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옹패설(이제현)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28. 23:46
Ⅰ. 작가
고려시대 학자이자 정치가인 이제현(李齊賢)은 충렬왕13년에 태어난 대 유학자이며 문신이다. 그의 자(字)는 중사(仲思)이고 초명(初名)은 지공(之公)이고 호는 익제(益齊)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검교정승(檢校政丞) 진의 아들이다. 충렬왕 27년(1301)에 나이 15세로 성균시에 장원하고 또한 문과에 급제하였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났던 그는 1303년에 권무봉선고 판관(權務奉先庫 判官)등을 거쳐 충선왕(忠宣王) 3년(1303)에 선부산랑(選部散郞) 그리고 이듬해에 전교사승(典校寺丞) 삼사판관(三司判官)등을 거쳐 1312년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로 나갔다가 성균악정(成均樂正)을 지냈다.
충숙왕 1년(1314)에 주자학자 백이정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다가 원나라에 있는 충선왕(忠宣王)이 만권당(萬卷堂)을 세우고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나라의 학자인 요수(姚遂) 조맹부(趙孟부)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했다. 이때 진감여(陳鑑如)이 찬사를 썼는데 그 필적과 그림이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 덕수궁 미술관에 보관되고 있다.
나라의 바른 기틀과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지극히 존중하는 그는 충숙왕 10년(1323)에 유청신(柳淸臣) 오잠(吳潛)등이 원나라에 글을 올려 고려가 원나라의 성(省)이 되어 원나라의 제성과 동등하게 살자고 청하였을 때 이제현(李齊賢)은 고려 400년의 토대가 이로 말미암아 무너진다고 간곡히 호소하여 성(省)이 되는 것을 철회하게 하였다. 때로는 충선왕이 모함으로 유배되었을 때 그 부당함을 밝혀 풀려나게도 했었다.
그는 문장에 밝을 뿐만 아니라 외교적 수완도 비상해서 원나라 정치가들 중에 그를 따르는 자들도 많았었다. 1336년엔 심양왕(瀋陽王)의 고의 모역으로 충숙왕이 잡혀가자 연경에 가서 이를 해명하고 이듬해에 귀국해서 향리에 은거하였다. 그가 향리에 은거해서 뼈아프게 느낀 것은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 밑에 사는 서글픔이었다.
또한 선비들이 자칫하면 이성을 잃고 강자편에 붙어서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을 서글프게 생각하였으며 고려의 튼튼했던 옛일을 무척 그리워하며 오늘의 현실을 타개하는 방법을 여러모로 연구했다. 나라의 사직이 흔들리는 것은 그 책임이 신하에게 있음을 통감했고 나라의 부강책을 세우기 위해서 무척 노력하였었다.
충혜왕 복위 4년(1343)엔 원나라 사신이 왕을 잡아가자 글을 올려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끌려가는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원통해서 기둥뿌리가 빠지도록 분통해 하였다는 것은 후기에 그가 기록하고 있다.
충목왕이 즉위하자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피봉되었고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즉위할 때 우정승에 임명되고 정동성사(征東省事)를 맡자 원종공신(願從功臣) 조일신(趙日新)이 자기보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을 시기하는 것을 알고 자기의 벼슬을 내놓았으므로 뒤의 ‘조일신의 난리’ 때 화를 모면하였었다.
그 후에도 우정승을 두 번 지냈으며 공민왕 6년(1357)엔 벼슬을 떠났다. 벼슬살이를 떠나서는 시를 썼고 성리학자로서 후진들에게 이기(理氣)에 대한 강론을 펴서 학문의 기틀을 튼튼히 했다. 1362년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는 왕과 함께 경주로 피난하였으며 그 후는 왕명으로 실록을 편찬하였었다.
저서로는 『익재난고(益齋亂藁)』·『낙옹비설』·『익재집(益齋集)』등이 있다.
당대의 큰 성리학자로서 각 문장으로 특히 외교문서에 뛰어났고 나라를 아끼는데 그 힘이 대단한 학자이며 정치가였다. 고려말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우기 위해 가진 고통을 안으로 소화해내면서 안으로 튼튼한 나라가 세워지기에 힘썼으며 기울어져가는 사직을 바로 세우기 위해 가진 노력을 바치다가 죽은 위대한 학자이며 정치가다.
Ⅱ. 패관문학
이제현의 <역옹패설>은 박인량의 <수이전> 이규보 <백운소설> 최자의 <보한집> 이인로 <파한집>등과 함께 패관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패관문학이란 패관들이 모아 기록한 가설항담에 창의성과 윤색이 가미된 일종의 산문적인 문학양식. 패관문학이라는 말이 국문학사와 소설사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김태준의 <조선소설사> 가 처음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패관문학보다 패관소설(稗官小說) · 패사(稗史) · 패사소설(稗史小說) · 패관기서(稗官奇書) 등이 거의 같은 개념으로 쓰였다.
김태준은 <조선소설사>에서 고려시대 문학에서 <파한집> <보한집><백운소설><역옹패설> 과 같은 시화 ( 詩話 ) · 잡록(雜錄) 등의 새로운 산문형식의 대두를 설명하면서, 이러한 책들이 패관문학의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고만 하였을 뿐이다. 그는 패관문학을 특정한 문학형식으로 지칭하지는 않았다.
김태준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 원래 여인(麗人)의 문학적 저술이 고려의 전반에 있어서는 주자학의 방성(方盛)하여짐으로 인하여 극히 적으며 약간의 패관문학도 고려의 중엽에 있어서 고려문화의 황금기를 일구어놓은 고종시대를 중심으로 하여 발단되었다. (중략) 인제 패관문학을 포함하였다고 볼 수 있는 서목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면 ” 이라고 하여 이규보의 <백운소설>, 이인로의 <파한집>, 최자의 <보한집>, 이제현의 <역옹패설> 을 열거하고 있다.
<조선소설사> 이후에 대부분의 소설사에서는 패관문학에 대한 일정한 개념을 규정하는 일도 없이 사용해 왔다. 심지어는 동일저서 속에서도 서로 다른 문학형식의 호칭으로 이를 사용해 왔다.
패관문학에 대한 의미를 대략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설화문학
② 설화문학과 소설문학을 연결하는 과도기적인 문학형식
③ 고려 후기의 가전체작품
④ 실사적(實事的)인 잡록 또는 견문잡지(見聞雜識)를 총집한 수필문학
⑤ 고전소설
⑥ 고려 중엽에 등장한 <파한집> · <보한집> 등의 시화문학 등이다.
다기(多岐)한 개념으로 파악되어 온 김태준의 ‘패관문학’ 의 의미는 그가 패관문학을 포함하였다고 볼 수 있는 서목이라고 한 책들의 내용을 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들은 시화 · 시평(詩評) · 서화평(書怜評)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밖에 이문(異聞) · 기사(奇事) · 인물평과 같은 잡기(雜記)로 채워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도 패관문학의 개념은 선명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패관 · 패사 등의 자의(字義)와 소유래(所由來)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패관이라는 두 글자가 문학사에 등장하게 된 것은 한대(漢代)의 도서목록인 반고의 <한서 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 비롯한다. “소설류에 속하는 것들은 대개 패관의 손에서 나왔으며 그것은 가담항어 도청도설로써 만들어진 것이다” 가 그것이다.
‘패관’ 의 패(稗)는 본래 속(粟)의 일종이지만 그 입자가 극히 작다. 그러므로 ‘패’ 는 소(小)의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패관은 곧 소관(小官)을 뜻한다. 그리고 그 신분은 여항(閭巷)의 풍속을 알기 위하여 둔 임시직 사관(史官)이다. 그 소임은 주로 시사 · 민간전설 · 신화를 채집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시사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패관은 중국소설사에서 소설의 근원으로 삼고 있는 민간전설 · 신화 · 사화(史話) · 시사 · 우언(寓言)과도 상통하는 바가 있다. 이로부터 소설가를 가리켜 패관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소설을 패사라고 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말한 소설은 반고가 그의 <한서> 예문지 주(注)에서 “ 혹은 고인에 의탁하고 혹은 고사를 기록한 것으로 사람에 의탁한 것은 자(子)에 가까우면서도 천박하고 사(事)를 기록한 것은 사(史)에 가까우면서도 황당무근한 것이다. ” 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허구적인 근대소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반고의 <한서> 예문지 이후에 <구당서 舊唐書> 경적지(經籍志), <신당서> 예문지, <송사 宋史> · <원사 元史> · <명사 明史> 등의 예문지에서 소설의 분류를 다기하게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모두 당서(唐書)의 그것과 대차가 없다. 그래서 소설가 또는 잡가(雜家)에서 처리하는 정도를 넘지 못하였다.
명대에 와서 호응린(胡應麟)이 그의 <산방필총 山房筆叢> 중에서 소설은 지괴(志怪) · 전기 (傳奇) · 잡록(雜錄) · 총담(叢談) · 변정(辨訂) · 잠규(箴規) 등으로 분류한 일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내용과 체재를 혼동한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청대(淸代)에 와서 기균(紀 浮 )이 <사고전서총목제요 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 소설을 서술잡사(敍述雜史) · 기록이문(記錄異聞) · 철편쇄어(綴編鎖語) 등으로 3분하였다. 그래서 그 내포외연의 범위가 윤곽을 드러낸 셈이다. 그러나 패관문학은 전통적으로 널리 쓰여온 패관소설 · 패사와 다를 것이 없으며 그 개념도 불투명한 상태이다.
≪참고문헌≫ 中國小說的起源及其演變(胡懷探), 小說纂要(蔣祖怡), 稗官文學에 대하여(閔丙秀, 古典文學硏究 1집, 1971). (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Ⅲ. 역옹패설
<역옹패설>은 이제현이 56세(충혜왕 3, 1342년)되던 해 은퇴하여 시문(詩文)·사록(史錄)에 걸친 각종의 고사 등을 만록체(漫錄體)로 엮은 것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역옹패설>은 초간본은 아니며, 1814(순조 4)년 후손들에 의하여 간행된 <익재난고(益齋亂藁)>에 수록된 것이다. 목판본 외에 1911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활자·양장본으로 출판된 바 있고, 1913년 일본 동경에서 영인되기도 하였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역옹패설>은 전2권, 후2권으로 나뉘어 있고 전집과 후집에 각각 간단한 자서(自序)가 있다. 전집 서에서는 책제목에 대한 해석을 하였고, 후집 서에서는 시문(詩文)에 관한 설화를 다룬 것을 밝히고 있다. 전집 2권에는 고려 왕실의 조종(祖宗) 세계(世系)부터 학사(學士)·대부들의 언행 등 역사·인물일화(人物逸話)·골계(滑稽)가 실려 있다. 후집은 시화(詩話)인데, 제1권은 대체로 중국의 것을, 제2권은 고려의 시인 또는 그들의 시에 관한 것을 주로 다루었다.
이 책에 나타난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고려가 몽고, 즉 원나라로부터 치욕을 당한 것에 대해 반성하는 한 방법으로 부당한 사대주의에 저항하고 있다. 전집 권1에서 조정의 중신이 몽고어를 능숙히 구사할 줄 아는 역관 출신이라 해도 공식석상인 합좌소(合坐所)에서 역관의 통역도 없이 직접 몽고어로 원나라의 사신과 대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민족자존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었던 그의 주체적 자세를 반영한 것이다.
② 전통성, 즉 민심의 기반이 없는 위조(僞朝)에서의 영화로운 생활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이 책에서 삼별초(三別抄)정권을 부정적 입장으로 보아 위조라고 생각한 것에 기인한 것으로 이제현은 정문감(鄭文鑑)이 삼별초정부에서 승선이 되어 국정을 맡게 되자, 위조에서의 부귀보다 죽음으로써 몸을 깨끗이 지키고자 하였던 행위를 마땅한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③ 무신정권의 전횡을 폭로하고 그 폐단을 고발하고 있다. 이제현은 오언절구와 시를 인용하여 주먹바람(拳風), 즉 무신의 완력이 의정부를 장악하는 공포정치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낸다. 이제현은 예전에는 우리나라의 문물이 중국에 필적할 만큼 융성하였으나 근래에 산중에 가서 장구(章句)나 익히는 조충전각(雕蟲篆刻: 수식을 일삼는 것)의 무리가 많은 반면 경명행수(經明行修: 경전공부와 심신수련)를 하는 사람의 수요가 적게 된 이유를 바로 무신의 난에서 찾고 있다.
곧 학자들이 거의 다 무신의 난이 일어나자 생명의 보존을 위하여 깊은 산으로 찾아들어 중이 되는 이가 많았다. 그래서 문풍(文風)이 진작되는 시점에 오게 되어도 학생들이 글을 배울만한 스승이 없어 도피한 학자였던 중들을 찾아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지적은 무신집권기가 초래한 반문화적 폐해를 단적으로 밝히고 있는 예이다.
④ 이 책에는 고려 말기 문학론에 있어서 용사론(用事論)과 신의론(新意論)의 현황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이제현은 한유(韓愈)·이백(李白) 등의 당대(唐代) 시인들을 비롯한 유명한 중국 문인들의 시를 거론하기도 하고 정지상(鄭知常)을 비롯한 우리나라 시인들도 거의 망라해서 그들의 시에 대한 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배척이나 악평은 삼갔다. 용사에 있어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단어의 사용은 권장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지명의 사용도 실제정황과 일치하지 못할 경우에는 호된 비판을 가하였다. 이러한 그의 비평태도는 시어의 현실성을 강조하였다는 측면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다.
Ⅳ. 서평
<역옹패설>은 저자가 스스로 ‘박잡한 글로 열매 없는 피 같은 잡물’이라 말하였지만 실제 후대인들에게 작자 당대의 현실과 문학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남겨준 요긴한 책이다.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쭉 뻗은 나무는 나무꾼 도끼의 일차적 표적이 돼 일찌감치 잘려나가고, 못 생긴 나무는 천수를 누린다고 말한다.
이제현은 이를 부재원해(不材遠害·재목이 되지 못하므로 해를 멀리 할 수 있다)로 표현한다. '굽은 나무가 고향 산 지킨다'는 말도 같은 의미로 사람의 눈을 끄는 화려함과 특이성이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위험에 빠뜨린 경우라 하겠다.
자료정리 : 양회영 ghldud2@hanmail.net
출처: SPR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