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혜경궁 홍씨)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28. 23:45
1. 지은이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1735~1815
1735년 지금의 서울 평동에서 홍봉한(洪鳳漢)의 딸로 태어났다.
1744년 사도세자와 혼례를 치르고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1752년 아들 정조를 낳았으며, 그 뒤로 딸 둘을 더 두었다.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면서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랐고,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자 경의 왕후에 추존되었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의 참사를 중심으로 영조 때부터 아들 정조와 순자 순조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일생을 회고한 <閑中錄>을 남겼다.
2. 책 소개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회갑이 되던 해에 1권과 4권을 썼고, 2권과 3권은 71세, 5권은 67세, 6권은 68세, 이렇게 네 차례에 걸쳐 쓴 회고록으로, <인현 왕후전(仁顯王后傳> <계축일기(癸丑日記)>와 함께 우리나라 궁중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더욱이 작자가 세자빈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이므로, 어휘의 선택과 문장의 표현에서도 고상하고 우아한 면을 엿볼 수 있다.
또 당시 사건의 주인공들인 영조와 사도 세자, 그리고 정순 왕후나 자신의 친정 식구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으므로 상황과 인물의 성격에 대한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고 절실하여, 한글로 된 문학 작품 중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아울러 왕실 내부와 사대부 집안의 이야기를 공식적인 기록이 아닌 개인의 감상 형태로 적어, 왕실 친인척의 관계와 여러 가지 관습을 알려 주는 점에서도 가치가 높다.
다만 내용적으로는 자신의 회갑 때 쓴 첫 권이 비교적 개인적인 감상을 기록한 것인 데 반해, 나머지는 아들 정조가 죽고 난 뒤 어린 손자 순조(純祖)에게 보이기 위해 쓴 것이므로 자신의 친정에 유리한 정치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점이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한중록>의 이본에는 한가롭게 쓴 기록이라는 <閑中錄>과 한恨의 기록이라는 <恨中錄> 또는 <閑(閒)中漫錄> 등의 한문 제목이 뒤섞여 사용되고 있다.
1권은 궁에 들어가 웃전들의 사랑을 받은 혜경궁 홍씨의 개인사를 다루고 있어 한가롭게 쓴 <閑中錄>이라는 명칭이 적당하다. 그러나 2권부터는 정치적으로 견제당하는 혜경궁 홍씨의 친정집 이야기와 임오화변에 대한 기록이 시작되면서 그녀의 한恨이 담겼기에 <恨中錄>이라는 제목이 적당하다.
3. 주요 인물
- 혜경궁 홍씨 (1735~1815)
홍봉한의 딸이자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1762년 남편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으로 올랐고,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헌경의황후’, 또는 헌경황후(獻敬王后)에 추존되었다.
- 사도세자 (1735~1762)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조선의 제 19대 황인 숙종의 손자이며 혜경궁 홍씨의 남편이다. 한중록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 총명하고 효성이 극진하였지만 후에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영조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정신병이 걸려 후에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게 된다.
- 영조 (1694~1776)
조선 제21대 왕으로 사도세자의 아버지이다. 탕평정책을 시행하여 붕당의 대립을 완화하였고 여러 차례 사치풍조 금단의 조치를 내렸다. <농가집성>을 보급하고 균역법을 시행하였으며 청계천을 준설하고 신문고를 설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한중록에 의하면 그는 모두에게 자애로운 성군이나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사도 세자에게만 유독 엄하고 미워하였으며 결국은 그를 뒤주에 가둬 죽인다.
- 홍봉한 (1713~1778)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로 1743년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된 뒤 이듬해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노론의 영수로서 영조를 도와 많은 업적을 남겼다.
- 선희궁 (? ~1764)
영빈(暎嬪) 이 씨를 가리킨다.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로, 어려서 궁녀 생활을 하다 귀인을 거쳐 1730년 영빈으로 봉해졌다. ‘선희궁’이란 이름은 1788년 정조가 영빈 이 씨의 사당 이름을 ‘선희궁’으로 고친 데에서 비롯되었다.
- 정조 (1752~1800)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아들이다. 영조 사 후 뒤를 이어 왕위를 등극한다. 어려서부터 비범하였으며 효심이 깊었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에게 갑자년(1804) 즉 혜경궁 씨의 칠순 되는 해에 어린 세자(순조)에게 왕위를 건네고 그에게 지난 모년의 일과 혜경궁 홍씨 집안의 죄를 씻어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정조는 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죽고 만다.
4. 내용 요약
1) 1권
1권에서는 <한중록>을 쓴 계기가 조카인 홍수영의 부탁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혜경궁 홍씨가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태어나 세자빈으로 궁에 들어온 뒤 시아버지와 남편의 사랑을 받은 일, 이 후 정조를 낳고 환갑을 맞기까지의 여러 가지 일들을 순차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이때의 기록은 그녀의 또 다른 풍파가 시작되기 전이고, 또 정조의 지극한 효성 때문인지 다른 권에 비해 담담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기술하고 있다.
2) 2권, 3권
2권과 3권은 임오화변의 주체인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간의 위태했던 일들의 기록이다. 사도세자의 비범한 탄생과 뛰어난 자질, 죽은 경종의 궁인들에게 어린 세자를 보육하게 한 영조와 선희궁에 대한 원망, 사도세자가 ‘문文’ 보다는 ‘무武’를 좋아하게 만든 경종의 궁인들에 대한 미움, 사도세자의 비행으로 겪었던 마음고생, 임오화변 당시의 상황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임오화변 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해서인지 남편 사도세자를 안쓰러워하다가도 혹 친정집에 누가 될까 조심스러운 태도로 주변을 원망하고 있다. 또한 2권부터는 <한중록>을 읽을 순조를 의식하였는지 1권에 비해 사건에 대한 혜경궁 홍씨의 주관적인 생각을 많이 기술하고 있는 편이다.
3) 4권
4권은 갑신년(1764), 영조가 적법한 국통을 잇게 하려 한다며 세손(정조)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은 데 대한 안타까움과, 영조 곁에서 자기의 뜻에 거스르는 일을 한 화완옹주에 대한 원망으로 시작한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의 총애를 받던 화완옹주에게 세손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지만 오히려 모자 사이가 서먹해 지고, 친정집에는 안 좋은 일만 계속된다. 이에 대해 혜경궁 홍씨는 이 일들이 모두 모함이며, 그녀의 친정은 다 나라와 집안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4) 5권
5권은 화완옹주의 양자인 정후겸과 김귀주의 이간으로 혜경궁 홍씨 집안이 겪게 된 일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리고 홍국영과 그의 아버지 홍낙춘에게 벼슬을 시켜 주지 않은 일로 앙심을 품은 홍국영이 훗날 정조의 신임으로 권력을 손에 쥐자 혜경궁 홍씨의 중부 홍인한과 동생 홍낙임을 대역 죄인으로 몰고 간 일에 대해 부당함을 호소하고 있다. 덧붙여 홍국영이 혜경궁 홍씨와 정조, 또 중전과 정조 사이를 이간하며 세도를 누리려 했음을 밝히고 있다.
5) 6권
6권은 1~5권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고 정조에게 후사가 없던 것을 걱정하던 중 가순궁이 순조를 낳은 일과, 정조가 순조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에 사도세자의 일과 외가의 죄를 씻어 주겠다고 혜경궁 홍씨에게 약속했다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혜경궁 홍씨는 이 글을 읽을 순조에게 정조가 한 약속을 지키도록 청하고 있다.
5. 17~18세기 조선왕실 계보와 당파 싸움
<한중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7~18세기의 조선왕실의 계보와 당파 싸움에 대해 미리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누가 다음의 왕, 또는 왕비가 될 것인가?'라는 문제는 언제나 임금의 친척과 관료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켰다.
조선 중기의 관료는 노론(老論). 소론(少論). 남인(南人). 북인(北人)등의 네 당파로 갈려 있었다. 그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을 계기로 번갈아 가며 권력을 잡았고, 그 때마다 왕명(王名)으로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 무렵 소론은 경종을 지지했고,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했다. 결국 경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노론은 경종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경종이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이복동생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영조이다.
영조는 당파 싸움의 폐해를 없애려고 노력했으나, 자신이 왕이 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노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 뒤 영조의 큰아들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후궁이 낳은 둘째 아들이 태어난 지 1년 만에 왕세자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사도 세자이다. 사도 세자는 매우 영리하여 열네 살 무렵부터는 영조를 대신하여 나라 일을 보기도 했는데, 당시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노론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과거에 노론이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사도 세자가 보기에 이것은 왕권에 도전하는 대단히 건방진 짓이었다. 노론의 입장에서는 사도 세자가 다음 왕이 되면 자신들의 앞날이 위태롭다고 판단하고, 사도 세자가 왕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이 무렵 영조의 왕비 정성 왕후(貞聖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새로이 정순 왕후(貞純王后)가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정순 왕후와 혜경궁 홍씨는 사도 세자의 적인 노론의 집안 출신이었다. 이 두 여인의 친정을 비롯한 노론 세력은 사도 세자를 모함했으며, 여기에 정순 왕후도 가담했다.
성격이 과격한 영조는 수시로 사도 세자를 불러 사소한 잘못에 이르기까지 매섭게 꾸짖었고, 세자는 영조를 두려워하면서 정신적으로 아주 불안정한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궁에 데리고 들어오며, 몰래 궁궐을 빠져 나가 평양에 갔다 오는 등 이상하고 난폭한 행동을 많이 했다.
그리하여 정순 왕후의 아버지 김한구(金漢耉)와 노론의 지시를 받은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비행(非行) 열 가지를 영조에게 해 바치는 일이 일어난다. 영조는 크게 화를 내며 왕실의 앞날을 위해 사도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불러 자결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세자가 말을 듣지 않자, 그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게 하고 말았다.
이 때 사도 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와 장인 홍봉한(洪鳳漢)은 애써 사도 세자를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뒷날 임금이 된 사도 세자의 아들 정조(正祖)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노론 일파에 벌을 내렸고, 혜경궁 홍씨와 정순 왕후의 친정 식구들은 죽거나 귀양을 가는 등 풍비박산이 되었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는 정조의 어머니, 정순 왕후는 정조의 할머니였으므로 해를 입지 않았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기록한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실제 내용에는 자신의 친정아버지 홍봉한과 그의 동생들이 사도 세자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없음을 주장하는 부분이 많다.
출처: 디지털 한국 민속 문학 백과사전
6. 감상
<한중록>은 우리나라 고전문학 가운데 그 의미가 아주 큰 작품이고, 소설이 아닌 소설 같은 궁중문학 <한중록>에 빠져들어 어떤 부분들은 되풀이하여 읽곤 하였다. 그러면 <한중록>이 그토록 사람을 잡아끄는 유인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 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정도로 꼽아 보았다.
첫째는 이 책의 저자인 혜경궁 홍씨가 체험한 역사적 사건 그 자체가 너무나도 기구하고 극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영조가 왕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다는 끔찍스런 부자간의 갈등. 지아비를 죽인 시아버지와 제 친정 동생 홍낙임을 죽인 시어머니 밑에서 효를 다해야 하는 며느리와 시부모 사이의 갈등. 그 갈등을 증폭시켜 음해와 모함의 당쟁이었던 권력투쟁의 궁중정치가 그대로 나타나 있다.
<한중록>이 다루고 있는 영조에서 정조, 순조에 이르는 조선 왕조 삼대에 걸친 궁정드라마는 어떤 허구 드라마보다 더욱 드라마틱한 현실의 역사이다. 내간체로 된 회상록 <한중록>을 놓고 궁중‘소설’이다, 아니다 하는 논쟁이 있지만, <한중록>을 한번 읽고 난 독자들은 실화가 소설보다도 더욱 소설적이란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한중록>의 소재 자체, 사건 자체가 사람을 잡아끄는 유인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는 ‘이야기’ 로서의 <한중록>이 갖는 매력이다. ‘사건’으로서 혜경궁 홍씨가 체험한 삶이 조선왕조 5백년의 궁중 이야기 중에서 가장 극적인 역사였다면, ‘기록’으로서 혜경궁 홍씨가 남긴 글은 조선왕조 5백년의 으뜸가는 궁중문학이다.
그 당시의 비극적인 궁중 사건을 아무리 말을 바꾸어 설명하려해도 그렇지 못했음을 글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사도세자의 탈선을 그대로 묘사하게 되면 자식을 죽인 영조의 비리를 일방적으로 밝히는 것이 되어버리고, 역으로 영조의 행동을 옳다고 한다면, 뒤주에 갇혀 죽은 자신의 남편 사도세자의 행동을 악으로 몰고가야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그녀는 말을 아끼고 아낀다.
역사의 기술은 주체의 입장에서 써지는 것이므로 정사가 아닌 야사로서의 <한중록> 또한 귀중한 사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역사왜곡의 가능성에 대한 비판은 언제나 가능하다. 이 글 자체가 역사서로 쓰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혜경궁 홍씨는 비록 안타까운 남편의 죽음을 표현하고 자신의 몰락한 가문에 대한 억울함에 대해서 호소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녀 특유의 섬세하고 우아한 표현과 담담함으로 당시의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너무나 비극적이었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시아버지 영조와 남편 모두를 배려하면서 이 글을 보는 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듯, 물 흐르듯 담담함을 잃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건의 정황이나 인물들의 움직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점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렇듯 지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녀가 많은 역사해설자들이 주장하는 정치적인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당대의 사건을 과장되게 기술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당대의 슬픈 역사에 대한 '증언'이라 생각한다.
자료정리 : 박혜미 loveham1982@hanmail.net
출처: SPR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