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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30. 00:47

인형의 집(헨릭 입센)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30. 00:47


1. 작가 소개 
 
  - 헨릭 입센 (Henrik Ibsen, 1828~1906)

  북극 스칸디나비아의 조그만 나라에서 태어나, 근대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에 널리 명성을 떨친 헨릭 요한 입센은 1828년 3월 20일에 노르웨이 남쪽 시엔, 대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입센은 가정적으로 불행한 사람이었다. 8세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함으로써 그의 집안은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야 할 비운에 처했다. 이렇다할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15세의 입센은 인근 읍의 제약사의 조수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 때부터 그는 독학으로 그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 의과 대학 시험에 응시할 뜻을 품고 여러 과목을 자습하다가 우연히 라틴 어의 명문 집을 대했다.

그중에서 로마의 웅변가인 키케로가 카틸리나를 탄핵한 연설문에 감동하여, 스스로 로마 공화제 말기의 유명한 반역자들의 사적 (史蹟)을 3막의 운문 극으로 엮었다. 이 무렵부터 그는 서정시도 쓰고 21세 때인 1848년에는 유럽에서 잇달아 일어난 혁명에 젊은이다운 감격으로 그것을 산문형식으로 엮기도 했다.

이렇듯 문학적인 기호를 선명히 드러낸 그는 장래 희곡가로서의 소지를 착실히 닦아 갔다. 그는 처녀작 《카틸리나》를 자비 출판했을 때는 겨우 4, 5부가 팔렸을 뿐 이렇다할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미숙한 이 약제사 조수의 습작 속에는 이미 위대한 희곡 가 입센의 모든 작품을 통해 고루 포함되어 있는 세 가지 주제가 희곡에 완곡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 세 가지 주제란 남녀의 성적 삼각관계, 육체적인 여성과 영적인 여성의 대립, 이상적이면서도 박약한 의지는 언제나 실패한다는 것이다.

의과 대학 시험에서 낙방한 후 심심풀이로 쓴 단막극 《전사의 무덤》을 상연했다. 그와 동시에 친구들과 정치. 문예에 관한 주간지를 발행하여 마침내 문학적 명성을 떨칠 기회를 얻었다. 그러자 1851년, 그가 24세 되던 해에, 신설된 노르웨이 극장에서는 그를 작가 겸 무대 감독으로 초빙했다. 물론 그것은 이름뿐인 자리였으나, 그는 10여년을 이 극장과 관계하면서 100여 편의 희곡을 썼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4, 5편밖에 되지 않지만, 그 즈음 공연을 위해 대본을 아주 많이 썼다. 이것은 그가 극작가로서 대성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무렵 그에게 영향을 끼친 작가는 덴마크 홀베르, 욀렌슐레게르 등 국민적 작가를 비롯하여 프랑스의 위고, 스크리브, 셰익스피어 등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의 고전극 연구에도 힘을 기울인 듯하다.

1857년,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 멜로드라마적 서정 비극인 《올라프 릴리엑클란스》를 마지막으로 남기로 베르겐을 떠나 크리스티아니아의 노르웨이 극장의 예술 총무로 초빙되었다. 수잔나 토레센과 결혼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목사의 딸인 그녀는 여성 운동가로서 이름 있는 사람들과도 교제하고 있었으므로 입센이 여성 해방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그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혼 후 최초의 작품은 3막으로 된 운문 가정극《사랑의 희극》이다. 여기서 그는 비로써 양성문제를 제시하여 결혼의 기초를 자유연애에 둘 것을 강조함으로써 근대 여성 해방 운동가들이 상투적으로 내건 사상을 처음으로 극화했다. 그러나 이를 전후한 10년 동안은 입센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회의에 빠져 있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작가로서는 옛 문인들의 형식을 모방한 데 지나지 않았고, 사상적으로는 주위의 영향에 함부로 휩쓸리던 시대였다. 이를 테면 《사랑의 희극》한 편을 제외하고는 표제마저 지난 과거의 역사와 전설을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 생활은 입센에게 정신적으로 안정을 가져왔으나 물질적으로는 여전히 빈곤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예술 총무란 이름은 화려해 보였지만 보수는 보잘것없었다. 특히 그 무렵 노르웨이는 외국 문화파와 국민 문화파의 두 파로 나뉘어 논쟁이 치열했고, 극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무리한 싸움 끝에 두 파가 함께 했다. 그러나 후배인 젊은 시인 비외른손은 그보다도 늦게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앞질러 노르웨이의 젊은 국민 시인으로서 전국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입센은 잇따른 불행과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돌연 노르웨이를 떠나 베를린, 트리에스터, 로마 등지를 방황했다. 이 때가 1864년,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가 1891년, 64세의 나이로 다시 귀국할 때까지 30년간의 유랑 생활을 한 셈이다. 그가 로마에 정착한 지 2년 만에 환성한 5막의 운문 비극이 바로 그이 필생의 역작인 《브란드》이다. 목사이자 극단적인 이상주의자 브란드라는 정열적 종교가를 영웅으로 형상화하여 그 주변의 어리석음을, 몽매, 소심, 비겁 따위를 철저히 통박했다. 그것은 비굴하고 나약한 노르웨이 국민에 대한 풍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웅대한 스케일과 아름다운 문장은 《파우스트》 이래 대서사 시극이라는 호평을 받았고, 이 사실은 본국 노르웨이에 전해지자 “이 나라에 세계적인 시인이 태어났다.”는 경탄과 추앙이 높아졌다. 동시에 지금까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그의 작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물질적으로 다소 윤택해진 그가 한층 거대한 구상 아래 2년 뒤에 발표한 것이 운문극 《페르 귄트》이다. 이 작품이 완성된 것은 그의 나이 40세 때, 그의 사상과 문장이 원숙기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이 작품이 세상에 발표되자, 주인공 페르 귄트의 성격상 특징이 세인의 물의를 일으켰다. 그 후로도 입센의 작품은 간행될 때마다 찬부 양론의 논쟁의 대상이 되곤 했다.

후로도 여러 편의 작품을 저술 하였고 《우리들의 사자가 소생할 때》를 탈고한 이듬해 봄부터 점차 쇠약해진 그는 1906년 5월 23일, 전 세계의 독자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동맥경화증으로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 그때 그이 나이는 79세였다.
시인의 구원의 안식처인 그이 묘소에는, ‘타협에 앞서 진실의 철저함을, 욕구에 앞서 노력의 의무를’ 가르치던 그의 생애를 상징하듯 오벨리스크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2. 시대 배경

- 19세기 유럽의 시대상황

서양사에서 일반적으로 규정하는 19세기는 근대 시민혁명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프랑스혁명이 발발한 1789년에서 1차대전이 시작된 1914년에 이르는 120여 년간을 의미한다. 많은 역사가들(특히 정치사가와 사상사가들)은 흔히 서양의 19세기를 민족주의의 시대, 자유방임의 시대, 또는 자유민주주의의 시대 등으로 규정하여 왔다.

한편, 사회경제적 측면에 중점을 두는 역사가들은 19세기를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산업과 제국의 시대, 또는 반란의 세기 등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즉 19세기는 산업자본주의가 몰고 온 급격한 사회변동에 따른 일반 하층민중의 저항운동이 본격화된 시기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의 19세기의 유럽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 번째 특징으로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두이다.

먼저 자유주의란 민족주의의 새로운 원리들을 찬양하면서 표현, 종교, 언론의 자유와 더불어 인민 주권과 대의제 정부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보수주의적 정책에 대한 반발을 통해 성장했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의 중간 계급들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자유주의가 그들에게 의미하는 것은 상업 및 산업발전의 가치를 인정한 태세를 갖춘 능률적인 정부, 자신들을 직접 대변하는 입법기관에 의해 자신들의 이해가 보장받을 수 있는 정부, 평화적인 대외정책과 자유 무역, 개인주의 신봉과 고전 경제학파의 이론 등이었다.

민족주의는 국민주의라고도 하며, 한 집단이 지닌 광범위한 역사, 지리, 언어, 환경 속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일종의 정서로, 다른 집단들과는 구별되는 하나의 전통에 대한 귀속의식이다. 즉,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것은 민족주의가 정치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보수주의의 복구이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크게 놀란 각국 정부는 국내외 질서 회복에 노심초사하여 강력한 보수주의 정책을 취했고, 빈회의를 열어 각국의 자유,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시켰으며, 1815년 이후 약 15년 동안 대다수 유럽의 통치자들은 중간 계급의 자유주의가 발전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억압 정책은 오히려 자유주의자들로 하여금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한 결의를 다지게 했다.

세 번째는  라틴아메리카와 그리스의 독립 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지 국가들은 18C 후반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에 자극받아 잇따라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빈체제가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탄압하려 하자 당시 식민지 국가의 독립으로 새로운 시장이 개척되는 것을 환영하는 입장이었던 영구의 반대와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유럽 국가의 간섭을 배격하고, 미국도 유럽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아메리카 대륙에 새로운 식민지 건설을 반대 한다'는 미국 대통령 먼로의 먼로주의 선언에 부딪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리스의 독립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지원으로 빈체제를 동요시켰다. 알렉산드로 이프실란티라는 그리스 출신의 군인이 조금은 모호하지만 자유주의적인 원칙을 내세우며 그리스 "제국"의 건설을 부르짖고 있었고 자신을 추종하는 무장 세력을 동원해 그리스를 지배하는 터키에 맞서 전투를 벌였다. 이프실란티는 곧 패배하였지만 그의 운동은 계속되어 5년이 지나면서 중요한 외적인 한경에 힘입어 성공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지중해 해군 전략을 이유로 영국-러시아-프랑스 연합함대가 사태에 개입하고, 또 러시아가 발칸반도를 침공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반란의 성궁은 유럽 자유주의자들을 고무했으며 메테르니히를 비롯한 반동세력이 유럽 열강의 최우선 목표를 현상 유지에 두고 동맹을 맺는 일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네 번째는 1848혁명이다.

1848년 혁명들의 충격은 1830년 혁명들의 충격에 비해 훨씬 더 중대한 것이었다. 파국적인 작황, 곤궁, 전염병의 창궐, 상업 활동의 감소, 빈곤과 실업 등 1835년 무렵의 유럽이 겪었던 경제적, 사회적 위기의 몇 가지 요인들이 정치체계를 향한 불만에 부가되었다. 이리하여 1848년의 반적으로 그것들은 중간계급들에 속하며 또한 프랑스대혁명의 이상들에 고무된 자유주의 지식인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1848년 2월, 선거법 개혁에 맞선 싸움에서 패배한 "시민 왕" 루이-필리프는 퇴위하지 않으면 안됐다.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는 3월에 빈으로부터 도피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의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었던 중부 유럽의 모든 수도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국가들에서도 입헌적 정부들이 수립되었다. 이들 혁명은 대부분이 몇 달 지나지 않아서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던 만큼 시간상으로 매우 단기적이었다.

영국에서는 차티스트 운동이 막을 내렸고,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 군대가 가리발디에 의해서 방위되고 있던 신생 로마 공화국을 전복시켰다. 북부이탈리아에서는 오스트리아 인들이 베네치아 공화국을 전복시키고 롬바르디아에 대한 그들의 지배권을 되찾았다. 그러나 피에몬테와 사르데냐 왕국은 빅토리오 엠마뉴엘레 2세의 등장에 힘입어 그들의 자유주의 헌법을 유지했다.

1849년 말 유럽의 절대군주정은 기반을 잃었으며 토지귀족의 위세는 퇴색했다. 유럽의 농민층은 봉건제의 질곡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 그리고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자유주의 사상들은 이미 궤도에 올라 민족주의 운동들의 승리를 위한 무대가 갖추어진 것처럼 보였다.

다섯 번째는 프랑스의 정치 발전이다.

먼저 제 2제정 성립되고 루이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 하였다. 프랑스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루이 나폴레옹은 카톨릭 교도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학교 교육에 대한 카톨릭의 지배권을 되찾아 주었고, 노령 보험 및 사업 장려 법을 도입함으로써 노동자들과 중간 계급들의 환심을 샀다. 1852년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나폴레옹 3세의 정치로 인해 멕시코원정의 실패, 프로이센·프랑스 전쟁패배로 몰락, 프랑스의 패배로 제 2제정 붕괴와 독일, 이탈리아 통일이 막바지의 작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여섯 번째는 인구증가와 도시화이다.

19세기가 진행되는 동안 유럽의 경제적 우위는 세계 여타 지역들보다 훨씬 거대한 인구의 절대적인 증가를 가져왔다. 서부의 유럽에서는 공중보건의 발전에 힘입어 사망률이 감소했다. 반면, 동부 유럽의 덜 발달된 나라들에서는 사망률이 여전히 높은 상태였다. 또한 결혼연령의 저하와 다산에 관계된 전통적 관행의 존속으로 인해서 출생률도 나란히 높아졌다.

사망사수에 대한 출생자수의 자연적인 우세와 보다 나은 생활조건을 찾으려는 희망에의 이주는 유럽의 강력한 인구 급증을 야기했다. 하지만 이러한 인구의 증가로 도시의 발달, 농업과 금융 발전 등이 팽창하는 인구의 수요를 충당하고 나아가서는 생활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여력까지 주었다.

도시들의 성장 영국, 벨기에, 프랑스, 독일 등지의 탄광지대나 철강 중심지 등과 같이 최초로 공업화된 지역들에서는 도시화가 매우 두드러졌다. 하지만 도시화는 이미 산업화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사회적 문제들을 악화시켰다. 급속히 성장하고 있던 도시들은 종종 위생시설이라든가 식수 공급 망 또는 심지어 거리 청소부 등과 같은 기본적인 도시체계조차 갖추지 못했고 수많은 인구가 비좁은 장소에서 비참하고 지저분하게 생활했다. 이러한 참상에 직면한 몇몇 사람들에게는 도시란 전통적인 사회적 행동양식의 파괴, 기성종교와 사회질서에 대한 위협등과 동의어였다.

일곱 번째는 농업부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농업기술의 혁명 18-19세기 동안 농업은 가축의 품종과 농사기술의 개선에 덧붙여 보다 효율적인 윤작체계, 보다 많은 수확량, 새로운 기계의 출현 등으로 표현되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다. 집약적인 경작, 경작면적의 확대를 실현했으며 농촌지역은 새로운 농업용 기계들로 수놓아졌다.

농업 변화의 결과 유럽의 인구는 농산물 수확량의 증대와 교통의 발달에 힘입어 보다 잘 급양되었으며 주기적인 식량부족 사태는 점점 더 드물어졌다. 농업상의 변화는 산업화의 역동성내에 포괄되었다. 농업에서 도출된 잉여는 자본을 창출했으며, 이것은 다시 교통과 공업에 투자되어 유럽 전역에 걸친 신기술의 전파에 이바지했다.

여덟 번째는 유럽의 산업화이다.

19세기의 유럽은 중세까지 기술적으로 앞서있던 중국 같은 나라들을 따라잡고 나아가 추월했다. 그 뒤 유럽은 다른 나라들과의 교역에 힘씀으로써 보다 증가된 자원들과 보다 확대한 시장으로부터 혜택을 받게 되었고, 기술적 우위에서 이득을 취하게 되었으며, 또한 자본을 수출할 수 있게 되었다. 본격적인 성장궤도에 오른 공업은 토지에서 해방된 점증하는 노동자들을 쉽게 고용할 수 있었다.

산업화의 결과 산업사회가 형성되어 자본주의가 확립되었고 산업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이 형성 되어 노사대립이 등장하였고 농촌인구가 도시로 집중되었다.

19세기 유럽사회를 8가지 특징으로 정리해 보았다. 위의 내용들과 같이 많은 일들과 혼란들이 혼재해 있던 시대가 19세기 유럽사회이다. 


3. 내용 요약

§ 등장인물 소개 §

노라 : 이 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한 매우 진취적인 여성이다.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세 아이의 엄마로 모자랄 것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여성의 권위와 자유를 주창하고 가부장 중심의 집안형태를 은연중에 비판하고 있다. 서명 위조를 하기도 하며 인간으로서의 권위를 찾기 위해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집을 나가는 대담한 여성이기도 하다.

헤르마 : 노라의 남편. 명예 적이면서도 여성의 권위는 경시하고 남성의 권위는 최고이라고 생각하는 권위주의적인 남자이다. 노라를 귀여워하고 사랑하긴 하지만 한편으론 위선적인 행동도 서슴치 않는다.

크로그스타트 : 헤르마는 가증스러운 사람이라고도 하지만 대체로 착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노라가 병이 위독하여 남 유렵으로 요양하러 갈 때 서슴없이 노라에게 급전을 빌려주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틴 (린데 부인) : 크로그스타트의 前 애인이고 노라의 친구로 이해심이 넓다. 노라의 남편 때문에 화가 난 크로그스타트를 노라를 위해서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크로그스타트에게 다시 예전의 사랑을 고백하고 함께 서로를 의지하며 살 것을 권유한다.

랑크 : 의사로 헤르마와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구이다. 그는 노라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 줄거리 §

- 1막

크리스마스이브로 시작한다. 노라는 남편 헤르마가 은행장이 되자 이제는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여유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아주 기뻐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노라는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를 한다. 이때 노라의 친구 린데 부인이 찾아온다. 그녀는 미망인이 되고 난후 일자리를 얻기 위해 온 것이다. 노라는 친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헤르마가 병으로 위독했을 때 스스로 돈을 구하여 남편의 병을 고친 것을 이야기하며 노라는 자랑스러워한다.

그리고 그 돈을 크로그스타트라는 변호사에게 빌려서 구하게 된 것도 이야기한다.
노라는 헤르마에게 이야기해 린데 부인의 일자리를 소개해 준다. 이때 크로그스타트가 노라를 찾아온다. 직장 상사가 된 헤르마가 자신을 파면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만일 자신이 파면되면 노라가 아버지 서명을 위조하여 자신에게 돈 빌린 것을 폭로한다고 협박한다. 노라는 자신의 행동이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용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안해  한다.

- 2막

노라는 자신이 한 일을 헤르마가 알까 봐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헤르마는 결국 크로그스타트를 파면시킨다. 크로그스타트는 노라를 찾아와 그가 헤르마에게 쓴 모든 사실을 폭로하는 편지를 편지통에 넣고 간다. 그러면서 자신을 다시 복직시키도록 위협한다.
노라는 헤르마가 편지를 읽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쓴다. 이때 랑크가 찾아온다. 랑크는 자신의 병이 악화돼 곧 죽을 것 같다고 말한다. 노라가 친구로서 한 가지 부탁을 한다고 하자 랑크는 행복해 한다. 랑크는 노라가 자신을 믿고 얘기한다면 행복할 것이라며 사랑을
고백한다. 노라는 랑크의 말을 막는다. 노라는 불안한 마음에 린데 부인에게 도움을 청한다.

- 3막

린데 부인은 크로그스타트가 돌아오자 그와 만난다. 린데 부인은 그녀가 크로그스타트를 떠난 것에 대해 용서를 빈다. 그들은 과거를 잊고 새 출발 하기로 한다. 크로그스타트는 노라를 협박한 것을 뉘우치고 사과하기로 한다.

그날 있은 무도회가 끝나고 헤르메는 편지를 읽어 보려고 한다. 노라는 불안해 하지만 막지 않는다. 첫 번째 편지는 랑크가 자신의 죽음을 말한 편지이다. 그리고 나서 헤르메는 크로그스타트의 편지를 읽고 분노로 가득 차 껍데기뿐인 생활을 하자며 노라에게 소리친다. 노라는 그의 행동에 실망하고 그 곳을 떠나기로 한다.

이때 크로그스타트의 또 다른 편지가 온다. 자신의 협박을 사과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헤르마는 안심을 하며 노라를 용서하지만 노라는 헤르마에게 이미 크게 실망하였다. 노라는 자신이 헤르마의 인형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고 인형의 집을 떠난다.

§ 다시 보는 대사 §

- 다람쥐는 언제 돌아왔지?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 일상적인 삶에 대해 만족하며 살아가는 아내의 모습을 다람쥐에 비유하여 부르는 것이지만, 그러한 호칭 이면에는 사회적 인습에 얽매여 쳇바퀴를 돌듯이 일상을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하는 작자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아내를 애완동물처럼 생각하는 것이 뒤의 '종달새'라는 표현에도 잘 드러나 있다.

- 우리 종달새가 ∼ 하고 왔구료.
물건을 사들이며 낭비하는 노라의 행위를 헤르마는 응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여기에서는 둘 사이의 대등한 인격적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 당신은 역시 여자로군!
여자에 대한 편견과 인습적인 권위주의가 나타나 있다.

- 과연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 응석을 받아 주셨어요. 하지만 우리 집은 놀이터에 지나지 않아요. 저는 친정집에서 아버지의 인형 딸이었던 것처럼, 당신에게 시집 와서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아이들이 제 인형이 되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제가 상대를 해서 놀아 주면 기뻐하듯이, 당신이 저와 놀아 주면 기뻐했던 거예요

수표로 인한 걱정이 사라지자 다시 노라를 받아들이려는 남편의 위선적인 태도를 비판하는 대목이다. 다람쥐, 종달새, 인형은 인격과 의지를 갖지 못하고 사회 인습의 굴레에 묶여 있던 당시 여성의 전형을 상징한다.

- 무엇보다도 첫째로 저는 하나의인간이에요. 당신과 마찬가지로......, 적어도 인간이기를 바란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과연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이 옳다고 할 것이고, 책에도 그런 식으로 씌어 있어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세상에서 말하는 것이나 책에 씌어 있는 것으로 이미 저는 만족할 수 없게 되었어요. 그런 것을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도 저 스스로잘 생각해 봐야겠어요.

- 다시 당신의 귀여운 종달새로 당신의 인형이 되면, 당신은 그게 가냘프고 망가지기 쉽다고 해서 이제부터는 한층 더 소중하게 손바닥 위에 얹어 주시겠다고 하셨죠. 그렇죠, 토르와르. 그때 나는 확실히 깨달은 거예요. 저는 팔 년 동안 이집에서 생판 남과 같이 살면서, 아이를 셋이나 낳은 거라고. 아아, 그렇게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어요. 그저 내 몸을 난도질하고 싶어!

남편만을 믿고 살아 온 자신의 인생이 허망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하는 대목이다. 자신을 믿고 자신의 힘에 의해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야 한다는 삶의 의지와 출발의 각오가 느껴진다.

- 오늘 하룻밤도 더 머무를 수는 없어요.
한 인간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노라의 단호한 의지가 표현된 구절이다.

- 저는 이미 기적 따위는 믿지 않아요.
여성의 지위를 무시하는 인습이 만연된 사회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삶이 실현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인간적인 삶이 주어지는 진정한 의미의 결혼 생활이 되기 이전의 결합이란 무의미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4. 작품 해설

1879년에 발표 된《인형의 집》은 오늘날 근대 연극 사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적인 작품으로 입센의 대표적인 희곡이다. 또한 입센의 극 중에서 최초로 이론의 여지없이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그 구성과 표현에 있어서 사실주의 작가로서의 입센의 새로운 이상(理想)을 최대한도로 추구한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여성을 사회가 요구하는 굴종적인 인물로서가 아닌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제의 충격성으로 인해 당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까지도 사회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 내용의 충격성으로 《인형의 집》은 발표되면서부터 굉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른바 여성해방론자들과 일부 문학관계자들은 환영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가 입센이 결혼과 가정의 신성함을 파괴했다고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당시의 사회적 도덕관념으로서는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여러 나라에서 상연이 금지되거나, 상연되더라도 결말 부분이 수정되어 상연되었다.

이 작품이 여성의 자유와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독립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사회와 개인의 갈등이라는 넓은 의미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입센은 이 극을 통해 시대의 사상이 한 인간 속에서 어떻게 극적으로 작용하는지를 긴밀한 구성력과 생동감 있는 인물을 등장시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라가 자신의 삶을 인형 같은 여자요 아내의 삶이었다고 판단하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살고 싶다고 하면서 집을 나가는 것은 확실히 여성의 독립선언이었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이 작품을 여성해방운동의 입장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 입센은 철저하게 인생의 허위를 파헤쳐서 진실을 희구했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따라서 《인형의 집》은 입센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인생의 한 단면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인간 삶의 진지한 모색이 담겨 있는 작품으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http://www.hongkgb.x-y.net 참고)

- 흔히 이 작품의 주제를 여성 해방의 주창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여성 해방은 남성들의 이해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 해결되는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여성과 남성이 동시에 독자적인 인격적 주체로 서는 순간이 돼야 여성 해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입센은 이 작품에서 여성만의 해방을 외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주체적인 의식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을 뿐이다.


5. 더 알아둘 내용

§ 사회극 §

- 사회극의 의의
모레노는 역할을 여러 사람이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집단적인 요소와 각 개인이 개별적으로 독특하게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요소로 나누었다. 이러한 두 가지 요소를 행위화하는 방법으로 심리극과 사회극이 탄생하게 되었다. 심리극은 사적인 역할과 개인적인 문제들에 초점을 두고 진행되며, 사회극은 사회적 역할과 그 역할들 사이의 문제를 다루는데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가장 큰 차이가 있다.

사회극은 집단간의 관계, 집단 이데올로기를 취급하는 심도 있는 행위 양식(action method)으로서 사회문제에 대한 심리극적 치료방법, 사회 환경 개선을 위한 드라마, 집단 내에서 사회적 문제에 대한 내적 감정을 탐구하는 역할놀이방법 등으로 정의되어져왔다. 이러한 정의들을 통해, 사회극은 부부관계, 부모자녀관계, 스승과 제자관계, 의사와 환자의 관계 등 사회적 역할들의 사회적 관계와 사회적 문제들을 행위 화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상황을 개선시켜나가는 집단행위방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모레노는 사회극을 통해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실연하면서 서로 다른 집단의 대표들끼리 서로 역할을 교대함으로써 서로 이해를 하게 되고 평화를 얻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모레노 이후 사회극은 많은 심리극지도자들에 의해 그 영역이 넓혀졌으며 현재는 교육 현장, 심리치료 현장, 직장, 연극 분야 등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

- 심리극과의 차이점

사회극은 사회적 상황을 개선하고 사회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교육적인 면에 중점을 두는 반면에, 심리극은 한 개인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해결해주려고 하기 때문에 치료적인 면에 중점을 둔다.

사회극의 과정은 기본적으로 심리극의 과정과 같으며, 준비단계, 행위단계, 나누기 단계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심리극에서는 개인적인 주제를 가지고 과정이 진행되지만 사회극은 집단 원들이 원하는 주제를 가지고 진행된다는 점이 다르다. 주제의 선정에 있어서, 심리극은 먼저 주인공이 주제를 선정하고 주인공의 지금-여기의 느낌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지만 사회극에서는 집단 원들이 모두 참여하여 주제를 선정하고 그 주제를 토대로 사회극이 진행된다.

심리극은 주인공의 감정에 초점이 두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장면을 이어나가면서 주인공의 감정을 다루어 나가지만, 사회극에서는 주제가 어느 정도 표현된 경우, 불완전하거나 왜곡되어진 경우나, 수정, 보완, 확대, 극대화 등이 필요한 경우, 기타 질문과 토론이 필요하거나 역할의 세분화, 초점의 명료화, 연기자의 교체 혹은 보강, 집단 전체의 의견 수렴 등이 필요한 경우 장면을 중단할 수 있으며 새롭게 보다 극적이고 효과적인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또한 심리극은 집단이 참여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사회극에서는 집단 원들 모두의 집단 카타르시스를 위해 집단 원 전체가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심리극은 짧은 시간 내에 개인적인 문제들이 많이 드러나기 때문에 노출을 꺼리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사회극은 개인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적인 노출의 부담이 없이 예방, 발달적인 측면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사회극의 목표

사회극에서는 심리극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서, 인지, 신체 모두를 다룬다.
정서적인 측면에서 정화를 일으키고, 인지적인 측면에서 통찰을 일으키고, 신체적인 측면에서 역할훈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러한 정화, 통찰, 역할훈련은 한가지만으로 집단 원 모두에게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행동변화를 위해선 한가지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며 세 가지 목표 모두를 사회극 과정에서 얻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디렉터는 워밍업을 하면서 이러한 목표들에 대한 욕구를 평가하고, 과정 중에 집단이 그 목표를 달성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http://saebyeok.comunart.or.kr 참고)

§ 입센주의(Ibsenism) §

입센의 사회극에 나타난, 유럽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적 태도를 이르며, '자기에게 충실 하라' 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가정과 사회의 인습적 편견을 적발, 기성 종교의 타파, 여성의 해방 등을 주장한 입센 특유의 자아주의이다. 문학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하여 해결을 암시하는 수법과 태도를 입센주의라 한다.

§ 페미니즘(feminism ) §

여성의사회적·정치적·법률적 모든 권리의 확장을 주장하는 주의. 라틴어의 페미나 (femina;여성)에서 파생된 말로, 여권주의·여성존중주의를 뜻한다. 18세기 영국의 M.울스턴크래프트가 쓴 《여성권리의 옹호(1792)》는 페미니즘을 주장한 최초의 정리된 저작물이었으며 여기서 그녀는 중산계급 여성의 정신적·경제적 자립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페미니즘에는 명확한 이론체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나라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스웨덴의 E.케이는 진화론 입장에서 모성의 옹호를 호소하여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와 독일의 페미니즘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60년대 이후 페미니즘은 미국을 중심으로 우먼리브의 영향을 크게 받고 마르크스주의 및 기호학과 접촉하면서 이론상으로 진전되었다. 이러한 이론상 발전에는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다만 인간이라는 의식 전환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페미니즘은 <여성에 의한 인간해방주의>로 규정되기도 한다.


- 입센의 또 다른 작품 《유령》

§ 줄거리 §

이 작품의 주인공 아르빙 부인은 가정에 계속 남아 있도록 설득당한 노라로 그녀는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가정과 사회의 관습으로 인해 희생을 당한다.
존경받는 시종무관 아르빙의 미망인인 아르빙 부인은 남편의 영지에서 홀로 살아가면서 남편의 뜻을 다라 자선사업을 추진해 왔다. 그녀의 아들 오스왈은 어머니가 완성한 고아원의 개원을 축하하러 파리에서 돌아왔다. 극의 시작은 목수 엥스트란드와 그의 딸이라고 여겨지는 하녀 레지네 사이의 대화로 시작된다.

그는 그녀에게 딸로서의 도리를 다하라고 하면서, 선원들을 위한 '선원의 집'의 여종업원이 되라고 설득한다. 그는 이 일로 돈을 모으려 한다.   그러나 레지네는 이를 거절하고 보다 고상한 삶을 원한다. 이 집안의 오랜 친구인 만데르스 목사가 도착하여 고아원의 봉헌식을 올린다. 목사와 새로운 도덕률에 대해 토론을 벌이던 오스왈이 식당으로 간 후 거기서 레지네를 유혹하는 말소리가 들려오자, 아르빙 부인은 과거의 유령이 나타나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2막에서 아르빙 부인은 레지네가 자기 남편이 하녀와의 관계에서 낳은 딸이라는 사실과 남편이 훌륭하다는 평판은 그녀의 선행 때문에 덤으로 얻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한다. 2막의 마지막에 목수 엥스트란드의 부주의로 불이 나서 고아원이 타버리고 만다.

3막에서 아들 오스왈은 또 다른 유령인 그의 아버지로부터 성병을 물려받았음을 고백한다. 아르빙 부인은 그의 병이 심해져 광기가 나타난다면 그에게 독약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극의 마지막에서 오스왈의 마음은 마지막 발작에 의해 붕괴되고, 아르빙 부인은 약속한 대로 약을 주어 죽게 할 것인가 아니면 희망이 없는 불치병자로 그냥 살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심한다. 그녀가 결심을 하려는 순간 막이 내린다.

§ 작품 해설 §

《유령》은 1881년, 입센이 이탈리아 소렌토에 머무는 동안 《인형의 집》에 이어 완성한 작품이다. 《인형의 집》이 간행되자 노라에 대한 비난이 자자했으므로 이것을 뒤집어 그의 입장을 변호하고 현모양처의 가면적인 도덕주의에 속아서 한 집안을 멸망으로 이끌어 간 ‘집을 나가지 않은 노라’ 아르빙 부인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린 것이 바로 《유령》이다.

그리고 《인형의 집》의 제2의 등장인물로서 암담한 성격을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학사 랑크는 《유령》에서는 청년 화가 오스왈로 다시 등장하며, 여성 해방 문제에서 바뀌어 유전이라는 근대 과학의 중대한 한 주제와 대결한다. 《유령》은 노라의 가출을 유리하게 인증하는 하나의 반증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제재나 이것을 다루는 수법이 너무나 심각하고 비참하여, 이로 인해 입센은 세상의 모든 반감을 사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제목이 상징하는 바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유령이란 오스왈의 아버지 세대의 낡은 인습과 허상을 상징한다.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극 전반부의 경우 밖에서는 계속 비가 내린다. 이어 멀리에서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돌아온 오스왈은 집에 돌아와 계속 병에 시달리고, 결국은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이것은 《인형의 집》에서 주장한, 작가의 인습 타파의 노력이 결국 봉건적인 사회 인식으로 인해 한계 상황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유령》은 당시의 충돌하던 가치관과 개인적 고민과 갈등을 잘 그려낸 수작이자, 오늘날 근대 희곡의 가장 완벽한 작품으로, 사실주의극의 한 전형으로 인정받고 있다.


자료정리:곽미희 mihee1984@hanmail.net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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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