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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28. 23:41

역사란 무엇인가(E.H. 카)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28. 23:41

역사란 무엇인가 (E.H. 카)
1. 작가 소개

에드워드 카 (Edward Hallett Carr, 1892. 6. 28 - 1982. 11. 3)

E. H.카는 1892년 런던에서 출생하여 런던의 머천트 테일러즈 스쿨(Merchant Taylors School)과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를 졸업했는데, 1916년에 외무부에 들어가서 수많은 업무들을 종사한 후, 1936년에 사임했으며, 웨일스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국제정치학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1941년부터 1946년까지는 더타임스(The Times)의 부편집인을 역임했고, 1953년부터 1955년까지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베일리얼 칼리지의 정치학 튜터(Tutor)였고, 1955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우가 되었고, 1966년에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베일리얼 칼리지의 명예연구원(Honorary Fellow)이 되었다.

역사가로서의 그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작 소련사(History of Soviet Russia)로 가장 유명한데, 이 책에 대해서 가디언(Guardian)지는 “금세기에 한 영국인 역사가에 의해서 쓰인 가장 중요한 저작들 중의 하나” 라고 했으며 더 타임스지는 “ 탁월한 역사적 업적”이라고 했다. 그는 소련사를 1945년부터 쓰기 시작하여, 거의 30여 년간 그 일에 매달렸다.

그것은 한 권의 개요집인 러시아 혁명 : 레닌에서 스탈린까지(The Russian Revolution : Lenin to Stalin)를 포함하여 14권으로 되어있다. 볼셰비키 혁명(1917-1923),공백기(1923-1924), 일국 사회주의 (1924-1926), 계획경제의 기초 (1926-1929), 등이 그것이다.

그의 다른 저작들 중에는 낭만의 망명객(The Romantic Exiles), 1933 , 20년간의 위기 , 1919-1939 , 평화의 조건 ( Conditions of peace), 1942 , 새로운 사회 (The New Society), 1951 , 그리고 나폴레옹에서 스탈린까지 ( From Napoleon to Stalin and Other Essays), 1980 등이 있다.


2. 시대적 배경

이 책은 E. H.카가 1961년 1월부터 3월까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연속 강연을 했으며, 이 해 가을에 그 강연 내용을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차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역사라는 것의 근본문제를 하나하나 빠짐없이 논한 역사 철학서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현대에 있어서 가장 새롭고 뛰어난 철학서로 평가받는 책이다. 이 책의 뛰어난 내용은 E. H. 카가 직업적인 철학자가 아니라 현대의 가장 탁월한 역사가라는 점과, 따라서 이 책이 그의 오랜 동안의 역사적 연구 및 서술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의 결정이라는 점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이다>라는 말을 E. H.카는 이 책에서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역사철학의 정신이다. 한편으로는, 과거는 과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재에 있어서의 의미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라는 것의 의미는 고립한 현재에 있어서가 아니라 과거와의 관계를 통해 분명해 지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강연 <역사란 무엇인가>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처음으로 행해졌고, 그 후 BBC 제 3 방송을 통해 행해졌으며, 방송을 통해 강연된 내용은 주간지 < Listerner > 에 연재되었다.

우리나라에 초판 1쇄 발행된 시기는 1997.8월 30일 이며, 내가 읽은 책은 제 25쇄 발행된 책으로 2007년 2월에 발행된 책이다.

책이 발행된 1960-70년대는 서구를 중심으로 근대화 담론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일어나게 되며,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여 포스트모던 이론들이 제기되면서 근대화 담론들이 쇠퇴하는 현상을 보이는 시기이다. 근대화 담론의 쇠퇴 현상은 바로 근대 역사학(랑케사학)의 쇠퇴와도 연결되어 있으며, 여러 역사가들이 지금의 근대 역사학의 상황을 위기국면으로 파악하고 있던 시기이다.

아울러 근대 역사학의 장점들과 포스트모던 역사학의 강점들의 상호보완적인 관계의 구성을 통해 역사학의 풍부한 논의의 지점들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역사학자들은 근대 역사학의 전통을 바탕으로 근대 역사학에서 옹호되어야 할 가치들이 무엇이며,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려야 할 포스트모던 역사학의 문제제기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참고자료1 랑케사학

역사의 실증주의적 입장으로 1830년대 랑케는 역사학이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는 것, 역사가가 자기 자신을 죽이고 과거가 본래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를 밝히는 학문이라 하여,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복원’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역사가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만 순수한 사랑을 느껴야 되고,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는 것만을 역사 서술의 최고 법칙으로 삼아야 한다. 역사가는 자기 자신을 죽이고 과거가 본래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그의 지상 과제로 삼아야 하며, 오직 역사적 사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해야 한다.

참고자료2 포스트모던 이론과 역사학

포스트모더니즘은 1960년대에 일어난 문화운동이면서 정치&#8228;경제&#8228;사회의 모든 영역과 관련되는 한 시대의 이념이다. 포스트 모던 이론은 인간중심주의와 서구주의, 민족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적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역사 구성물로의 ‘근대’에 대해 비판과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는 휴머니즘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양식을 구체적이고 이성적인 단일한 주체로 인정하는 것에 대한 부정으로 이것은 인류학이나 언어학, 정신분석학이 발전을 하게 되면서 분열적인 인간의 존재양식이 드러나게 되면서 나타난 문제제기이다.

근대에 있어서 인간의 이성의 노력은 데카르트 이후 세계는 객관적, 합리적, 그리고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 위에서 성립되어왔다. 이런 확신은 당연히 이성에 의해 세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향상시켜갈 수 있다는 역사에 대한 확신과도 연결되어왔다.

이런 믿음이 바로 근대 역사학의 바탕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의 경향성으로 이성에 의해 역사적 객관성과 과학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이론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역사학의 경우 이런 전제들과 이성에 의한 보편적인 역사적 실재에 접근하거나 구성할 수 있다는 부분이나 이성에 의한 계몽을 통해 역사의 진보가 가능하다는 사고 전반을 거부한다.


3. 책의 차례

1). 역사가와 그의 사실

2). 사회와 개인

3).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

4).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5). 진보로서의 역사

6). 지평선의 확대


4. 책의 내용

1). 역사가와 그의 사실

역사란 결코 지나간 일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작업이 아니라 오히려 해석을 통해 과거 사실을 편집하고 의미를 다시 꾸리는 일이다. 작가는 “정확성은 의무이지 미덕은 아니라.” 라고 말하며

'정확하게 사실을 밝혔다는 이유로 역사가를 칭찬한다면, 이는 좋은 목재와 잘 섞인 콘크리트를 썼다고 건축가를 추켜세우는 것과 같다. 건축가의 진짜 능력은 집을 짓는 데서 드러난다. 사학자도 마찬가지다. 역사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살려낼 때 역사가의 능력을 빛을 발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장에서 작가는 오크셔트(1901-. 영국의 정치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몇 가지 진리를 말하고 있다. 오크셔트는 ‘역사란 역사가의 경험이다. 역사는 역사가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 역사를 서술하는 것만이 역사를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몇 가지 진리는 첫째.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코 ‘순수한’것으로 다가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는 역사가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그들의 행위의 배후에 있는 생각을 상상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역사가에게는 ‘상상적 이해(imaginative understanding)'가 중요하다. 사료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뒷면을 생각하며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역사가는 사실의 잠정적인 선택과 그 선택을 이끌어준 잠정적인 해석에서 출발한다. 그가 연구하는 동안 사실의 해석 그리고 사실의 선택 및 정돈 그 두 가지는 이러저러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미묘한 그리고 아마도 얼마간 의식되지 못하는 변화들을 겪는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관계도 역시 포함되는데, 왜냐하면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며 사실을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작가의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past) 라고 말하고 있다.

2). 사회와 개인

사회가 먼저인가 개인이 먼저인가 하는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와 같다. 그것을 논리적인 문제로 논하든, 아니면 역사적인 문제로 논하든 간에, 그것에 대해서 언급을 하게 되면 이렇게 든 저렇게 든 반대되면서 똑같이 일방적인 언급에 의해 수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와 개인은 불가분의 것이다. 이것들은 서로 필요하고 상호 보완하는 것이지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던(1573-1631. 영국의 시인)은 ‘어느 누구도 그 자체만으로 전체를 이루는 섬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진리의 일면이라고 E. H카는 말한다.

역사의 모든 단계 또는 선사시대에서도 모든 인간은 사회 속으로 태어나고 또 아주 어린 나이에서부터 사회에 의해 틀이 만들어진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개인적 유산이 아니라 그가 성장한 집단에서 얻은 사회적 획득물이다. 언어와 환경이 그의 생각과 내용을 결정하는 데 돕게 된다. 그의 아주 어릴 적 생각은 다른 사람에게서 온 것이다. 이미 잘 언급되었듯이 사회에서 동떨어진 개인은 말이 없고 생각이 없다.

미개인은 문명인에 비하여 덜 개인적인 반면, 더욱더 완벽하게 사회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인류학들이 흔히 말한다. 이것은 일리가 있다. 단순한 사회는 더 획일적인데, 복잡하고 발전되 사회보다 개인의 기술이나 직업의 다양성을 덜 필요로 하고 그런 기회도 적다는 의미로 볼 때, 더 획일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증대되는 개인화 현상은 현대의 발전된 사회에 필수적인 결과이며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사회의 모든 행동에 스며져 있다. 그러나 이 개인화의 과정과 사회의 증가하는 힘과 결합력 사이에 대립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라고 E. H카는 말한다. 사회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병행하는 것이며 서로 조정하는 것이다. 정말로 복잡하거나 또는 발전된 사회란, 개인간의 상호의존이 발전되고 복잡한 양상을 띠는 사회이다.

따라서 상식적인 역사관은 역사란 개인이 개인에 대하여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이론은 본질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너무 단순화되고 적당치 못한 것 같아서 좀더 깊이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카는 말한다. 역사가의 지식은 그 자신만의 가지고 있는 개인적 소유물이 아니다.

아마도 수많은 세대의, 그리고 다른 많은 나라들의 사람들이 그 지식을 축적시켜 왔다. 역사가의 연구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진공에서 활약한 고립된 개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나간 사회의 상황과 충동 속에서 행동하였다. 역사가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인간이다. 다른 개인과 마찬가지로 그도 또한 사회적 현상이며 그가 속해 있는 사회의 산물로서 의식을 하든 않든 간에 그 사회의 대변인이다.

이러한 자격으로 그는 역사적 과거의 사실에 접근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역사의 과정은 ‘움직이는 행렬’이라고 말한다. 이 비유는 매우 적절하나, 역사가를 외로운 암벽에서 그 행렬을 내려다보는 독수리라거나 또는 사열대 위의 요인이라고 생각하게끔 유혹하지는 말아야 한다.

역사가는 그 행렬의 한 부분에서 뚜벅뚜벅 걷고 있는 하나의 희미한 존재이며 역사가 또한 역사의 일부이다. 그 행렬이 굽이쳐서 혹은 오른쪽으로 혹은 왼쪽으로 돌고 때때로 거꾸로 되돌아와서 그 행렬의 다른 부분들이 상대적으로 위치가 상항 바뀐다. 그래서 예를 들면 오늘날의 우리가 1세기전의 선조들보다 더 가까이 중세에 접하고, 또는 시저의 시대가 단테의 시대보다 더 우리들 가까이에 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완전히 사리에 맞는지도 모른다.

이 장에서 E. H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인을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자 대리인이면서 이와 동시에 세계의 모습과 인간의 사유를 변화시키는 사회적 힘의 대변자이자 창조자인 탁월한 개인으로 인식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역사는 이 말의 두 가지 의미에서 하나의 사회적인 과정이며, 개인은 그 과정에서 사회적인 존재로서 참여한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과정, 즉 과거와 현재의 대화는 추상적이고 고립적인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어제의 사회의 대화이다.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질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또한 현재도 과거에 비추어질 때에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이 과거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리고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것, 이것이 역사의 이중적인 기능이라고 말하고 있다.

3).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

이 장에서 E. H카는 역사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논의들을 정중하고 고찰하고 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역사는 오로지 특수한 것만을 다루며, 과학은 일반적인 것을 다룬다.
⒝역사는 교훈을 가르치지 않는다.
⒞역사는 예견할 수 없다.
⒟역사는 인간이 인간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다.
⒠역사는 과학과는 달리 조교와 도덕의 문제를 포함한다.

이 논의에 대해서 E. H카는 역사가는 언어의 사용 그 자체에 의해서 과학자들처럼 일반화에 관여한다고 설명한다. 역사가는 항상 자신의 증거를 검증하기 위해서 일반화를 이용한다. 일반화가 역사와는 관계없다고 하는 것은 몰상식한 말이다. 역사는 일반화 위에서 번성하는 것이다.

웰턴(1921-. 영국의 역사가)이 케임브리지 근대사 신판의 어느 한 권에서 산뜻하게 지적하듯이, 역사가를 역사적 사실의 수집가와 구별해주는 것은 일반화이다 ; 그는 자연 과학자를 박물학자가 표본수집가와 구별해주는 것도 바로 그 일반화라도 덧붙여도 좋았을 것이다.

역사는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의 관계를 다룬다. 여러분이 역사가라면, 사실과 해석을 분리시킬 수 없듯이, 그 두 가지를 분리시키거나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우월한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역사가에게 있어서 일반화의 진정한 핵심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역사로부터 가르침을 얻고자 한다는 것,  즉 어떤 일련의 사건들에서 이끌어낸 교훈을 다른 일련의 사건들에 적용하고자 하는 것에 있다. 예를 들어 유럽의 지도를 다시 만들 때 민족자결의 원칙을 무시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교훈이었다.

E. H카는 역사에서의 예언의 역할에 대해서도 지적했는데, 역사가는 일반화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역사가는, 비록 특정한 예언은 아니더라도, 미래의 행동에 대한 타당하고도 유용한 일반적인 지침은 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는 특정한 사건을 예언할 수는 없는데 이는 특정한 것은 유일하기 때문이며 또한 거기에 우연이라는 요소가 개입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역사들이 어느 정도는 루리타니아 사회에 관한 특정한 지식에서 어느 정도는 역사연구에서 이끌어내려고 노력하게 될 결론은 루리타니아는 누군가 촉발시키기라도 한다면 혹은 정부 쪽에서 손을 써서 막아내지 못한다면 가까운 장래에 혁명이 발생할 것 같은 그런 상태에 있다는 식의 결론이다.

네 번째 논제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관점은 그가 행하는 모든 관찰에 불가피하게 개입하며, 그래서 역사는 그야말로 상대성으로 가득 차 있다고 설명한다. 카를 만하임의 말을 인용하여 경험을 포괄하고 수집하고 정리하는 범주마저도 관찰자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역사가 종교와 도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논의에 대해서는 역사가는 어떤 초역사적인 힘(deus ex machina)에 의해 전혀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것을, 역사란 말하자면 조커 카드가 없는 트럼프 게임과 같다는 것을 전제하며 설명한다.

예를 들어 파스퇴르나 아인슈타인은 사생활에서는 성스럽다고까지 할 만큼 모범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불성실한 남편, 잔혹한 아버지, 파렴치한 동료였다고 가정한들, 그들의 역사적 업적이 조금이라도 폄하될 것인가? 그러므로 역사가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종교나 도덕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업적이라고 설명한다. 즉 역사가는 자신의 책에 등장하는 개인의 사생활에 대하여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옆길로 새지 않는다는 뜻이다.

4).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역사의 연구는 원인에 관한 연구이다. 따라서 역사가는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위대한 역사가란 새로운 것들에 관해서 또는 새로운 맥락 속에서 ‘왜?’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라고 E. H카는 말한다. 과거에는 역사는 과거의 사건을 원인과 결과의 질서정연한 전후관계 속에 배열함으로써 성립한다는 것이 공인된 교리였다.

최근에는 이 의미가 조금 달라졌다. 이제는 역사에서 ‘법칙’이라는 용어는 사라졌고 ‘원인’이라는 말마저 유행에서 사라졌는데, 이러한 것들로 인해 역사에서의 ‘원인’이라하고 하지 않고 ‘설명(explanation)'이나 '해석(interpretation)', '상황논리(logic of the situation)' 나 ‘사건의 내적논리(inner logic of events)'라는 용어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인과적 연구방법(왜 그것이 발생했는가라는)에 반대하면서 기능주의적 연구방법(그것이 어떻게 발생했는가)에 찬성하고 있다.

비록 기능주의적 연구방법은 필연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발생했기에 이르렀는가라는 질문을 포함하는 것 같고, 따라서 우리들은 '왜?’라는 질문으로 되돌아가도록 이끌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역사가라면 자신이 수집한 원인들의 목록을 앞에다 놓고서는 그것을 정리해야 한다든가, 그들간의 상호관계를 고정시키게 될 원인들의 일정한 위계질서를 수립해야 한다든가, 아니면 어떤 원인이나 어떤 범주의 원인들이 ‘결국에 가서는’ 또는 ‘최종적인 분석에 따라서’ 궁극적인 원인, 즉 모든 원인들의 원인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직업적인 강박감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연구주제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이다.

과학자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역사가의 세계도 사진을 찍어놓은 것과 같은 현실세계의 복사판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역사가가 효과적으로 현실세계를 이해하고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작업 모델이다. 역사가는 과거의 경험에서, 즉 그가 입수할 수 있을 만큼의 과거의 경험에서 합리적인 설명과 해석을 가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부분들을 추려내어, 그것으로부터 연구의 지침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결국 역사란 역사적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의 과정이다. 톨콧 파슨스의 말을 빌리면 역사는 실체에 대한 인식적 지향의 ‘선택체계(selective system)’일 뿐만 아니라 인과적 지향의 ‘선택체계’이다. 역사가는, 끝없는 사실의 바다에서 자신의 목적에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수한 인과적 전후관계 중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을, 오직 그런 것만을 추출해낸다 ; 그리고 그 역사적 중요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그 전후관계를 자신의 합리적인 설명과 해석의 모형에 짜 맞추는 역사가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5). 진보로서의 역사

여기서 E. H카는 진보(progress)와 진화(evolution)에 관한 혼란스러운 생각을 제거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헤겔은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고 자연은 진보하지 않는 것이라고 뚜렷이 구분하였고 다윈의 혁명은 진화와 진보를 동일시함으로써 모든 혼란을 제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진화의 원천인 생물학적인 유전을 역사에서의 진보의 원천인 사회적인 획득과 혼동함으로써 훨씬 더 심각한 오해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 둘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구분된다. 어떤 유럽의 아이를 중국인 가족에게 맡기면 그 아이는 피부는 희지만 중국말을 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피부색의 형성은 생물학적인 유전이며, 언어는 인간의 두뇌를 매개로 하여 전승되는 사회적 획득물이다. 역사가 쓰여진 이래 인간에게 중요한 생물학적 변화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지만 현대인은 그동안의 여러 세대의 경험을 습득하여 그것을 자신의 경험에 합체시킴으로써 사고의 유효성을 몇 배나 증가시켜왔다.

역사란 획득된 기술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진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에서의 진보는 자연에서의 진화와는 달리 획득된 자산의 전승에 의존한다는 것은 역사의 한 전제이다.

6). 지평선의 확대

지금까지 E. H카는 역사를 끊임없이 움직이는 과정으로 제시했고 역사가도 그 과정 안에서 움직여나간다고 말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이 시대의 역사와 역사가의 위치에 대해서 말하게끔 한다.

E. H카는 먼저 역사과정에서 눈에 띄는 모든 발명, 혁신, 새로운 기술에는 그 긍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부정적 측면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항상 누군가는 희생을 당하는 법이다. 인쇄술이 발명되고 난 후 그것 때문에 잘못된 견해의 확산이 용이하게 되었다는 비평가들의 지적이 시작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오늘날에도 교통사고 사망자 명부를 만들어 낸 것은 자동차의 출현이라고 한탄하는 일은 흔히 있다. 그리고 심지어 일부 과학자들은 원자력이 파멸적으로 이용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이용되어왔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들이 원자력 이용의 방법과 수단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개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진짜 해답은 이성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을 점점 더 철두철미하게 의식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고 E. H카는 말한다.

두 번째로 세계의 모습이 변한 것에 대해 언급한다. 15세기와 16세시의 그 위대한 시대를 특징지었던 것은 신대륙의 발견과 지중해 연안에서 대서양 연안으로의 세계중심의 이동이었다. 그리고 16세기로부터 약 400여 년이 지난 후, 세계의 중심은 완전히 서유럽을 떠났다.

세계의 중심이 현재 서유럽이라는 부족건물이 딸린 영어사용권 세계에 머무르고 있는지, 또는 오랫동안 계속 거기에 머무를 것인지는 결코 분명치 않다. 오늘날 세계의 문제를 조율하는 것은 동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까지 뻗어 있는 거대한 땅덩어리라고 생각된다. ‘변하지 않는 동방’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는 대단히 낡아빠진 상투어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E. H카는 모리슨 교수가 역사는 건전한 보수적인 정신으로 쓰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격동하는 세계, 진통하는 세계를 내다보고 나서 진부하기조차 한 어느 위대한 과학자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그래도 - 그것은 움직인다."

 


자료정리 : 김효주 khju1985@hanmail.net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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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