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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29. 16:58

용서(달라이라마)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29. 16:58

 
1. 작가 소개

① 달라이 라마(14대 : 1935 ~ )

  ▷ 달라이 라마가 되기 전

    달라이 라마는 1935년 7월 6일, 티베트와 중국의 국경선 근처 암도의 탁스터 마을에 있는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다른 애들에 비해 좀 덩치가 크고, 명민하고, 호기심이 많은 것을 빼놓으면 아주 평범한 아이였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라모돈드루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가 두 살쯤 되었을 때 40명의 요인으로 구성된 달라이라마 탐색팀이 그의 집에서 마차로 하루거리인 쿰붐 수도원에 도착했다. 그들은 달라    이 라마의 최근 화신을 찾기 위해 전국으로 파견된 3개 탐색팀 중 하나였다. 그보다 4년 전 13대 달라이 라마가 라사에서 입적했다. 여러 가지 상서로운 조짐이 그가 암도에서 환생할 것임을 알려주었다. 그가 사망한 후 며칠 뒤 그의 머리는 동북쪽을 가리켰다. 비상한 구름이 라사 계곡을 뒤덮었고, 많은 무지개가 산 너머 동북쪽을 가리켰다.
 
  쿰붐에 도착한 탐색팀은 이미 험준한 티베트 고원을 돌아다닌 지 두 달째여서 지쳐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 무렵, 탁스터 마을에 아주 특별한 아이가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놀랍게도 라모는 그 비밀 탐색팀 중의 한 사람이 라사에 있는 사라 사원의 라마라는 것을 알아보았고, 여러 가지 비슷한 물건들 중에서 입적한 달라이 라마의 접시, 북, 안경, 지팡이를 자신의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라모 돈드루프는 텐진 가초로 개명되었고 14대 달라이 라마로 인정되었다. 그가 소년일 때에는 섭정들이 각종 정치적, 정신적 의무를 수행했지만, 그가 성년이 되면 국가의 모든 통치를 맡게 되어 있었다. 네 살이던 그는 라사에 도착하여 아주 침착하고 위엄있게 사람들을 대했고, 또 아주 오래된 방식으로 축복을 내려주었다. 아무도 그런 행동거지를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했던 것이다.
 
  여섯 살이 되자 달라이 라마는, 그 후 20년 동안 계속된 강도 높은 종교 교육을 시작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라이프』의 묵은 잡지들을 보면서 그는 세상의 지리를 배웠고 기본적인 영어를 익혀 나갔다. 열한 살에 그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영국령 인도에 설치된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온 오스트리아 출신의 산악가 겸 스키 선수인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를 만났다. 하러는 육로로 히말라야를 통과해 티베트로 들어와 라사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달라이 라마는 하러에게 자신의 영어 가정교사가 되어 달라고 했고 또 티베트 일상생활을 영화로 찍어서 포탈라 궁에서 은밀히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달라이 라마는 13대 달라이 라마가 갖고 있던 고장난 영사기를 가져다가 분해한 뒤 깨끗하게 수리했다. 그리하여 그는 티베트의 일상생활을 영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온다는 말만 들어도 동작을 중지했기 때문에, 보통 때는 일상생활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 달라이 라마 즉위 후

  어린 달라이 라마의 환상세계는 느닷없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느닷없이 붕괴되었다. 1950년 중국군이 티베트의 동쪽 국경을 침공하자 달라이 라마는 예정보다 일찍 정치적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 해 눈 많이 내리는 12월, 그는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 국경 근처의 마을로 피신하여 망명 채비를 차렸다. 그러나 몇 달 뒤 중국이 티베트의 완전한 종교적 자유와 내치를 보장하자 다시 라사로 되돌아 왔다.
 
  1950년 내내 달라이 라마는 평화를 유지하고 티베트의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중국이 자꾸만 약속을 어기자 많은 티베트 사람들, 특히 동부 지역의 암도와 캄 사람들이 반발하기 시작하여 많은 희생자가 났다.
 
  1959년 3월 10일 티베트 대봉기가 발발하자, 중국군은 노르불링카 궁에 총격을 해 왔다. 달라이 라마는 몇 대의 캐러밴을 동원하여 히말라야를 넘었다. 라사를 떠난 지 일주일 후 티베트의 변방에서 새로운 티베트 정부를 구성한 달라이 라마 일행은 고국 티베트를 뒤로하고 인도에 도착했다. 4월 27일 그들은 인도의 수상 네루를 만났다. 오랜 협상과 우여곡절을 겪은 후 이듬해 4월 29일에야 다람살라에 도착했다. 영국 식민지 시절 휴양지로 개발된 다람살라는 이제 티베트 인들의 새로운 조국이 되었다.
 
  1960년 다람살라에 100여 명의 난민과 함께 자리 잡은 티베트 망명 정부는 세기가 바뀌어도 끝나지 않는 ‘비폭력 티베트 독립운동’의 기지가 되었고, ‘티베트 불교를 전 세계에 알리는 전진 기지’가 되었다. 달라이 라마 역시 끝나지 않은 조국의 불행에서 한시도 비켜서지 않았다. 일관되게 비폭력 독립운동은 펼쳐온 그는 마침내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② 빅터 챈
  홍콩 출신으로 미국과 캐나다에서 물리학을 전공했고, 캐나다 브리티쉬 콜럼비아 대학의 동양학 연구소 교수이며, 인도와 네팔과 티베트를 여러 차례 여행했다. 지금은 벤쿠버에서 살고 있다.


2. 역사적 배경
 
  중국공산당이 중국 민족주의자들(국민당)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1949년 중화 인민공화국이 건설되면서 티베트의 현대사도 완전히 바뀌었다. 베이징방송은 중국 본토를 하나의 정부가 통치한다는 공산당의 구호 아래 티베트와 타이완을 포함한 중국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고 발표하였다. 그 다음해 1950년 10월 7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해방군은 침략을 감행하였다. 4만의 중국군이 국경을 넘어 무기도 없이 초라한 티베트의 군대를 완패시켰다.
 
  11월에 열리는 티베트 국회 회기 중에 의원들은 당시 겨우 16세이던 달라이 라마에게 정부의 전권을 맡아주기를 요청했다. 그리고 나서 곧 티베트 외무부는 UN에 긴급 전문을 띄웠다.
“중국의 침략에 대항할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티베트 정부도 잘 알고 있다. 평화를 신봉하는 나라가 전쟁 준비를 끝낸 나라에게 대항하기는 불가능하다. UN이 세계 각지에서 자행되는 침략적 행위를 저지시켜 줄 것을 기대한다.”

   침략을 합법적인 것으로 가장하기 위하여 중국 정부는 1951년 5월 23일 티베트의 국회의원 대표들이 티베트 평화 해방안 16개 조항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고 서류에 찍힌 티베트의 도장을 위조하였다. 조약에 따라 티베트의 외교권은 중국 정부로 넘어갔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지역 자치, 완전한 종교적 자유, 판첸과 달라이 라마 두 사람 모두의 복권을 약속하였다.
 
  1951년 9월 9일, 최초의 인민해방군 부대가 라사에 진입하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티베트는 직접적인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점령군은 티베트의 봉건적인 잔재를 일소하고 학교, 병원, 철도, 그리고 영화 산업 등의 광범위한 현대화를 약속하면서 대중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중공 라디오와 신문, 광고, 영화를 통하여 중국은 달라이 라마를 공격하였으며 티베트의 불교를 격하시켰고 티베트의 전통 문화가 구태의연하다고 비방하였다. 처음에는 티베트인들의 적의를 바라보기만 했던 중국인들은 차츰 그들이 자신들의 선전에 동조하지 않고 공산주의를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마침내 분노를 터트리고 말았다.
 
  자신들의 선동이 실패하였음을 깨달은 중국은 협박과 무력을 사용하기 시작 하였다. 가장 많이 사용한 방법은 존경받는 종교·정치가들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범죄자로 몰아 폭행하거나 고문하고 마침내는 사형시켰다. 수도자, 여성, 무력한 시민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을 참다못한 티베트인들은 산발적인 저항을 하였는데 이는 티베트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수천만 티베트 인들이 체포되고 보복을 당했으며 토지 개혁이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티베트 게릴라 활동이 위축되었다.
 
  중국과 협상하고 끊임없이 비폭력을 요구했던 달라이 라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비극이 찾아왔다. 1959년 라사와 전국 각지에서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중국은 달라이 라마를 체포하려는 음모를 진행시켰다. 경호원 없이 올 것을 조건으로 하여 달라이 라마를 연극에 초대한 것이다. 티베트 국민들은 분노하였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를 보호하기 위하여 노르불링카 궁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반(反) 중국 구호를 외치는 수만의 군중들과 합세하였다. 라사 전역에 수많은 군중들이 모였다. 이에 대응해 중국은 노르불링카에 포격을 퍼부었다. 1959년 3월 10일 시위에 참여한 약 1만5천 명의 티베트인들이 사살되었으며 그들의 시신이 라사 거리에 나뒹굴었다. 중국이 저지르는 폭력과 살인을 목격한 달라이 라마는 중국과의 조약이 허구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도로 피신했다. 3월 28일 중국 수상 저우언라이는 티베트 정부의 해체를 발표하였다.
 
  친절을 가장한 그들의 속셈이 드러나자 중국 군대는 티베트인들에게 폭력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일 년이 지나지 않아 중앙 티베트에서 약 8만7천 명의 티베트인이 사살되었다. 포탈라 궁과 노르불링카 원과 라모체 사원은 파괴되었다. 마침내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티베트를 지배하려는 중공의 의중에는 티베트의 불교를 탄압하려는 속셈도 있었다. 공산주의와 불교는 공존할 수 없었다. 중국 점령군은 사원의 체계와 학교, 사원, 성지 그리고 티베트인들의 순수한 신앙까지도 탄압하였다. 1976년까지 6,259개에 달하던 티베트의 사원 중에서 몇 개만이 그 명맥을 유지했다. 백 만명에 이르던 수도승과 여승의 사분의 일이 자신의 종교를 포기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십만이 넘는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폭행당하고 살해되었다. 성스러운 긴 역사의 교본들이 불에 태워지거나 군대의 뒷간에서 사라져갔다. 신성한 사원의 금, 귀한 보석류들은 사원이 폭파되기 정에 강탈되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티베트인의 문화재인 도자기, 불상, 벽화, 세공품들이 중국으로 실려갔다. 이렇게 실려간 것을 녹여서 중국은 메달을 만들거나 국제 골동품 시장에 내다 팔아서 외화를 벌여들였다.
 
  수천 명의 억류자를 수용하고 점령 초기의 재건축 사업을 위한 노동력 확보를 위하여 중국은 여러 개의 감옥과 노동 수용소를 지었다. 감옥에 수감된 이들은 고문을 당하고 처형되거나 굶어죽었다. 수용소에 갇힌 죄수들은 티베트의 천연자원을 체계적으로 수탈하는 일에 노예처럼 부려졌다.
 
  사태의 심각성은 탄압에 반기를 들던 1959년보다 나아질 바가 없었으며 1966년이 되어서는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때 티베트는 가장 급진적인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중국 사회를 대규모 재편성시켰던 문화혁명의 회오리에 말려들고 말았다. 10년간의 광적인 공포 정치가 실시되었으며 그러는 동안 수천 명이 살해되었다. 강탈범들이 전역을 돌며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1976년 모택동이 사망하자 문화혁명도 막을 내렸으며 등소평은 중국에 자유경제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또 티베트에서의 중국의 실수를 인정하고 계엄령을 철회하였다. 자유화 정책이 티베트에서도 실시되었다. 중국인들은 외관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새로운 정책을 실시하는 듯 했다. 몇몇 사원이 재건축되었으며 학교는 다시 문을 열었다. 불교 의식을 많이 허용하여 종교 깃발을 걸 수 있게 되었으며 향을 피우거나 법회를 열 수 있게 되었다.
 
  세계 인권협회는 티베트에서의 종교 개혁이 중국의 군사 행동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 사원에 딸린 대학의 교육 과정에 심각한 규제가 가해졌으며, 중국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학생들만 입학이 허가되었다. 교본과 지도자 그리고 그 외의 교육시설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불교 의식만이 허가되었으며 수도승들은 중국 당국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아야 했다. 조금만 그들의 체제에 위반되어도 체포나 고문을 받았다. 달라이 라마는 1984년 티베트 봉기 25주년 기념식에서 발표한 성명서에서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파괴된 사원을 복구함으로써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는 것처럼 선전을 하였지만 종교 단체에 가입하거나 불법(佛法)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장애가 뒤따랐다. 인상적인 구호를 사용하여 종교와 국가 자치의 자유를 보장하였다는 것은 단지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했다.
 
  종교개혁이 환상에 그치고 말았듯이 중국의 경제자유화정책도 인권 신장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티베트에서의 정치적 자유는 실천되지 않았다. 1980년 전반에 걸쳐 정치 활동을 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은 체포되거나 구금되어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중국 경찰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향한 불길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티베트의 시위자들은 결속하였고, 중국 보안 당국의 탄압에 강하게 맞섰다. 1988년 북경 정부는 모든 불평 불만자들을 엄단하겠다고 공포하였고 1989년 3월 7일 라사에 계엄령을 발표함으로써 두 민족의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수백 명이 살해되었으며 수천 명이 체포되었는데 이것은 그 해 말 북경 정부에 의해 자행된 천안문 광장에서의 대학살을 알리는 서곡에 불과하였다.
 
  1990년 5월 계엄령이 철폐되었으나 티베트의 보안군은 여전히 중국 통치에 대항하거나 의심이 가는 사람을 체포하고 구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92년 중국은 체제 전복을 도모한 사람들과 연관된 자료를 찾아내기 위하여 가택 수사를 실시하였다. 불교 관련 책자를 비롯하여 달라이 라마와 연관 있는 것, 그의 연설, 녹음 테이프, 기도문, 저서 등이 검열 대상에 포함되었다. 3년 후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보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공포되었다.
                 
―매튜 번슨(Matthew E. Bunson)의『달라이라마-티베트에서 온 편지』


3. ‘용서’의 줄거리

3-1. 함께 있어서 기분 좋은 사람

- 빅터 챈이 달라이 라마에게 왜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은지 물어보았다. 그는 자신이 특별히 뛰어난 면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몇 가지 장점들이 있다고 했다. 그 중 하나가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다. 달라이 라마는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절대로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누구에 대해서도 나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선한 마음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달라이 라마는 이야기 한다.

3-2. 친절이라는 이름의 종교

- 이 책의 공동저자인 빅터 챈이 달라이 라마를 처음으로 접견했을 당시 순수 중국인 혈통인 자신을 미워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 질문을 던졌을 때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중국인에 대해 어떤 나쁜 감정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티베트 인들은 중국의 침략으로 크나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중국인들은 계획적으로 티베트의 위대한 사원들을 돌 하나까지도 해체하고 있습니다. 다람살라에 와 있는 거의 모든 티베트 가정이 슬픈 이야기를 하나씩은 갖고 있습니다. 중국의 잔학행위 때문에 대부분의 집이 최소한 식구 한 명씩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중국 공산당과 투쟁하는 것이지, 일반 중국인들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중국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사실 무조건적으로 그들을 용서합니다.”
  달라이 라마와 나눈 이 대화로 인해 감명 받은 빅터 챈은 4년 동안 광활한 티베트의 영토를 방랑하였고 티베트의 순결한 순례지들에 대한 여행 안내서를 쓰기에 이르렀다. 중국인들을 결코 미워하지 않는다는 달라이 라마와 그의 티베트 국민들은 아주 단순한 종교를 실천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서로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이다.

3-3. 영혼이 살아있는 얼굴

- 2000년 3월 다람살라에서 열린 제8차 마음과 인생 학술대회에서 폴 에크먼은 달라이 라마를 처음으로 만났다. 에크먼은 심리학 교수이자 얼굴 표정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9 11 테러가 발생한 뒤 CIA와 FBI 합동의 테러 대책 본부의 인간 거짓말 탐지기의 역할을 한 사람이다.
  에크먼이 달라이 라마의 얼굴을 관찰한 결과 지금까지 알았던 어느 누구보다 얼굴 근육을 가장 활발히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했다. 달라이 라마의 얼굴 근육은 생기가 넘치고 유연했으며 20대의 사람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얼굴 근육이었다고 했다. 실제로 달라이 라마는 감정이나 느낌을 매우 정확히 얼굴에 표현을 하며 행복할 때, 그는 백 퍼센트 행복하고 그 기분을 희석시키는 어떠한 다른 감정도 끼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가식적이지 않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3-4.용서와 마음의 평화

- 달라이 라마와 공동으로 책을 집필하기로 한 빅터 챈은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고, 그의 생활의 일부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빅터 챈은 달라이 라마에게 중국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아주 가끔이라도 느껴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달라이 라마는 그러한 적이 거의 없다고 대답했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든 사람에게 나쁜 감정을 키워 나간다면, 단지 자신 마음의 평화만 깨어질 뿐이고, 만일 그를 용서한다면 자신 마음은 평온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명상을 통해 증오와 같은 파괴적인 감정이 쓸모가 없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요즘에는 분노나 미움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3-5.가장 큰 수행은 용서

- 적을 용서하는 것이 한 사람의 영적 성장에 큰 차이를 가져다 줄 수 있다. 미움이나 또 다른 파괴적인 감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 반대의 감정들을 키워야 한다. 자비와 친절이 그것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강한 자비의 마음과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용서는 훨씬 쉬어질 것이다. 용서는 이런 긍정적인 감정들을 갖도록 도와줄 것이며, 이것은 영적인 성장에 큰 도움이 된다.

3-6.세상에서 가장 이타적인 사람

- 40여 년 동안 달라이 라마와 많은 티베트 국민들은 중국인들을 달래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1989년 티베트인들은 막 중국과 대화를 시작하려는 시점에 있었다. 중국 대표와 가까스로 접촉을 시도하는 데 성공을 했으며 홍콩에서 열릴 임시 회의에 대한 기본 원칙에 합의가 이루어졌고, 실제 협상 장소와 날짜를 정하기로 했다.
  그 때 비극적인 천안문 사태(1989년 6월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학생, 노동자, 시민들을 탱크와 장갑차로 해산시키면서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가 일어났다.
  달라이 라마는 오랫동안 준비해 온 자국을 위한 노력을 망칠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중국의 정책이 국민들을 유린하고 있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광장에 있는 젊은이들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 결과 등소평은 달라이 라마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고, 중국과의 협상도 망치게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이익, 자국의 이익 보다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려한 중국 젊은이들의 편에 섰다.

3-7.보살피는 마음, 나누는 마음

- 종교인인 달라이 라마는 과학자들과 자주 만난다. 그 이유는 현대의 과학과 고대의 지혜가 더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9 11테러와 같이 인간의 지식이 결합되고 미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이끌린 현대 기술은 엄청난 재앙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행복한 개인, 보다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서로를 보살피는 마음, 나누는 마음 등 인간의 가치를 키워야 한다.

3-8.용서하라, 그러면 행복해 진다.

- 티베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모든 존재는 한때 우리의 어머니였으며, 우리도 한때는 그들의 어머니였다.’
  달라이 라마에게 있어, 생명 현상은 어느 것 하나 뗄 수 없이 서로 연결된 유기적인 통합체이다. 모든 것은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홀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나비효과’와 같은 것으로 베이징의 나비가 날개짓을 할 때 발생한 아주 작은 기류의 변화는 점점 퍼져가 캐나다 밴쿠버의 기후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와 같은 원리로 복수는 자신에게 더 큰 불행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더 넓은 시각에서 생각해야 한다. 복수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므로 용서를 선택해야 한다.

3-9.자비와 상호 의존의 가르침

- 존재들은 상호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나에게 이익이 된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고통 받는다면, 나 역시 결국에는 고통을 받을 것이다.
  사담 후세인은 미국 부시 대통령의 눈에는 100퍼센트 나쁜 존재, 부정적인 존재이지만 후세인의 아내에게는 여전히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그리고 후세인이 저지른 나쁜 일들은 그의 군대 때문에 일어났다. 군대가 없고 무기가 없었더라면 그런 종류의 침략자가 될 수 없었다. 그 무기들은 이라크 인들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서양에서 온 것이다. 서양의 무기 회사들이 이 침략자를 만드는데 기여한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해놓고는, 나중에 가서 후세인을 비난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3-10.지혜로운 자의 눈

- 달라이 라마에 따르면, 우리는 먼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지혜를 얻어야 한다. 지혜는 투명한 시선을 의미한다. 지혜로운 자는 편견 없이 맑은 시선으로 자신을 둘러싼 모든 현상과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

3-11. 자기를 비운 사람의 아름다움

- ‘나’와 ‘타인’이라는 개념은 관계에 있어서만 의미를 가질 뿐이다. 달라이 라마에게 있어서 실체의 본질, 실체의 핵심은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물 사이의 근본적인 상호 연결이다. 이것이 그가 주위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가 평생 동안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헌신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이것을 한 차원 높은 자기 이익이라고 부른다. 그는 타인을 도우면 자기 자신이 누구보다 먼저 그 혜택을 받게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3-12. 지혜와 자비는 새의 두 날개

- 새가 날기 위해서는 두 개의 날개가 필요하듯이,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지혜와 자비 둘 다 필요하다. 지혜만 있고 자비심이 없는 사람은 산 속에서 풀이나 뜯어먹고 사는 외로운 은자나 다름없고, 지혜가 없이 자비심만 있는 사람은 호감 가는 바보일 뿐이다.

3-13. 공중을 나는 요가 수행자

- 대개 우리는 사물들을 단단하고, 손으로 만져지는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따라서 그 대상들을 움켜쥐려고 하고 그것들에 집착한다. 우리는 자아와 사물들이 분리되어 있고 독립되어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손에 넣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들을 소유하는 순간, 흥분감은 사라지고 우리는 또 다른 새로운 것을 갈구한다. 이러한 그칠 줄 모르는 갈망이 고통을 불러온다.
 
3-14. 나를 아파하는 대신 남을 아파하라.

- 달라이 라마는 인도의 가장 중요한 불교 성지들을 순례하는 스케쥴이 잡혀 있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도중 달라이 라마는 극심한 복통을 느꼈고 이 복통은 꽤 오래 지속되어 계획했던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는 신체적으로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지만 마음은 전혀 불안하지 않고 평화로웠다고 한다. 그는 신체적인 고통을 겪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아무 보살핌도 받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했다. 따라서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염려가 그의 고통을 덜어준 것이다. 자비심을 갖는 경험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에게는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

3-15. 행복한 삶에 이르는 길

- 붓다와 보살들, 진정으로 지혜롭고 자비로운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목표에 전적으로 집중한다. 그 목표란 궁극적인 행복을 얻는 일, 깨달음을 성취하는 일이다. 그들은 그것을 자비심을 키우고 이타적인 마음을 가짐으로써 이뤄낸다. 그 과정에서 최대의 행복이라는 이익을 얻는다.

3-16. 보리죽 한 그릇의 만족

- 달라이 라마의 수행은 그가 쓸모 있는 삶을 살도록 도와준다. 그가 짧은 순간이나마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면 그의 삶은 어느 정도 목적을 이룬 것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것은 그에게 깊은 정신적인 만족감을 안겨준다.

3-17. 단순한 삶, 고요한 마음

-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이 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해결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해결 방법이 없다면 그래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 고통을 다른 사람들이 겪는 더 큰 고통과 비교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때 우리는 곧바로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아, 나의 고통은 그 고통들에 비하면 실제로 그렇게 큰 것이 아니구나.’ 그러면 우리는 더 나은 기분이 된다.


4. 감명 깊은 문장

만일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상처를 준 사람에게 미움이나 나쁜 감정을 키워 나간다면, 내 자신의 마음의 평화만 깨어질 뿐이다. 하지만 내가 그를 용서한다면, 내 마음은 그 즉시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용서해야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

용서는 단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을 향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에서 스스로를 놓아 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이자 사랑이다.

모든 사람은 행복한 삶을 원한다. 더 평화롭고, 더 만족스런 삶을 원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용서와 나눔 같은 내면세계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잘 키워야 한다. 그 결과 우리는 더욱 열림 사람이 되고, 세상을 보는 눈도 넓어질 수가 있다.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삶의 목표에 전적으로 집중한다. 그 목표란 궁극적인 행복을 얻는 일이다. 그들은 자비심을 키우고 이타적인 마음을 가짐으로써 그것을 이뤄낸다. 그 과정에서 그들 자신이 최대의 행복이라는 큰 이익을 얻는 것이다. 자신의 목표를 이루고 행복한 삶을 이끌어가는 최상의 길은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것이 진정한 지혜이다.


자료정리:양소영 soyoung6670@naver.com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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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