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5

« 2024/5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2010. 4. 29. 16:51

실천이성비판(칸트)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29. 16:51


1. 작가 소개

-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

동(東)프로이센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칼리닌그라드)에서 출생하였다. 프랑스 혁명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그 이전의 서유럽 근세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고, 그 이후의 발전에 새로운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 영향은 여러 가지 형태로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으며, 근세 철학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마구(馬具) 제조업자인 아버지와 경건하고 신앙심 두터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루터교 목사가 운영하던 경건주의학교에 입학하여 8년 6개월 동안 라틴어 교육을 받은 후 고향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또 모교의 교수로 일생을 마쳤다.

스코틀랜드에서 이민해 온 변경(邊境)의 소시민 가정에서 장성한 칸트는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의 계몽적인 시민육성책의 혜택도 받을 수 있어 지리적 ·역사적 조건이 그의 철학으로 하여금 독일적 특수성을 떠나 참다운 ‘세계시민적’인 철학이 되게 하였다. 대학 재학 중에는 당시의 신사상이었던 뉴턴역학에 특히 관심을 두었다. 이 방면에 대한 연구는 대학 졸업 후 10년이 지나 모교의 강사직을 얻은 1755년에 《천계(天界)의 일반자연사와 이론 Allgemeine Naturgeschichte und Theorie des Himmels》 으로 결실을 보았다. 이 저작에서 그는 뉴턴역학의 모든 원리를 확대 적용하여 우주의 발생을 역학적(力學的)으로 해명하려고 하였는데, 후일 ‘칸트-라플라스의 성운설(星雲說)’로 널리 알려지게 된 획기적인 업적을 수립하였다. 뉴턴의 방법의 철저한 적용이라는 이 대담한 시도는 목적론적 세계관에의 귀의(歸依)와 표리일체를 이루며 그것의 바탕 위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일면을 지닌다.

그는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 에서 뉴턴의 수학적 자연과학에 의한 인식구조에의 철저한 반성을 통하여, 종래의 신(神)중심적인 색채가 남아 있는 형이상학의 모든 개념이 모두 인간 중심적인, 즉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학적인 의미로 바뀌어야 되는 이유를 들고, 나아가 일반적 ·세계관적 귀결을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 인식이 성립되는 장면을 해명해야 할 인간학적 형이상학을 새로 수립하는 일을 통하여, 종래의 신적 형이상학(神的形而上學)이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이유를 제시한 것이다.

제2의 비판서인 《실천이성비판(實踐理性批判)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1788)에서 칸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율적 인간의 도덕을 논하고, 실천의 장(場)에서의 인간의 구조에 ‘불가결한 요청(要請)’이라는 형태로 신(神) ·영세(永世) 등의 전통적 형이상학의 내실을 재흥시켜 그것이 새롭게 인간학적 철학에서 점유할 위치를 지적하였다. 종교를 도덕의 바탕 위에 두는 이 구상(構想)은 그 후의 《종교론》(1793)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이상 두 가지 비판서로 명백하게 된 인식과 실천이라는 두 개의 장면을 매개하고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장(場)의 구조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새로운 인간학적 철학을 종결짓고자 구상된 것이 제3의 비판서인 《판단력비판(判斷力批判) Kritik der Urteilskraft》(1790)이다. 여기서 칸트는 미(美)와 유기체(有機體)의 인식이라는 장면의 분석을 통하여 목적론적 인식의 구조를 명백히 하고, 또한 목적론과 기계론의 관계라는, 일생의 과제이며 동시에 세기적 과제에 비판적 해결을 부여하여 스스로의 철학적 노력을 결말지은 것이다.

이상 3권의 비판서에 의하여 그 토대가 놓여진, 비판철학 사상과 밀접히 관련하여, 또는 그 위에 기초한 사고(思考)를 전개한 기타의 주요 저서로는 《순수이성비판》의 해설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프롤레고메나 Prolegomena》(1783), 《실천이성비판》에 앞서 비판적 논리학의 기본구상을 기술한 《도덕형이상학원론(道德形而上學原論)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1785), 이것에 기초한 법철학 ·도덕철학의 구체적 체계를 전개한 《도덕형이상학 Metaphysik der Sitten》(1797), 그 자매편으로 자연철학의 체계를 전개한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원리 Metaphysische Anfangsgrunde der Naturwissenschaft》(1786)가 있다. 또 오랜 기간의 강의를 정리하여 출판한 《인간학》(1798) 《자연지리학》(1802)은 칸트의 폭넓은 실제적 지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칸트의 철학은 3권의 비판서 간행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예나를 비롯한 몇 곳을 거점으로 하여 순식간에 전독일의 대학 ·논단을 석권하였고, J.G.피히테에서 G.W.F.헤겔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 철학의 선두 주자로서, 또 그 모태로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 영향은 다시 영국 ·프랑스의 이상주의철학까지 미쳤으며, 특히 후일의 독일 신(新)칸트학파의 철학은 칸트의 비판주의의 직접계승을 지향한 것이었다. 또한 신칸트학파 퇴조 후에 나타난 수많은 철학 조류도 모두 직접 ·간접으로 칸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 네이버 백과사전


2. 칸트 철학의 대강

칸트 철학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도대체 <인간은 무엇인가?>이다. 그러나 이 물음에서 <인간은 이성적 존재자다.>라는 형식적 규정은 이미 전제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물음은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의 보다 실질적인 규정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 관한 이 실질적인 규정은 다음의 세 물음에 대한 답을 통해 얻어지는바, 그것들은 곧, 이성적 조재자로서 인간인 1) 나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3)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괜찮은가? 이다.

그런데 위의 세 물음을 통해 칸트가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 이성에게 허용되는 지식, 행위, 희망의 가능 근거와 범위이다. 그리고 칸트가 이것을 알아내기 위해 하는 작업이 <인간 이성의 비판>이다.

인간 이성에게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표상하고 관조(觀照)하는 능력이 있으며, 있는 것을 극복하거나 있지 않은 것을 있도록 만드는 실천(實踐)하는 능력이 있고,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특수 사례들을 반성(反省)해서 통일적 원리를 생각해 내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칸트는 인간의 일체의 의식 활동의 원리인 이성을 세 면에서 고찰하며, 그 세면을 각각 <이론적 이성>, <실천적 이성>, <반성적 판단력>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세면에서의 이성의 대표적인 가치 활동을 각각 인식작용, 도덕 행위, 합목적적 판단이라고 본다.

칸트에서 <이성 비판>이란 그러므로 인간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인식할 수 없는 것,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과 행해서는 안 될 것, 합당하게 희망해도 좋은 것과 희망할 수 없는 것을<분간해 내는 일>이다. 이것은 바로 이성 자신이 자신의 한계를 규정하는 작업을 뜻하며, 이때 한계 규정되는 이성은 순수한 이성이다. 문제되는 이성이 <순수>한 것이라 함은 여기서의 이성의 한계 규정작업은 철학적 작업이고, 철학적 작업의 대상은 <이성이 그 자체로서, 어떠한 감각적 경험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가 감각 경험하는 이성의 활동 내용을 탐구한다면, 그것은 여타의 자연물의 운동에 관한 탐구나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답을 얻기 위한 칸트의 철학적 작업은 <순수 이성 비판>일 수밖에 없고, 세 방면에서의 <순수한 이성 비판>작업의 결실이 각각 그의 이론 철학과 실천 철학, 그리고 희망의 철학의 내용이다. 이것은 요즘 학교에서의 철학 개념으로 말하면 각각 존재 형이상학(인식론/존재론), 윤리 형이상학(윤리학), 그리고 종교 철학 및 역사 철학에 상응한다.


3. 원전의 목차

머리말

서설: 실천 이성 비판의 이념

제1편  순수 실천 이성의 요소론
   제1권  순수 실천 이성의 분석학
       제1장  순수 실천 이성의 원칙들
           §1. 설명
               주해
           §2. 정리 Ⅰ
           §3. 정리 Ⅱ
               계(系)
               주해 Ⅰ
               주해 Ⅱ
           §4. 정리 Ⅲ
               주해
           §5. 과제 Ⅰ
           §6. 과제 Ⅱ
               주해
           §7. 순수 실천 이성의 원칙
               주해
               계(系)
               주해
           §8. 정리 Ⅳ
               주해 Ⅰ
               주해 Ⅱ
         Ⅰ. 순수 실천 이성 원칙들의 연역
         Ⅱ. 사변적 사용에서는 그 자체로 가능하지 않은 순수 이성의 확장을 위한 실천적 사용에서의 순수 이성의 권한
       제2장 [실천 이성의 분석학] 순수 실천 이성의 대상 개념
           선 및 악의 개념과 관련한 자유의 범주들 표
           순수한 실천적 판단력의 범형[範型]
       제3장 순수 실천 이성의 동기들
           순수 실천 이성의 분석학에 대한 비판적 조명

   제2권  순수 실천 이성의 변증학
       제1장  순수 실천 이성 일반의 변증학
       제2장  최고선의 개념 규정에서 순수 이성의 변증학
           Ⅰ. 실천 이성의 이율배반
           Ⅱ. 실천 이성의 이율배반의 비판적 지양
           Ⅲ. 사변 이성과의 결합에서 순수 실천 이성의 우위
           Ⅳ. 순수 실천 이성의 요청으로서 영혼의 불멸성
           Ⅴ. 순수 실천 이성의 요청으로서 신의 현존
           Ⅵ. 순수 실천 이성의 요청들 일반
           Ⅶ. 그 인식을 동시에 사변적으로 확장함이 없이 실천적 의도에서 순수 이성 의 확장을 생각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Ⅷ. 순수 이성의 요구[필요]에 의한 동의
           Ⅸ. 인간의 실천적 사명에 현명하게 부합하는 인간 인식능력들의 조화

제2편 순수 실천 이성의 방법론

맺음말


4. 책의 내용

- 자유란

"무릇 자유 개념은, 그것의 실재성이 실천 이성의 명증적인 법칙에 의해 증명되는 한에 있어서, 순수 이성의, 그러니까 사변 이성까지를 포함한, 체계 전체 건물의 마룻돌[宗石]을 이룬다. 그리고 아무런 받침대도 없이 순전한 이념들로 사변 이성에 남아 있는 (신이니 [영혼의] 불멸성이니 하는 등의) 여타의 모든 개념들은 이제 이 개념에 연결되어, 이 개념과 함께 그리고 이 개념을 통하여 존립하고 객관적 실재성을 얻는다. 다시 말해, 이 개념들의 가능성은 자유가 현실적으로 있다는 사실에 의거해 증명된다. 이 [자유의] 이념은 도덕 법칙에 의해 개시[開示]되기 때문이다."(4,5)

"법칙의 일체의 질료(곧, 욕구된 객관들)로부터의 독립성과 동시에 그와 함께, 하나의 준칙이 그것이 될 수밖에 없는 순전히 보편적인 법칙 수립적 형식에 의한 자의의 규정에 윤리성의 유일한 원리는 성립한다. 그러나 저 독립성은 소극적 의미에서 자유이고, 이 순수한 그 자체로서 실천적인 이성 자신의 법칙 수립은 적극적 의미에서 자유다. 그러므로 도덕 법칙은 다름 아니라 순수 실천 이성, 다시 말해 자유의 자율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 자유는 그 자체가, 그 아래에서만 준칙들이 최상의 실천 법칙에 부합할 수 있는, 모든 준칙들의 형식적 조건이다." (12, 13)

"자유의 최초의 개념은 소극[부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를 직접적으로 의식할 수가 없고, 또한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현상들의 법칙만을, 그러니까 자유와는 정반대되는 자연의 기계성만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자유를 추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우리가 의지의 준칙을 개략적으로 그리자마자) 의식되는 것은 도덕 법칙이다. 도덕 법칙은 우리에게 맨 처음에 주어지는 것이다. 이성은 도덕 법칙이 어떠한 감성적 조건에 의해서도 압도되지 않는, 도대체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독립적인 규정 근거임을 보여줌으로써, 바로 자유의 개념에 이른다."(53)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자유는 책임과 의무라는 개념의 자유가 아니라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인간적으로 행위 할 수 있음을 말하는 자유일 것이다. 필연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행동의 원인에 대한 선택이 자유롭다는 것이고, 자신의 행위가 짐승 같은 본성 -행여 그런 본성이 있다면- 에 의한 것이 아닌 자유를 지녔다는 것이다.

-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이 비판에는 <순수 실천 이성 비판>이 아니라, 그저 <실천 이성 비판>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실천 이성과 사변 이성을 병렬시킴은 저런 이름을 요구하는 듯이 보임에도 말이다. 그 까닭은 이 논고가 충분히 해명해 줄 것이다. 이 논고는 순수 실천 이성이 있다는 것만을 밝히고, 이 의도에서 그것의 전 실천적 능력을 비판한다. 만약 이 일이 성공을 거둔다면, 이 논고가 (사변 이성에서 능히 일어나는 바와 같이) 혹시 순전히 월권적으로 이성이 그러한 순수 능력을 가지고서 자기 분수를 넘어서지나 않을까를 알기 위해, 순수 능력 자체를 비판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성이 순수 이성으로서 실제로 실천적이라면, 이성은 자기의 실재성과 자기 개념들의 실재성을 행위를 통하여 증명할 것이고, 그런 가능성에 반대되는 일체의 궤변은 헛된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3)

"이에 반해 이제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이전에는 거의 기대할 수 없었던 매우 만족스러운, 사변적 비판의 일관성 있는 사유 방식의 확인이 시작된다. 곧, 사변적 비판은 경험의 대상들 그 자체와 그 가운데 있는 우리 자신의 주관을 단지 현상들로 보지만, 그럼에도 현상들의 근거에 사물들 그 자체를 두도록, 그래서 모든 초감성적인 것을 가공적인 것으로 그리고 그것의 개념을 내용에 있어서 공허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가르쳤는데, 실천 이성은 이제 독자적으로, 다시 말해 사변 이성과 협의함이 없이, 인과성 범주의 초감성적 대상, 곧 자유에다 실재성을 부여한다(비록 이 자유가 오로지 실천적 사용을 위한 실천적 개념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저 사변 이성에서는 한낱 생각될 수 있던 것이 [실천 이성에서는] 하나의 사실에 의해 확인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제 동시에, 사고하는 주체[주관]조차도 내적 직관에서 그 자신에게는 한낱 현상일 뿐이라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러나 기이한 사변적 비판의 주장 또한 실천 이성 비판에서 완전한 확인을 받는다. 그래서 전자가 이 명제를 결코 증명한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이런 확인에 이르지 않을 수가 없다."(9-10)

"이성의 이론적 사용은 순전한 인식 능력의 대상들에 종사하였고, 이런 사용과 관련한 이성 비판은 본래 단지 순수한 인식 능력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이 인식 능력은 후에 가서 입증된 바, 쉽사리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 혹은 도달할 수 없는 대상들 사이에서 혹은 심지어 서로 모순 되는 개념들 사이에서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혐의를 불러일으켰으니 말이다.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는 사정이 이미 전혀 다르다. 실천적 사용에서 이성은 의지의 규정 근거들에 종사하는 바, 의지란 표상들에 대응하는 대상들을 산출하거나 이런 대상들을 낳도록([그 자신의] 자연적 능력이 충분하든 그렇지 못하든) 자기 자신을, 다시 말해 자기의 원인성을 규정하는 능력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적어도 이성은 의지를 규정하기에는 충분하고, 의욕만이 문제가 되는 한에서 그것은 언제나 객관적 실재성을 갖기 때문이다."(29, 30)

여기에서 순수이성(사변이성)과 실천이성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자유의 문제에서 순수이성은 오직 인과적인 질서만이 있지만 행위에 있어서 자유는 실천이성에서 드러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 법칙과 준칙

칸트는 인간은 도덕 법칙에 거역하는 준칙을 갖지 않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에 무한히 접근해 가는 것이 "이성적 존재자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의지의 자율은 모든 도덕 법칙들과 그에 따르는 의무들의 단 하나의 원리다. 이에 반해 자의의 모든 타율은 무책임의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책임 및 의지의 윤리성의 원리에 맞서 있다. 곧, 법칙의 일체의 질료 (곧, 욕구된 객관들)로부터의 독립성과 동시에 준칙이 그에 부합해야 하는 순전히 보편적인 법칙 수립적 형식에 의한 자의의 규정에 윤리성의 유일한 원리가 성립한다. 그러나 저 독립성은 소극적 의미에서 자유이고 이 순수한 그 자체로서 실천적인 이성 자신의 법칙 수립은 적극적 의미에서 자유다. 그러므로 도덕법칙은 다름 아니라 순수 실천이성의, 다시 말해 자유의 자율을 표현한다. " (59)

"그렇게 해서 행위들은 한편으로는 자연 법칙이 아니라 자유의 법칙인 하나의 법칙 아래 있고, 따라서 예지적 존재자들의 태도에 속하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감성 세계 안의 사건들로서 현상들에 속하는 것이므로, 실천 이성의 규정들은 후자와 관련해서만, 따라서 지성의 범주들에 의거해서이기는 하지만, 지성의 이론적 사용의 관점에서 (감성적) 직관의 잡다를 선험적인 한 의식 아래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잡다한 욕구들을 도덕 법칙에 의해 명령하는 실천 이성 내지는 선험적 순수 의지의 통일 의식에 종속시키기 위해서, 생길 수 있을 것이다."(116)

도덕 법칙은 인간이 자신에게 부과하고, 인간답기 위해 스스로 따라야 하는 명령이며 인간이 악으로 나아갈 수 도 있는 자연적 경향성을 제압하고 스스로를 도덕법칙 아래에 세워야 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인격적 존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쾌 또는 불쾌 ― 이것은 언제나 단지 경험적으로 인식되며,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타당할 수는 없는 것인데 ―라는 수용성의 주관적인 조건에만 근거하는 원리는 그러한 수용성을 지닌 주관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준칙으로 쓰일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 자신만으로는 (이 원리에는 선험적으로 인식되어야 할 객관적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법칙으로 쓰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원리는 결코 실천 법칙을 제공할 수가 없다."(39, 40)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들이 그들의 만족이나 고통의 감정의 대상들로 받아들여야 할 것과 관련해서, 그리고 또한 동시에 심지어는 만족을 얻고 고통을 방지하기 위해 그들이 쓸 수밖에 없는 수단과 관련해서조차 예외 없이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해도, 그래도 자기 사랑의 원리가 그들에 의해 실천 법칙이라고 결코 주장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일치 자체가 단지 우연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규정 근거는 아무래도 언제나 주관적으로만 타당하고, 한낱 경험적인 것으로, 모든 법칙에서 생각되는 그런 필연성, 곧 선험적 근거들에 의한 객관적 필연성을 갖지 못할 것이다.”(47)

"실천 법칙이란 철저하게 객관적 필연성을 갖는 것이지 한낱 주관적 필연성을 갖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이성에 의해 선험적으로 인식되지, 경험에 의해 ― 이 경험이 비록 경험적으로 제 아무리 보편적이라 하더라도 ―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47)

행복이나 행복하지 않음에 따라 행위를 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관적이고 경험적이기 때문에 도덕 법칙으로는 볼 수 없다.

-최고선, 영혼 불멸 그리고 신의 현존

"최고는 최상(最上)을 의미할 수도 있고, 완벽(完璧)을 의미할 수도 있다. 전자는 자체로 무조건적인, 다시 말해 다른 어떠한 것에 종속되지 않는 그러한 조건 (곧, 原本)이다. 후자는 같은 종류의 더 큰 전체의 어떤 부분이 아닌 그런 전체 (곧, 完全)이다."(198)

“무릇 덕과 행복이 함께 한 인격에서 최고선을 소유하고, 이 경우에도 행복이 (인격의 가치이자 인격의 행복할 자격인) 윤리성에 정비례하는 몫을 가지고서 가능한 세계의 최고선을 형성하는 한에서, 이 최고선은 전체, 곧 완전선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서도 덕은 언제나 조건으로서 최상선이다. 왜냐하면, 최상선은 자신 위에 더 이상의 조건을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은 항상 그것을 소유한 이에게는 유쾌한 어떤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 자체만으로 절대적으로 그리고 모든 관점에서 좋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도덕 법칙에 알맞은 거동[태도]을 조건으로 전제하는 것이다."(198)

최고선의 전 단계는 최상선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서 최상선은 덕을 갖추는 것이다. 하지만 최고선은 덕을 성취하여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에게 행복까지 있을 때에야 비로소 최고선이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 학파가 모두 덕과 행복의 실천 원리가 한 가지임을 캐내려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이 동일성을 끄집어내고자 한 방법에서 일치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서로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한쪽은 그 원리를 감성적인 면에, 다른 한쪽은 논리[이성]적인 면에, 곧 한쪽은 감각적 요구의 의식에, 다른 한쪽은 실천 이성의 일체 감각적 규정 근거들에 대한 독립성에 두었기 때문이다. 덕의 개념은 에피쿠로스학파에 따르면 이미 자기 자신의 행복을 촉진하라는 준칙 안에 있었다. 반면에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행복의 감정은 이미 자기의 덕에 대한 의식에 포함되어 있었다."(201, 202)

"곧, 행복과 윤리성은 최고선의 종적으로 전혀 다른 두 요소들이고, 그러므로 양자의 결합은 (가령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이런 그의 태도[거동]에서 순전히 그의 개념들을 분해함으로써 덕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거나, 또는 덕을 좇는 사람이 그러한 태도[거동]에 대한 의식에서 이미 그 사실 자체만으로 자신이 행복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이) 분석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 개념의 종합인 것이다."(203)

그렇다면 도덕적이기 때문에 행복한 것일까, 행복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므로 행복에 대한 욕구가 덕의 준칙들을 위한 동인[動因]이거나, 덕의 준칙이 행복을 낳는 원인이거나 일수밖에 없다. 첫째 경우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분석학에서 입증됐듯이) 의지의 규정 근거를 자기 행복의 추구에 두는 준칙들은 결코 도덕적일 수가 없고, 아무런 덕도 정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째 경우 또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세계 내에서의 원인들과 결과들의 모든 실천적 연결은 의지 규정의 성과로서 의지의 도덕적 마음씨에 정향[定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 법칙들에 대한 지식 및 이것을 그의 의도대로 사용하는 자연적 능력에 정향되어 있고, 따라서 어떠한 필연적인, 최고선을 위해 충분한, 덕과 행복의 연결은 세계에서 도덕 법칙들을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기대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릇 이 연결을 자기 개념 안에 포함하고 있는 최고선의 촉진은 우리 의지의 선험적으로 필연적인 객관이고, 도덕 법칙과 불가분리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첫째 경우의 불가능성은 반드시 둘째 경우의 거짓됨을 증명하는 바다. 그러므로 만약 최고선이 실천 규칙들에 따라서 불가능하다면, 이를 촉진할 것을 명령하는 도덕 법칙 또한 환상적이고, 공허한 상상된 목적들 위에 세워진, 그러니까 그 자체로 거짓된 것일 수밖에 없다."(204, 205)

두 경우 모두가 불가능하다?

"두 명제들 중 첫째의 것, 곧 행복을 얻으려는 노력이 덕 있는 마음씨의 근거를 낳는다는 명제는 절대적으로 거짓이다. 그러나 둘째의 것, 곧 덕 있는 마음씨는 필연적으로 행복을 낳는다는 명제는 절대적으로 거짓인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감성 세계에서의 원인성의 형식으로 보아지는 한에서, 그러니까 내가 감성 세계에서의 현존을 이성적 존재자의 유일한 실존 방식으로 받아들일 때만, 그러므로 오직 조건적으로만 거짓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현존재를 오성 세계 내의 예지체로도 생각할 권한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도덕 법칙에서 (감성 세계 내의) 나의 원인성의 순수 지성적 규정근거를 또한 가지므로, 원인으로서 마음씨의 윤리성이 감성 세계에서의 결과로서 행복과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인 (자연의 예지적 창시자에 의한), 그러면서도 필연적인 연관을 갖는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한낱 감관의 객관인 자연에서의 이러한 결합은 다름 아니라 우연적으로밖에는 일어날 수가 없고, 최고선에 충분할 수가 없다."(206, 207)

최고선 실현을 목표로 하는 행위들은 도덕이 행복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되 스스로의 존재를 현실의 존재로서가 아닌 이상세계의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최고선의 실현은 도덕 법칙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의지의 필연적인 객관이다. 그러나 이 의지에서 마음씨의 도덕 법칙과의 완전한 부합은 최고선이ㅡ 최상 조건이다. 그러므로 이 부합은 그 객관과 꼭 마찬가지로 가능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객관을 촉진하라는 동일한 명령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지의 도덕 법칙과의 완전한 부합은 신성성, 곧 감성세계의 어떠한 이성적 존재자도 그의 현존은 어떤 시점에도 이를 수 없는 완전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합은 실천상 필연적인 것으로 요구되므로, 그것은 저 완전한 부합을 향한 무한한 전진 중에서만 만나질 수 있고, 그리고 그러한 실천적 전진을 우리 의지의 실재적 객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순수 실천이성의 원리상 필연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런 무한한 전진[前進]은 동일한 이성적 존재자의 무한히 지속하는 실존과 인격성 ― 이것을 사람들은 영혼의 불멸성이라고 부르거니와 ― 을 전제하고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최고선은 실천적으로는 영혼의 불멸성을 전제하고서만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 영혼의 불멸성은 도덕 법칙과 불가분리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서 순수 실천 이성의 하나의 요청이다."(220)

"도덕 법칙은 감성적 동기들의 전혀 아무런 참여 없이 순전히 순수 이성에 의해 지정되는 실천적 과제, 곧 최고선의 첫째의 가장 고귀한 부분인 윤리성의 필연적 완성이라는 실천적 과제에 이르렀고, 이때 이 과제는 오로지 영원에서만 해결될 수 있으므로, [영혼] 불멸성의 요청에 이르렀다."(223)

이제 앞에서 말했던 최고선의 추구가 아닌 실현을 위해서는 영혼의 불변성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요청들은 모두 도덕의 원칙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도덕의 원칙 [자신]은 요청이 아니라, 그를 통해 이성이 직접적으로 의지를 규정하는 법칙이다. 이러한 의지는 그것이 바로 그렇게 규정됨으로써 순수 의지로서 그의 훈계 준수의 필연적 조건들을 요구한다. 이 요청들은 이론적 교리[敎理]들이 아니라, 필연적인 실천적 고려에서의 전제들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사변적 인식을 확장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사변 이성의 이념들에게 일반적으로 (그것들의 실천적인 것과의 관계를 매개로) 객관적 실재성을 주며, 그것들에게 그 밖의 경우에서는 감히 그 가능성조차 주장하려 들지 못했을 개념들로서의 권한을 부여한다.
이것들은 [영혼의] 불멸성, 적극적으로 (예지의 세계에 속하는 한에서의 한 존재자의 원인성으로) 보아진 자유, 신의 현존의 요청들이다. 첫째 요청은 도덕 법칙을 완벽하게 실현하기 위한 적절한 시간의 길이라는 실천적으로 필연적인 조건에서 나온다. 둘째 요청은 감성 세계로부터의 독립성과 예지 세계의 법칙에 따라 자기의 의지를 규정하는 능력, 다시 말해 자유의 필연적 전제에서 나온다. 셋째 요청은 최고의 독립적인 선의 전제 아래 최고선이 있기 위한 그러한 예지 세계를 위한 조건, 다시 말해 신의 현존의 필연성에서 나온다."(238, 239)

"그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지속적으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큰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이다"   - 맺음말에서

인간은 인간답기 위해서는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도덕은 스스로의 실천을 통해서 드러난다. 인간이 도덕적인 실천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덕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도덕적인 실천 능력인 덕이란 한갓 이론이나 훈계를 통해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있는 경향성이라는 적을 무찌르려는 끈질긴 시도를 통해서, 곧 수행적(修行的)으로 개발되고 훈련될 수 있는 것이다. 오로지 우리는 독행(篤行)을 통해서만 덕의 힘을 갖출 수 있다. 이때 덕의 훈련에서의 척도는 다른 사람의 행실이 아니라 인간성의 이념과 이에 따라 인간이 마땅히 준수해야 할 도덕 법칙이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인간의 의무의 완수를 우리는 이승에서는 다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덕의 도야는 무한히 계속되어야 한다. 

- 역자의 ‘실천이성비판연구’ 논문 맺는말에서


자료정리:박정인 jos6494@empal.com
 
출처: SPR 경영연구소

:
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