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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29. 16:59

다산문선(정약용)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29. 16:59


Ⅰ. 다산의 삶

1. 성장기(1762-1782) 

다산은 1762년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 목사를 지낸 정재원(1730-1792)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로 조선시대 유명한 서화가인 공제 윤두서의 손녀였다. 다산의 아명은 귀농, 자는 미용, 송보이고, 호는 사암, 열수, 다산, 자하도인, 문암일인 등이며 당호는 여유당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7세때 지은 '산'이라는 시가 지금까지 이를 입증해 준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또 다산이 10세 이전에 지은 시문을 모은 삼미자집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1777년 다산은 자신의 학문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가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이다. 다산이 두 살 되던 해에 성호가 세상을 떠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산은 성호의 길을 접하고 학문을 굳히게 되었다.

2. 개혁 정치의 큰 뜻을 품고 (1783-1800)

다산은 22세 때(1783)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때 당시의 임금인 정조의 눈에 뛰어 인정받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뛰어난 재능과 학문 때문이었다. 다산은 성균관 생활이 끝날 때까지 여러 차례 시험을 통해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28세때 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그는 첫 벼슬인 희릉직장을 비롯하여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을 거쳤다. 이즈음 그는 '성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성을 쌓는데 유형거와 거중기를 만들어서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이로써 많은 경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암행어사로서 그는 전 연천 현감 김향직과 전 상양 군수 강명길의 폭정을 고발하여 처벌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통해 책임과 관리의 의무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천주교와 만남도 그의 삶에 큰 비난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23세 때 천주교를 처음으로 접했다. 이후 그는 한때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심취하기도 하였으나 성균관에서 학업에 정진하느라고 곧 손을 떼었다. 그는 천주교 신앙과 서양과학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기도 하였으니 또한 갖은 시련과 좌절을 맛보기도 하였다.

3. 강진 유배지에서(1801-1818)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의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이때 다산의 셋째형 정약종은 옥사하고 둘째형 정약전은 신지도로 다산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 곧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일어나서 서울로 다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강진에서의 유배기간은 다산에게는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5백여 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졌으니 18년 동안에 걸친 강진 유배기는 저술 작업 기간이었다고 할 만하다. 특히 이 시기의 경세학과 더불어 다산사상의 도축을 이루는 경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제자들을 모아 교육하였으며, 이들 제자들은 또한 다산 저술 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유배지의 제자들로는 이청 · 황상 · 이강회 · 이기로 · 정수칠 · 윤종문 등을 들 수 있다.

4. 말년 고향에 돌아와(1819-1836) 

57세 되던 해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저술을 계속하였다. 이때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으며 『흠흠신서』, 『아언각비』 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또한 회갑을 맞이해서는 자찬 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북한강을 유람하여 여유 있는 생활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신작 · 김매순 · 홍석주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유배지에서 쇠약해진 심신을 추스리며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고향으로 돌아온 지 18년 만에 75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출처- 다산학술문화재단(http://www.tasan.or.kr)


Ⅱ. 민족문화추진회 소개 (http://www.minchu.or.kr/)

민족문화의 보전·전승ㆍ계발ㆍ연구를 추진하여 민족문화 진흥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1965년 서울에서 조직된 교육부(당시 문교부) 산하 고전국역단체다.
창립 당시에는 학·예술계의 원로 50여 명으로 구성된 사회단체로 출발하였다. 초대 회장에 박종화, 부회장 이병도·최현배, 이사에 김동리·손재형·신석호·이은상·조연현·홍이섭, 회원으로 김두종·김윤경·성낙훈·이숭녕·조지훈·한갑수·이희승 등이 참여하였다.
"학문과 예술로 민족얼을 부흥시켜 국가의 이상을 실현하게 하는 과정을 밟으면서 크게 민족문화를 앙양시킨다"는 취지 아래 발족하였다. 1970년 고전의 현대화를 통한 주체와 정통의 확립을 표방하였으며, 주요 활동으로 고전의 국역과 편찬, 국역자 양성 등을 하였다.

국역작업은 《국역 연려실기술》 《조선왕조실록》 등 문학·역사·철학 전반에 걸쳐 4백여 책을 간행하였고, 한국 고전총서는 《교감 삼국유사》 등을 간행하였다. 1974년 국역요원 양성을 위하여 국역연수원을 개원하였으며, 1975년 이후 매년 1회씩 학술지 《민족문화》를 간행하여 고전정리 및 연구, 국학연구 논문을 싣는다.
1980년부터는 민족문화문고를 발행하여 고전 이해의 저변 확대를 꾀하는 한편, 1986년부터는 한국문집을 선정하여 한국문집총간 영인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1996년에는 조선왕조실록 국역문 CD-ROM 작업을 완료하였다.
한편 국역사업의 장기화를 위한 정부지원을 보강하고, 고전국역후원회와 국역연수원 동문회를 발족하는 등 근대 개화기 이후 민족문화전통의 단절을 극복하고 고전의 재평가와 외래문화를 선별, 수용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125-1번지에 있다.


Ⅲ. 다산문선 목차

다산문선은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마과회통>과 같이 단행본 성격을 띠고 있는 다산의 저술들 이외에 시문집 가운데 전하는 약간 편을 추린 책으로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생각을 접해 볼 수 있다.

- 목 차 -

일러두기
해설

기·記
취몽재기 醉夢齋記
서석산에서 노닐은 기 游瑞石山記
동림사 독서기 東林寺讀書記
수종사에서 노닐은 기 游水種寺記
월파정에서 밤에 노닐은 기 月波亭夜游記
득월당기 得月堂記
여유당기 與猶堂記   
남호에서 배를 뛰우고 논 기 南湖汎舟記
단양 산수기 丹陽山水記
세검정에서 노닐은 기 游洗劍亭記
조룡대기 釣龍臺記
오서산에서 노닐은 기 游烏棲山記
곡산의 북방산수기 谷山北坊山水記

전·傳
죽대선생전 竹帶先生傳
장천용전 張天傭傳
조신선전 曺神仙傳
정효자전 鄭孝子傳   
몽수전

가훈·家誡
학연에게 보여주는 가훈 示學淵家誡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훈 示二子家誡
또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훈 又示二子家誡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훈 示二子家誡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훈 示二子家誡
또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훈 又示二子家誡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훈 示二子家誡
학유가 떠날 때 노자 삼아 준 가훈
학연에게 보여주는 가훈 示學淵家誡

서·書
두 아들에게 부침 寄二兒
두 아들에게 답함 答二兒
두 아들에게 부침 寄二兒
두 아들에게 부침 寄二兒
연아에게 답함 寄淵兒
두 아들에게 답함 答二兒
두 아들에게 부침 寄二兒
두 아들에게 부침 寄二兒
연아에게 부침 寄淵兒
두 아들에게 보여줌 示二兒
두 아들에게 답함 答兩兒
두 아들에게 부침 寄兩兒
두 아들에게 부침 寄兩兒
두 아들에게 부침 寄兩兒
두 아들에게 부침 寄兩兒
두 아들에게 부침 寄兩兒
두 아들에게 부침 寄兩兒
두 아들에게 부침 寄兩兒
두 아들에게 보임 示兩兒
두 아들에게 보임 示兩兒
두 아들에게 부침 寄兩兒
두 아들에게 답함 答兩兒
학유에게 부침 寄游兒    

설·說
종두 치료법 種痘說
수령이 조심해야 할 네 가지 일 居官四說
병아리를 구경한 데 대한 설 觀鷄雛說

논·論
기예에 대해 논함 技藝論
맥에 대해 논함 脈論
용모에 대해 논함 相論      
풍수에 대해 논함 風水論
효자에 대해 논함 孝子論
열부에 대해 논함 烈婦論
충신에 대해 논함 忠臣論
일본에 대해 논함 日本論
서열에 대해 논함 庶孼論
환상에 대해 논함 還上論
간사한 아전에 대해 논함 奸史論
감사에 대해 논함 監司論

원·原
가르침 原敎
정사 原政
덕성 原德
사면 原赦
원원 原怨
목민 原牧               

소·疎
지평을 사양하면서 겸해 과거의 폐단을 진술하는 소
辭持平兼陳科弊疏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
辭謗辭同副承旨疏

기사·紀事
이대장이 자객을 만난데 대한 기사 紀李大將遇剌客事
고금도 장씨 딸에 대한 기사 紀古今島張氏女子事

잡문·雜文
곡산향교에서 효도를 권장하는 글 諭谷山鄕校勸孝文
종을 내쫓는 글
파리를 조문하는 글 吊蠅文    
뱀을 쳐서 죽인 데 대한 해명 擊蛇解
탐진에 대한 대답 耽津對
 

Ⅳ. 다산이 이르기를

   * 여유당기 與猶堂記 
  자기가 하고 싶지는 않으나 부득이 해야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요, 자기는 하고 싶으나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그만둘 수 있는 일이다. 그만둘 수 없는 일은 항상 그 일을 하고는 있지만, 자기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그만둔다. 하고 싶은 일은 언제나 할 수 있으나,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또한 때로는 그만 둔다. 진실로 이와 같이 된다면 천하에 도무지 문제가 없을 것이다. ................... <중략> ..................... 노자의 말을 보건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고 하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

- 무슨 일을 하기 전에 그 일이 꼭 해야 하는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시작하라.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는 것은 부득이 한 것이 아니므로, 곧 그만둔다.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는 것은 마음에 크게 두려움이 있어서이므로, 마음에 크게 두려움이 있는 것은 또한 그만둔다. 당신 안에 두려움을 애써 외면하며 남이 알지 못하게 일을 한 적은 없는가?

      * 정효자전 鄭孝子傳
  ... 여섯 살 되는 해에 그의 아버지가 밭을 돌아보러 나갔는데, 밤이 되어 추워지자 효자는 그 어머니에게, “밭에 움막이 있습니까?” 물었다. 어머니가 “없다.”고 대답하자 효자는 벌떡 일어나 나가려고 하였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늦은 밤에 어린아이가 어디를 가려고 하느냐?” 하니 효자는 “아버지가 들에서 떨고 계시는데 자식은 방에서 따뜻하게 있으니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하였다. 어머니가 굳이 말리니 효자는 창문 아래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아버지가 돌아온 뒤에야 편히 쉬었다.

- 예로부터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 했다. 효자인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다. 자식이 밖에 나가 늦게 들어오면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하고 걱정을 하는 부모는 많지만, 그 자식은 어떠한가? 이 세상에 건강하게 태어나게 해준 것으로 부모는 당신에게 할 만큼 했다. 이제 당신이 갚아나갈 시간이다.

     *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훈 示二子家誡
.... 중국은 문명이 일반화되어 궁벽한 시골이나 먼 산구석의 마을에 살더라도 성인도 될 수 있고 현인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여 도성의 문에서 몇 십 리만 벗어나도 태고의 원시사회가 되어 있으니, 더구나 멀고먼 외딴곳이야 말할 게 있겠는가?.........<중략>........ 나는 지금 이름이 죄인의 명부에 적혀 있으므로 너희들에게 우선은 시골집에서 숨어 지내도록 하였다만, 뒷날의 계획은 오직 서울의 10리 안에서 거처하는 것이다. 만약 가세가 기울어 도성으로 깊이 들어가 살 수 없다면 모름지기 잠시 근교에 머무르며 과수를 심고 채소를 가꾸어 생계를 유지하다가, 재산이 좀 넉넉해지기를 기다려 도심의 중앙에 들어가도라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 말이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이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다. 당신의 큰 뜻을 서울에서 펼쳐보는 것은 어떠한가? 자신이 나고 자란 이 곳의 익숙함에 젖어, 혹은 서울을 동경은 하고 있지만 우물 밖으로 나가는 게 두려워 망설이고 있지는 않은가? 우물 속에서 보이는 좁은 하늘에 만족하지 말라.

    * 학유에게 부침 寄游兒 
... 나는 몇 년 전부터 독서에 대하여 대략 알게 되었다. 책을 그냥 읽기만 하면 하루에 천백번을 읽어도 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무릇 책을 읽을 때에는 한 글자를 볼 때마다 그 뜻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곳이 있으면, 모름지기 널리 고찰하고 자세히 연구해서 그 근본을 터득하고 따라서 그 글의 전체를 완전히 알 수 있어야 하니, 이렇게 하는 것을 계속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한 종류의 책을 읽을 때에 아울러서 수백 가지의 책을 널리 찾아보게 될 것이요, 따라서 본서의 의리에 대해서 분명히 꿰뚫을 수 있으니 이 점을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 혹시 의무감 때문에 꾸역꾸역 책을 읽고 있지는 않은가? 한 장을 읽어도 차분하게 집중하며 읽는 습관을 들이자. 호기심을 가지고 읽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권의 책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책이 TV나 인터넷 보다 좋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당신은 책과 TV나 인터넷 중 무엇을 더 집중하여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 용모에 대해 논함 相論
  ... 어떤 아이가 있는데 얼굴이 풍만하게 생겼으면 아이의 부모는 말하기를 “이 아이는 부자가 될 만하다”하여 재산을 더욱더 주고, 부자 사람은 그 아이를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부릴 만하다”하여 자본을 더욱더 주게 되니, 이 아이는 더욱 힘쓰고 날로 부지런하여 사방으로 장사를 다닌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가 상업을 부흥시킬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주인으로 삼으니 잘될 사람을 더욱 도와주어 조금 뒤에는 백만장자가 되어 버린다.
어떤 아이가 있는데 눈썹이 더부룩하고 또 어떤 아이는 콧구멍이 밖으로 드러났으면 그 아이의 부모와 스승 또래의 어른들은 양성하고 협조하는 것을 일체 이상의 것과 반대로 하니, 이들이 어찌 자기 몸을 귀하고 부유하게 할 수 있겠는가. ....< 중략 >...... 공자가 말하기를,
“용모로써 사람을 취했더라면 자우(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인품이 훌륭하나 얼굴이 매우 못생겼다 한다.)에게 실수할 뻔했다”하였으니 참으로 성인이다.

- 당신의 주변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한 적은 없지 않은가? 당신의 말 한마디가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제 외모만으로 남을 평가하는 경솔한 생각은 버리자. 당신보다 못생긴 그에게는 분명 당신보다 잘난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 목민 原牧
목민관이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목민관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곡식과 베를 생산하여 목민관을 섬기고, 또 말과 수레와 하인을 내어 목민관을 전송도 하고 환영도 하며, 또는 피고름과 진수를 짜내어 목민관을 살찌우고 있으니, 백성이 과연 목민관을 위하여 있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목민관이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다.

- 정치인들은 항상 국민을 위해서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특히 선거철에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어떤 국민도 그들의 말에 감동하지 않는다. 일단 당선만 되면 거만해지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던 그 말들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과연 그들이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살 자격이 있는가?

      * 파리를 조문하는 글 吊蠅文
.... “아! 이는 죽여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이는 굶주려 죽은 자의 몸이 옮겨 붙은 것이다. 아! 기구하게 사는 생명이다. 애처롭게도 지난해 흉년이 들어 식량이 크게 모자랐고 또 겨울의 혹한을 겪었다. 그로 인해서 전염병이 돌게 되었고 게다가 또다시 가혹한 세금징수까지 당하여 수많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고, 그 시체를 버린 들것은 언덕을 덮었다. 수의도 관도 없는 시체에 훈훈한 바람이 불고 기온이 높아지자, 그 피부가 썩어 문드러져 옛 추깃물과 새 추깃물이 고여 엉겨서 그것이 변해 구더기가 되어 항하강(인도의 갠지스강)의 모래보다도 만 배나 많았는데, 이 구더기가 날개를 가진 파리로 변해, 인가로 날아드는 것이다. 아! 이 파리가 어찌 우리의 모습이 아니랴. 너의 생명을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 이에 음식을 만들어 널리 손님을 청해와 모이게 하니 서로 기별해 모여서 함께 먹도록 하라.”

- 현재 생계형 범죄가 늘어난 것은 비단 그들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다. 나라 살림이 어려워지면서 죽지 않기 위해 그런 일을 벌인 사람도 있다. 아이에게 먹일 분유를 살 돈이 없어 분유를 훔치는 어머니를 보면서 어느 누가 그 어머니만을 탓할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가 아이였고 언젠가는 부모가 될 것이다.


자료정리:장광익 gwangik@paran.com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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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