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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29. 16:56

율곡문선(율곡 이이)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29. 16:56


1. 작가 소개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원도 강릉 출생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 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 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 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 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


2. 시대적 배경

A. 불교와 유교의 상황

- 조선 왕국은 초기부터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이 지속적으로 효과 있게 진행된 것도 아니다. 세조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오히려 승려의 권익을 옹호하고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켰으며, 불교 경전을 번역하는 등 불교 진흥정책을 폈다. 또한 명종 때에 문정왕후를 만나면서 승과가 부활하고 부흥의 기운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곧 세상이 달라졌고 당시 불교 부흥운동에 앞장을 섰던 보우 선사는 유생들에 의해 쫓겨나 제주도에서 맞아 죽었는데 이러한 사건이 있은 뒤 불교는 점점 조선조의 사상ㆍ문화의 이면으로 사라져갔다.

한편 유교는 성균관을 중심으로 학풍을 이룩하였고 사회적인 정통이념이자 국가 종교로 발전시켰다. 조선 초기에는 소학과 같은 일상생활을 중심으로 실천적인 윤리가 중요시 되었으나  ‘성리대전’, ‘대학연의’, ‘심경’, ‘근사록’ 과 같은 성리학 이론서의 수입과 보급으로 인생과 우주의 문제를 다루는 형이상학적인 차원으로 발전하면서 조선을 단일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유교 국가로 변모시켰다.

이 같은 과정에서 성리학의 이론으로 무장한 신진세력, 즉 사림이 중앙 무대에 등장하였고 이들의 등장은 기존의 훈구 세력과 갈등을 일으켰으며 ‘사화’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이 4번의 사화에서 사림집단의 많은 인원이 희생되었다.

B. 세상의 어수선함

율곡이 태어나기 30년 전에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이 들어섰으며 [1506년 중종반정] 17년 전인 중종 14년에는 신진사림의 대표자인 조광조의 죽음이 있었다.[1519년 기묘사화] 또한 율곡나이 9살인 1545년에 중종이 임금의 배다른 아들의 왕위 계승 문제로 을사사화가 발생하여 글 읽는 선비들의 기운을 크게 꺾어 놓았다. 그리고 율곡이 23세이던 명종 14년에 황해도 양주골의 백정이었던 임꺽정이 난을 일으켜, 그 후 황해도 일대를 3년 동안 소란하게 하였다. 신분사회의 모순, 을사사화 이후 조정의 윤리적 파탄과, 농민 생활의 황폐화 등으로 나라의 질서를 더욱 어지럽히고 있었다.


3. 내용 요약

1. 조기 교육의 힘

율곡은 사임당의 태교(胎敎), 양육(養育), 교육(敎育)등 삼육의 결과로 가장 바람직한 인간적 바탕과 실력을 발휘하여 어렸을 때부터 그 능력이 뛰어났다. 율곡에 있어서 어머니인 신사임당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성장기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경사(經史)에 능하고 시문과 서화에 뛰어난 사임당이야말로 그의 어렸을 적의 교육적 인간적 바탕을 세우는데  크게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 율곡의 소년시절 학문수업은 외부로 나가서 수학을 하는 기회보다는 주로 어머니 밑에서 교육을 받았다. 신사임당이라는 훌륭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율곡은 집안의 신분으로 보아서 유교의 경전을 보다 일찍이 접하였고 그리하여 7세가 되기까지 사임당 신씨에게 틈틈이 글을 배워서 문리(文理)가 통하여 4서[논어, 대학, 맹자, 중용] 를 보통사람들과는 달리 훨씬 쉽게 이해하였다.  그는 당시(7세) 표리부동한 재상인 진복창(陳復昌) 에 관한 글을 지었다. 이웃에 진복창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율곡의 어린 눈에도 사람됨이 몹시 교활해 보였다. 그래서 붓을 들어 지은 것이 <진복창전>이다.

* 임인 21년(1542)【선생 7세.】

「진복창건(陳復昌傳)」을 지었다.
그 줄거리는, “군자(君子)는 마음속에 덕을 쌓는 까닭에 그 마음이 늘 태연하고, 소인(小人)은 마음속에 욕심을 쌓는 까닭에 그 마음이 늘 불안하다. 내가 진복창(陳復昌)의 사람됨을 보니, 속으로는 불평불만을 품고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려고 한다. 그 사람이 뜻을 얻게 된다면 나중에 닥칠 걱정이 어찌 한이 있으랴.” 하였다. 이 때 진복창은 가까운 이웃에 있었는데, 당시에 명예가 있었으나 나중에 과연 사화(士禍)를 일으켰었다.
- 율곡전서 권33, 연보, 임인 -                          

어떻든 기록에 의하면 진복창은 율곡이 걱정한대로 훗날 윤원형을 도와서 을사사화를 일으킨 매우 부도덕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2. 어머니와의 이별 그리고 입산

- 율곡이 16세 되던 해 하늘은 사임당 신씨와 율곡을 갈라놓았다. 율곡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스승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죽음은 율곡에게 큰 충격이었다. 어린나이에 경험한 모친의 죽음은 그에게 하나의 충격이었고 그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큰 것이었다. 율곡은 주자가례[朱子家禮] 에 따라 3년 동안 여막(廬幕) 생활을 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몸소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홀연히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의 입산 배경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가정환경의 변화에 직접적인 원인을 두는 견해가 있다. 율곡의 집안은 서모와 큰형의 사이가 나빠서 율곡이 이를 만류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서모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 사실도 가슴 아픈 일 이었을 것이다. 이에 율곡은 아버지에게 울며 간하였으며, 그래도 가정의 화합이 이루어지지 않자 아버지, 서모, 큰형에게 각각 편지를 남기고 강릉의 외할머니에게 갔다. 마침  그곳에서 금강산에 간다는 사람이 있었기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명복을 빌고자 하는 마음까지 일어 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3. 세상으로 돌아옴

- 율곡 나이 20세, 1년 만에 불교의 진면목을 이해하고 역시 불교는 현실성이 약(弱)하고 윤리성이 희박하여 한계와 문제가 있음을 판단하고는 홀연 금강산에서 나와 외가로 간다.  그리고 유학의 도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 경계하여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지은 글 ‘자경문’을 썼다.

전체적으로 자경문은 유학(儒學)으로 향하고자 하는 뜻의 중요성을 강조한 글이다. 

○ 먼저 모름지기 입지(立志)를 크게 하여 성인으로써 준칙(準則)을 삼을 것이니, 일호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마치지 못한 것이 된다.
○ 마음이 정해진 자는 말이 적으니, 마음을 정하는 것은 말을 적게 하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 꼭 할 때가 온 뒤에야 말을 한다면 말이 간략해지지 않을 수 없다.
○ 오래 방치해 놓았던 마음을 하루아침에 거둔다 하여, 힘을 얻기가 어찌 용이할 수 있으리오. 마음은 곧 살아 있는 물건이라 정력(定力)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요동(搖動)하여 편안하기 어렵다. 만약 사려(思慮)가 어지러워지고 흔들릴 때 의(意)의 작용(作用)으로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니 이것을 끊어 버리고자 한다면 더욱 더 어지러워지고 흔들리는 것을 깨닫게 되어 갑자기 일어났다 홀연히 멸하는 등 나를 말미암지 않는 것 같을 것이다. <이 때에 이러한 방법으로> 가령 단절한다 하여도 다만 이 단절하려는 생각이 가슴속에 가로막혀 있으리니, 이것도 또한 망념(妄念)일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어지러워지고 흔들릴 때를 당하여 정신을 가다듬어 슬쩍 조관(照管)하고 그와 더불어 가지 말지니, 이렇게 공부하기를 오래 하면 반드시 응정(凝定)될 때가 있을 것이다. 일을 집행할 때 전일하게 하는 것도 이것이 또한 정심하는 공부이다.
○ 항상 계구(戒懼)하고 근독(謹獨)하는 마음을 흉중에 보존하여, 생각하고 생각하여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일체의 사악한 생각[念]이 자연히 일어나지 않으리라.
○ 만 가지 악이 모두 근독하지 않는 데서 생긴다.
○ 근독한 연후에라야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읊조리며 돌아오는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 새벽에 일어나서는 아침에 할 일을 생각하고, 조반 후에는 낮에 할 일을 생각하고, 취침할 때는 내일에 할 일을 생각해야 한다. 일이 없으면 방하(放下)하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하여, 일을 조치(措置)할 때 의리에 맞는 도리를 얻어야 하니, 그렇게 한 뒤에 글을 읽어야 한다. 독서는 시비의 분변을 구해서 일을 행하는데 이것을 베푸는 것이니, 만약 일을 살펴보지 않고 우뚝이 앉아 독서만 한다면 쓸모없는 학문이 된다.
○ 재리(財利)와 영리(榮利)는 비록 그 사념(私念)을 깨끗이 제거한다 하더라도, 만약 일에 당면하였을 때 일호라도 편의(便宜)한 것을 택하려는 생각을 갖는다면 이것이 또한 탐내는 마음이니, 더욱 성찰해야 한다.
○ 무릇 일을 만남에, 만약 해야 할 일이면 성심을 다하여 하고 싫어하거나 게을리 하는 마음을 지녀서는 안 되며, 해서는 안 될 일이면 일체 끊어버려 시비가 흉중에서 교전(交戰)하게 해서는 안 된다.
○ 항상, 하나라도 옳지 않은 일을 행하거나, 죄 없는 사람을 한사람이라도 죽이고서라면 천하를 얻는다 해도 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가슴 속에 지녀야 한다.
○ 횡역(橫逆)이 내게 닥쳐오면 스스로 반성해서 깊이 성찰하여 감화시키기로 기약해야 한다.
○ 한 집안의 사람이 교화되지 못하는 것은 다만 성의가 극진하지 못해서이다.
○ 밤에 잠잘 때나 질병이 아니면 드러누워서도 안 되고 기대서도 안 된다. 비록 밤중이라도 졸음이 오지 않으면 눕지 말 것이나 다만 억지로 얽매어 속박되어서는 안 된다. 낮에 졸음이 오면 마땅히 마음을 깨우쳐 십분 맹세할 것이니, 만약 눈가죽이 무겁거든 일어나 두루 걸어 다니며 정신을 깨게 하여야 한다.
○ 공부하여 노력하는 데는, 늦춰서도 안 되고 조급히 하여서도 안 되며, 죽은 뒤에 그만 둘 따름이다. 만약 공효를 급속하게 구하면 그것도 또한 이욕의 마음이다.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고 부모의 유체(遺體)를 욕되게 하면 곧 사람의 자식이 아니다.
- 율곡전서, 권14, 잡저1, 자경문 -

4. 퇴계 선생과의 만남

율곡 나이 23세, 퇴계는 58세 때 퇴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의 만남은 일생에서 단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아주 소중한 만남이었다. 그들은 서로 시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상호존중과 격려로서 서로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고,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하여 敬공부나 격물ㆍ궁리의 문제를 왕복 문변(問辨) 했다.

○ 늘 선생님의 뜻을 엿보건대 항시 물러갈 뜻이 있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왔겠으나, 다만 지금은 사왕(嗣王)이 아직 어리고 나라의 운명이 매우 걱정되므로 도리로써 헤아려보더라도 선생님의 뜻과는 같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가 고질(痼疾)에 잠긴 것이 20여 년이 되었는데, 상하가 모두 인습적이어서 추호도 고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현재는 민력(民力)이 다 되고 국가의 저축도 이미 탕진되었습니다. 만약 개혁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장차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니, 조정에 벼슬하는 선비가 어찌 막연(幕燕)과 다름이 있겠습니까. 한밤중에 생각하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 앉아있게 됩니다. 저와 같은 미미한 존재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명공(明公)께서는 삼조(三朝)의 은혜를 입고, 벼슬이 육경(六卿)에 올랐는데 이에 대해 걱정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가령 명공께서 문을 닫고 병을 요양하면서 궐문(闕門)을 드나들지 않더라도 만약 서울에만 계시면 선비들의 기개(氣槪)가 저절로 갑절이나 될 것이요, 나라가 잘 다스려짐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사(國事)는 지극히 무거우니 일신(一身)의 사사로움은 아마도 헤아릴 틈이 없을 듯합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위로 나라의 은혜를 생각하고 아래로 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 지나친 겸양으로써 마음을 삼지 말고 심기를 편안히 하고 생각을 안정해서 빈객(賓客)을 간단히 접대하면서 오래 머무를 계획을 해주시면 이 보다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
- 1567년 정묘년 퇴계선생에게 올리다 -

○ 임금께서 나이 젊고 자질이 아름다워 향학(向學)을 게을리 하지 않으시니, 만약 배양(培養)하고 보도(輔導)하여 능히 윤덕(允德)을 이루면 태평의 터전이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합하께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주에 대해서는 비록 스스로 부족하게 여긴다 하더라도 성현의 글을 깊이 음미하여 그 뜻을 밝히고 그 요지(要旨)를 구분하여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아는 것 같은 일은 사방을 두루 돌아보아도 합하보다 나은 분이 없는 듯합니다. 그리고 한 개도 감히 망령되게 취하지 않고 한 개도 감히 망령되게 주지 않으며, 한 개의 도시락밥을 싫어하지 않고 만종(萬鍾)의 녹(祿)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도 사방을 두루 돌아보아도 합하와 어깨를 나란히 할 분이 없는 듯합니다.
.......생략.......
엎드려 바라건대, 서둘러 이에 앞서 따뜻한 날을 이용하여 올라 와서 성주(聖主)의 성의에 부응하고 국가의 뿌리를 북돋우며 사람들의 기대를 위로하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저는 경부(經浮)하고 박잡(駁雜)한 버릇이 벼슬을 하면서 더욱 심하니 이런 식으로 계속하다가는 아마도 사람 짓을 못할 듯합니다. 밤중에 조용히 생각하노라면 소름이 온몸에 오싹 끼칩니다. 혹시 합하의 광의(光儀)를 가까이하여 고질의 병을 침질하고 뜸질한다면 거의 반성함이 있을 터인데 길이 멀고 아득하여 바람을 향해 자경(自警)할 뿐입니다.
- 1568년 무진년 퇴계 선생에게 올리다 -

이런 율곡에 대해 퇴계선생은 자신의 제자 조목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일전에 서울에 사는 선비 이이가 성산으로부터 나를 찾아왔었네. 비 때문에 사흘을 머물고 떠났는데, 그 사람이 밝고 쾌활하며 기억하고 본 것이 많고 자못 우리 학문에 뜻이 있으니, ‘후생이 두려울 만하다’라는 옛 성인의 말씀이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았네. 일찍이 그가 아름답게 수식한 시문을 너무 숭상한다고 들었기에, 억제하고자 시를 짓게 하지는 않았네. 떠나는 날 아침 눈이 내렸기에 시험 삼아 음영(吟詠)을 하게 했더니, 즉석에서 몇 수를 읊었다네. 시는 그 사람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볼 만하여 지금 여기 동봉하니 읽은 후에 다시 돌려보내면 좋겠네. 학문이 날로 새로워지기를 기원하면서 이만 줄이네.
- 퇴계전서, 권23, 서 -

5. 뛰어난 업적

기록상으로 율곡이 처음으로 시험장에 들어선 것은 불과 13세 때의 일이다. 진사초시에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금강산으로부터 돌아온 21세 때 한성시에 장원으로 뽑히고 그 후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장원공’ 이라 일컬어졌다. 물론 율곡이라고 해서 과거에 떨어진 경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젊은 나이에 과거에 오르는 것은 하나의 불행이다”라고 하였으니, 자네가 이번 과거에 실패한 것은, 아마도 하늘이 자네를 크게 성취시키려는 까닭인 것 같으니 자네는 아무쪼록 힘을 쓰게나.
- 퇴계전서, 권14, 서 -

1588년 명종 13년, 율곡의 나이 23세에 겨울에 치른 특별시험(별시)에서 그는 ‘천도책’이라고 부르는 유명한 답안지로 수석의 영광을 차지하였던 사실은 말한 바이다.
천지자연의 운행과 그에 따른 인간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대해 율곡은 이렇게 답하였다.

생각하건대 만화(萬化)의 근본은 하나의 음양일 뿐입니다. 이기가 동하면 양이 되고 정하면 음이 되니 한번 동하고 한번 정하는 것은 기이고 동하게 하고 정하게 하는 것은 이입니다. 천지의 사이에 형상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더러는 오행의 정기가 모여된 것도 있고, 천지의 괴기(乖氣)를 받은 것도 있고, 음양의 서로 격돌하는 데서 생긴 것도 있고 음양 두 기운이 발산하는 데서 생긴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월성신이 하늘에 걸려 있는 것이나 비·눈·서리·이슬이 땅에 내리는 것이나 바람과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나 우뢰와 번개가 발작하는 것이 모두 기가 아닌 것이 없으나, 이것들이 하늘에 걸리고 땅에 내리고 바람과 구름이 일어나고 우뢰와 번개가 발작하는 까닭은 이(理)가 아님이 없습니다. 이기(二氣)가 진실로 잘 조화되면 저 하늘에 걸려 있는 일월이 전도를 잃지 않고 땅에 내리는 비나 눈이 반드시 제 철에 맞으며 바람·구름·우뢰·번개가 모두 화기 속에 둘려 있게 되는 것이니 이는 이의 정상입니다.
만일 이기가 조화되지 않으면 일월의 운행이 그 전도를 잃고 발휘함이 제 철을 잃으며 바람·구름·우뢰·번개가 모두 어그러진 기운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는 이의 변괴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니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고 사람의 기가 순하면 천지의 기도 순해집니다. 그러니 이의 정상함과 변괴를 어찌 하나같이 천도의 탓으로만 돌려서야 되겠습니까.
.......생략.......

성왕(聖王)이 백성을 다스리면 천지가 서로 통하여 5일에 한번 바람 불고 10일에 한번 비오는 것 또한 떳떳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덕이 있으면 반드시 이와 같은 감응이 있는 것이니 천도가 어찌 사사로이 후히 대함이 있겠습니까. 원기(怨氣)는 가뭄을 부르는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한 여인이 품은 원한이 오히려 적지(赤地)를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왕(武王)이 은(殷)을 쳐서 이긴 것이 천하의 원기를 소멸시키기에 충분하고 진경(眞卿)이 옥사(獄事)를 판결한 것이 한 지방의 원기를 해소하기에 충분하였으니, 단비가 때에 맞춰 내린 것이 괴이할 것 없습니다. 원기를 풀어준 데에도 이러하였는데 하물며 필부필부(匹夫匹婦)까지도 은택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는 태평세대이겠습니까.
.......생략.......

인군이 자기의 마음을 바로 하여 조정을 바로 잡고 조정을 바로 하여 사방을 바로잡고 사방이 바르면 천지의 기운도 발라진다, 하였으며 또 듣건대 ‘마음이 화평하면 형체도 화평하고 형체가 화평하면 기운도 화평하며 기운이 화평하면 천지의 화평이 호응한다.’ 하였으니 천지의 기운이 이미 바르다면 어찌 일식·월식이 있으며 어찌 성신이 전도를 잃겠습니까. 천지의 기운이 이미 화평하면 우레·번개·벼락이 어찌 그 위엄을 부리며 바람·구름·서리·눈이 어찌 그 제 때를 잃으며, 빛이 나지 않고 음침하거나 흙비가 내리는 여기(戾氣)가 어찌 재앙을 만들겠습니까. 하늘은 비와 햇볕과 따사로움과 추위와 바람으로써 만물을 생성(生成)하고 인군(仁君)은 엄숙과 다스림과 슬기와 계획과 성스러움으로써 위로 천도(天道)를 호응하는 것이니 하늘이 때맞춰 비를 내리는 것은 바로 임금의 엄숙과 같고 때때로 햇볕을 쪼여 주는 것은 임금의 다스림과 같고 때때로 따사롭게 하는 것은 임금의 슬기의 응험(應驗)이고 때때로 추워지는 것은 계획의 응험이고 때때로 바람이 부는 것은 성(聖)의 응험입니다. 이것으로써 관찰하건대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이 육성되는 것이 어찌 임금 한사람의 수덕(修德)에 달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 율곡전서, 권14, 잡저1, 천도책 -

6. 율곡의 개혁의지

그 후 율곡은 관료의 자리에서 여러 직책을 맡으며 지냈다. 중국으로 문물견학을 다녀온 후 율곡은 일종의 문화적 충격에 빠져버린다. 그리고 사가독서(賜暇讀書)제도로 일정기간 머물면서 동호문답이라는 글을 만든다. 이 글에서 율곡은 현재 조선시대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아주려는 점이 보인다.

○손님: 정사(正邪)를 이미 분별하여 인재를 얻어서 정치를 한다면 정치는 무엇부터 먼저 해야 합니까?
○주인: 먼저 폐법 부터 개혁하여 민생을 구출해야 합니다. 폐법을 개혁하려면 마땅히 언로(言路)를 넓혀서 선책(善策)을 모아야 할 것이니, 위로는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시폐(時弊)를 말하게 하여, 그 말이 과연 쓸 만한 것이라면 그 사람의 신분의 고하로 취사(取捨)하지 말고 해당 부서[曹]로 하여금 전례를 따라 아뢰는 것을 막는 짓을 하지 말도록 하여 오직 폐법을 다 고치기로 기약할 것이니 그런 뒤에라야 나라 일이 해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손님: 그대가 백성을 구제하는 길은 폐법을 개혁하는데 있다고 하는데 지금의 폐법 으로는 무엇이 백성들의 고통 중에 큰 것입니까?
○주인: 일족절린(一族切隣)의 폐단이 첫째요, 진상번중(進上煩重)의 폐단이 둘째요, 공물방납(貢物防納)의 폐단이 셋째요 역사불균(役事不均)의 폐단이 넷째요, 이서주구(吏胥誅求)의 폐단이 다섯째입니다.

일족절린의 폐단이 무엇이냐 하면, 지금 여기에 <과중한 세금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한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 친척과 이웃사람에게 그의 세금을 부담시키고, 친척과 이웃이 감당할 수 없어 또 도망하게 되면 다시 그 친척의 친척과 이웃의 이웃에 부담시키게 되어 한 사람이 도망함으로써 재앙이 천 가구에까지 파급되어 그 형세는 반드시 백성이 남지 않게 된 뒤에야 끝이 날판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100가구나 되던 마을이 지금은 10가구도 못되고 지난해에는 10가구의 마을이 지금은 한집도 없게 되어, 마을이 쓸쓸해지고 인가의 밥 짓는 연기가 아주 끊어져 그렇지 않은 곳이 없으니 만약 이 폐단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근본(民)이 뽑혀 넘어져 결국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 폐단을 개혁하려면 곧 전국의 군과 읍에 명령을 내려 그 부적(簿籍)을 조사해서 만약 도망친 가구가 있다면 곧 그 이름을 삭제하고 친척과 이웃에게는 침해가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국가의 손실은 다만 이미 도망가 버린 사람에게만 있는데 그치고, 이산(離散)하지 않은 백성은 편안히 모여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양육(養育)하고 생식(生息)해서 호구가 번성하면 충족하지 못했던 군액(軍額)도 머지않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생략.......

이상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을 논한 것임. [右論安民之術]
- 율곡전서, 권15, 잡저2, 동호문답 -

이 글은 크게 11개 항목으로 형식은 손님이 묻고 주인이 대답을 하는 이른바 대화체를 취하고 실제적인 정치 경제의 실용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 임금의 정치하는 도리를 논함
○ 신하가 지켜야 할 도리를 논함
○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만나기 어려움을 논함
○ 우리나라의 도학이 제대로 되지 못함을 논함
○ 우리나라의 정치가 미흡함을 논함
○ 오늘의 시대 상황을 논함
○ 힘써 실제를 행하고 스스로 마음을 닦는 것을 논함
○ 간사한 신하를 멀리하고 현명한 신하를 쓸 것을 논함
○ 민생의 안정을 논함
○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논함
○ 대의명분이 정치의 근본임을 논함

7. 임금에게 올린 거대한 상소문(만언봉사)

선조 3년, 율곡나이 35세 때 홍문관의 교리직책을 맡으면서 임금을 자문하는 역할을 맡았다. 율곡은 선조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 후 동료들과 연합하여 “을사사화의 가짜 공훈을 깎기를 논하는 상소”를 올린다. 동료들조차도 어렵게 여기고 회의 하는 상황에서 무려 41회에 걸친 상소를 하여 허락을 얻어냈다고 한다. 하지만 선조는 개혁의 의지도 없었고 그저 한때의 미봉책이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서서히 갈등의 관계로 접어들었다.
율곡과 선조는 서로 다른 입장차이 때문에 의견이 맞지 않았다. 율곡은 현재의 시대분위기와 선조의 행동의 잘못됨을 알리기 위해 상소문을 계속해서 올리고 그중 선조 7년, 율곡의 나이 39세에 올린 “만언(萬言)에 이르는 장편의 글로 임금에게 아뢰는 소”가 대표적인 것이다.

신이 생각하옵건대, 정사에 있어서는 때를 아는 것이 소중하고, 일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것에 힘쓰는 것이 긴요합니다. 정사를 하면서도 때에 알맞게 할 줄을 모르고, 일을 당하여 실질적인 공효(功效)에 힘쓰지 아니한다면, 비록 성왕(聖王)과 현신(賢臣)이 어울렸다고 하더라도 다스림의 효과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옵서는 총명하고 영특하시어 선비를 좋아하고 백성을 사랑하시며, 안으로는 음악과 주색을 즐기시는 일이 없으시고, 밖으로는 말을 달리며 사냥하는 기호를 끊고 계시며, 옛날의 임금님들이 마음을 흐리게 하고 덕을 해치는 일이라 하던 것들은 모두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노련하고 성숙한 이들에게 의지하고 인망이 있는 이들을 뽑아 쓰시며, 뛰어나고 훌륭한 이들을 널리 불러들이니 벼슬길이 점차로 맑아지고, 곧은 말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니 공정한 의론이 성행하여, 온 조야(朝野)가 흠모하면서 지극한 다스림을 보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기강(紀綱)이 바르게 떨쳐지고 민생(民生)은 생업을 즐기고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기강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개인의 이익만을 쫓고 공익은 무시하는 것이 옛날과 다름이 없고, 법령과 명령대로 행하여지지 않는 것도 옛날과 같으며, 여러 관리들이 직무를 태만히 하는 것도 옛날과 같습니다. 나라의 민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집안에 일정한 재산이 없는 것이 옛날과 같고, 흘러 다니며 일정히 살 곳을 잃고 있는 것도 옛날과 다름이 없으며, 방탕하고 사악하여 악한 짓을 일삼는 것도 옛날과 같습니다. 신은 일찍이 개탄을 하면서 속으로 그 까닭을 깊이 연구하여 한번 전하께 아뢰고자 하였으나 그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제 전하께옵서 천재로 말미암아 대신들을 깨우치신 교지(敎旨)를 보옵건대, 전하께옵서도 역시 크게 의심하시고 깊이 탄식하시며 진휼(振恤)할 방책을 듣기를 바라고 계시니, 이때야말로 뜻있는 선비라면 말을 다할 시기일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대신들은 지나치게 황송스럽고 당혹하여서 말로 그들의 뜻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략.......
살펴보건대, 지금의 시사(時事)는 날로 그릇되어 가고 있고, 백성들의 기력은 날로 소진(消盡)되어 가고 있으며, 그것은 권세 있는 간신들이 세도를 부렸을 적보다도 더 심한 듯하니,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권세 있는 간신들이 날뛰던 시절에는 조종(祖宗)들의 남겨주신 은택이 어느 정도 다하지 않고 남아 있어서, 조정의 정치는 혼란했다 하더라도 백성들의 힘은 어느 정도 지탱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조종들이 남기신 은택은 이미 다하고, 권세 있는 간신들이 남겨놓은 해독이 작용을 일으키고 있어서, 훌륭한 논의(論議)가 비록 행해진다 하더라도 백성들의 힘은 바닥이 나버렸습니다. 비유를 들면 마치 어떤 사람이 한창 젊었을 적에 술에 빠지고 여색(女色)을 즐기어 그 해독이 많겠으나, 혈기가 강성한 때문에 몸에 손상이 가는 줄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만년에 이르러서야 그 해독이 노쇠함을 따라 갑자기 나타나 비록 근신하며 몸을 보양한다 해도 원기(元氣)가 이미 쇠퇴하여 몸을 지탱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시사(時事)는 실로 이와 같으니, 10년이 못가서 화란이 반드시 일어나고 말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도 열 간(間)의 집과 백 묘(百畝)의 전답을 자손에게 물려주면 자손은 또 그것을 잘 지키어 선조들에게 욕되지 않게 할 것을 생각합니다. 하물며 지금 전하께서는 조종 백 년의 사직(社稷)과 천 리의 봉강(封疆)을 물려받으셨는데, 화란이 닥쳐오려 하고 있음을 어찌하시겠습니까.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해결책을 구한다면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해도 아주 엉뚱한 결과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며, 능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스스로 구제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전하께서는 권세를 거두어 잡으시고 사리(事理)에 밝으시며, 시국을 구원할 능력이 있으십니까.
소신(小臣)은 나라의 두터운 은총을 받아 백 번 죽는다 해도 보답하기 어려운 정도이니, 진실로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끓는 가마솥에 던져지고 도끼로 목을 잘리우는 형벌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신은 피하지 않겠습니다.
- 율곡전서, 권5, 소차3, 만언봉사 -

이 글에는 7가지의 걱정해야 할 일들을 지적하고 있다.
Ⅰ. 상 하간 서로 믿는 실상이 없다
Ⅱ. 관료가 일을 책임지는 실상이 없다
Ⅲ. 임금이 경연에 참석은 하지만 덕을 성취하는 실상이 없다.
Ⅳ. 현명한 인물을 불러오기는 하지만 그의 계책을 수용하는 실상이 없다
Ⅴ. 하늘이 내린 재변을 만나도 반성하여 하늘의 뜻에 응하는 실상이 없다.
Ⅵ. 많은 계책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백성을 구제하는 실상이 없다.
Ⅶ. 사람들의 마음이 선한 곳으로 향하는 실상이 없다.

8. 훌륭한 임금 만들기

나라는 점차 병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회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정치가 문란해지기 시작했으며 백성들의 생활도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율곡은 유교의 ‘수기치인’ 곧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로 성학집요를 저술했고 그 효과가 제왕뿐만 아니라 일반백성에게 미치는 것을 소망하였다.

※성학집요 목록도

1. 통설(統說: 수기, 정가, 위정의 총론)

2. 수기(修己)
총론
總論입지
立志수렴

斂궁리
窮理성실
誠實교기질矯氣質양기
養氣정심
正心검신
檢身회덕량
恢德量보덕
報德돈독
敦篤공효
功效

3. 정가                                       
총론
總論효경
孝敬형내
形內교자
敎子친친
親親근엄
謹嚴절검
節儉공효
功效총론
總論취선
取善명교
明敎용현
用賢공효
功效식시무
識時務근천계
謹天戒안민
安民법선왕
法先王입기강
立紀綱
                                         
4. 위정

5. 성현 도통(聖賢道統: 수기, 정가, 위정을 극진히 함)

9. 후반기에 접어드는 율곡의 삶

여러 번의 상소문등으로 인해 선조와의 정신적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율곡은 상당한 고뇌를 겪었다. 결국 율곡은 벼슬을 버리고 황해도 거주 땅으로 내려가 지낸다. 율곡이 해주에 머무른 1570년 12월 그는 인편을 통하여 퇴계선생의 부음을 들었다. 이때 그가 지은 “퇴계선생을 곡함” 이라는 시로서 슬픔을 표현했다.

좋은 옥 정한 금처럼 순수한 정기 타고 나시어,〔良玉精金氣純〕
참된 근원은 관민에서 갈려나왔다.            〔眞源分派自關
백성들은 위아래에 혜택 입기를 바랐건만,〔民希上下同流澤〕
자신의 행적은 산림에서 홀로 몸을 닦으셨네.〔迹作山林獨善身〕
호랑이 떠나고 용도 사라져 사람의 일이 변했건만,〔虎逝龍亡人事變〕
물결 돌리고 길을 여신 저서가 새롭구나.〔瀾回路闢簡編新〕
남쪽 하늘 아득히 저승과 이승이 갈리니,〔南天渺渺幽明隔〕
서해 물가에서 눈물 마르고 창자 끊어집니다.〔淚盡腸西海濱〕
- 율곡전서, 권2, 시, 퇴계선생을 곡하다 -

그 후에도 가족의 질서유지를 위해 지은 ‘동거계사’와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해 지은 ‘학교모범’등을 지었다.

함께 살아감에 있어 경계할 말을 덧붙이다
【본래는 언문으로 기록되었으나 여기서는 송시열의 한역문(漢譯文)을 붙임.】

형제는 본래 부모의 한 몸에서 나뉘었으므로 한 몸이나 다름이 없으니, 마땅히 서로 친애하여 너니 나니, 남이니 나니 하는 마음이 조금도 있어서는 안 된다. 옛 사람 중에는 9족(族)이 한 집에서 함께 살던 일도 있었거늘, 하물며 우리들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맏형마저 진작 작고해버린 고단한 처지가 아닌가........
효도는 온갖 행실의 근원인데, 부모들이 이미 작고했으니, 다시 효도해 볼 곳은 없고 다만 제사지내는 일 한가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젊은이들이 부모를 섬기는 데는 반드시 옛 성인의 훈계로 마음을 다져서 효도를 극진히 해야 할 것이다.......
한집안 내에서 숙부는 아버지를 섬기는 예와 같이하고, 종형제는 친형제를 섬기는 예와 같이하여 서로 친애하기를 마치 자기의 몸을 아끼듯 할 것이며, 서로 대할 때 몸가짐은 반드시 공순히 하고 말씨는 반드시 화열하게 하고 안색은 반드시 평온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한집안 사람들은 서로 화목하기를 힘써야 한다. 마음이 화평하면 집안에 좋은 일만 반드시 모일 것이고, 만약 서로 삐치고 뒤틀면 불길한 기운이 생길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은가. 우리들은 서로 모여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은 어버이에게 효도하며, 남편은 아내에게 모범이 되고 아내는 남편에게 공경하며, 형은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는 형에게 순종하며 처는 첩을 사랑하고 첩은 처에게 공순하며, 젊은이는 성심으로 어른을 섬기고, 어른은 성심으로 젊은이를 사랑하며, 비록 미급한 일이 있더라도 모름지기 조용히 경계하고 서로 성내지 말 것이다. 그리고 선행을 하는 사람이 있거든 서로 다투어 그를 본받을 것이며, 불평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서로 참아야 할 것이다. 가주(家主)의 경우도 비복을 자애(慈愛)하고 비복은 가주를 경애(敬愛)해야 절대 불평한 말이 없고 불평한 기색이 없으며, 온 집안에 항상 화선(和善)한 기운이 돈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모름지기 각각 이 뜻을 알아서 스스로 힘쓰는 것이 옳다.
- 율곡전서, 권16, 잡저 3, 동거계사 -

이제 지난날의 물든 습속을 일소하고 선비의 기풍을 크게 변화시켜 보려고, 선비를 가려 뽑고 가르치는 방법을 다하여서 성현의 모훈(謀訓)을 대략 본받아 「학교모범」을 만들어서, 여러 선비들로 하여금 몸을 가다듬고 일을 처리해나가는 규범을 삼게 하는 바이다. 모두 16조이니, 제자 된 자는 진실로 마땅히 지켜 행하여야 되고, 스승 된 자는 더욱 이것으로써 먼저 제 몸을 바로 잡아, 이끄는 도리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1)은 뜻을 세움이니, 배우는 자는 먼저 뜻을 세워야 하며 도(道)로써 자신의 임무를 삼아야 한다.
(2)는 몸을 단속함이니, 배우는 자가 한번 성인이 되겠다는 뜻을 세우고 나서는, 반드시 구습을 씻어버리고, 오로지 배움을 향하여 몸가짐과 행동을 다잡아야 한다.
(3)은 독서이니, 배우는 자가 선비의 행실로 몸가짐을 단속하고 나서는 반드시 독서와 강학(講學)으로써 의리를 밝혀야 하니, 그런 뒤에 학문에 나아가야 공부의 방향이 흐리지 않는 것이다.
(4)는 말을 삼감[愼言]이니, 배우는 자가 선비의 행실을 닦으려 하면 반드시 추기(樞機)를 삼가야 한다.
(5)는 본마음을 간직함이니, 배우는 자가 몸을 닦으려면 반드시 안으로 마음을 바로 잡아 외물(外物)의 유혹을 받지 않아야만 된다는 것이니, 그런 뒤에야 마음이 편안해 온갖 사악(邪惡)이 물러나서 바야흐로 실덕(實德)에 나아가게 된다.
(6)은 어버이를 섬김이니 선비의 온갖 행실 중에 효도하고 어른께 순종함을 근본으로 삼으니, 삼천 가지 죄목 중에 불효가 가장 큼을 말한다.
(7)은 스승을 섬김이니, 배우는 자가 성심으로 도에 뜻을 두었으면 반드시 먼저 스승을 섬기는 도리를 융숭히 하여야 한다.
(8)은 벗을 가림이니, 도를 이어받고 의혹을 푸는 것은 스승에게 있다 하더라도, 서로 갈고 닦아 인(仁)을 돕는 것은 실로 벗에게 힘입어야 함을 말한다.
(9)는 가정생활이니, 배우는 자가 몸과 마음을 닦고 나서는 가정생활에서 윤리를 다하여야 한다.
(10)은 사람을 응접함이니, 배우는 자가 가정을 바로잡고 나서는 남을 대할 때 한결같이 예의로 지켜야 한다.
(11)은 과거에 응시함이니, 과거는 비록 뜻있는 선비가 조급히 서두를 것은 아니나, 또한 근세에는 그것이 벼슬길에 들어가는 통규(通規)이다.
(12)는 의리를 지킴이니, 배우는 자는 의(義)와 이(利)를 밝게 분별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다.
(13)은 충직함을 숭상함이니, 충후(忠厚)와 기절(氣節)은 서로 안팎이 되는 것이나, 스스로 지키는 절도가 없이 두루뭉술한 것으로 충후한 체하는 것도 옳지 못하며, 근본적인 덕이 없이 과격한 것으로써 기절인 체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14)는 공경을 돈독히 함이니, 배우는 자가 덕에 나아가고 학업을 닦는 것은 오직 공경을 돈독히 하는 데에 있다.
(15)는 학교에 거처함이니, 배우는 자가 학궁(學宮)에 있을 때에는 모든 행동지시를 일체 학령(學令)에 따라야 한다.
(16)은 글 읽는 방법이니, 매월 초하루 보름에는 여러 유생이 학당에 함께 모여 문묘(文廟)에 배알하고 읍례(揖禮)를 마친 뒤 좌정하여【스승이 있으면 북쪽에 앉고 여러 유생들은 삼면에 앉는다.】 장의(掌議)【장의가 유고 시에는 유사(有司) 또는 글 잘 읽는 자가 대신한다.】가 소리 높여 ≪백록동교조(白鹿洞敎條)≫와 ≪학교모범≫을 한 번씩 읽는다.
- 율곡전서, 권15, 잡저2, 학교모범 -

1583년 여름 율곡은 “국가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렀다”는 것과 “교만하여 임금을 업신여겼다.”는 당시 삼사의 관료들의 주장으로 탄핵을 당한다. 그리고 1584년 선조17년, 향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4. 율곡의 철학사상

Ⅰ. 이기의 개념

율곡은 주자의 견해를 따르면서도 이와 기가 그 존재에 있어서건 혹은 동작에 있어서건 두 가지 물건으로 파악하지 않고 ‘서로 떠날 수 없음(不能相)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와 기의 상호간의 발용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이 점에 있어서 ’이‘와 ’기‘가 서로 각기 동작하는 바가 있다는 퇴계의 이른바 ’理氣互發說‘에 반대하고 있다.)

대저 ‘이’는 ‘기’를 주재하는 것이요, ‘기’는 ‘이’가 얹혀 타는 바이네. ‘이’가 아니면 ‘기’는 뿌리를 내릴 곳이 없고, ‘기’가 아니면 ‘이’는 의지할 데가 없네....... 대체로 발동하는 것은 ‘기’요 발동하게 하는 까닭은 ‘이’이네. ‘기’가 아니면 발동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발동하게 하는 근거가 없다네. 이 두 가지는 앞뒤가 없고, 떠나고 합해지는 것이 없으며, 상호 서로 발동한다고 말 할 수 없네
- 율곡전서, 권10, 서2 -

이상과 같이 율곡은 이와 기의 관계를 말하면서 ‘이’를 하나의 스스로 밝은 원리로 파악하고 ‘기’를 그 원리를 실현하는 능동적인 힘으로 파악하고 있다.

2. 이기의 미묘함

‘이’와 ‘기’의 문제를 이해함에 있어서 율곡은 주자나 화담 또는 퇴계등에 비하여 절충적인  묘합의 논리를 주장한다.

‘이’와 ‘기’는 한 가지 물건인가 아니면 두 가지 물건인가 하고 묻는 질문이 있었다. 내가 답하였다. 앞선 교훈을 살펴보건대 ‘이’와 ‘기’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이’와 ‘기’는 혼연하여 사이가 없어서, 원래 떨어지지 않은 까닭에 두 물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자는 말씀하시기를, “그릇은 또한 도이요, 도는 또한 그릇이다.”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자는 비록 떨어지지 않을지라도 혼연한 가운데 실지로는 섞이지 않아서 한 가지 물건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자가 말씀하시되. “‘이’는 스스로 ‘이’요 ‘기’는 스스로 ‘기’이어서 서로 섞이지 않는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말씀을 합하여 깊이 생각하면 이, 기의 미묘함을 거의 알 수 있습니다.
- 율곡전서, 권20, 성학집요2 -

이것을 바탕으로 이기의 묘합을 정리하면
○ ‘이’와 ‘기’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다
○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지지 않고 또한 서로 섞이지 않는다.
○ ‘이’와 ‘기’는 혼연하여 사이가 없다.
○ ‘기’가 발동할 때 ‘이’는 얹혀 탄다.

3.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

이가 통한다는 것은[理通]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이는 본말도 없고 선후도 없습니다. 본말도 없고 선후도 없으므로 아직 감응하지 아니하였을 때에도 먼저인 것이 아니며, 이미 감응하였을 때에도 뒤인 것이 아닙니다.【정자(程子)의 설이다.】 그러므로 기를 타고 유행하여 천태만상으로 고르지 아니하나 그 본연의 묘리(妙理)는 없는 데가 없습니다. 기가 치우치면 이(理)도 역시 치우치게 되나 그 치우친 바는 이가 아니라 기이며, 기가 온전하면 이도 역시 온전하나, 온전한 바는 이가 아니라 기입니다. 맑고 탁하고 순수하고 잡박한[淸濁粹駁] 것과 찌꺼기·재·거름·오물[糟粕燼糞壤穢]가운데도 이가 있지 않은 곳이 없어, 각각 그 성(性)이 되지만 그 본연의 묘리는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이것을 이(理)는 통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가 국한된다[氣局]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기는 이미 형적(形迹)에 관계되기 때문에, 본말이 있고 선후가 있습니다. 기의 본체는 담일청허(湛一淸虛)할 뿐이니, 어찌 일찍이 조박(糟粕) 외신·분양(糞壤)·오예 등의 기가 있으리오마는, 오직 그것이 승강비양(升降飛揚)하여 조금도 쉬지 않으므로 천태만상으로 고르지 않아 만 가지 변화가 생깁니다. 이에 기가 유행할 때에 그 본연을 잃지 않는 것도 있고, 그 본연을 잃어버리는 것도 있으니, 이미 그 본연을 잃어버리면 기의 본연은 이미 있는 데가 없습니다. 치우친 것은 치우친 기요 온전한 가가 아니며, 맑은 것은 맑은 기요 탁한 기가 아니며, 조박(糟粕)·외신은 조박·외신의 기요 담일청허(湛一淸虛)의 기가 아니니, 이는 이(理)가 만물 가운데서 그 본연의 묘리가 어디서나 그대로 있지 않는 것이 없는 것과 같지 않으니, 이것이 이른바 “기의 국한[氣之局]” 이란 것입니다.
- 율곡전서, 권10, 서2 , 성호원에게 답하다 -

이, 기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다 (율곡)  이는 귀하고 기는 천하다 (퇴계)

4. 인심도심설

율곡은 마음(心), 본성(性), 정(情) 세 가지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확연하게 구별하여 정의하고 있다. 즉, 마음이야말로 한 몸의 주재가 되고, 본체와 작용의 기미가 되며,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을 모두 포섭하는 개념으로서, 마침내는 본성과 정을 통섭하는 것이다. 율곡은 이와 같이 마음 자체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마음의 기능면에서 인심과 도심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신(臣)은 살피건대 천리(天理)가 사람에게 부여(賦與)된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과 기(氣)를 합하여 일신에 주재(主宰)된 것을 심(心)이라 이르며, 심이 사물(事物)에 감응(感應)하여 외부에 발현(發見)된 것을 정(情)이라고 이릅니다. 성은 바로 마음의 본 체(體)요 정은 바로 마음의 작용(用)이며 심은 바로 미발·이발(未發已發)의 총명(總名)입니다. 그러므로 심통성정(心統性情)이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성의 조목이 다섯이 있으니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요, 정의 조목이 일곱이 있으니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입니다. 정이 발하는 데는 도의(道義)를 위하여 발하는 것이 있습니다. 가령 어버이에게 효도하고자 하고 임금께 충성하고자 하는 것과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측은(惻隱)해하며 옳지 않은 것을 보고 수오(羞惡)하며, 종묘(宗廟)를 지나갈 때 공경하는 유(類)와 같은 것이니, 이것을 도심(道心)이라 이릅니다. 구체(口體)를 위하여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가령 주리면 먹으려 하고 추우면 입으려 하고 피로하면 쉬려고 하며 정기(精氣)가 왕성하면 아내를 생각하는 유와 같은 것이니 이것을 인심이라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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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은 순수(純粹)한 천리(天理)이므로 선만이 있고 악은 없으며 인심은 천리도 있고 인욕도 있으므로 선도 있고 악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마땅히 밥을 먹어야 할 때 먹는 것이나 마땅히 옷을 입어야 할 때 입는 따위는 성현도 이를 면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은 천리이고, 식색(食色)의 생각으로 인하여 흘러서 악이 되는 것은 인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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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을 가지고 관찰하건대 칠정(七情)은 인심과 도심, 선과 악의 총합된 명칭입니다. 맹자는 칠정 중에 나아가 선한 것 한쪽만을 뽑아내어 사단(四端)으로써 지목하였으니, 사단이란 곧 도심 및 인심의 선한 것입니다. 사단에 신(信)을 말하지 않은 것은 정자가 말하기를 “이미 성심이 있어 사단이 된 것이니 신이 그 가운데 있다.” 하였습니다. 대개 오성(五性)의 신(信)은 오행(五行)의 토(土)와 같아서 정위(定位)가 없고 전기(專氣)가 없이 사시(四時)에 기왕(寄旺)하는 것입니다. 논하는 사람이 혹은 사단을 가지고 도심을 삼고 칠정으로 인심을 삼기도 하니, 사단은 진실로 도심이라고 이를 수 있으나 칠정이야 어찌 인심이라고만 이를 수 있겠습니까. 칠정 이외에 다른 정이 없는데, 만약 치우치게 인심만을 지칭(指稱)한다면 이것은 그 절반만 들추고 절반은 버린 것입니다.
- 율곡전서, 권14, 설, 인심도심설 -

* 율곡의 인심도심설에 대한 견해
- 인심 도심설을 한 마음(一心)에 근원을 두었다.
- 퇴계는 인심은 칠정이 되고 도심은 사단이 된다고 주장하는데 대해 율곡은 사단이 도심인 것은 가하나 칠정은 인심+도심 이라고 말한다.
- 인심과 도심이 서로 시작과 끝의 관계가 있다.


자료정리:김철중 ztoa99@hanmail.net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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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