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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30. 00:28

간디자서전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30. 00:28

1. 지은이 & 역자 소개

(1) 지은이 소개

간디 : 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 사상가.
1869년 인도 서부의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나, 18세 때 런던에 유학하여 법률을 배우고, 1891년 귀국하여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893년의 남아프리카 여행에서 백인에게 박해 받던 인도인들을 보고 1951년 귀국할 때까지 그곳에서 인도인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위해 인종 차별 반대 투쟁에 나서기 시작한 그는 이후 아힘사, 무소유, 무 집착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적 바탕 위에 사티아그라하 운동, 아슈람, 공동체 운동 등을 전개하였고, 영국에 대한 비협력 운동의 일환으로 납세 거부취업 거부상품 불매 등을 통한 비폭력 저항 운동을 이끌었으며, 인도 카스트 최하층인 하리잔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도 진력하였다.
1947년 7월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던 후 힌두교와 이슬람교간의 융화를 위해 활동하던 중 1948년 1월 반 이슬람 극우파의 한 청년이 쏜 흉탄에 쓰러졌다. 1922년 12월 인도의 문호 타고르로부터  '마하트마' 라고 칭송한 시를 받은 뒤로 '마하트마 간디' 라 불려 온 그는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가슴속에 위대한 영혼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2) 간디의 책들
- 날마다 한 생각 :
  간디가 아내를 잃고 상심에 빠진 제자 아난드 힝고라니(Anand T.Hingorani)에게 보낸 편지 글을 모은 것이다. 1944년 11월 20일부터 1946년 10월 10일까지 2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쓰인 편지에는 모두 688개의 짧지만 빛나는 경구가 담겨 있다.
- 힌드 스와라지(Hind Swaraj) :
  이 책은 『자서전』과 더불어 간디의 몇 안되는 주저 가운데 하나다. '인도의 자치' 라는 뜻의 『힌두 스와라지』는 간디 개인으로 볼 때는 일종의 '출사표'며, 인도인의 입장에서는 '인도 독립 선언서'에 해당하고, 인류 전체에게는 '복음'이라 불릴 만하다. 간디 나이 마흔 살이던 1909년, 영국에서 남아프리카로 가는 배 위에서 씌어진 이 글은, 한편으로는 당시 식민지 인도의 긴급한 정치적 요청에 대한 답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의 세계사적 운명에 대한 진단과 고심의 산물이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에" 썼다는 고백에서 보듯, 이 글은 간디의 그 어떤 그보다 더 생생하고 진정어린 영혼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 남아프리카에서의 사티아그라하의 역사
- 간디 자서전 : 나의 진리실험이야기

(3) 역자소개
함석헌(咸錫憲 : 1901~1989)
문필가, 시민운동가, 종교사상가, 독립운동과 민주화, 인권운동에 공헌하였으며, 씨알 사상 정립에 공헌하였다.

함석헌은 평북 용천 사람으로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9년 관립 평양고보 졸업반 때 3.1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후 3.1 만세사건에 참여한 잘못을 뉘우치라는 학교당국의 ‘반성문’ 제출조건을 거부하고 자퇴하였다. 그 후, 평안도 정주에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에 편입하여 남강 이승훈, 다석 유영모을 스승으로 모시고 삶과 민족과 역사에 눈을 떴다.
그는 일본 동경사범학교에 입학하고, 동경 유학시절 우찌무라 간죠의 무교회 성서연구모임에 김교신과 더불어 참여하였다. 1928년 귀국 후에는 모교인 오산학교에 역사교사로 강단에 섰으며, 1933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 』를 집필하였다. 그는 일제시대 여러 차례 감옥 생활을 경험하였으나 감옥을 스스로 ‘인생대학’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을 구성하는 세 가지 핵심화두는 ‘민족, 종교, 과학’으로 민족사랑, 진리사랑, 이성적 사고를 강조하였다.

조국 해방 후, 해방 정국에서 함석헌은 평북문교부장관에 추대되기는 했으나 소련군에 의해 수감되었고 1947년 남하하였다. 1950년 6 25 한국전쟁을 계기로 함석헌의 사상은 또 한번 껍질을 벗고 근본적인 깊이와 높이를 더하게 되었다. 그의 사상의 밑바탕에는 는 성서사상 즉 기독교적 요소가 있으나 기독교의 교리주의, 형식주의에 반대하고 노장사상, 공맹사상, 화엄사상 등에도 깊은 종교적 진리와 구원의 지혜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말년에 그는 퀘이커에 가입하여 평화운동에 진력하였다.
남하한 후 함석헌은 자유당정권, 군사부치하에서 민주주의운동, 인권운동측면에서 ‘재야의 중심인물’로 시민운도의 최전선에서 활동하였고, 1970년 월간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그의 독특한 ‘씨알 사상’을 본격적으로 서술하기 시작하였고, 1976년 소위 ‘명동 3.1 사건’에 참여하여 윤보선, 김대중, 정일형, 문익환, 안병무, 이문영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민주수호 양심세력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함석헌은 종교, 시 300여 편을 남긴 탁월한 종교시인이며 문필가였지만, 그의 핵심은 행동하는 지성인, 진리구도의 종교사상가, 거짓과 비겁에 저항하는 시대의 양심이었다. 그의 중심사상은 '씨알사상' 으로 대표되는데 '씨알'은 민중 중에서도 순수한 사람됨을 지향하는 순수 우리말 표현이다. 그의 역사관은 영웅사관이거나 유물사관이거나 유심사관이 아니고, ‘역사의 주인은 씨알이다.'고 보는 민중사관이다. 그는 1989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총체적으로 볼 때, 함석헌은 개신교가 한국에 전래된 후, 주체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소화 흡수하여 동양의 고전과 대화시키면서 독창적이고 토착화 된 기독교 사상을 이룩하였다. 그는 역사를 가르친 교육자였고 인생의 진리를 추구한 종교 사상가였으며 언론인이면서 민주인권운동가였다.

(4) 함석헌의 책들
- 뜻으로 본 한국역사                               - 인간혁명의 철학
-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서풍의 노래                                         - 수평선 너머
- 간디의 참모습/간디 자서전                    -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 역사와 민족                                         - 달라지는 세계의 한길 위에서
- 두려워말고 외치라                                - 6천만 민족 앞에 부르짖는 말씀
- 바가바드 기타                                      -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말씀/퀘이커 300년                                - 사람의 아들 예수/예언자
- 민족통일 의 길                                     - 진실을 찾는 벗들에게
- 영원의 뱃길                                         - 씨알의 옛글 풀이


2. 시대배경

19세기 중엽, 영국은 전 인도를 지배하게 된다.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인도를 영국의 상품시장과 원료기지로 만든다. 또한 공업 발전을 억압하고 농민들에게서 토지를 빼앗아 인도의 전반적인 노동 생산력을 저하시킨다. 재해의 정도는 점점 심해졌고 자연적으로 각 처에서 농민들의 폭동이 발생했다. 세포이 반란도 이 중의 하나로 종교적 계율에 어긋난다고 생각되는 명령을 내림으로서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이 반란은 영국 신예군대의 무자비 반격으로 1859년 7월에 진압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인도는 영국에 협조를 한다. 협조의 이유로는 2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영국에 협조하면 영국과 대등한 지위가 부여될 것을 기대해서였고 둘째, 회의파 분열로 민족운동 중추세력의 약화와 전시입법의 강요 때문이었다. 전쟁의 진행으로 민생고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그에 따라 반영 풍조도 높아져만 갔다. 또한 이슬람교도들은 영국이 그들이 존중하던 터키의 킬라파(이슬람교 교주로서의 터키 왕의 칭호)와 적대 관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동요하여 그들 안에서 내부 분열이 일어나 해방세력을 강화했다. 중산계층도 점점 민족주의의 경향을 띄었다.

1916년 두개의 자치 연맹(틸라크 - 급진파의 수장 + 애니 베전트 여사 - 영국인이면서 인도의 독립을 위해 싸운 인물)를 결성하고 1917년 몬터규 성명(“인도에서의 자치를 점차 확대하여 영제국 내에서 자치령 지위를 정진시킨다.”)을 발표한다.
1918년 11월11일.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19년 3월 롤래트 법을 공포한다. 이어 4월에 암리차르시에서 롤래트 법에 반대하는 평화적 집회에 발포하여 대량학살이 감행되고, 펀자부 주에는 계엄령이 선포된다. 간디가 인도로 돌아와 마침내 1919년 롤래트 법 반대투쟁을 계기로 정치무대에 등장하고 전국적인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이 시기이다.


3. 간디의 사상과 용어해석

(1) 간디의 종교적, 이념적 사상
간디의 종교적 신조에는 두 개의 다른 특징이 있다. 하나는, 그가 도덕적 가치를 종교의 실질로 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는 하나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간디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진리와 사랑이 기본적인 종교적 원리임을 말한다. 전통적인 힌두교는 그런 진리와 사랑에다 자기억제와 자기부인을 합쳐서 네 개를 기본적은 덕성이라고 생각했고, 비착취와 비소유에 대한 필요한 보충으로서 간디에게 큰 감명을 준 이른바 브레드 레이버(bread-labour)를 힌두교의 다섯 번째 기본원리로 삼게 된다. 위의 다섯 개의 원리들을 좀 더 상세히 검토해보자.

▶사티아
사티아라는 말은 네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사티아란 원래 사트(sat), 곧 ‘존재’에서 연유하는 말로, 존재 또는 진리는 신의 가장 중요한 이름이지만, 신이 진리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진리야말로 신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 진실과 일치하는 지식, 영원한 천복인 절대적 지식
셋째, 성실
넷째, 정의

▶아힘사
적극적인 의미 : 애정, 동정, 자비, 관용, 봉사 , 자기희생 등
소극적인 의미 : 비폭력, 불상해(不傷害)
하지만 불상해, 비폭력과 같은 소극적인 면보다는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선으로 대한다는 적극적인 면을 더 의미하고 있다.

▶브라마차리아
브라마차리아는 ‘순결’이며 경우에 따라 ‘자제’ 또는 ‘자기정화’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단순히 ‘성욕의 억제’라고 이해되고 있지만, 이는 곧 진리를 탐구하는데 적합한 행위를 뜻한다.
브라마차리아는 육욕의 억제에서 시작되기는 하나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감각기관의 통제, 더 나아가 생각, 말, 행위의 일체의 통제 없이는 불가능하며, 특히 미각의 통제가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간디는 감각적 욕망은 단순히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높은 목적에 이바지할 때에만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을 일반적인 원칙으로 삼아왔다. 음식물은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보존하고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서 취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성욕도 단지 육체적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원하는 수의 아기를 낳기 위해서 충족되어야 하는데, 그것도 성교를 가능한 한 최소한을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아파리그라하
아파리그라하는 ‘비소유’이다. 여기서 소유란 ‘장래를 위한 준비’를 의미한다. 이를 좀더 깊이 생각하면, 육체도 하나의 소유가 되고 향락에 대한 욕망의 결과가 된다. 그 때문에 모든 생물은 윤회 속에 있게 마련이고 이 욕망이 없어진다면, 육체의 존재이유가 사라지고 우리 인간은 윤회에서 해방되어 우리의 정신은 자유 독립의 존재를 얻을 수가 있다. 따라서 육체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은 비소유의 이상이다.

▶브레드 레이버
브레드 레이버(bread-labour)란 “빵에 대한 권리를 얻기 위한 생산적인 손일”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손일에 의해서 무엇인가 생산함으로써 남에게 기대는 일은 하지 않고, 단지 남의 노동의 성과만을 향유하지 않는 것이다. 간디가 장려한 물레질은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이유만이 아니라 브레드 레이버의 최선의 것으로의 선택이었다.

(2) 용어해석

→불가촉천민(untouchables) : 최하층민(pariah), 추방당한 자 (outcast), 또는 하리잔(harijan)이라고 도 불린다. 카스트의 최하급 수드라보다도 더 낮은 신분으로 전적으로 사람  대접을 못 받는 사람들이다. 그 수는 5천만 내지 6천만이라고 한다.
→3파운드 인두세 : 원래 나탈 정부가 1860년 무렵 사탕수수의 재배와 제당에 필요한 노동력을 얻기 위하여 인도정부와 합의하에 인도인 계약노동자를 데려갈 때에는, 5년간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그들 노동자는 자유롭게 나탈에 정착할 수 있고 또 완전한 토지소유권도 가질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기한 이 끝난 노동자들이 농업에만 종사하지 않고 상업에도 손을 뻗쳐 토지와 가옥도 소유하고, 그들을 뒤따라 인도의 상인들도 그곳에 가서 정착하게 되어서 거대한 기업체를 가지게 된 이도 생겼다. 이렇게 되자 백인 상인들이 위협을 느끼게 되고, 그들의 적개심이 인도인의 선거권 박탈법안과 인두세 부과법안으로 나타났는데 계약기한이 종료된 노동자는 바로 인도로 귀환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2녀마다 계약을 갱신해야 하며, 이를 모두 거부하는 경우에는 25파운드의 연세(年稅)를 납부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인디언 오피니언 : 『영 인디아』(1919년 창간)와 『하리잔』의 전신인 주간지로 간디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자기 훈련하는 동시에, 그 사상을 민중에게 전하고 그 반향과 비판을 알기 위한 기관지이다. 신문은 처음에는 구자라트 어, 힌디어, 타밀어, 영어의 각 판으로 만들어지고, 일정한 난에 간디는 반드시 기고했다. 이 신문은 사티아그라하 운동의 불가결의 무기로 되었다.
→팅카디아 : 참파란 주민들이 법령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자기 토지의 20분의 3을 지주를 위해 인디고를 재배하기로 되어있던 것을 팅카디아 법이라고 한다.
→롤래트 법안 : 1919년 초에 제정되어 3월에 발효된 이 법의 목적은 전시입법 (즉, 1915년의 인도방위법)의 실효에 즈음해서 일정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투옥할 수 있게 한여 정부의 민족운동 탄압력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법안이다.
→하르탈(hartal) : hat(상점)라는 말과 tala(잠그다)라는 말이 합해서 된말, 우리말로 휴업, 파업.
→카디(khadi) : 물레를 손으로 돌려 짠 옷감.


4. 줄거리

(1) 간디 1부

모한다스 카람차드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구자라트 주의 카티아와르 반도에 자리 잡고 있는 조그마한 해안도시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카람찬드 간디는 상처를 거듭하여 네 번 결혼했는데, 그 네 번째의 처인 푸틀리바이와의 사이의 3남 1년 중 간디는 그 막내둥이였다.
간디의 가문을 보면, 간디 가는 이도의 카스트 상으로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다음가는 바이샤의 일종인 바이샤에 속해 있었다. 말하자면 상인계급이다. 그러나 간디의 조부도, 부친도, 숙부도 포르반다르 번왕국의 수상을 지냈다. 조부는 몹시 절조가 굳은 사람이어서, 그가 음모에 휘말려 포르반다르의 수상 자리에서 쫓겨나 주나가르 번왕국에 망명했을 때, 그는 그곳의 번왕에게 왼손으로 인사를 했다. 그 무례함을 따졌을 대, 그는 “오른손은 이미 포르반다르에 바치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하낟. 부친은 정력적이며 호탕한 기질의 사람이어서, 금전에는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아 거의 모든 재산을 자선사업에 바치고, 가족에게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다. 양친이 모두 힌두교의 일파인 비슈나파에 귀의하고 있었지만, 특히 어머니는 차투르마스(chaturmas : 우기 넉 달 동안 단식 혹은 반 단식의 맹세를 하는 것)를 빠진 일도 없고, 언제나 가장 어려운 맹세를 해놓고는 틀림없이 그것을 지켰다.

어린시절 간디는 몹시 수줍어하고, 외모나 재능에서 다른 소년들과 구분 지을 만한 이렇다할 특질도 나타낸바 없었다. 그렇지만 양친에 대한 효심과 의무에 대한 헌신, 성실하고 정직한 마음씨와 타인의 결점을 꼬집기를 싫어하는 성품은 젊은 학생시절에도 뚜렷했다. 그는 몹시 수줍음을 타 학우들과 어울리질 않고, 누가 자신을 놀려 대지나 않을까 겁이 나서 수업만 마치면 곧장 집으로 달려오곤 했다. 그는 7세 때 부친이 라지코트 번왕국의 법관이 되었으므로 그곳에 가서 곧 소학교에 들어가 12세 때에는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17세 때에는 바브나가르에 있는 사말다스 대학에 입학했다. 한편 간은 나이의 카스투르바이와 7세 대 약혼하고, 고등학교 시절인 13세 때에 결혼했다. 어린시절의 이야기지만, 눈이 먼 양친을 인도하며 순례한다는 내용의 『슈라바나 피트리박티 나타카(Shravana Pitribhakti Nataka : 슈라바나의 효성에 대한 희곡)』을 읽고, 또 그 연극을 보고는 크게 감명을 받아 자기도 그러한 효자가 되려고 마음먹는다.

중학교 시절, 간디는 열등생으로 취급받지 않고 언제나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그는 체육을 정말 싫어했는데 그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수줍음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운동은 교육에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유를 더하자면 체육을 싫어한 이유는 아버지의 간호를 잘해 드리자는 열의 때문이었는데 학교가 끝나기만 하면 집으로 달음질쳐 와서 아버지를 간호했다. 체육이 필수 과목이 되자 간호 일에 지장이 생겼는데 어느 날은 체육이 오후에 들어있어서 오전 수업을 마치고 아버지 간호를 하고 다시 학교로 가야했다. 간디는 시계가 없었는데 흐린 날씨 때문에 수업시간에 늦게 되고 선생님께서 결석한 이유를 묻자 사실대로 얘기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고 벌금을 물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사실을 말씀드려 벌금을 물지는 않아도 되었다. 간디는 진실하려는 사람은 또한 조심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이 사건은 학교 시절에 부주의를 저질렀던 처음인 동시에 마지막 사건이었다.

그는 또한 영국에 가기 전까지는 글씨를 잘 쓰는 것이 교육에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후에 남아프리카에서 이를 뉘우치고 나쁜 글씨는 불완전한 교육의 표시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등학교 시절, 육식은 종교상으로 엄금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입맛에도 맞지 않았는데도, 육식을 하면 마음이 대담해지고 몸이 강해져 능히 영국인을 몰아내고 인도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어린 마음에서 사회적 금기를 깨뜨리는 데서 오는 양심의 가책으로 심히 고민하면서도, 애국자의 의무라고 생각하여 일시나마 남몰래 한 친구와 더불어 육식을 했다. 어머니와 형과 아내는 나쁜 친구를 사귄다고 경고했지만 그의 단점을 시정해주기 위하여 개혁자의 정신으로 그 우정을 오랫동안 지속한다. 그 후 그는 자신이 잘못 판단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개혁자는 그가 개혁시키려는 그 사람과 친숙해질 수가 없다. 참된 우의란 혼과 하나 됨인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것이다. 오직 같은 성격사이에서만 우정은 온전히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있고 또 오래갈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친구는 서로 영향을 주는 것이므로, 친구 사이에는 개혁의 여지는 거의 없으며 그는 모든 배타적인 친밀은 피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또한 학창시절에 선생이나 학우에게 거짓말을 한 일이 없다고 말하고 있거니와, 어느 시험대는 감독 선생이 옆에 학생의 답안을 보고 베끼라고 넌지시 종용했으나, 커닝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커닝을 종용하던 그 선생의 여러 단점이 눈에 띄었지만, 그 선생에 대한 존경심을 그대로 가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형한테서 꾼 돈을 갚을 길이 없어 몰래 형의 금팔찌를 조금 깎아 팔아 빚을 갚고는 고민 끝에 부친에게 이를 고백하고 병석의 노부가 분노와 비탄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지켜보는 엄한 시련을 겪고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1888년 9월 4일, 만 18세의 간디는 처자를 고국에 두고 뭄바이를 떠나 영국에 유학했다. 그때만 해도 인도에서 영국에 유학하는 데는 공사 간에 까다로운 일이 많아 앞서도 말했지만, 모친에게는 육식과 주색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하고, 자기 카스트로부터는 추방을 당하고 나서야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런던에 도착한 간디는 얼마 동안 마음이 들떠, 영국식 신사가 되려고, 값진 양복을 마구 맞추어 입고, 댄스와 웅변과 바이올린을 배운다고 야단하면서 시간과 돈을 낭비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마음이 가라앉아 간소한 생활을 하면서 면학에 힘썼다. 그는 변호사의 자격을 얻으려고 런던의 이너 템플 법학원에 다녔지만, 3년간에 걸친 이 영국 유학은 간디로 하여금 마음의 창문을 열게 하여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웠다. 실로 후년의 간디를 형성하는 기초적인 부분이 여기서 얻어졌는데, 사실 그는 영국에서 인도적인 요소, 유럽적인 요소, 인류적인 요소를 스스로 몸에 지니게 되었다.
우선 그는 새로운 종교적인 접촉을 통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런던에서 『바가바드 기타』를 읽었는데 이는 그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그는 기독교에 대해서는 별로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원래 그는 라지코트에서의 학생시절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힌두교와 그 신들에 마구 욕설을 퍼붓곤 했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런던에서 만남 한 선량한 기독교 신자의 권유에 못 이겨 성서를 읽어보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또 신약에 나오는 ‘산상수룬’특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라“는 구절은 한번에 자기 마음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한편 간디는 모친과의 서약을 지키는 이외에 ‘경제와 위생’의 관점에서 처음에는 채식주의에 들어갔으나, H. S. 솔트의 『채식주의의 변』을 읽고 나서부터는 자진해서 채식주의자로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보급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게 되었다.

간디는 영국 유학시절에도 수줍어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여, 남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할 정도여서 앞으로 변호사가 될 일이 큰 걱정이었다. 그래서 인도를 떠날 때 소개장을 받아간 다다바이 나오로지를 방문하여 조언을 구하라는 우인의 권고를 받은 일이 있었다. 간디는 자주 모인 같은 곳에는 참석했으나 끝내 개인적으로 상담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국인 프레더릭 핀카트에게는 찾아가 상의했다. “보통 정도의 정직과 근면만 있으면 살아나가는 데 충분하다”라는 핀카트의 말을 듣고 안심은 했지만, “군은 변호사에게는 필요불가결한 세상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인도의 역사조차 읽고 있지 않다. 변호사는 인간성을 알아야 한다.” 는 충고를 받고 여러 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는 후에 변호사의 자격을 얻고 1891년 6월 12일, 인도를 향해 영국을 떠났다.

(2) 간디 2부

1891년 7월 인도에 돌아온 간디는 라지코트에서 뭄바이로 나와 변호사 개업을 했으나 타고난 수줍음과 꼼꼼한 성격 때문에 변호사업이 시원치 못했다. 그러나 귀국하던 길에 뭄바이에서 알게 된 젊은 보석상이자 시인이며 종교가인 레이찬드바이와는 교우를 지속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간디는 “현대 인문 중에서 세 사람이 나의 생애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라고 말했다-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 레이찬드바이, 『신의 나라는 그대의 마음 안에 있다.』를 통해서 톨스토이, 『이 마지막 자에게도』의 러스킨)
뭄바이에서 경비만 들 뿐 변호사의 일을 제대로 얻을 수가 없었으므로 라지코트로 다시 돌아가 형의 도움을 얻어 일종의 법률대서 같은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일은 수입이 괜찮은 편이였다. 그러던 중 처음으로 그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 벌어졌다. 그의 형은, 포르반다르의 전 번왕이 태자로 있을 때 그의 비서인 동시에 고문이었다. 그 당시에 그릇된 진언을 했다는 혐의로 새삼스레 고소당하여 그 사건의 처리가 형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그곳의 영국인 주재관에게로 넘어가버렸다. 간디는 형의 간청으로 마음은 내키지 않았으나, 자기가 런던에서 지면이 있는 그 주재관에게 부탁하러 찾아갔다. 그러나 주재관은 간디의 청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하인을 시켜 간디를 사무실에서 내쫓고 말았다. 때마침 인도 유수의 변호사인 페로제샤 메타가 우연히 라지코트에 왔다가 영국인을 고소해봤자 자기 신세만 망칠 뿐이니 무모한 짓을 하지 말고 세상을 좀더 알아야 한다고 충고를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한 충격은 간디의 인생행로를 전적으로 바꾸게 했다. 라지코트에서 개업을 계속한다면, 자연 간디의 사건은 대부분 그 주재관의 법정에서 처리해야 하는데, 자연 간디의 사건은 대부분 그 주재관의 법정에서 처리해야 하는데, 간디는 그와 화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더구나 일단 고소한다고 해놓고 가만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중에 여러 소국들로 이루어져 있는 카티아와르에서는 소소한 음모와 책략이 부단히 행해지고 있음을 알게 되자 그 분위기가 싫어져서 간디는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떠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형의 지인이며 남아프리카에서 크게 사업을 벌이고 있던 포르반다르 출신의 이슬람교도 상사로부터 고문변호사로 와달라는 의뢰가 있었다. 간디는 처자를 두고 혼자서 남아프리카에 가기로 결정했다.

1893년 5월 간디는 나탈의 더반 항에 상륙했다. 이리해서 그의 생애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킨 남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남아프리카 주로 나탈에 약 7만 명의 인도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대다수는 연기계약의 노동자 및 계약 연기를 끝낸 자유노동자이고, 나머지는 이슬람교도 상인과 힌두교도, 파르시 교도의 서기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다수의 외국인의 유입은 백인 주민 사이에 외인배척 문제를 야기했다. 정부는 아시아인의 이주를 경원하고, 이미 그곳에 정주하고 있던 아시아인도 갖은 수단을 다하여 추방하려 하고 있었는데, 조직적인 박해가 인도인의 생활을 견딜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고 있었다.
간디는 인도인의 참상을 목격해야 했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직접 비통한 체험을 겪어야만 했다. 위촉받은 소송사건 때문에 더반에서 프리토리아로 가는 도중, 그는 다만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말할 수 없는 굴욕을 당해야만 했다. 어떤 정거장에서 그는, 유색인은 1등 차실에 탈 수없다고 하여 백인 차장한테 차 밖으로 내쫓겨났던 것이다. 이 경험은 간디에게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의무를 생각하게 된다.

남아프리카 시절 간디는 종교적 진리를 계속 추구했다. 특히 프리토리아에 머물 당시 여러 기독교인들과의 밀접한 접촉으로 크게 자극받아 종교 서적을 읽는데  몰두했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기독교의 신앙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아 끝내 기독교 신자로는 될 수 없었다. 동시에 그는 힌두교도 결코 완전하거나 세계 최고의 종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불가촉천민의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슬람교도 친구들의 권유로 코란을 읽고 감명 받아 다른 이슬람교에 관한 서적도 구해 읽었다. 그는 종교상의 고민을 해결할 길이 없어서 레이찬드바이에게 서신을 보냈더니, 좀더 참을성 있게 힌두교를 깊이 연구하라는 회답을 받는다. 이 무렵에 톨스토이의『신의 나라는 그대의 마음 안에 있다.』는 책을 읽고 평생 잊지 못할 감명을 받는다.

간디는 이처럼 종교적 탐구에 열중하는 한편, 프리토리아에 거주하고 있던 인도인들과 광범위하게 접촉한다. 인도인 집회를 열고, 상인(프리토리아에 거주하던 인도인 대부분이 상인)도 상행위에서 정직해야 한다는 점, 인도인은 주위의 영국인들에 비해 불결하고 비위생적이니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모든 인도인은 그 종교나 출신 지방의 구별을 넘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자진해서 영어도 가르치고 고정적인 집회를 통해 상호간의 자유로운 토론을 하여 그들의 힘든 점을 당국에 호소하여 그 시정을 꾀하였다. 이런 집회를 통해 그곳에 있는 인도인들을 모두 알게 되었고, 그 결과 오렌지 자유구과 트란스발에 거주하는 인도인의 실정을 잘 파악하게 되었다.
오렌지 자유국에서는 그 이름과는 달리, 인도인은 1888년의 특별법에 의해서 일체의 권리가 박탈당한 상태였다. 인도인 상인들은 명목상의 보상만으로 국외로 추방당했고, 남아있는 이들은 대개 하인이었다. 트란스발에서는 인도인에 대한 극히 가혹한 번이 1885년에 공포되었는데, 그 다음해인 1886년에 개정되었다고는 하지만, 모든 인도인은 입국료로 3파운드의 인두세를 지불해야 하는 반면에 선거권을 갖지 못한데다가 기본권마저 무시되어 밤 아홉시 이후에는 외출할 자유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봉사하려는 간디의 성격은 결국 계약기한이 지난 후에도 계속 남아서 그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싸우게 한다. 1894년에 더반으로 돌아와 막 귀국하려던 차에 때마침 ‘이도인 선거권 문제’가 야기된다. 이 문제는 인도인에게서 나탈 입법의원 선거권을 박탈하려는 법안이 나탈 의회에 상정됨으로써 일어났다. 간디는 인도인 유지들에게 그 대책을 부탁받고 1개월간 출발을 연기하리로 한다. 1개월간의 체재 연기가 도중 두 차례의 짤막한 귀국을 제외하고는 장장 20년간의 남아프리카 체재로 이어지고 말았다.

인도인 선거권 옹호를 위해 간디는 법적 경로를 밟으면서 투쟁을 시작한다. 즉, 나탈 수상에게 항의하는 전보를 치고, 각계각층의 지원자를 모집하여 서명운동을 벌였다. 그 사본을 여러 신문사에 보냈더니,『타임스 오브 인디아』지는 사설에서 크게 격려하고 ,『런던타임스』지도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이렇게 되자 간디는 떠날 수가 없었다. 그는 나탈 인도인회의를 조직하였다. 또한 정기적인 회합으로 회원을 훈련하고 그 산하에 ‘식민지 출생의 인도인 교육협회’를 조직하여 그들의 동포애를 함양하는 동시에 활발한 선전활동을 편다. 그 결과 남아프리카의 많은 인도인들은 벗을 얻게 된다.
이 회의는 비교적 많은 회비 때문에 계약노동자를 비롯한 가난한 인도인은 포섭할 수가 없어서 간디는 항상 괴로워했다. 하루는 노예에 못잖은 악조건 밑에 있던 한 계약노동자가 백인 주인한테 구타당하여 피투성이가 되어서 뛰어든 것을 간디가 법적 절차를 통해 새로운 주인과 계약갱신을 해주었다. 이 일로 그는 계약노동자들과 밀접히 접촉하게 되었는데, 그러던 차에 ‘3파운드 인두세’ 문제가 일어났다. 이는 사실상 인도인의 나탈 이민을 금하고, 이미 입국해 있던 인도인도 추방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악법이었으므로, 1895년에는 반세투쟁도 시작하게 되었다. 다행히 인도인 선거권투쟁은 1897년에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 반세투쟁은 1914년의 승리까지 장장 20년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3) 간디 3부, 4부

간디가 자기실현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인도인 속에 들어가 인도인에 대한 봉사에 몰두하는 것으로 기독교인들과의 교우로 촉발된 진리탐구욕도 대중과 밀접히 접촉하는 가운데서 심화되어 갔다. 1903년 접신론을 믿는 우인들의 요청으로 힌두교 서적들을 그들과 함께 읽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간디는 『바가바드 기타』 를 철저하게 연구하였다. 그 결과 간디는 『기타』를 철두철미하게 믿고, 그것을 실제 생활의 지침으로 삼았다. 그는 책에서 강조하는 ‘비소유’의 원리를 즉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후에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밑에서는 사유재산을 허용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즉 사람들은 사유재산을 공적 신탁으로 보고, 자기를 위해서는 꼭 써야 할 때에만 쓰고, 나머지는 남을 위해 써야 한다는 것이 그 조건이었다. 그는 점차 모든 사치와 안락을 버리고 최소한의 필수품에 국한하는 간소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천대받는 인도인인 만큼, 위신을 세우고자 주택과 가재도구에도 무척 신경 쓰던 그였다. 자기 자신의 유럽화 뿐만 아니라 그 처자(1896년에 일시 귀국하여 데려왔다)에게도 유럽식의 복장을 하게하며, 구두와 양말을 억지로 신게 하여, 이에 익숙지 못한 처자한테서 불평이 나오면 화를 벌컥 내던 그가 간소한 생활을 하게 된 직접적 이유의 하나는 인도인 노동자에 대한 그의 뜨거운 동정심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공공사업에 많은 금액의 기부로 인하여 형편이 옹색해졌기 때문이다.

1904년 러스킨의 『이 마지막 자에게도』를 읽고는 몹시 감격하여 한층 더 간소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책은 간디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보람 있는 생활이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임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그는 1904년 더반 근처에서 피닉스 농원이라는 일종의 수도장(ashram, 아슈람)을 만들고, 사회봉사에 헌신하던 그의 동지들과 더불어 그곳에 가서 살았다. 같은 해 창간된 기관지 『인디언 어피니언』도 이 농원으로 옮겼다. 모든 입거 자는 농장과 신문사에서 자기 생계를 위해 직접 일하고, 인종이나 민족의 구별 없이 매달 똑같은 3파운드의 고정임금으로 극히 간소한 생활을 하면서 정신훈련을 쌓았다.

이런 간소한 생활을 하게 된 간디는 점차 동포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철저히 하려면, 단지 세속적인 소유욕을 포기할 뿐 아니라 성욕도 억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906년 줄루 족 반란 때에 6주간의 종군생활을 할 무렵, 곤란한 행군 동중에 성심성의껏 사회봉사를 하려면 가정의 근심, 걱정에서 해방되어야 하나든 생각이 들었고, 그 후 심사숙고 한 끝에 브라마차리아를 실행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함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와 상의하여 동의를 얻자 정식으로 서약하고 브라마차리아에 들어갔는데. 이는 그가 만 36세 때의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를 “56살이 넘은 때에도 매일 칼날 위를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정욕을 억제하는 데는 신선한 과실과 견과가 제일 적당한 음식임을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간디는 보어전쟁(1899~1902) 당시에는 “인도의 완전한 해방은 영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라고 믿고 자진해서 인도인 야전 위생 대를 인솔하여 종군했고, 줄루족 반란(1906년 전반)시에는 “ 영국은 세계의 복지를 위해 존재 한다”라고 믿었으므로 자진해서 나탈 정부를 도왔다. 사적으로는 보어인과 줄루족을 동정하면서도 영국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영국을 위해 종군했지만 1906년 8월 22일 트란스발의 정부 관보는, 8세 이상의 모든 인도인은 정식등록과 함께 지문을 찍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벌금 투옥 또는 형벌을 가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게재했다. 이는 말하자면 트란스발에서는 인도인 전체를 일종의 범인으로 취급하려는 것이었다. 이 법안은 단지 트란스발에 있는 인도인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인도 자체에 대한 모욕이라고 간디는 느꼈다. 간디는 그 대책을 협의하기 위해 요하네스버그의 제국극장에 모인 3천 명의 인도인에게 비록 그 법안이 벌률로 되는 경우에도 그 법률을 무시하기로 할 것과, 그 법률을 무시한 데 대한 벌은 달게 받아 감옥에 가고, 필요하다면 죽음을 택할 것을 맹세했다. 이것은 처음 ‘소극적 저항(Passive Resistance)'라고 불렸다. 그러나 오해를 없애기 위해 그 명칭을 공모했고 ‘사다그라하(sadagraha, 진리파악)’ 가 당선되었는데 그는 그 뜻을 보다 명백히 하기 위하여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라고 고쳐서 사용했다. 그것은 폭력과 증오를 악으로 여겨 배제하며, 악에 대해서도 악으로써가 아니라 선으로써 대한다는 것이 그 신조였다.

아시아인 등록법은  1907년 8월 1일부터 실시하기로 되었고 그 동안 인도인의 반대투쟁이 적극적으로 전개되고, 또한 간디는 영국 정부와 직접교섭을 한 결과 영국 정부는 이 법안을 승인하지 않았으나, 1907년을 기해 트란스발에는 자치정부가 들어서게 되고 결국 부녀자만 그 적요에서 제외하기로 하고는 법안이 통과되고 말았다. 정부의 탄압이 심해져 검거선풍이 일어났고, 후에 옥중에서 교섭이 진행되어 만일 인도인들이 자진해서 등록한다면 아시아인 등록법은 폐기한다는 스뫼츠 장군이 제안을 수락하여 간디가 제일 먼저 등록했지만 스뫼츠 장군은 약속을 어겼다. 이에 항의하는 사티아그라아 투쟁은 계속되어 2천 명 이상의 인도인들이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하미다 모스크에 모여 그 등록증을 한데 모아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많은 인도인들이 감옥에 들어갔단 석방되기를 반복했다.

16년간에 걸친 남아프리카 체재에서 언은 경험으로 간디는 다음과 같은 결론, 즉 유럽인에 의한 인도와 남아프리카 지배는 인도인을 사실상 노예로 만들고 있는데, 이에 물질적 무기를 가지고 싸움으로써 벗어나려고 한다면, 그들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비록 성공하더라도 그렇게 얻어진 자유는 그릇된 자유로 되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힌두 스와라지』(Hind Swaraj, 인도의 자치, 1909)라는 소책자에 의하면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상류계급일지라도 농민과 노동자와 같이 간소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얘기한다. 이런 견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간디는 1910년 요하네스버그 근처에 톨스토이 농원이라는 사티아그라하 운동자들의 수도장을 설립한다. 명칭을 톨스토이 농원으로 붙인 것은, 일찍이 톨스토이의 책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디와 농원의 가족들(인도의 각 지방에서 온 카스트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 이들)은 그들의 생활필수품을 거의 모두 스스로 생산하기 위해 농업과 그 밖의 산업들에 종사하는 한편, 자녀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가르쳤다.

간디가 톨스토이 농원에서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위한 훈련에 주력하고 있는 동안 실제적인 저항운동은 소수의 인도인이 감옥에 들락날락하는 일상 관례로 되고 말아, 사태는 비교적 정온하였다. 더구나 1912년 10월에는 남아프리카의 실정을 시찰하기 위하여 인도 민족운동의 온건파 지도자인 고칼레가 내방하였는데, 스뫼츠 장군은 그를 크게 환대하며 그에게 이민금지 해제와 3파운드 인두세 폐지를 약속하였다. 그러다 이 약속도 지켜지지 않자 1913년 또다시 남아프리카 전역에서 격심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간디는 2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과 트란스발로 행진을 단행하기로 하고, 만일 체포되지 않는다면, 톨스토이 농원으로 가기로 했다. 간디는 체포되었지만 노동자들은 행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 기차에 실려 탄광으로 송환되어 철조망을 둘러친 속에 강제로 수용되고, 노동자들이 일하기를 계속 거부하자 많은 사상자를 내기에 이르렀다. 이 소식이 인도에 전해지자 인도에서는 항의의 물결이 세차게 일어났다. 인도와 런던, 런던과 남아프리카 사이에 교섭이 오고간 끝에 1913년 12월 정부 당국과의 교섭을 위해 간디는 석방되었고 결국 1914년 6월 30일 합의에 도달했다. 이로써 3파운드 인두세는 폐지되고, 힌두교 이슬람교 파르시교의 방식에 의한 결혼도 합법성이 인정되었다. 그리고 1914년 7월 14일, 간디는 오랜 인고와 자기정화의 터전이었던 남아프리카를 떠나 영국을 경유하여 조국으로 돌아온다.

(4) 간디 5부

인도로 돌아온 간디는 자신의 귀국을 환영해주기 위해 모인 고향인 구자르트 사람들과의 연회에서 대부분의 연설이 영어로 행해지는 것을 듣고 구자르트 말로 답사를 하면서, 자신은 구자르트 말과 힌두 말을 사랑한다고 설명한 다음 영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겸손한 항의를 했다. 그는 봄베이에 잠깐 머문 다음 푸나에서 고칼레를 만났다. 고칼레는 만약 간디가 정부에 대한 어떤 행동을 취할 때는 자신을 찾아와 줄 것을 당부하며 그의 환영 파티를 열었다. 그의 건강은 매우 좋지 않아서 몇 발자국 떼기조차 어려웠지만 진심으로 간디를 환영했다. 후에 간디는 그가 샨티니케탄에 머물고 있을 때 푸나로부터 고칼레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를 받게 된다.

간디는 1915년 5월 사티아그라하 아슈람을 아메다바드에 창립하게 된다. 자신이 구자라트 사람이니 구자라트 말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대해 최대의 봉사를 할 수 있고, 아메다바드는 옛날 베틀 길쌈의 중심지였으므로 농가의 수공 방적 공업을 부활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지역일 것 같았고, 게다가 그곳은 구자라트의 수도이므로 부유층으로부터 재정적 원조를 얻는 데 다른 어디보다도 더 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슈람의 이름을 자신과 동지들의 목적과 봉사의 방법을 다 나타내는 말로 ‘사티아그라하 아슈람’이라고 짖는다. 그들의 토론중에는 물론 불가촉 제도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아슈람이 시작된 지 불과 몇 달이 되지 않아서 한 불가촉민 가족이 아슈람에 들어오기를 희망한다. 간디는 몹시 동요하였으나 그들을 진정한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허나 문제는 거기서 시작이었다. 그들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아슈람을 돕던 이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나고 그 맨 처음의 문제는 우물의 사용이었다. 또한 재정 원조가 중단되는 것과 함께 사회적으로 배척을 하려는 모의가 있다는 풍설이 돌기도 했다. 간디는 아무리 배척당하고 편의 시설의 사용을 금지 당하더라도 아메다바드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고 차라리 불가촉민 구역으로 가서 거기 머물면서 육체노동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이름모를 셰드의 도움으로 많은 양의 원조를 받고 이 위기를 넘기게 된다.

잠깐 계약 노동자들에 대해서 살펴보자면 1916년 3월에 판디트 마단 모한 말라비야지(Pandit Madan Mohan Malaviyaji)는 대영제국 하원에서 계약노동자의 연기 계약 법령의 폐지를 위한 결의안을 제출했고 간디는 단지 모호한 보장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즉시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17년 2월에 판디트 말라비야지는 그 법령의 즉시 폐지를 요청했고 간디는 시위운동을 위해서 봄베이서부터 순회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는 카라치, 캘커타, 그 외 여러 곳을 방문했었다. 그리고 7월 31일이 되기 전에 정부는 인도에서 나가는 계약 이민은 중지되었다고 발표했다.

참파란(Champaran)은 자나카 왕의 영토다. 거기는 인디고 농원이 많이 있었는데 참파란 주민들은 법령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자기 토지의 20분의 3을 지주를 위해 인디고를 재배하기로 되어 있었다. 라지쿠마르 슈클라(Rajkumar Shukla) 는 그 고통당하는 농민의 한 사람이었는데 수천 농민에게서 이 인디고의 얼룩을 말끔히 씻어버리자는 결의에 불타고 있었다. 그는 참파란 에서 간디의 협동 자가 된 사람이요 비하르의 민중 활동의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간디의 목표는 참파란 농민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농장주들에 대한 그들의 불평을 알아내기 위해 수 천 명의 라이어트(ryot : 소작농민)를 만나야 했다. 하지만 지방장관은 그를 위협하며 당장 떠나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즉시 떠나라는  명령에 대한 불복종을 이유로 재판을 받으라는 소환장을 받게 된다. 그날 밤 간디는 밤을 새우며 편지를 썼고 이 사실이 주위에 알려지자 군중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변호인과 치안관, 그 밖의 여러 관리들은 조바심이 났고 결국 치안관은 부총독이 간디의 소송을 취하하라는 명령을 했다는 서면을 보내왔고 도움이 필요하면 무엇이든지 관리들에게 요청해도 된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간디는 농장주 조합에도 찾아가서 소작인들의 불평을 알려주고 그들의 견해를 탐지해 보기도 했고, 동료들과 의논하여 여섯 부락에 초등학교를 열기로 결정한다. 아이들에게 문법이나 읽기, 쓰기, 셈하기를 가르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깨끗이 하는 것과 예법을 가르쳐주기를 강조했고 지원자들을 모아 질병 치료와 위생일 일 돌보았다. 위와 같은 사회봉사 사업이 계속되는 가운데 농민들의 불만을 기록하는 일도 계속되었는데 그 수가 늘어날수록 농장주들의 분노도 더해갔고 그들은 간디의 일을 방해하고자 했다. 하루는 비하르 당국의 부지사 에드워드 게이트 경은 조사위원회를 구성할 터이니 위원회의 위원이 돼달라고 간디에게 청하고 간디의 주도아래 이 위원회는 농민들에게 유리한 사실을 파악하고, 위원회가 불법이라고 인정한 부당 징수금은 농장주들이 변상할 것과, ‘팅카디아’는 법에 의해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권고했다. 간디가 아직 조사위원회의 일을 끝내지 않았을 때, 아메다바드의 노동 상태에 관해 쓴 편지가 한 장 왔다. 임금이 낮아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 운동을 오래전부터 벌여왔는데 간디의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었다. 간디는 직공들에게 파업을 계속하라고 조언했고, 성공적인 파업의 조건을 설명해 주었다.

첫째, 결코 폭력을 사용하지 말 것.
둘째, 파업 방해자들을 괴롭히지 말 것.
셋째, 결코 동정금에 의존하지 말 것.
넷째, 파업이 아무리 오래 계속되더라도 결코 흔들리지 말고, 파업하는 동안 다른 정직한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것.

파업 지도자들과 직공들은 자신들의 요구조건이 다 받아들여지기 전에는 다시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점점 동요하는 사람의 수가 늘었다. 간디는 자신도 모르게 “파업자들이 한테 뭉쳐서 해결이 날 때까지 파업을 계속하든지 , 그렇지 않으며 한 삼도 남김없이 다 공장을 떠나든지 할 때까지 나는 아무 음식도 입에 대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했고, 직공들에게는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고 사방에 선의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해결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단식을 시작한 지 겨우 사흘 만에 파업은 중지되고, 파업을 시작한지 21일 만에 문제의 해결을 보게 되었다.

간디는 일찍이 남아프리카에 있을 때부터 힌두교도와 회교도 사이에는 진정한 우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유럽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을 때 이 둘 사이의 일종의 화해를 위해 킬라파트에 대한 연구를 하고 모병운동을 펼쳤다. 모병운동을 하는 동안 간디의 건강은 아주 형편없었고 스스로 말하기를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고 이야기 한다.
막 몸을 회복하기 시작하는 때에 우연히 신문에서 롤럿 위원회의 보고문을 읽게 된다. 인도 전역에서 롤럿 위원회 보고서를 반대하는 시위운동이 확대되어 강력해지고 있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정부가 점점 더 확고한 태도로 건의안을 실시하려고 하여, 그 롤래트 법안을 발표해 버렸다. 간디는 전국적으로 하르탈을 지킬 것을 호소해야겠다고 생각하고 1919년 4월 6일 전 인도는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도시도 촌락도 완전한 하르탈을 지켰다. 이 일로 간디는 체포, 호송되는 일을 겪었는데 봄베이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시민들이 격분하여 기마 경비대와 맞부딪혀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간디는 문득 시민의 불복종 운동은 시기상조였다는 생각에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완벽하게 모둔 씨들이 이해할 때까지 미루기로 한다.

간디는 『나바지반』과 『영 인디아』 두 잡지를 통해서 사티아그라하에 대한 교육을 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미카엘 오드와이 경과 성난 펀자브 젊은이들은 펀자브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 간디 때문이라고 주장했고 정부는 간디의 펀자브 행을 한동안 막았다. 펀자브 정부는 명목만으로 감옥에 처넣은 수백 명의 펀자브 인들을 계속 감금해 줄 수는 없었다. 이들 대부분이 국민회의가 열리기 전에 석방되었고 그때 국왕의 새로운 개혁안이 발표되어 우여곡절 끝에 타협이 이루어졌다. 간디가 암리차르 국민의회에 참가한 것은 사실에 있어 의회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라고 스스로 이야기한다.
자서전을 장식하는 마지막 간디의 업적으로는 인도의 스와라지, 스와데시 운동으로 카디의 탄생을 들 수 있다. 간디는 오랜 시간을 끝없이 찾아 헤매서 물레를 찾아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기술자에게서 기술을 배우도록 하여 인도의 방직 공장에서 천을 만들어 낸다. 이때부터 그의 모든 옷은 순전히 카디로만 만들어진다. 간디는 자서전을 쓴 이유를 자신의 경험은 스스로에게 진리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을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하나 있으니 하며
방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자료정리:김숙현 best-ssuk@hanmail.net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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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