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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 소개

막스 베버(1864.2.4~1920.6.14)는 1864. 2. 4 독일 에르후르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법학, 역사학, 경제학, 철학을 전공하였으며 중세 독일 법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1892년 베를린에서 로마법과 상법에 관한 교수자격논문을 제출하였으며 경제적 이유로 변호사가 되었다.
1893년에 그는 마리안느 수니트거와 결혼하였으며 그녀는 베버의 사후에 그의 전집을 출간하였고 그의 전기를 집필하였다. 1894년에 그는 경제학 정교수로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초빙되었고 그 후 1897년에는 하이텔베르크 대학으로 초빙되었다. 베버는 청년기 이래로 고질적인 신경증을 앓고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1903년부터 수년간 학문적 활동이 중단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베버는 지원하였으나 전선근무를 하지는 못하고 하이델베르크의 야전병원의 책임자로 있었다. 전후에 그는 베르사유 강화조약에 독일대표단의 자문위원자격으로 참여하였다. 베버는 또한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국회의원과 장관이 되려는 정치적 포부를 가졌으나 이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 대신에 그는 1918년 비인 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었으며 다시 뮌헨대학으로 초빙되었다. 그는 1920년 56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베버의 생애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그와 양친과의 관계이다. 베버의 아버지는 전형적으로 권위적인 ‘프러시아 적’ 유형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교양 있고 예술적인 여인이었다. 베버는 아버지의 권위주의에 대해 반항적인 태도를 지녔으며 어머니를 동정하였다. 1903년 베버가 학문 활동을 중단하기까지에 이른 신경증은, 그의 아버지의 급작스런 죽음이 원인이 되었다고 베버 자신은 믿었다.

베버는 인류역사의 변동과 관련해서 역사변동의 원인을 어떤 한 가지 원인에 의해 설명하기 보다는 다인 적(여러 가지 원인) 설명의 전개하였다. 그는 경제와 사회, 역사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서구문명의 합리성의 증대와 연결시켜 분석했으며 그러한 합리성을 근대 관료제의 대표적 속성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베버는 계급 개념에 집착하기 보다는 이것을 포함해서 계층 및 집단들의 활동에 대한 연구에 관심을 가졌다. 계급이나 계층의 출현은 생산수단의 소유유무에 의한 것이 아니라 권력이나 기회의 불균등한 분배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해했다.

방법론적으로 베버는 두 가지 측면에서 비교정치론에 영향을 미쳤다.
권위에 대한 세 가지 이념형을 제시 하고 사회학에 있어 몰가치적(몰가치성 : 사회과학으로부터 실천적 ·윤리적 가치를 배제하여야 한다는 사회과학 방법론상의 이론)분석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 막스 베버는 사회조직이나 활동에 있어 합리성이 증대되는 것이 발전의 단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고 규정하였다.
한편 객관적 현실은 공평하게 연구될 수 있겠지만 가치들은 인간 의지의 산물이기 때문에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기 힘들다고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과학 분야는 몰가치적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2. 내용 요약

<제1부 문제>

종파가 혼합된 지방에서 직업통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항이 빈번하게 주목된다.
- 자본의 소유자와 기업의 경영자들이 주로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
- 현대 기업세계에서의 기능공과 관리자 계층은 주로 프로테스탄티즘 층에서 충원되고 있다는 사실.
개화기의 자본주의가 주민을 계층적으로 그리고 직업적으로 재편할 수 있었던 모든 곳에서의 종교 통계가 이러한 현상을 명확히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인구 비율에 비해 프로테스탄티즘 주민이 자본소유와 대규모 제조업 상업의 상부 관리 층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은 아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근거가 있다. 여기서 종파적인 소속은 경제적 현상의 원인일 뿐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그 결과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경제적 역할에 참여하는 것은 자본의 소유나 혹은 많은 비용이 드는 교육을 전제하며 부분적으로 혹은 대부분의 경우에 이 두 가지를 모두 전제한다.
제국의 지역 중에서 자연조건이나 혹은 교통상의 여건이 양호하고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곳, 특히 부유한 도시들의 대다수는 16세기에 이미 프로테스탄티즘 화 하였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경제적 생존경쟁에서 프로테스탄티즘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로 이 역사적 질문이 발생한다. 어떤 이유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된 지역이 종교개혁을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여기에서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즉 종교개혁이라는 것은 삶 전반에 대한 교회의 지배의 종식이 아니라 당시까지의 지배의 형식이 다른 형식으로의 대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된 국가에서 나타난 종교 개혁가들이 비난하고 나선 것은 일상생활에 대한 교회-종교의 지배가 너무 과도하다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당시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된 나라에서 그것도 경제적으로 상승하고 있는 부르주아 중산계급에서 그들이 당시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청교도의 전제를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이의 수호를 위한 영웅주의까지를 만들어냈는가? 부르주아 계급의 영웅주의는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현대적 대기업의 숙련공 중 가톨릭의 비율이 어째서 낮은가를 설명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 수공업도제들 중에서 가톨릭은 나의 견해로는 수공업에 그냥 머물러서 흔히 수공업 장인이 되는 경향이 강하고 프로테스탄티즘은 이와 대조적으로 공장에 들어가 숙련공이나 관리직 사원의 상층부를 점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경우에 의심할 여지없이 다음과 같은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즉 습득된 정신적 특성, 고향과 가정의 종교적 분위기가 결정한 교육의 방향이 직업선택과 따라서 직업세계의 운명을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또, 프로테스탄티즘들은 지배계층이었거나 혹은 피지배계층 이었거나 막론하고 혹은 어느 사회에서 다수였거나  소수였는지를 막론하고 경제적 합리주의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보였다. 가톨릭은 이에 반하여 어떤 처지에 놓여있건 과거나 현재를 막론하고 그런 경향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상이한 태도의 근원은 각 교파가 놓여있었던 역사적인 혹은 정치적인 처지에서보다는 기본적으로 이들이 지니고 있는 내재적 특성에서 찾아야 한다.
가톨릭이 지니고 있는 보다 뿌리 깊은 비 세속성과 이들의 최고 이상인 금욕적 성격이 이들로 하여금 세상의 재물에 대하여 보다 무관심한 태도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프로테스탄티즘을 ‘물질주의’라는 규정으로 상대를 공박하고 나선다. 한 현대 작가는 이러한 영리행위에 대한 양 종파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대립 점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가톨릭은 조용하며 영리충동이 적기 때문에 위험하고 자극적이기는 하나 궁극적으로 명예와 부를 가져올 수 있는 생활보다는 비록 수입이 적다하더라고 가능한 한 안전한 생을 구한다. 사람들은 이를 잘 먹겠느냐 혹은 발 뻗고 자겠느냐는 익살로 표현한다. 위에서 볼 때 프로테스탄티즘은 잘 먹는 것을 택하고 가톨릭은 발 뻗고 자는 것을 택했다고 할 수 있다.”

독일 프로테스탄티즘들은 세속적인 직업생활에 몰두하고 있고 그들의 상층은 종교적으로 무관심하다. 이러한 비교가 보여주는 것은 가톨릭의 비세속성 이나 프로테스탄티즘의 물질주의적인 세속의 즐거움 혹은 이와 유사한 소리들로서는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화는 현재에서는 혹은 최소한 과거에서는 전혀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의 정신, 진보의 정신 혹은 무엇으로 부르건 간에 프로테스탄티즘이 불러일으켰다는 이 정신은 세속의 즐거움 혹은 어떤 계몽주의 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신과 근대 자본주의 문화의 내적 연관성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싫으나 좋으나 이를 소의 물질주의적 혹은 최소한 반 금욕주의적 세속의 즐거움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의 순수한 종교적인 성격에서 찾아야 한다.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러한 역사적 개념은 도식적으로 정의될 수는 없고 역사적 실제에서 취해지는 구성요소로부터 점차적으로 합성되어야 한다.
직업의무라는 사상은 자본주의의 사회에서의 가장 특징적인 사회윤리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이 사회의 기본적 토대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직업에 대한 의무의식은 직업의 내용이 어떻든지 간에 혹은 직업이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하는 것이건 혹은 자기의 물적 소유(자본)를 사용하는 것이건 간에 각자가 가지고 또 가져야 만하는 것이다.
오늘날 경제생활을 지배하는 자본주의는 경제적인 자연도태를 통하여 필요한 경제주체를 교육하고 선택해낸다. 하지만 여기서 ‘자연도태’라는 개념이 역사적 현상을 설명해 내는 데 있어서 가지는 역사적 한계는 역시 분명하다. 이는 인간집단에 의해서 하나의 세계관의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 글의 목적이다.
돈벌이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뻔뻔스럽게 자기 이해를 관철시키는 관례가 바로 서양의 척도로서의 부르주아 자본주의적 발전이 후진적인 지역의 특징이다. 모든 공장주들은 독일과 달리 예를 들어 이태리 노동자들이 양심적이지 못한 것이 이태리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의 주된  장애요인 이였고 이는 현재에도 그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본주의는 규율을 모르는 자유로운 인간을 노동자로 사용할 수 없으며 타인과의 거래에 있어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업가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제도의 차이점이 화폐에 대한 욕망의 차이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금전욕은 인류역사만큼 오래 된 것이다.

특정한 윤리, 즉 일정한 규범에 재배되는 생활태도라는 의미에서의 ‘자본주의 정신’이 봉착한 가장 큰 장애는 ‘전통주의’라고 규정할 수 있는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는 일정한 자세와 반응이었다. 몇 개의 특정한 사례를 통하여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 알아보기로 하자.
-노동자 : 근대적 기업가 ‘자신의’노동자로부터 최대한의 노동성과를 올리고 노동 강도를 강화하는 기술적 수단의 하나는 성과급이다. 이들은 성과급을 인상하여 짧은 시간 내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이들의 노동성과를 제고하려들려 한다. 그러나 성과급 인상은 놀랍게도 동일한 시간 내에 보다 많은 노동성과를 이룬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적은 성과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사실적으로 노동자들은 그 보다 적은 양의 일을 하고 종전과 같은 성경말씀대로 ‘그에게 족한’ 만큼의 임금을 선택한다. 많이 버는 것 보다 적게 일하는 것을 그들은 택한 것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들의 ‘전통적’요소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는 얼마나 일 해야 하는 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통주의’라고 지칭된 행위형태의 예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반대의 수단이 동원될 수가 있다. 즉 임금을 인하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수입을 유지하려는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노동을 강제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시초부터 이러한 길을 택하고 또 택하였다. 저 임금이 생산적이라는 생각, 즉 저임금이 노동성과를 제고한다는 생각을 수 백 년 동안 자본주의의 신조로서 통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 수단은 효과에 한계가 있다. 특히 숙련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생산품의 산출이나 혹은 고가의 정교한 기계를 다루거나 고도의 집중력과 창의성이 요구되는 일에서는 저 임금이 전혀 수익을 내지 못하며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런 일에서는 비단 높은 책임감이 필수적일 뿐 아니라 하나의 정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은 높은 혹은 낮은 임금에 의해 이루어진 바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오래 지속된 교육과정에 의해 이루어진 산물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를 예를 통해 보자.

후진적이고 전통적인 노동의 모습은 흔히 여성 노동자, 특히 미혼 노동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물려받은 전통적인 노동방식을 보다 더 실질적인 방식으로 바꾸려는 능력이나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 그런데 종교적인, 특히 경건주의적인 배경을 가진 처녀들에 있어서는 경제적 교육이 이런 그룹들에서 가장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얘기를 우리는 들을 수 있고 이는 통계조사로 확인 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노동을 ‘소명’으로, 즉 자체목적으로 여길 수 있는 가장 유리한 토대가 존재하며 전통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종교적 교육의 결과로 이들에게서 가장 높게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직업적(소명), 체계적,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는 태도를 ‘자본주의 정신’으로 표현해보자. 이는 역사적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신은 근대 자본주의적 기업에서 가장 적절한 자기표현의 형태를 찾았고 반면에 근대 자본주의 기업은 이 정신 속에서 가장 적절한 정신적 추진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 지난 18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대륙의 섬유업 부문에 종사하는 선대업자의 삶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서 평온했다. 노동시간도 적당하였고 소득은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고 작은 재산을 쌓기에 충분한 정도였으며 업자들 상호간에 경쟁은 별로 심하지 않았다. 이 사업은 모든 면에서 자본주의적 조직 형태를 갖추었다. 하지만 사업가들의 머릿속에 있는 ‘정신’의 측면을 볼 때 이는 ‘전통적’경제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평온함이 언젠가 갑자기 파괴되었으며 그것도 조직형태의 기본적인 변화(공장체계, 기계 제 생산)가 없이 이루어졌다. 선대업자 집안의 한 사람이 내려와 농부를 엄선하고 통제를 강화하고 그들은 노동자로 교육시켰으며 ‘박리다매’라는 기본 원칙을 관철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목가적 풍경은 치열한 경쟁 하에서 산산이 깨어졌다. 상당한 재산이 모아졌고 과거의 안락하고 쾌적한 생활방식은 근면함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점인데 이러한 변화를 일으킨 것이 새로운 화폐의 유입이 아니라 새로운 정신, 즉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었다. 이러한 정신의 도래는 결코 평화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이러한 새로운 정신이 지배하는 경제생활의 관철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든 사람들은 대체로 엄격한 부르주아적 관점과 원칙을 지닌 어려운 인생역정에서 단련된, 심사숙고하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냉정하고 꾸준히 치밀하고 도 철저하게 일에 몰두하는 형태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개인적 도덕적 특성에 종교적 사상은 물론이고 윤리적 원칙과는 무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양자 사이에 관련이 있다면 이는 새로운 유형의 생활 태도의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에 있어서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적 믿음과 행위는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만약 있다면 그것은 최소한 독일에서는 부정적인 성격의 것으로 나타나 곤 한다. 만약 그들에게 자신의 소유에 대하여 결단코 만족해하지 않고 쉬지 않고 일을 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저 대답에 궁해서 자식과 자손을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진실한 해답은 이보다는 그들에게 있어서 지속적인 일이 수반되는 사업은 생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고 유일하게 정확한 동기이다.   

분명히 새로운 사실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세속적 직업에서의 의무의 완수를 개인의 도덕적 행위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내용으로서 평가하는 것이다. 이는 불가피하게 세속적 일상 상[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러한 의미에서 최초로 ‘소명’개념을 불러일으켰다. 다라서 ‘소명’개념에는 프로테스탄티즘교파의 중심교리가 표현되어있다. 이는 기독교의 윤리적 계율을 ‘명령’과 ‘권고’로 나누는 가톨릭의 방식을 거부하고 있다. 신을 기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은 수도 적 금욕을 통하여 세속적 도덕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세속적인 의무의 성실한 이행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속적 의무는 각 개인의 세상의 위치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것이 그의‘소명’이 되는 것이다.

루터는 이러한 생각을 그의 종교개혁활동의 첫 번째 십 년 동안에 발전시켰다. 수도사적인 생활은 신 앞에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 당연히 전혀 무가치할 뿐 아니라 세상에서의 의무를 회피하는 이기적인 냉혹함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초기 루터의 종교개혁 활동 속에서 그는 ‘소명’을 기본적으로 육신의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세속적인 행위에 관한 한, 고니도 전서7장에 나오는 바울의 종말론적 무관심과 내면적으로 유사한 태도가 그를 지배했다. 인간은 어떤 상태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으며 생의 짧은 순례과정에서 직업의 종류에 관해 연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가 점점 세상사에 관여하게 되면서 그는 점점 직업노동을 높이 평가 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루터에게 있어서 각 개인의 구체적인 직업은 각 개인에 대한 신의 특별한 명령이 되었다. 즉 신의 섭리가 그에게 부여한 어떤 특별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차 생의 사소한 일에서 조차 섭리를 강조하는 태도는 점차 운명 사상에기초한 전통주의적 색채를 띠었다.  각 개인은 기본적으로 신이 정하신 직업과 지위에 머물러야 한다. 또한 지상의 노력은 이러한 신에 의해서 그에게 주어진 삶의 한계 내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 적 의미에서의 단순한 소명사상은 우리가 탐구하는 목표에 관해서는 단지 논란의 여지가 많은 중요성 밖에 갖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제2부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윤리>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역사적 담지자는 크게 보아 네 가지이다.
-칼뱅주의가 특히 17세기에 자신의 주요 지배지역이었던 서유럽에 취한 형태 
- 경건주의  - 감리 파  - 침례교 운동에서 발생한 교파

16,17세기에 가장 발달된 자본주의 국가인 네덜란드, 영국, 불란서에서 거대한 정치투쟁과 문화투쟁을 야기했던 믿음은 칼뱅주의였고 따라서 여기부터 시작한다.
칼뱅주의의 가장 특징적인 교리는 예정설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만이 자유롭고 어떤 법칙으로부터도 자유롭기 때문에 그의 결단은 단지 그가 그것을 인간에게 알리는 것이 이롭다고 여길 때에만 인간을 이해할 수 있고 인간에게 알려질 수 있기 때문에 세상의정의의 척도로 신의 지고한 섭리를 재는 것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그의 존귀함을 침해하는 일이다. 우리는 단지 이러한 영원한 진리의 단편에 의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어두운 비밀에 싸여있으며 이를 알아내려는 것은 불가능하고 잘못된 일이다. 신의 은총은, 그의 결정은 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받기로 작정한 자에게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고. 이를 받지 못하게 작정된 자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으로 비인간적인 교리는 개별적 자아의 전대미문의 내적인 고립감을 가졌을 수밖에 없다. 종교개혁 시기의 인간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관심사, 즉 영원한 구원을 향하여 인간은 태초로부터 정해진 운명을 따라 고독하게 자기의 길을 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었다. 신조차 도움이 안 된다. 이것 즉 교회적이고 성례적인 구원의 절대적인 폐지가 가톨릭과 비교 할 때 결정적인 것이다.

우리는 예정설의 영향을 우리가 취급하는 시대의 생활 방식과 인생관에서 나타나는 기본적 요소 속에서 명확히 발견할 수 있다. 예정설은 결국 우리가 다루려하는 신에 대한 배타적 믿음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이다. 단지 신만이 믿을 수 있는 존재이다. 루터주의와 아주 대조적으로 칼뱅주의가 성행한 지역에서는 이러한 생활 태도와 연관하여 개인적 참회가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는 그러나 중대한 의의를 갖는 사건이 되었다. 우선 이러한 종교성이 작용하는 방식의 징후로서의 의의, 그리고 또한 그 윤리적 태도에 관한 심리적 발달자극으로서의 의의가 있다.

세계는 신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한다. 선택된 기독교도는 최선을 다하여 그의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신의 영광을 높이기 위하여 존재한다. 세상에서의 칼뱅주의자의 황동은 단지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한 활동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현세적 삶을 위해서 이루어지는 직업노동도 이러한 성격을 갖는다. 이미 루터에 있어서도 우리는 사회적 분업의 일환으로서의 직업노동의 근거를 이웃사랑에서 출발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칼뱅주의자 에 있어 서는 그들의 윤리적 체계의 독특한 일부분이 되었다. 이웃사랑은 그것이 육신의 영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의 영광을 위해서만 실천될 수 있으므로 이는 무엇보다도 자연법에 의해서 주어진 나날의 과제를 수행하는 데서 나타난다.

하나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신자들에게 제기되었고 나는 과연 선택되었는가? 그리고 나는 내가 선택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러나 칼뱅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도구라고 여겼고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였다. 따라서 그는 우리는 단지 신의 결정이 있다는 것과 아는 것과 진정한 믿음에 의하여 야기된 그리스도에 대한 끊임없는 신뢰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라고 하였다.
개혁교회의 토대위에서 최초로 성장한 경건주의 발전 속에서 이질문은 핵심적이 의미를 지녔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때로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었다.

예정설이 재해석 되거나 환화되거나 혹은 결코 포기되지 않는 한에 있어서 두 개의 상호 연관된 목회 적(목회: 목사 혹은 전도사가 행하는 모든 교역자적 행위) 권고가 특징적으로 부각된다. 첫째는 자신을 선택된 자로 여기고 어떤 의심도 악마의 유혹으로서 물리쳐야 한다는 것을 의무화 하는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자기 확신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수단으로서 끊임없는 직업노동이 강조되었다. 직업노동만이 종교적 회의를 떨칠 수 있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준다는 것이다.
칼뱅주의자들은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표현되는 바와 같이 자신이 구원을 스스로 만든다. 청교도적 금욕주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항상 지속되는 동기를 유지시키고 또 그에 입각하여 행동하게 하였는데 이는 특히 스스로 자신을 훈련하여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전인격에 대한 방법론적 통제가 이 두 종교에 세상을 지배하는 엄청난 힘의 근원이 되었다.
다른 면으로 경제적 금욕주의와 칼뱅주의 적 금욕주의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는가는 명확하다. 그것은 복음의 권고가 없어져 따라서 금욕은 순전히 현세적인 것으로 바꾼 데에 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방법론적으로 가장 완벽한 인간이란 단지 수도승이고 그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라서 금욕주의가 개별적 인간을 더욱 철저하게 장악할수록 그는 더욱 더 일상생활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바로 세속적 도덕의 초월에 성자의 삶이 있었기 때문 이다. 이를 배척한 것은 루터였고 칼뱅주의는 단지 이를 단순히 받아들였다.
칼뱅주의 적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가 가톨릭 적질서의 합리적 형태의 생활과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그러한 윤리적 생활태도의 체계화는 순전히 외적으로는 엄격한 청교도가 자신의 은총의 상태를 계속하여 점검하는 데서 나타난다.

경건주의는 그들이 공식적으로 속해있던 교회에 계속 머물러 있었지만 경건한 실천의 추종자들을 세상과 동떨어진 독립집회에 모으기 시작하였다. 경건주의는 성도들의 보이지 않는 교회를 지상에 끌어내려 보이게 하려 했다. 그러나 독립된 분파를 형성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진정한 참회자들의 작은 교회는 보다 철저한 금욕의 실행으로 이미 현세에서 신과의 합일이라는 축복을 누리려 했다. 이제 후자의 경향은 루터적인 신비적 합일과 내적으로 연관된 것이며 아주 흔히 개혁파 교회의 평균적 신자들이 받아들이는 것보다 종교의 정감적 측면에서 강조로 기울었다. 이것이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에  개혁교회 안에서 출발한 경건주의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적인 그러나 금욕적인 신앙과 칼뱅주의 적 금욕주의의 교리적 기초의 부정 혹은 점증하는 무관심과의 결합이 대륙 경건주의의 영미 찬이라고 할 수 있는 감리교를 특징지어준다. 동시대인들에게 이 교리의 추종자들의 특색으로 나타난 것은 구원의 확신에 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의 생활방식의 방법적 체계이다. 이것이 독일 경건주의의 어떤 방향과 의심의 여지가 없는 친화성을 지니는 것은 이 방법론이 특히 감정적인 회개의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데 응용되었다는 데에서 나타난다.
모든 정감적인 것을 속임수라고 하여 배척하였던 칼뱅주의와는 달리 성결의 증거에서 직접적으로 흘러나와 순수하게 느껴진 구원받은 자의 순수한 느낌이 원칙적으로 구원확신의 유일하고 확실한 근거가 된다고 보았다.

침례교 분파는 이들의 초창기를 지배하였던 동기에서 우리가 칼뱅주의에서 이미 알고 있고 이 근본적인 중요성이 계속해서 강조되는 하나의 원칙을 취하여 이를 지속적으로 보전하였다. 이 원칙이란 모든 형태의 피조물 숭배를 오직 신에게만 향해질 외경심을 손상시키는 것으로서 무조건 배척하였던 것이다. 침례파는 예정설 신봉자, 특히 엄격한 칼뱅주의자 에게 서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성례를 가장 급진적으로 평가 절하하였고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세계의 탈마법화를 가장 철저한 형태로 관철시켰다.

국가의 규제가 경찰 적,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질 때 이는 오히려 자본주의 정신을 직접적으로 마비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은 효과는 교회가 금욕을 통제하는 데에 마치 경찰적인 방식을 사용한다면 동일하게 발생할 수 있다. 교회가 특정한 회적인 행동양식을 강제할 때에 합리적인 생활태도를 위한 주관적인 동기를 때에 따라서는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점을 주의하여야 한다. 즉 국가교회의 권위주의적 윤리의 규제와 자발적인 준수에 근거하는 종파의 윤리적 규율의 큰 차이를 주목하여야 한다.
침례교의 모든 분파가 기본적으로 교회가 아니라 종파를 건설했다는 사실이 금욕주의 강화에 기여했는데 이러한 사정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칼뱅주의 적, 경건주의 적, 감리교적 집단에 있어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사실에 있어서 다 같이 자발적 집단을 결성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이 상이한 금욕주의 운동들이 세세한 점에서 차이가 있고 강조점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고 중요한 공통된 성격이 이 모두에 있다. 우리의 고찰에서 결정적인 사실은 거듭해서 말하지만 모든 교파에 이어서 종교적인 은총의 상태를 사회적인 신분의 상태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분은 인간을 피조물의 타락한 상태와 세계로부터 격리시켰다. 이러한 신분을 획득하는 것이. 각각의 교파의 교리에서 상이하게 나타나겠지만, 결코 주술적 성례나 혹은 고해를 통한 사항이나 혹은 개별적인 경건한 업적을 통해서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연적 인간의 생활태도와는 의문의 여지가 없이 완전히 상이한 특수한 형태의 행위 속에서의 증거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로부터 각 개인에게 자신의 은총의 상태를 생활 속에서 방법적으로 검증하려는 동기가 되어왔고 따라서 금욕적 원칙이 생활방식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금욕적인 생활양식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신의 의지에 입각한 전생에의 합리적 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금욕은 더 이상 보상의 업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에 관한 확신을 가지려는 자가 행하여야 될 과업이었다. 이러한 종교적으로 요구되는 자연적 생활과 구분되는 성도의 특별한 생활은 더 이상 속세를 떠난 승려집단에서가 아니라 세계와 세계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세를 겨냥한 이러한 현세 속에서의 생활의 합리화라는 것이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소명 개념이 끼친 결과였다.
  

3. 알아두기

- 칼뱅주의 : 16세기 프랑스의 종교가 칼뱅의 종교개혁 운동에 의한 기독교의 교의. 엄격한 성서주의를 뜻한다.
칼뱅주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의 가장 핵심이 되는 것
-  칼뱅의 직업 소명 설
신으로부터 자기 몫의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라는 것으로 직업은 소명이며 그 자제의 신성함을 역설하고 사유재산제의 도덕적 합리화, 영리활동의 자유를 윤리적으로 옹호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자기 몫의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즉 자신이 맡은 직분에 충실히 하라는 말인데 이것은 공자의 정명사상과 일맥상통한다.
공자의 논어에서  “君君 臣臣 父父 子子” (생활 속에서 자기가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할 것을 강조) 라는 구문이 바로 그것이다.
- 경건주의 : 17세기 말경 독일 루터 파 교회의 정통주의 적 고정화(固定化) 경향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프로테스탄트 적 종교운동.
- 감리교 : 18세기에 존 웨슬리가 영국국교회를 부흥시킨다는 취지로 시작한 운동.
- 침례교 : 자각적인 신앙고백에 기초한 침례를 시행하는 그리스도교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


자료정리:곽미희 mihee1984@hanmail.net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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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