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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29. 17:00

의무론(키케로)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29. 17:00


1. 저자소개

이 책의 지은이 키케로(Marcus Tullius Ciceto)는 기원전 106년 아르피눔에서 태어났다. 로마의 유명한 철학자, 산문가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실상 그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대표적인 정치가였다. 일찍이 그리스에 유학하여 고전 철학과 역사 및 정치학에  정통하였던그는 법정에서의 웅변으로 정계에 그 이름을 날렸다. 특히 기원전 63년에 카틸리나의 국가 전복 음모 사건을 사전에 발각하여 분쇄함으로써 ‘국부’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기원전 58년 클로디우스의 압력을 받아 잠시 자진 추방의 길에 오르기도 했던 그는 제 1차 삼두 정치시대와 카이사르 집권기에 저술 활동을 했다.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공화국 부활 운동을 하다가 결국 기원전 43년 12월에 제 2차 삼두 정치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세기 이래 그는 공화주의의 상징으로, 전제주의의 카이사르와 대비되는 유명한 정치가로서 부각되고 있다.
그의 저작으로는 『의무론』, 『국가론』,『법률론』, 그리고 각종 연설문과 서간문 등 방대한 문집이 남아 있다.


2. 줄거리 요약

제 1권. 도덕적 선에 대하여

키케로는 파나이티우스가 가장 중요한 ‘의무’의 정의에 대해 논하지 않은 것에 놀라해 하며 그는 이를 정확히 짚고 넘어간다.
키케로는 주로 의무에 관한 문제는 이중적이라 하여 의무를 구분해 놓고 있다. 하나는 선의 한계, 즉 최고선에 관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상 생활 전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교훈들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전수되어 오는 의무들에 관한 교훈은 비록 선의 한계, 즉 최고선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덜 중요하게 나타나는데, 그 까닭은 오히려 공동생활에 관한 교훈들을 성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키케로는 이 책에서 후자에 해당하는 것에 설명하려한다.

그 외에도 의무에 대한 또 다른 구분이 있다. 말하자면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는, 때문에 그 결과를 놓고 따져봐야 하는 그러한 평범한, 보통의 의무와 완전한, 절대적 의무로 구분하기도 한다. 여기서 키케로는 완전한, 절대적 의무란 올바른 의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이유는 그리스인들은 이를 카토르토마 즉 유익하고 가치 있는 행위로 말하고 있고, 이와 반대로 평범한, 보통의 의무를 카테콘, 즉 합당한 것으로 부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파나이티우스는 어떤 행동을 하려고 결정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이 삼중적이라고  보았다. 우선 첫째로, 사람들은 심사 숙고된 행동이 실제로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운지, 아니면 도덕적으로 나쁘고 추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그 다음 둘째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심사 숙고된 행동이 생활의 편리함과 즐거움, 많은 취업의 기회와 풍부한 재산, 부와 권력을 가져다주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조심스럽게 탐색하거나 추구하는데, 그러한 여러 가지를 이용하여 그들 자신과 그들에게 딸린 사람들을 도울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고려는 유익함의 정도에 달려 있다. 셋째로, 의문을 품고 고려해야 할 것은 유익하게 보이는 것이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운 것과 상충되는 것으로 보일 때이다. 이 때 마음은 심사숙고함에 혼란을 일으켜 사고하는 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생기게 된다.

여기서 두 가지 구분이 간과되었는데, 이를 인식한 키케로는 어떤 것이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운가, 나쁘고 추한 것인가가 고려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운 것이 두 가지가 제시되었을 때 어떤 것이 더 선하고 명예로운지, 마찬가지로 두 개의 유익한 것이 제시되었을 때 어느 것이 더 유익한지 고려되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즉, 어떤 행동을 하려고 결정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은 다섯 가지로 구분되어야 하며 이에 먼저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운 것에 대하여는 이중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고, 유익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논의되어야 하며, 그런 후 마지막으로 이들에 대한 비교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인간에게 가장 고유한 것은 진리탐구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인간은 종사하는 일과 그 일에 대한 근심 걱정에서 해방되어 정신적 여유가 생기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듣고 배우기를 갈망하게 되며, 비밀에 싸여 있거나 놀랄 만한 일들에 대해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나 욕망을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진리에 대한 욕망과 이에 소위 제 1인자가 되려는 욕망이 첨가되어 인간 정신의 위대성과 인간과 사물에 대한 경멸감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본능과 이성의 힘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인간만이 질서가 무엇인지, 예의범절과 언행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감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도덕적으로 선한 것, 명예로운 것이 형성되어 나온다.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운 것, 즉 인간이 행해야 할 의무라는 것은 네 개의 부분 중 하나에서 나온다. 그것은 첫째 진리에 대한 통찰과 이해에서 생각되거나 둘째 인간 사회를 유지하며, 각자의 것은 각자에게 나누어주며, 계약된 것에 대한 신의에서 생각되거나, 셋째 고귀하며 굽히지 않은 정신의 위대함과 강직함에서 생각되거나, 마지막으로 넷째 행해지고 말해진 모든 것에 절도와 인내가 내재해 있는 질서와 온건함 속에서 생각되는 것이다. 이 각각을 지(진리), 의(정의), 용(용기), 인(인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네 개 부분은 비록 상호간에 중복되거나 혼합되어 있다 하더라도, 어떤 유의 의무들은 단일 부분에서 나오게 된다.

의무의 제 1원천인 지(知), 즉 진리는 인간의 본질과 가장 관계가 깊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인식과 학문의 욕구에로 유도되어 빠져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서는 뛰어난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반면, 빗나가거나 잘못하는 것, 알지 못하거나 속임을 당하는 것을 악하고 추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의 본성과 도덕적으로 선한 것에 있어서는 두 가지 오류를 피해야 한다. 하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아는 체하여 맹목적인 동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애매모호하고 어려우며, 필요하지 않은 것들에 너무 많은 정력과 노력을 쏟는 것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덕의 찬양은 정치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나 정치 활동이란 자주 중단 될 수도 있는 것이며 진리 탐구에 관한 연구에 복귀할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 게다가 절대로 휴식을 취하지 않는 정치 활동은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이 없을 때조차도 계속적인 지식 추구에 전념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생각과 정신 활동은 도덕적으로 선한 것과 명예로운 것, 착하고 행복한 생활로 안내하는 것들을 계획하거나 학문과 지식을 추구하는 일에 전념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한편 나머지 세 가지 구분에서는 인간 사회를 그 자체 속에서 유지하게 하고 또 생활 공동체 같은 것을 유지하게 하는 그러한 생각이 매우 광범위하게 전개되는데, 이것은 정의와 자선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정의는 덕의 광채가 최대로 빛나며, 사람들은 정의에 기초하여 선한 사람들이라고 일컬어진다. 정의의 제 1차 기능은 정의롭지 못한 것에 의해 해를 입지 않는 한 남을 해치지 않으며, 공공물은 공공을 위해 사용하고, 개인의 사유물은 그 개인 자신을 위해 사용하게 하는데 있다.

정의의 기초는 신의이며, 이는 말한 것과 계약한 것의 변치 않음과 진실됨을 뜻한다. 불의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불의를 자행하는 자들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에 의해 불의가 자행되어 자신에게 해가 돌아왔을 때 물리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리치지 못하는 자들의 것이다.
남을 해칠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저질러진 불의들은 남을 해하고자 하는 자가 남을 해하지 않으면 자신이 남에게서 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에서 흔히 저질러지나 대부분은 얻고자 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불의를 자행하게 된다. 이 악함 속에는 탐욕의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富)는, 일부는 생활필수품을 공급하기 위해 일부는 인생의 쾌락을 향유하기 위해서도 추구된다. 그러나 야심만만한 자들에게는 돈에 대한 욕심은 권력과, 세력 그리고 호의를 베풀기 위한 수단을 장악하기 위한 것과 결부된다.
그러나 의무 수행의 옹호와 의무 유기를 간과하는 흔한 이유들이 있다.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거나, 수고를 하지 않으려고, 또는 경비를 부담하지 않기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람들은 무관심, 태만, 무능 또는 자기 일에 대한 몰두, 또는 언제나 바쁜 일 때문에 의당 돌봐 주어야 할 자들을 방치한 상태로 놔두기까지 한다. 또 남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을 애써 보이면서 자기 일만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불의는 흔히 어떤 속임수와 지나친 교활함, 더욱이 악랄한 법의 해석에 의해서도 발생한다. 이러한 해석으로 인해 국가간의 정치에서는 많은 잘못이 저질러진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 의해 자신이 불의의 손해를 보았다 하더라도 심지어 그런 자들에 대해서까지도 지켜서 해야 할 의무들이 있다. 그 까닭은 복수하는 것과 처벌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히 한계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편 불의가 행해지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폭력과 기만이다. 기만은 마치 여우의 교활함처럼 보이고, 폭력은 사자의 사나움처럼 보인다. 폭력과 기만은 인간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지만, 기만이 더 큰 혐오를 받아 마땅하다.

다음은 자선을 행하거나 호의를 베푸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인간 본성에 가장 적합한 것이다. 자선을 행하거나 호의를 베푸는 데에는 주의할 점들이 많다.
첫째는 베품으로써 친절하다고 여겨지게 하려는 베품의 대상자들 자신과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 자체가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의 기초로서 그 자체가 정의로운 것이 아니면 절대로 관대한 것이 아닌 것이다. 둘째는 재산능력보다 더 크게 친절을 베풀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정이 허락하는 이상으로 관대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우선 가족과 가까운 친척들에게 해를 끼친다는 점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친절을 베품에 있어서 그 대상의 가치에 대한 선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누군가가 우리에게 행한 호의에 대해 우리가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우리를 가장 많이 생각해 준 사람에게 최대의 것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 상대방의 호의에 대해 변하지 않고 일관성 있는 원칙으로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때 우리는 상대방이 어떤 마음가짐과 어떤 생각에서 호의를 베풀었는지 고려해야 한다. 그 까닭은,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모든 것이 병적인 상태에서, 일시적인 마음의 충격을 받아 돌발적인 상태에서 무모하게 선심을 많이 쓰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대로 된 이성과 정신에 입각하여 모든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모든 공동체 사회의 모든 결합들 중 국가, 즉 공화국의 결합이 가장 중요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의무를 이해함에 있어서 최우선이 국가, 부모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들에게 최대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이 처자나 가솔들이 될 것이며 그 다음이 친척이나 친구들이 될 것이다.

키케로는 용기에 대해서 스토아학파가 올바르게 정의했다고 본다. 그들은 용기를 형평을 위해 투쟁하는 덕이라고 말하고 있다. 용감하고 위대한 정신을 추구하다보면 너무 쉽게 제 1인자가 되려는 집념과 과도한 욕심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자신의 고유한 형평을 유지하기가 힘든 것이다. 따라서 불의를 행하는 자가 아니라 불의를 물리치는 자가 강하고 위대한 사람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대개 강하고 고매한 불굴의 정신은 크게 두 가지 특징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주위의 사물들에 대한 무관심이나 경멸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은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우며 자연과 인간 본성에 합치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찬양, 소망, 추구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며, 그 어떤 누구에게도 정신의 불안정이나 운명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위와 같은 정신으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생명은 물론 특히 삶에 가치가 있는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위해, 진실로 최대 최고로 유익하기는 하지만 많은 고난과 위험이 따르는 일을 아주 열심히 하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위대한 인물을 배출하는 데 있어서의 합리적 이유는 전자에 있다. 그 까닭은 정신을 탁월하게 하고 인간사를 경멸하게 하는 것은 전자에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고매하고 꿋꿋한 불굴의 정신 속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도덕적 선은, 육체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신력으로 형성된다. 참으로 강한 불굴의 정신이란 역경에 처했을 때에 당황하거나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중심을 잃어 주위 사람들에게서 내침을 받지 않으며, 세상 사람들이 얘기하듯 침착하게 자기 중심을 잡고, 계획과 이성에서 이탈하지 않는 데에서 나타난다. 불굴의 용감한 정신은 생각을 깊이 하고 미래를 예견하여, 그 결과는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아 이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갖출 수 있는 총명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은 위대하고 특출한 정신 활동이며, 현명과 지혜에 내재하는 신의 깊은 정신 활동이기도 하다.

장차 공화국의 정무를 맡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필히 플라톤의 두 가지 교훈을 명심해야 된다. 첫째 항상 시민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사리 사욕을 떠나 시민의 복리를 증진시킨다는 것이고, 둘째는 공화국 전 시민단을 일일이 보살펴야 하는 것인데, 이 때 어느 일부 계층의 사람들만을 돌보다가 다른 계층의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 경영은 후견인의 일과 같아서 그것을 위탁한 사람들, 말하자면 전체 시민의 이익을 위해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화국을 통치함에 있어서 모든 처벌과 징계에는 분노가 개입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은 누군가에게 벌을 가하거나 말로 질책하는 자의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서가 아닌, 말하자면 공화국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데 목적을 두고 가해지도록 해야 한다. 또한 내리는 벌이 지은 죄보다 더 크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며, 특히 최대의 금기 사항은 처벌을 할 때 화내는 일이다. 왜냐하면 벌을 주려고 하는 사람이 분노하게 되면 결코 과대와  과소의 중간에 있는 중용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중용은 소요학파가 좋다고 인정하는 것인데, 이는 매사에 화를 내지 않도록 해야 하며, 바람직한 것은 공무를 수행하면서 공화국을 통치하는 사람들이, 법처럼 처벌할 때 분노에 의해서가 아니라 형평의 원리에 입각해서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도덕적 선의 나머지 한 부분은 수치심과 일종의 생활의 미적 감각, 절제와 중용, 모든 정신 혼란의 진정과 사물들의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에 더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 그리스어로는, 소위 프레폰, 라틴어로는 데코룸이라는 것이다. 이것의 본질은 도덕적 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데코룸한 것은 도덕적으로 선하며, 도덕적으로 선한 것은 데코룸하기 때문이다. 키케로가 말하는 데코룸하다는 것은 실로 모든 도덕적으로 선한 것, 즉 호네스툼과 관계가 있고, 또 그 관계가 매우 밀접하게 맺어져 있어 어떤 심오한 이성에 의해 식별되는 것이 아니라 자명한 것으로 나타난다. 데코룸한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명예로운 도덕적 선이 먼저 있고 나서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며 데코룸한 것은 모든 덕에서 인식되는 것이고, 사실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사유 능력으로 덕에서 더 잘 분리시킬 수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다. 하나는 모든 호네스툼에 내재해 있는 어떤 일반적인 데코룸을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일반적인 데코룸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호네스툼의 각개의 부분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전자는 ‘데코룸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나머지 짐승의 본성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인간의 우수성과 합치하는 바로 그것이다.’라고 정의하고 후자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인 데코룸이란 자연, 즉 인간 본성과 합일하여 그곳에서 어떤 예의바른 신사의 태도와 함께 중용과 절제가 나타나는 바로 그것이다.’라고 정의한다.

시인들은 매우 다양한 등장 인물들에게서, 심지어 사악한 인간에게서 무엇이 적합하고 데코룸한지를 보여주게 되나 자연은 우리에게 일관된 성격, 중용, 절제, 수치심의 속성들을 부여했고, 또 바로 자연이 같은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행해야 할 지에 대해 무지하지 않도록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그 결과 모든 도덕적 선에 관련되어 있는 저 데코룸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적용되어 나타나는가를 볼 수 있다.
데코룸으로부터 이끌어지는 의무는 자연과의 일치와 자연법의 준수로 이끄는 첫 번째의 길을 취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안내자로 자연을 따른다면 우리는 결코 방황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우리는 본질상 도덕적 선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데코룸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신체의 움직임뿐만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정신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자연에 합일하는지 아닌지를 우리가 입증해야 할 것이다.

사실 정신력과 정신의 본질은 이중적이다. 하나는 그리스어로 호르메라고 하는 것으로 욕망에 놓여져 있는데, 욕망은 사람을 충동시켜 이리 저리로 잡아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며 피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설명하는 이성에 놓여져 있다. 그 결과 이성이 주도하고, 욕망이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욕망을 억제하고 진정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어떤 일이나 단순한 충동에 의해 깊은 생각도 없이 무모하게 아무렇게나 행하지 않도록 자각하고 항상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자연에 의해 두 가지 성격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 중 하나는 공통적인 것으로서, 우리 모두가 이성을 소유하고 있고, 그렇게 때문에 짐승보다는 우월하다는 사실에서 생긴 성격이다. 이와는 반대로 다른 하나는 각 개인들에게 고유한 것으로서 주어진 것이다.
인간 본성과 성격에는 무수히 많은 차이점들이 있고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은 각기 각자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고유한, 우리가 탐구하고 있는 데코룸을 보다 더 쉽게 유지하게 해주는 자신의 특성을 지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신의 고유한 재능과 특성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자신의 장점과 결점들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인물, 때와 장소, 장소에 따라서도 자신의 고유하고 적절한 의무를 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데코룸은 모든 말과 행동, 심지어는 신체의 움직임과 정지 상태에서조차 식별되는 데 이에 따라 자연은 우리에게 경탄할 만한 신체구조를 갖게 해준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을 따르고, 눈과 귀에 거슬리는 것은 모두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야말로 일거수 일투족에까지 소위 저 데코룸한 것을 지키는 것이다.

이상은 도덕적으로 선한 것에 속하는 네 가지 부분에서 의무들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았으나 이런 도덕적으로 선한 것 자체에서도 어떤 것이 더 도덕적으로 선한지에 대해 상충과 비교가 발생할 수 있는데 이 점이 파나이티우스에 의해 간과되었다.
키케로는 지식 획득, 즉 진리 탐구와 연관되는 의무들보다는 공동체 의식, 즉 정의에서 생기는 의무들이 자연상태인 인간 본성에 더 적합한 것으로 보았다. 또 용기도 인간의 결속과 공동체 사회에서 동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야수적, 비인간적인 만용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 본성에 가장 적합한 이 공동체 의식이 심지어 절제와 중용보다도 언제나 우선해야 하는지의 문제는 검토되어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더구나 공동체 자체 내에서조차도 의무의 등급이 있어서 그들 가운데 어떤 의무가 다른 의무들보다 더 중한지 이해할 수 있으니, 그 첫째가 불멸의 신들에 대한 것이고, 둘째가 조국에 대한 것이요, 셋째가 부모에 대한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점차 밑으로 내려가면서 나머지 의무들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제 2권 유익함에 대하여

여기서는 생활의 안락함, 사람들이 향유할 사물을 획득하는 수단, 권세와 부에 관계되는 의무들을 다루고 있다
인간의 손과 노동의 대가가 없었다면 우리 인간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생명이 없는 것들에서 생기는 이득과 유익함을 얻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이 서고 돕지 않았다면 동물들로부터 우리는 어떤 이득이나 편리함을 취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우리가 인간들의 결합과 합의에 의해 큰 이익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해보다 더 무서운 것도 없다. 인간이 인간에게 최대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원천이기도 하고, 또 최대의 손해를 끼치는 원천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이러한 상태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자기 자신에게 유리하게 붙잡아 두는 것이 바로 덕의 속성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참으로 모든 덕은 거의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첫째가 지혜이며, 둘째가 인내이고, 셋째가 정의이다. 우리는 본래 우리에게 부족하여 필요한 것들을 그들의 도움을 받아 풍족하게 소유하고, 만약 무엇인가 우리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없애고,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고 기도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응징하여 형평의 원칙과 인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처벌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어떻게 동료 시민들의 호감을 사 협동심을 유발시킬 수 있는가 하는 지식에 대해 언급한다.
사람들이 타인인 동료 시민의 재산을 늘리고 명예를 높이기 위해 도움을 주는 데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권력을 유지하고 확고히 하는 데에는 경애보다 더 적합한 것은 없고 공포보다 낯선 것도 없다.

공포 정치란 단지 권력을 유지시킬 뿐인 나쁜 안전장치이지만, 이와 반대로 선의는 실제로 그것을 영구히 믿을 만하게 지켜 주는 안전판인 것이다. 선의의 힘은 크고, 공포가 갖는 힘은 매우 약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이상, 다음으로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가 원하는 바 정직과 신의와 더불어, 애정과 존경 즉 경애를 가장 쉽게 획득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도록 한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의 존재 가치를 존경하는 친구들의 우정과 신의를 갖는다는 것이 급선무이며 최대로 필요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다음은 영예에 관해서 언급하는 것이 중요한데 최고의 그리고 완벽한 영예는 세 가지 조건에 달려 있다. 첫째 만약 대중이 그를 경애한다면, 둘째 만약 대중이 그를 신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셋째 만약 대중이 그를 어떤 찬사와 함께 관직에 따른 영예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하는 바로 그 세 가지이다.

우선 신의를 획득할 수 있는 규칙들을 살펴보면, 첫째 신의는 실제로 선행에 의해 최대로 획득되며 둘째 신의는 그 결과로서 우발적으로 손에 생기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선행을 하겠다는 의지에 따라 움직여진다. 신의는 두 가지 조건에 의하여 확보될 수 있는데 첫째 조건은, 만약 우리가 사람들에 의해 정의감과 결합된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을 지녔다고 판단된다면 이고, 두 번째로 사람들은 정의롭고 신의있는 사람들, 즉 선인들에게 신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럴 때 그것은 사기와 불의에 대한 혐의가 추호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하에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중에서 신의를 획득하는 데에는 예지보다는 정의가 더 강하게 작용한다. 확실히 정의는 예지 없이도 충분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지만, 예지는 정의 없이는 신의를 갖게 하는 아무런 힘도 없다. 그러므로 영예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된 세 조건들은 모두 정의에 의해 획득된다. 따라서 영예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정의에 의해 부과되는 의무들을 열심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말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대화이고, 다른 하나는 논쟁이다. 그런데 영예를 얻기 위해서는 실로 우리가 웅변이라고 말하는 논쟁이 더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언사에 있어서 부드러움과 친밀함이 인간의 마음을 얼마나 부드럽게 하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사실상 말속에 중용과 결합한 위엄이 들어 있다면 그보다 더 찬탄을 받을 것이 없고, 그것이 있다면 더욱더 찬탄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웅변을 해야 할 때가 있는데 우리 공화국에서는 많은 청년들이 법정에서, 대중 집회에서, 그리고 원로원에서 연사로서 칭찬을 받지만 최대의 찬탄은 법정에 있다. 법정 안에서의 발언에는 고발과 변론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가운데 변론이 더 칭찬받을 만하지만, 그러나 고발도 흔히 훌륭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까지는 영예를 얻는 데 도움이 되는 청년들의 의무에 대해 논했으므로, 이어서 호의와 관대함에 대해서 언급한다. 호의와 관대함을 얻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필요한 자들에게 봉사하거나 돈을 줌으로써 이들은 행해진다. 후자 즉 관대함은 더 쉽고 특히 부자에게 쉽지만, 전자 즉 호의는 더 명예롭고 더 훌륭하며 강하고 뛰어난 사람에게 더 어울린다. 사실 능력과 근면으로 이루어진 호의가 도덕적으로 더 선하고 더 개방적이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때로는 돈을 주어야 하고, 이런 종류의 자선을 베품이 전부 거부되어서는 안 되며, 종종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산에서 적당히 돈을 나누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신중하고 절도가 있게 해야 한다. 필요하거나 유익함이 있는 경우 베품에는 정당성이 있다 할 것이다. 이러한 베품에 있어서도 중용의 법칙이 최상이다.
그러므로 베품이라는 것은 때때로 적합한 시기에만 필요하며, 그때에도 능력에 부합해야 하고 중용에 따라야 한다.

개인적 봉사에 의해 나타나는 호의는, 때로는 공화국 전체에 때로는 시민 각 개인에게 베풀어진다. 법으로 보호하는 것 즉 법률 상담을 통해 돕는 것과 법률 지식으로 가급적 많은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은 그 도와주는 사람의 영향력과 인기를 높이는 것이다. 이 법률 상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특히 웅변술이다. 웅변은 즉각 더 인기를 얻게 되고 더 유명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집단의 사람들을 도와주고자 할 때에는 다른 집단의 사람들을 해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하고 본의 아니게 누군가를 해쳤다면 모든 방법을 써서 변명을 하고, 잘못해서 손상을 입힌 것은 다른 봉사와 의무로서 충분히 보상해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도와줄 때에는 흔히 성품이나 재산이 고려되곤 하는데 우리의 판단은 그의 재산 소유정도가 아니라, 순전히 그리고 단순하게 그 자신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에 입각해야 한다. 호의와 봉사를 제공함에 있어 최대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은 형평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을 추구하지 말 것이며 불의를 피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속적인 찬사와 명성의 기반은 정의이고, 정의없이 칭찬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전체 시민과 국가에 대한 선행들에 관해 논하자면, 유념해야 할 것은 개인에게 유리하도록 하게 하여 각자에게 추호라도 손해를 끼쳐서는 안 될 것임은 물론, 국가에도 유익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국가 행정을 담당해야 할 사람이 제일 먼저 주의해야 할 점은 각자 자기의 것을 소유하며, 사유 재산에 대해서는 국가의 간섭에 의한 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제 1인자들과 공화국을 통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탐욕보다 더 추잡한 도덕적 결함은 없다. 따라서 공화국을 수호하는 것이 의무인 정무관들은 어떤 사람에게서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는 유의 선물 증여 또한 삼가야 할 것이다. 유익함에 관한 교훈들 중에서 파나이티우스가 간과한 두 가지가 또 있는데 바로 건강과 돈에 관한 배려가 빠졌다는 것이다. 확실히 두 가지는 유익한 것들이다.
유익한 것들의 상호비교는 종종 필요한데 왜냐하면 이것은 파나이티우스에 의해 간과된 네 번째 문제이기 때문이다.

제 3권 도덕적 선과 유익함의 상충  
 
파나이티우스는 우리에게 도덕적 의무론에 대한 가장 완전한 논의를 제공하였는데,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윤리적 문제들을 세 개의 일반적인 제목으로 분류하였다. 첫째는 도덕적으로 옳은가 옳지 않은가 하는 문제이고, 둘째는 유익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이며, 셋째는 도덕적으로 옳은 것과 유익한 것이 상충될 때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그는 앞의 두 문제에 대해서는 설명했으나 세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다.

이에 키케로는 유익함과 도덕적 선은 절대 상충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원래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양자를 분리시키는 자들을 저주했다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따른 스토아 학파의 견해를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도덕적으로 선한 것은 무엇이든 유익하고, 도덕적으로 선하지 않은 것은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사실 이 책에서 논하고 있는 의무는, 스토아 학자들이 평범한, 보통의 의무라 부를 것으로 이 의무들은 공유되고 있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좋은 자질과 학문의 증진에 의해 그것을 추구한다. 따라서 덕의 품성을 지닌 모든 사람들은 그 의무들의 영향을 받는다.

사람들은 유익한 것이 아니라 유익하게 보이는 것 때문에 마음이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경우 제기되는 문제는, 크게 유익한 것 때문에 도덕적으로 선한 것을 희생시켜야 하는 점이 아니라 외견상 유익하게 보이는 바로 그것을 어떻게 하면 도덕적으로 악한 것 없이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유익한 것들을 포기해서는 안 되고,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남에게 양도해서도 안 되지만, 남에게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누구나 자신의 유익함을 향유해야 할 것이다. 유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결코 도덕적으로 나쁜 것이 될 수 없으며, 도덕적으로 나쁜 것은 결코 유익한 것으로 보일 수 없다.

의무감에서 가장 큰 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우정의 경우이다. 우정의 경우, 친구를 위해 옳은 일을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은 친구의 도리가 아니며, 그렇다고 옳지 않는 일을 친구 사이의 정에 이끌려 하는 것도 친구의 의무에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정에서 유익한 것처럼 보이는 것과 도덕적으로 선한 것을 비교할 때에는, 외견상 유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버리고 도덕적으로 선한 것을 취하도록 해야만 한다. 반면, 우정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것들이 요구될 때에는, 양심과 신의가 우정보다 중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유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도덕적 선과 상충하는 경우가 있을 때에는 상황을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도덕적 선과 유익함이 상충하는 망설여지는 경우들에 있어서,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된다. 참으로 침묵을 지키는 것은 무엇이든 다 숨기는 것은 아니나, 알고 있는 것이 남에게 알려지는 경우, 그들에게 이득이 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들에게 그것을 알리지 않을 때, 그것은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숨기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일종의 숨기는 행위이며, 이런 행위를 한 자는 침묵한 것이 아니라 숨겼다는 사실을 그 누가 알아채지 못하겠는가? 확실히 이런 행위를 한 자는 결코 정직하지도, 순박하지도, 명예롭지도, 정의롭지도, 선하지도 않은 사람이며, 오히려 교활하고 간교하고 남을 잘 속이며, 사악하고 난폭하며, 사기와 음흉의 세계에서 자란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이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실제로 거짓말을 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교활한 행동과 속임수는 추방해야 한다. 속임수는 참말로 자신을 교묘하게 꾸며 지혜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하지만 지혜와는 가장 거리가 멀고 또 지혜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네가 약속을 한 당사자들에게 유익하지 않은 그러한 약속은 확실히 지킬 필요가 없다. 약속한 것을 지키고, 합의한 것을 고수하며, 맡은 물건을 되돌려 주는 행동은 유익함이 변하여 해가 될 때 도덕적으로 선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제 1권에서 도덕적 선의 네 가지 원천으로부터 의무를 살펴보았는데, 네 가지 원천에 입각하여 유익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들이 덕의 적이 될 수 있다.

한편 쾌락조차도 유익함의 모습을 지닌다고 주장될지는 모르지만, 쾌락과 도덕적 선 사이에는 여전히 어떤 연결 고리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장 너그럽게 쾌락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쾌락은 아마 인생에 양념 같은 맛을 제공할지도 모른다는 점은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확실히 쾌락은, 실제로 유익함이란 하나도 없다는 사실 또한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자료정리:홍제선 sun800414@naver.com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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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