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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 소개 -  이반 투르게네프 (Ivan Sergeevich Turgenev)

저자 투르게네프는 1818년 11월 9일 오룔주(州) 스파스코예루토비노보에 있는 어머니의 영지(領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병 장교로서 방탕과  도박으로 신세를 망치고는, 재산이 탐나서 1,000명의 농노를 거느린, 6세나  연상인 부유한 여지주(女地主)와 결혼했다. 어머니는 추한 용모에다 포악한 전제 군주적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아버지와는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투르게네프는 어머니 영지의 농노들에 대한 동정에서 농노제를 증오하게 되었다.

이런 복잡한 가정사정이 한 소년의 비정상적인 첫사랑을  묘사한 중편(中篇) 《첫사랑》(1860)에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외국인 가정교사에게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를 배우며 자랐다. 1833년 모스크바대학 문학부에 입학하고, 다음해 페테르부르크대학 철학부 언어학과로 옮겼다. 1836년 대학을 졸업, 셰익스피어와 바이런의 작품 번역을 시도하였고, 푸슈킨과도 교유(交遊)하였다. 1838∼1841년 베를린대학에서 철학 ·고대어 ·역사를 배우고, 베를린에서 스탄케비치, 그라노프스키, 바쿠닌 등 진보적인 러시아 지식인들과 친교를 맺게 되어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1841년 귀국하여 고향에서 수렵을 즐기고, 가을에는 바쿠닌을 찾기도 하였다. 내무부에 근무하면서 발표한 서사시 《파라샤Parasha》(1843)는 비평가 벨린스키의 격찬을 받았다. 1843년 겨울 페테르부르크에 온 프랑스 여가수 P.비아르도와 알게 되어 매일 그녀와 만났고, 그 후 죽을 때까지 그녀와의 친교가 계속되어 그가 생애의 태반을 외국에서 지낸 원인이 되기도 하였는데, 후일 《문학적 회상》(1869)에서 농노제라는 ‘적’과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하여 서유럽에 도피하였다고 술회하였다. 1847년 《동시대인(同時代人)》지(誌) 제1호에 농노의 비참한 생활을 그린 연작 《사냥꾼의 수기(手記) Zapiski okhotnika》의 제1작이 발표되었다. 이에 대한 호평에 자신을 얻어 속편을 파리에서 썼다.

계속하여 소설을 발표하였고, 1850년 말 어머니의 죽음과 동시에 농노를 해방시켰다. 1852년 농노제의 비판으로 당국의 미움을 사, 고골리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구실로 체포된 후 고향에서 연금생활도 하였다. 이 무렵 농노제에 대한 증오에 찬 단편 《무무 Mumu》를 집필하였고, 1852년 8월에는 《사냥꾼의 수기》가 출판되었는데, 이 출판을 허가한 검열관 리보노프는 면직당하였다. 1855년 뛰어난 지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현실 속에서 삶의 목표를 발견하지 못하였던 1830년대 ·1840년대의 ‘잉여인간(剩餘人間)’을 형상화한 장편 《루딘 Rudin》을 발표하여 장편 작가로서의 지반을 굳혔다.

1858년 무렵부터 파리에 살면서 몰락하는 귀족계급에의 엘레지 《귀족의 보금자리 Dvoryanskoe gnezdo》(1859), 농노해방 전야를 배경으로 혁명적인 청년들을 그린 《그 전날 밤 Nakanune》(1860), 니힐리스트 ‘바자로프’를 등장시켜 부자(父子) 2대의 사상적 대립을 묘사한 《아버지와 아들 Ottsy i deti》(1862), 망명 혁명가들의 퇴폐를 고발한 《연기 Dym》(1867), 나로드니키의 약점을 찌른 《처녀지 Nov'》(1877) 등과 그 밖에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고, 1882년에는 조국 러시아와 러시아어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산문시(散文詩)》를 발표하였다. 파리 교외 비아르도 부인의 별장에서 척추암으로 죽었고, 유언에 따라 페테르부르크의 보르코보 묘지에 안장되었다.


2. 시대적 배경 ; 러시아의 농노해방

차르정부가 근대화 정책 대상 중 최우선 과제로 인식했던 것은 농노해방이었다. 그토록 농노를 해방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게 했던 것은 크림전쟁(1853~1856)에서 러시아 차르정부가 영국과 프랑스에게 크게 패전했던 직후와 그 이후 빈발했던 치열한 농민반란 때문이었다. 크림전쟁은 일찍부터 이란, 터키시장에 진출해 있던 농노제 차르제정의 국영공장에서 생산해낸 제품들이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영국의 기계제 상품에 의해 축출되자, 이 지역에 다시 진출하려던 러시아가 영국을 대상으로 수행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농노들로 구성된 육군과 마차가 이끄는  군수물자 및 증기선도 못 갖춘 수준의 해군을 파병했던 러시아는 1856년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패전 이 후 국가적 위기를 통감한 러시아 차르정부의 진보적 관료들 간에 농노제를 철폐하려는 세력이 등장했다. 그들은 금융제정, 관세제도 등에 대한 경제체제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에서 농노해방은 1861년 알렉산더 2세에 의해 농노해방령으로 공표되게 되었다.  러시아에서도 농노해방과정에서 진보적인 개혁세력과 봉건세력 간에 심한 갈등이 있었다. 당초 진보세력이 작성했던 농노해방의 원안은 보수세력의 압력에 의하여 수정, 완화되었다. 그리하여 1861년 3월에 공포된 농노해방령의 내용은  매우 불철저한 개혁으로 마무리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구 영주층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한 차리즘(Tarism)이 위로부터 단행한 개혁에 불과하다.

농노해방령의 내용은 모든 토지에 대한 구 영주의 소유권을 그대로 인정하고 농노에게 그들의 분여지를 매입할 의무를 부과하는 한편, 불하대금은 시장가격을 훨씬 상회하게 책정했다. 대금지불방법은 20%는 농민이 직접 지주에게 일시불로 지불하게 하고, 나머지80%는 정부에 연 5% 이자율로 49년 간 분할 상환하도록 하고 정부는 지주에게 6%의 이자부 증권을 지급하도록 했다.

1863년부터 농노해방령에 따른 농지분배가 개시되었어도, 분여지 매도여부에 대한 권한과 토지보유의 재량권이 영주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개혁의 성과는 지지부진하였다. 영주들은 양질의 옥토를 유보하고 열악한 토지를 농노들에게 분배해 주었다. 이 과정에서 농노는 영주가 정한 법률에 의하여 해방되었으며, 개혁과정에서 누적된 유가증권과 이자부 상환금은 차르정부의 내부자금으로 활용되었다.

러시아 농노해방의 불철저성은 결국 이후 차르정부가 근대화 과정에서 실패한 커다란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법령을 통하여 농민이 구입한 토지는 그 농민에게 소유권이 이전된 것이 아니라 촌락공동체(mir)의 소유가 되었다. 따라서 이농한 농민은 그 권리를 포기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것은 차르정부가 이농을 방지하고 전통적 공동체를 존속시킴으로써 납세의 공동체적 책임을 지우면서 전근대적 지배질서를 유지하려고 한 정책이었다.

이러한 농민의 공동체적 계박정책(繫縛政策)은 인구가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농민을 농토에 묶어둘 수는 있었지만 공업노동자의 공급을 제약했다. 농민들의 거주이전의 자유가 확립된 것은 1885년 인두세가 철폐된 이후의 일이었다. 영주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이루어졌던 러시아의 농노해방은 실질적으로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농민은 신분적으로는 자유로워졌으면서도 높은 토지상환금이나 조세 부담 때문에 토지를 개량할 여유가 없었다. 더욱이 정기적인 토지의 재분배는 농민의 토지개량의욕을 상실하게 하여, 농업기술 및 농민생산성을 낮은 수준에 머물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렇듯 러시아의 농노해방은 즉각적으로 큰 효과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농노해방이 영주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방향에서 수행된 만큼 불철저한 것이었고, 농노제는 실질적으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존속하게 되었다. 농노해방의 효과는 1880년대 이후에 점차 나타나 토지상환제가 폐지되고, 농민보유지의 자유로운 처분권이 인정되었으며, 농민의 촌락공동체로부터의 자유이탈이 인정되어 농민층 분해가 촉진되었다. 부농의 형성기반이 마련된 것은 1906년의 스톨리핀의 개혁에 의해서였다.


3. 등장인물

큰아버지: 파벨 키르사노프           
아버지: 바실리 이바니치
아버지: 니콜라이 키르사노프         
어머니: 아리나 블라셰브나
후처: 페니치카                        
아들: 바자로프
아들: 아르카디                      
오딘초프 - 카챠(여동생)

▷니콜라이 키르사노프 : 아르카디의 아버지, 19세기 귀족 계급의 한 전형으로서 온유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문예 취미를 가지며, 자연 애호가인 동시에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진다.

▷파벨 키르사노프 : 아르카디의 큰아버지. 구세대를 대변하는 인물로 신세대를 대변하는 바자로프와 이념 차이의 논쟁을 주로 펼친다. 그의 동생과는 달리 매우 직설적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인물로, 바자로프를 매우 싫어한다. 후에 바자로프와의 대결로 인해 부상을 입는다.
 
▷아르카디 : 바자로프와 같은 세대이지만, 바자로프와 다른 귀족계급에 속한다. 

▷바자로프 : 의사를 지망하는 젊은 자연 과학자, 허무주의자, 유물론자, 무신론자. 이기적이지만, 사회봉사를 지향하는 태도를 보인다. 냉담하고 까다로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오딘초프 : 이지적이고 총명한 여자지주이다. 일체 편견을 갖지 않으며, 강한 신앙심 또한 없다. 아르카디와 바자로프 모두 사랑했던 여인, 하지만, 그녀는 어느 누구와도 사랑을 하지 않는 인물로 나온다.

▷카챠 : 오딘초프의 동생. 언니 눈치를 보며 무서워한다. 후에 아르카디와 사랑을 하는 인물.

▷페니치카 : 아르카디 아버지의 후처.

▷바실리 이바니치 : 바자로프 아버지, 자식 바자로프를 끔찍이 아끼는 아버지

▷아리나 블라셰브나 : 바자로프 어머니, 매우 믿음이 깊고, 감수성이 예민한 여자. 자식 바자로프를 끔찍이 아끼는 전형적인 어머니.


4. 줄거리 요약

니콜라이 키르사노프는 길 저편을 바라보며 아들(아르카디)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르카디가 학사 학위를 받아 금의환향하는 날이었다. 아들은 이번 겨울에 사귄 친구 바자로프를 데리고 돌아왔다. ‘호인에다 착한 아버지’도 바자로프의 눈에는 ‘구식 낭만주의자’에 불과하다. 또 전에는 상류 사교계의 별이었던 큰아버지 파벨은 ‘고물학적(古物學的) 현상’일 뿐이다.

이 큰아버지와 바자로프 사이에 생활의 신조와 주의에 대해 격론이 벌어진다. ‘바자로프는 어떤 사람이냐?’ 하는 큰아버지의 물음에 아르카디는 ‘니힐리스트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즉, 자연과학의 사도 바자로프는 모든 것을 비판적 견지에서 본다. 그의 태도는 ‘조리(條理)가 닿는 것이면 거기에 동의할 뿐’이다.
                                                           
아르카디는 이 친구의 감화로 시인 취향의 아버지에게 뷔히너의 〈힘과 물질〉을 권하기도 한다. 이윽고 두 젊은이는 시내로 가서 고관 콜랴진이나 ‘해방된 여자’의 쿠크신 등과 가까워진다. 그러나 바자로프는 누구에 대해서나 냉소적이다. 그런데 현(縣) 지사의 무도회에서 안 이웃 현의 여자지주 오딘초프의 총명과 미모에 두 젊은이는 강하게 끌린다. 두 사람은 초대되어 그녀의 저택에서 묵는다.

아르카디는 그녀에 대한 동경을 그 여동생 카챠와의 교우로 해소하고, 이윽고 사랑에 빠진다. 바자로프와 오딘초프는 서로 열렬히 구하면서도 결실을 맺지 못한다. 그녀는 결국 안온한 생활을 사랑하고 있었고, 반면 그는 여자에 대한 사랑에 이상적인 순결을 인정하지 않으면, 정욕의 자제에 극도로 엄격해서 자기 내면의 로맨티시스트를 말살하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이윽고 바자로프는 퇴역 군의관인 아버지의 영지로 돌아간다. 그러나 오딘초프에 대한 감정 처리에 고민하다가 다시 그녀를 찾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심정적 갈등에 발전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아르카디의 부친 네 저택에 머문다.

어느 날 그는 여기서 니콜라이의 후처 페니치카와 키스하는 현장을 파벨에게 들키어 결투를 신청 받는다. 결국 파벨이 부상을 입고, 그는 이 저택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버지의 영지 마을로 돌아간 그는 군의사의 집에서 티푸스 환자의 시체 해부에 입회했는데, 그것이 원인이 되어 패혈증에 걸려 죽음의 침상에 눕는다. 바자로프는 오딘초프에게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안부 메시지 심부름을 보내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한다. 이 메시지를 받은 오딘초프는 의사와 함께 병상으로 달려왔다. 오딘초프는 죽어가는 바자로프를 보고 ‘다만 차갑고 괴로운’ 경악을 느꼈을 뿐이었다.

이틀 후 바자로프는 죽었다. 바자로프의 죽음으로부터 반년이 지났다. 아르카디는 카챠와 결혼하고, 아버지 니콜라이는 파벨의 결투 후의 심경 변화에 따라 페니치카를 정식 아내의 자리에 앉힌다. 아들은 경영을 재건하고, 아버지는 농노 해방 뒤의 조정 위원으로 활동한다. 한편 파벨은 드레스덴을 영주의 땅으로 정하고 아우의 집을 떠난다. 그리고 오딘초프는 강력한 실제적 양식과 광장한 웅변의 재능을 지닌 법률가로서, 선량하고 젊지만, 얼음처럼 냉정한 남자와 결혼하였다. 


5. 주요 대화

▶ 바자로프 VS 파벨 페트로비치

파벨 페트로비치: “그럼 오직 욕설을 퍼부을 뿐이군?”

바자로프; “욕설을 할 뿐입니다.”

파벨 페트로비치: “그게 니힐리즘이라는 것인가?”

바자로프; “이것이 니힐리즘이라는 겁니다.”

파벨 페트로비치: “그렇군!”

파벨 페트로비치: “니힐리즘은 모든 슬픔을 구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자네들은 우리 러시아의 구제자요, 영웅인 셈이군. 그런데 자네들은 어째서 같은 부류라고 보아도 좋을 폭로가들까지 욕을 하는가? 자네들도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공론을 일삼고 있지 않은가?”

바자로프: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그 책망만은 못 받아들이겠습니다.”

파벨 페트로비치: “그럼 뭔가? 자네들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행동하려 하고 있는 것인가?”

파벨 페트로비치: “음, 행동한다, 파괴한다 이 말이군ㆍㆍㆍㆍ.”

파벨 페트로비치: “하지만 까닭조차 모르고 어떻게 파괴할 수 있다는 건가?

아르카디: “우리가 파괴하는 것은, 우리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바자로프, 아르카디 VS 파벨 페트로비치
         (신세대)                   (구세대)


바자로프: "실례지만, 파벨 페트로비치 씨! 당신은 그렇게 자신을 존중하며 팔짱만 끼고 앉아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사회복지에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당신은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 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파벨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파벨 페트로비치: "그건 전혀 다른 문제네. 어째서 내가 말대로 팔짱만 끼고 앉아 있는가. 지금 그것을 자네에게 설명할 이유는 전혀 없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만 귀족주의는 하나의 원리이며, 오늘날 원리 없이도 생활할 수 있는 것은 부도덕한 인간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쓸모없는 인간뿐이란 말이네. 나는 그것을 아르카디에게 집에 돌아온 이튿날 말해 두었네. 그래서 같은 말을 자네에게도 하고 있는 걸세. 니콜라이 그렇지 않은가?"

바자로프: "귀족주의, 자유주의, 진보, 원리."

바자로프: "그야말로 여러 가지로 외국의......쓸모도 없는 단어들뿐이군요! 러시아인에게는 그런 것은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뭐가 필요하다 는 건가? 자네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우리가 인류와 떨어져서, 그 법칙의 테두리 밖에서 사는 것 같네. 천만의 말씀......역사의 윤리가 요구하는 것은......." "그런 논리는 우리에게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 우린 그런 것이 없어도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파벨 페트로비치: "어째서 그런가?"

바자로프:  "그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당신은 배가 고플 때 한 조각의 빵을 입에 넣는 데 논리 같은 건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추상론이 과연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파벨 페트로비치: "그런 말을 하다니, 난 자네를 이해할 수 없네. 자네는 러시아 국민을 모욕하고 있네. 어째서 원리나 법칙을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 도대체 자네의 행동은 어떤 원리에 의해 이루어진단 말인가?"

아르카디: "제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큰아버님, 우리는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자로프: "우리는 우리가 유익하다고 인정하는 것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현재 가장 유익한 것은 부정 정신이므로 우리는 부정하는 것입니다."

파벨 페트로비치: "뭐든지 부정한단 말인가?"

바자로프: "네, 모든 것을."

파벨 페트로비치: "뭐라고? 예술과 시뿐만 아니라...무서운 일이군...."

바자로프: "모든 것을 말입니다."

파벨 페트로비치: "자네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네.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야... 그러나 건설하는 일도 필요한 게 아닌가?"

아르카디: "그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우선은 터가 깨끗하게 닦여야 하니까요." "현 시대 상황 속에서 국민 모두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르카디: "우리는 그러한 요구를 실행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개인적인 에고이즘의 만족에 젖어 있을 권리가 없습니다."

이 마지막 구절은 바자로프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에는 철학적인 냄새가, 즉 로맨티시즘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자로프는 철학까지도 로맨티시즘이라 부르고 있었다.

▶ 바자로프와 오딘초프 간의 대화

바자로프: “.....둘째, 분명히 말합니다만, 개개의 인간을 연구하는 것 따위는 수고할 가치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육체나 정신이 똑같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누구든 머릿골이나 지라나, 염통이나 그 구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정신적 자질이라는 것도 대체로 비슷비슷합니다. 약간의 변종은 아무런 뜻도 없습니다. 전체 인간을 판단하려면 한 사람의 샘플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인간은 숲 속의 나무와 같습니다.”

오딘초프: “그렇다면 어리석은 사람과 영리한 사람,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차이도 없다는 말이군요?”

바자로프: “ 아니죠, 있습니다. 병자와 건강한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듯이 말입니다. 결핵 환자의 폐도 구조는 똑같지만 나나 당신의 폐와는 상태가 다릅니다. 어째서 육신의 병이 생기는지 우리는 대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의 병은 나쁜 교육, 어려서부터 사람의 머리에 꽉 차 있는 온갖 너절한 생각, 한마디로 말하면 사회의 추악한 상태에서 생기는 겁니다. 사회를 바로잡으면 병도 없어집니다.”

오딘초프: “그렇다면, 사회가 바로잡히면 바보도 영리한 사람도 다 없어진다고 생각하세요?”
바자로프: “적어도 사회 기구가 올바르다면 어리석건 영리하건, 악인이건 선인이건 똑같은 것이 되겠죠.”

▶ 바자로프와 아르카니 간의 대화

아르카니: “원리니 뭐니 하는 게 도대체 뭔가.”

바자로프: “자넨 이런 걸 아직도 모르고 있었나!”

바자로프: “잊은 건 감각이야, 모든 것이 감각에 지배되는 거야.”

바자로프: “예를 들면, 나 말인데, 내가 부정적 방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감각 때문이야. 내게는 부정이 즐거워. 내 두뇌는 그렇게 생겨 먹었어. 그 뿐이야! 어째서 내가 화학을 좋아하느냐? 어째서 자넨 사과를 좋아하느냐? 이것도 역시 감각 때문이야. 모두 똑같은 이치야. 인간이란 절대로 그보다 깊이는 도달하지 못하는 거야.”

아르카니: “그럼 뭔가? 성실도, 감각이란 말인가?”

바자로프: “물론이지, 아르카니!”

▶ 바실리 이바니치와 아들 바자로프 간의 대화

바실리 이바니치: “한참 찾았어, 하지만 좋은 장소를 골라 좋은 일을 하고 있군. ‘대지’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이 말이지........, 그렇지, 그건 아주 의미가 깊은 일이지!”

바자로프: “제가 하늘을 보는 것은 재채기가 나오려 할 때뿐인데요.”

▶ 바자로프가 집을 떠난 후 파벨 페트로비치가 아우 니콜라이에게 한 말

“난 요즘 내 귀족주의를 공격한 바자로프가 옳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 아냐, 괜찮아, 니콜라이, 이제 우리는 세상일을 생각하며 골치 앓는 일은 그만두자. 우리는 이제 낡고 얌전한 인간이야. 여러 가지 번거로운 일은 옆으로 제쳐놓을 시기가 온 거야. 네 말마따나 우리의 의무나 실행하자. 그렇게 하면 덤으로 행복을 얻게 될지도 몰라.”


6. 읽을거리

▶허무주의(虛無主義), nihilism
(nihilism은 '무'라는 뜻의 라틴어 nihil에서 유래)

- 전통적인 사상·이론·진리·지식·규범 등의 가치를 일체 부정하는 주의.

이 용어를 만든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F. H. 야코비인데, 19세기말에서 20세기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중세에는 특정 이교도들을 가리키기도 했다. 러시아 문학에서는 N. I. 나데주딘이 〈유럽의 사절 Messenger of Europe〉에 쓴 글에서 푸슈킨을 언급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한 듯하다. 이때 나데즈딘은 허무주의를 회의주의와 같은 뜻으로 사용했는데, 그 후 1858년 V. 베르비도 동일한 뜻으로 사용했다. 허무주의를 혁명과 같은 뜻으로 해석하는 데 크게 기여한 저명한 보수파 언론인 M. N. 카트코프는 모든 도덕원리를 부정함으로써 사회에 위협이 되는 것을 허무주의로 보았다.
  
투르게네프는 소설 〈아버지와 아들 Fathers and Sons〉(1862)에서 허무주의자 바자로프를 통해 이 용어를 대중화했다. 그 결과 1860, 1870년대의 허무주의자는 헝클어진 머리와 지저분한 용모, 무례한 행동과 누더기 차림으로 전통과 사회질서에 반항하는 자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허무주의 철학은 알렉산드르 2세의 살해와 당시 절대주의에 대항한 비밀조직의 정치적 테러와 관련된 것으로 오해받기 시작했다. 허무주의자는 보수주의자들의 눈에는 시대의 저주였지만, N. G. 체르니셰프스키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민족 사상 발전의 과도기적 요소, 즉 개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한 단계이자 반항적인 젊은 세대의 진정한 정신적 대변자였다.

체르니셰프스키는 〈무엇을 할 것인가? What Is to Be Done?〉(1863)에서 허무주의 철학의 적극적인 면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러시아 무정부주의 지도자 표트르 크로포트킨 공(公)도 〈회고록 Memoirs〉에서 허무주의를 모든 형태의 폭압·위선·가식 등에 반대하고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투쟁의 상징으로 규정했다.

근본적으로 허무주의는 모든 형태의 탐미주의를 부정하는 철학이었으며 공리주의와 과학적 합리주의를 옹호한 반면 사회과학과 고전적 철학체계는 완전히 거부했다. 허무주의는 실증주의와 유물론의 초기 형태이자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반역이었으며, 국가·교회·가족 등이 행사하는 모든 권위를 부정했다. 허무주의의 신념은 오직 과학적 진리만을 토대로 했으며, 따라서 과학이 사회문제의 만병통치약이 되었다. 허무주의자는 모든 악이 무지라는 유일한 근원에서 생겨나며, 과학만이 그 무지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허무주의자들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찰스 다윈, 헨리 버클, 허버트 스펜서 등의 사상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인간이 육체와 영혼, 정신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의 결합이라는 이원론을 부정했기 때문에, 교권과의 격렬한 싸움에 돌입했다. 또한 신권(神權)에 관한 교설에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에 세속의 온갖 권위들과도 충돌하게 되었다.

모든 사회적 속박과 가족의 권위를 거부한 그들에게는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는데, 이러한 주제를 훌륭하게 묘사한 것이 바로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바자로프와 20세기초 레오니드 안드레예프가 쓴 희곡의 주인공 사바를 비교해 보면 허무주의 철학이 과학에 대한 신앙에서 특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테러와 파괴를 정당화하는 방편으로 타락했음을 알 수 있다.


자료정리:홍제선 sun800414@naver.com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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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