는데 그것이 의사가 진단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였다. 의사들의 성공과 실패는 침상 곁에서 환자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있었다. 돈벌이가 많이 되는 자리를 다른 의사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경쟁이 치열했다. 질병에 대한 상호 배타적 이론과 치료법이 만연했고 치료방법이 특이하면 할수록 환자들은 자신들이 의사로부터 특별하고 개인적인 치료를 받고 있다고 느꼈다.”

18세기 사람들은 강력한 국력이 인구에 달려있다고 믿기 시작하면서 전제 군주들은 인구 증가에 힘을 쏟는다.  출산 전후 6주 이상 침대에서 몸조리를 할 수 있도록 하며, 육아에는 학교 정책, 난방, 조명, 환기 등 지원이 있었다.

프랑스 의학이 두드러지게 발전한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의사의 지위가 향상 되고, 전쟁에서 부상당한 병사의 치료를 전담하는 위생관이라는 새로운 지위가 부여 되었다. 전쟁을 통해 살 속에 남은 납탄 옷감, 등이 감염을 일으킨다. 라는 사실과 신체적 외상이 전혀 없이 죽어가는 군인들을 해부함으로 내상으로 사망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의학은 통계학과의 결합과 사망자의 시체는 모두 해부할 수 있도록 한 프랑스 정부의 지원하에 데이터화 해나감에 따라 질병의 성질과 경과에 따라 효율적 치료가 가능진다.

이에 환자는 질병의 진단과 치료에 아무런 간섭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파스테르. 리스터의 ‘석탄산 살균법’등 중요한 잇달아 발견되며 환자들은 데이터의 한 부분으로 취급된다.

 


자료정리 : 박순용 psy33077@hanmail.net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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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