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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29. 16:48

장자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29. 16:48


Ⅰ. 장자의 소개

  장자莊子 (기원전 약 355~약 275)

성은 장莊이고 이름은 주周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장자는 양혜왕, 제선왕과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일찍이 몽이라는 곳에서 칠원리를 지냈다. ‘칠원’은 지명이라는 설과 오늘날의 국립공원과 같은 동산이라는 설이 있다. ‘몽’은 오늘날 중국 허난성 상추시 동북지역에 있다.

당시 강대국 가운데 하나였던 초나라 위왕이 장자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초빙해서 재상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장자는 이를 사양하고 전원에서 자유롭게 사는 길을 선택하였다.
장자에게는 혜시라는 말벗이 있었다. 혜시는 중국 고대의 논리학파인 명가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위나라 재상을 지낸 적이 있다. 장자는 혜시와 철학적인 문제를 가지고 토론하였으며, 그 내용이『장자』10여 군데에 보인다.

장자는 그의 부인이 죽었을 때 질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얼핏 그는 비정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도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인데 아내의 죽음 앞에서 어찌 슬프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는 생사를 달관할 수 있었던 철인인지라 이내 슬픔을 거두고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이라는 사태를 대자연의 관점에서 관조할 수 있었다.

장자는 자기 자신의 죽음도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관조하였다. 『장자』「열어구」에서 보이는 일단의 글에 따르면 그는 자기 자신의 죽음에 임하여 천지를 관곽으로 삼고, 해와 별과 만물을 자기 죽음의 동반자고 간주한다고 말하였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장자의 흉금이 얼마나 호방했는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자유로우면서도 속 시원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살다 간 사람이었다. 

<장자는 어떻게 살았는가?>

장자가 살던 시대는 거듭되는 전쟁과 그 속에서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어수선하고 험한 시대였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275자로 짧게 장자에 대해 적어 놓고 있는데, 이 대목에서 간단하게나마 장자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장자가 살던 곳은 강력한 제후국들한테 둘러싸인 조그만 나라였다. 따라서 언제나 전쟁의 중심지였다.

각 제후국의 임금들은 자기 땅을 넓히려고 백성들을 소 돼지처럼 전쟁에 끌고 나가 전쟁의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다행히 전쟁에 나가지 않더라도 적의 침입을 받아 자기 땅에서 죽어야 했다. 백성들의 시체가 골짜기와 들판을 메우고 먹을 것이 없어 언제나 굶주려야 하는 지옥과 같은 생활이었다.

게다가 장주가 살았던 때의 송나라 임금은 소문난 폭군이었다. 당시 송나라를 다스린 임금은 척성과 강왕이었다. 강왕은 척성을 공격하여 왕위를 빼앗고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는데, 은나라 마지막 왕으로 유명한 폭군인 걸왕에 비교될 만큼 나쁜 짓만 골라했다. 강왕은 11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주변의 제후국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으며, 자기한테 바른 말을 하는 신하가 있으면 즉시 화살을 쏘아죽이기도 했다.

결국 제후국들이 연합하여 한꺼번에 쳐들어 와서 강왕을 살해했고, 송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장자는 자기 나라가 망하기 바로 직전까지 살았으니 얼마나 험한 시대를 살았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장자는 당시의 사회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능력 있는 사람을 우대하면  사람들이 시기와 질투를 하고, 이익만 얻으려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대낮에도 강도질을 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또 달팽이의 왼쪽 뿔에 있는 나라를 촉씨의 나라라고 부르고, 달팽이의 오른쪽 뿔에 있는 나라를 만씨의 나라라고 하는데, 늘 영토문제로 서로 전쟁을 하여 죽은 자가 수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장자는 불행한 시대를 살면서 출세를 하거나 명예를 탐내지 않고, 여유롭고 한가하게 살면서 자기의 수명을 끝까지 다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으로서 가장 큰 행복이라고 보았다. 그렇다고 장자는 일부러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만들어 피하거나 하지 않았다. 항상 현실의 땅을 굳건하게 딛고, 세속적인 가치들을 멀리하고, 그 속에서 어리석고 생각이 짧은 사람들을 비판했다. 특히 늘 고통 받고 가난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입장에 서서 백성들이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올바른 다스림과 올바른 생각이 무엇인지를 따졌다.

장자는 평생 가난하게 사는 것을 스스로 선택했다. 젊었을 때 목장 비슷한 칠원이란 곳에서 말단 관리를 했지만, 그 후로는 어떤 벼슬에도 오르지 않았다. 한 번은 초나라의 왕이 장자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재상으로 임명하려고 사신을 보냈다. 초나라 왕의 사신이 장자를 방문하여 뜻을 전했지만, 장자는 이를 거절했다. 장자가 보기에 높은 벼슬을 한다는 것은 제사에 쓰기 위해 잘 가꾸는 소와 같다는 것이다. 차라리 진흙탕 물에 자유롭게 사는 미꾸라지가 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벼슬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고달프게 할 뿐이었다.

또 장자는 공자처럼 사숙을 열어 제자들을 키우지도 않았다. 장자는 노자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학파를 만들어 세상에 영향을 주고 세력을 과시하는 일을 아주 싫어했다. 홀로 대자연 속에 파묻혀 구만 리 창공 위를 날아 올라가는 붕새처럼 저 밑에 떠도는 아지랑이와 티끌, 먼지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진정한 행복이란 절대적인 자유와 평등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장자가 살았던 시대>

장자는 맹자보다 조금 뒤에 태어난 사람으로 이 시기는 전국 시대 중반에 해당된다. 장자가 살았던 시기에는 제자백가가 전국에 출현하여 사상의 꽃을 피우던 때였으며, 동시에 각 지방의 제후국 임금들이 무력으로 천하를 얻으려는 쟁탈전을 끊임없이 벌이던 시기이기도 했다. 춘추 전국 시대에 앞서 은나라를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한 주나라는 약 8백 년간 이어졌다. 그러나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민족의 공격을 받아 주나라의 힘은 차츰 기울기 시작했다.
주나라는 천하를 통일할 때 공로를 세운 귀족들에게 각지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 이들은 제후국이 되어 주나라를 황실로 섬겨왔으나, 주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호시탐탐 천하의 패권을 가지려고 전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공자와 노자가 살았던 춘추 시대에는 그래도 전쟁의 규모가 크지 않았고, 오랜 기간 동안 싸우지도 않았다. 그러나 장자가 살았던 전국 시대에 들어서면 규모가 커지고 몇 년 동안 전쟁을 하기도 했다. 당시 세력이 큰 제후국들은 자기 나라의 힘을 키우고, 군인과 말과 무기와 군량을 모으는 일에 몰두했다.

이런 각 나라의 임금들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른바 병가라고 하는 손자나 오자가 이런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임금들에게 십만 명의 군대를 만들어라, 하루의 싸움으로 천하를 움켜쥐라는 등의 이야기들을 서슴지 않고 주장했다. 또 첩자를 이용하여 적을 염탐하고, 적의 약점을 치라는 방법도 내놓았다.

손자와 오자 위에 소진과 장의 같은 종횡가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들은 복잡한 제후국 사이의 사정을 잘 따져 이익이 되고 손해가 되는 입장에서 합종과 연횡을 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각 제후국마다 사정이 다르므로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교묘한 논리로 천하를 얻으려고 하였다.

종횡가 다음에 나타난 법가는 모두 법률로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특히 그 가운데 극단적인 법률 지상주의를 내건 인물이 상앙이었다. 상앙은 백성들에게 법을 퍼뜨릴 생각으로 상과 벌을 분명하게 했다. 백성들은 상앙으로 인해 법을 두려워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또 한비자는 형벌과 은덕으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주장했다.

이 밖에도 묵자와 양자는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내놓았다. 묵자는 ‘겸애’를 주장하며, 세상에서 싸움이 생기는 이유에 대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할 줄 알면서도 남을 사랑 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반대로 양자는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했다. 사람 속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묵자는 자신을 사랑하듯이 남을 사랑하라고 했지만, 상대가 과연 그만큼 기뻐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사랑하듯이 남을 사랑하라는 말 역시 잘못이다. 결국 자신을 아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양자는 자신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하고 싶은 바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자리설’을 주장했다.  

<장자의 주요사상>

위대한 철학자의 사상은 시대가 바뀌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이 다시 꽃을 피워낸다. 장자의 철학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장자의 철학에 면면히 흐르는 정신은 과연 어떤 것일까?

첫째로, 비판정신을 들 수 있다.
지난날 동아시아 전통사회를 움직였던 것은 통치자와 제도와 이념과 도덕이었다. 유가에서 성인이 예악을 만들어 다스리는 것을 정치의 이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장자는 아무리 성인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뜻으로 천하 사람들을 바로잡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이란 어떤 시대, 지역의 특정한 교육에 의하여 형성되므로 결국 그 시대, 지역, 교육에 의하여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제한성 때문에 사람은 사물, 사건들을 깊고 포괄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가 보고 들어서 알게 된 것만을 옳다고 고집할 수 있다. 장자는 이러한 의식에 입각한 행위를 인위人爲라고 하였다.

장자에 따르면 사람들에게 욕구하는 성향이 있다. 그 욕구 때문에 사람들은 외물을 추구하고 그에 의존하여 속박 당한다.
사람들에게는 또한 호지好知의 성향이 있다. 그러나 사람이 지닌 인식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물의 표면현상을 보고 바쁘게 오고 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삶의 덧없음을 느끼고 좌절한다. 장자는 이러한 일상적인 연민의 정을 가지고 바라보면서 인간의 인식문제를 철저히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둘째로, 초연(超然)정신을 들 수 있다.
『장자』「소요유」첫머리에는 대붕이 등장한다. 이 붕새는 구만리 상공으로 솟구쳐 오른 뒤에 머나먼 남녘 바다로 비상한다. 붕새의 비상은 일체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자유인의 상징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자는 대붕도 절대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고 보지 않는다. 붕새도 바람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자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추구한다. 이를 무대無待의 소요逍遙라고 한다. 무대의 소요는 일종의 정신초월이다. 이러한 소요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욕으로부터 초연할 뿐만 아니라, 사적 자아의식을 버리는 자기초월을 거쳐 실현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서야 물질적인 향락생활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기성 사조와 이념과 도덕 그리고 심지어 생사문제를 초탈할 수 있다.

  바람에 구름 흐르듯이 돈과 권력을 좇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앞만 보고 달리면서 자기의 고귀한 영혼을 남들에게 맡기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부평초 같은 삶의 허무함을 느끼고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고 마는 우리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우리는 장자의 초연정신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셋째로, 조화정신을 들 수 있다.
유가에서는 인화人和를 중시한다. 그러나 장자는 그보다 근본적인 관점에서 천화天和를 제창하였다. 천화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려면 자연에 따라야 한다. 인간이 자연에 따르려면 사태를 자기중심적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일체 사물, 사건들의 본체인 도道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장자는 이를 ‘이도관지’ 라고 하였다.

장자철학은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우리에게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일체 생명체들이 서로의 생의를 살리면서 조화를 이루어 살아갈 수 있는 세계관으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Ⅱ. 『장자』라는 책 소개

『장자』라는 책에 대하여

『장자』는 기원전 3세기 중국 전국 시대 때 송나라에 살던 사상가 장주의 이름을 따 온 책으로 4세기에 북송의 곽상이 정리했다. 곽상이 이 책을 정리할 때에는 장자가 지었다는 책들이 여러 가지 사본으로 떠돌고 있었다. 장자가 죽고 나서 200년 뒤에 사마천이 『사기』를 썼는데, 거기에 보면 사마천이 살아 있을 당시 10만개의 글자로 이루어진 『장자』라는 책이 있었다고 전한다. 애초에 52편이 넘는 분량으로 널리 읽히고 있었지만, 후대에는 33편만이 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진나라 곽상이 크게 <내편>, <외편>, <잡편>으로 나누어 오늘날의 모습으로 정리했다고 한다. 곽상은 이런저런 사본들을 모두 정리하여 이것을 33편으로 줄이고, 거기에다 자기 나름대로 주를 달았다.

그런데  <내편>, <외편>, <잡편>가운데 <내편>만은 곽상이 정리하기 전부터 한 권의 책으로 돌아다녔다. 이것은 장자가 직접 쓴 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모두의 지적이다. 그리고 장자 <내편>은 「소요유」처럼 제목이 모두 세 글자로 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한편 <외편>과 <잡편>은 주로 장자가 평소에 주변 사람들에게 들려준 우화나 짤막짤막한 문장으로 되어 있고, <내편>보다는 훨씬 이해하기 쉬운 내용들이 많다.

장자가 『장자』전체를 직접 썼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다. 이는 장자가 직접 쓰지 않았다고 짐작되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편>만은 장자의 사상을 가장 충실하게 전하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

『장자』<내편>은 모두 내용을 알려 주는 제목이 붙어있다. 내용과 제목이 매우 깊게 관련되어 있으며, 각 제목에 따라 장자가 자기의 깊고 넓은 생각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다.


Ⅲ. 『장자』들여다보기

1.  소요유(逍遙遊)

소요유는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것을 말한다. 북쪽 바다에 사는 곤이라는 큰 물고기가 붕새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 곤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등 넓이만 해도 몇 천 리가 될 정도였다. 이 거대한 물고기와 붕새는 대자연에 맞추어 자유자재로 변하는 진인의 모습을 가리킨다.

남쪽 바다로 유유히 날아가는 붕새의 행동을 땅 위에서 사는 하찮은 생물들은 이해할 수 없다. 매미와 작은 참새처럼 작고도 수명 짧은 것들은 구태여 저렇게 힘들게 날아갈 이유가 있는지 붕새는 한껏 비웃는다. 그러나 붕새가 본다면, 이들은 너무도 작고 우스운 미물들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벼슬자리 하나할 정도의 능력밖에 없는 사람, 그보다 좀 나아서 마을하나 섬길 정도의 사람, 한 나라를 다스릴 정도의 임금 등이 있겠지만, 진인과 비교한다면 이들은 모두 참새류와 같은 하찮은 사람들이다.

물론 훌륭한 사람들도 있다. 송영자는 반전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이다. 그는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키는 이유가 남한테 칭찬받기만을 좋아하고, 비난받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장자가 보기에 송영자의 마음에는 칭찬과 비난을 따지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훌륭하기는 해도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다.

송영자보다 훨씬 자유로운 열자도 있다. 열자는 송영자와는 달리 세상일에 아주 초연했다. 언제나 바람을 타고 세상 밖을 돌아다니는 신선 생활을 했다. 그러나 장자가 보기에는 열자도 바람에 의지하기 때문에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진정 자유로운 사람은 누굴까. 바로 바닷물에 있을 때에는 물고기가 되고, 하늘에 있을 때에는 붕새가 되는 사람이다. 자연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함께 변화되어 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진인이고 지인이며 신인이고 성인이다.

이런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일까? 우리는 요 임금과 허유의 이야기에서 그 모습을 조금 들여다 볼 수 있다. 요 임금은 천하를 아주 잘 다스리는 왕이었다. 그런데 스승인 허유가 자기보다 더 잘 다스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허유에게 천하를 양보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허유는 ‘임금의 자리란 단지 이름에 불과하다. 실체가 아니다.’ 실체도 없는데 이름만 따라다니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는다며 거절한다. 진정 자유로운 사람은 명예를 좇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허유는 보여주고 있다. 이름을 좇지 않고 실체만을 간직하려는 사람은 진인이며 신인인데, 이런 신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 모습을 장자는 이렇게 자세하게 이야기해 준다.

신인은 새하얀 피부를 가진 청순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며, 사람들 먹는 곡식을 먹지 않고 오직 맑은 바람과 이슬만 마신다. 용을 타고 구름 위를 날아다닌다. 마음은 언제나 흔들리지 않고 고요하다. 아무리 큰 홍수가 일어나도 그 물에 빠지지 않는다. 심한 가뭄으로 햇빛이 아무리 뜨겁게 내리쬐어도 조금도 더워하지 않는다. 신인의 마음은 무한대로 열려 있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이렇게 살고 있으니, 신인이 세상일에 구태여 얽히려 들지 않는다.

그럼 신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장자는 조롱박과 가죽나무의 예를 들면서 신인들이 어떻게 장수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 해 준다. 혜자는 장자와 절친한 친구인데, 늘 장자의 말이 쓸데없이 허황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자의 허황된 말을 슬쩍 조롱나무와 가죽나무에 빗대어 비웃었다. 조롱박이 너무 커서 아무 쓸모가 없다며 혜자가 지적하자, 장자는 큰 물건을 쓰는 방법을 몰라서 그렇다고 오히려 혜자의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기껏해야 큰 조롱박을 물 마시는 바가지 정도밖에 생각 못 하는 혜자의 좁은 소견이 문제라는 것이다.

같은 물건이라도 쓰는 사람에 따라 물건의 쓰임새가 달라지는 것이다. 장자는 추위에 튼 손에 바르는 약의 예를 들고 있다. 송나라에 세탁 일을 하면서 이 약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빨래하기 위해 튼 손이나 겨우 바르는 수준으로 이 약을 허용했다.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이 그걸 보고 약 만드는 비법을 금 백 냥에 샀다. 그걸 갖고 월나라고 가서 월나라 임금에게 전쟁에 쓰겠다고 설득했다. 마침 이웃 나라가 쳐들어오자 그 사람은 병사들에게 그 약을 쓰게 하여 겨울 추운 강물에서 수중 전을 치르게 했고, 월나라 군대는 크게 승리했다. 월나라 임금은 그 사람에게 큰 벼슬과 땅을 주었다.

이처럼 같은 물건이라도 쓰는 사람에 따라 물건의 쓰임새가 다른 것이라고 장자는 혜자를 일깨웠다. 그러나 혜자는 이에 지지 않고 가죽나무의 예를 들었다. 가죽나무는 덩치야 크지만 꾸불거리고 나쁜 냄새가 나서 목재로 도저히 쓸모없는 나무였다. 그러나 장자는 그렇게 쓸모없었기 때문에 가죽나무가 오랫동안 나무로서의 수명을 다할 수 있지 않았느냐고 혜자에게 반문한다.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죽나무는 쓸모없지만, 가죽나무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러한 쓸모없음이 오히려 자기를 지켜주고 있는 가장 큰 쓸모가 되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러니 공연히 쓸모없음, 쓸모 있음을 따지지 말고 대자연 속에 그대로 두고 그것과 하나가 되어 노니는 것이 좋다고 장자는 주장한다. 

2.  제물론(齊物論)

앞서 「소요유」끝머리에서 장자는 뒤집어 생각해 보기를 이야기했다. 「제물론」은 바로 이 뒤집기에 대한 여러 생각을 담고 있다. 「제물론」은 <내편>가운데 가장 어려운 부분으로 철학적인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다. 그럼 제물론은 어떤 의미일까?

「제물론」은 물物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런히 한다, 평등하게 한다는 뜻이다. 목수의 입장에서 본 가죽나무는 쓸모없지만, 가죽 나무의 입장에서 본 쓸모없음은 아주 중요한 쓸모가 된다는 상대주의적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목수와 가죽나무는 모두 물物이다. 목수의 생각만이 전부는 아니며, 가죽나무의 생각만이 전부가 아니다. 둘의 생각을 공평하게 아울러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 어떻게 하면 모든 사물을 공평하게 볼 수 있을까 생각해 보자.

첫 번째, 나를 잊어야 한다. 남곽자기는 제자 자유에게 세 가지 종류의 좋은 소리에 대해 가르쳐 준다. 인간의 소리와 땅의 소리, 그리고 하늘의 소리가 이 세상에 있다. 인간이 내는 좋은 소리는 퉁소 소리와 같다. 퉁소의 안은 텅 비어 있다. 인간의 마음이 퉁소처럼 되었을 때 욕심이나 편견이 사라진다. 그런 마음이 내는 소리가 가장 좋은 것이다. 땅의 소리는 어떨까. 땅의 소리는 땅에 있는 온갖 구멍들이 하늘과 부딪혀 내는 소리이다. 이런저런 다양한 소리를 내지만, 사실은 하늘의 바람과 부딪혀 내는 소리이다. 하늘의 바람이 없으면 땅의 소리가 사라지고, 바람이 있으면 땅의 소리가 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소리는 하늘의 소리가 있어야 나는 법이다. 하늘의 소리를 들으려면 자기를 잊어야 들을 수 있다.
두 번째, 늘 한가롭고 너그럽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언제나 담담한 모습을 말해야 한다.
세 번째, 사람으로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몸을 잘 간직해야 한다. 싸우지 말고 편견의 마음을 갖지 말라.
네 번째, 말을 화려하게 꾸미지 말고, 분명한 뜻을 담은 참된 말만 하라.
다섯 번째,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두 가지 면이 반드시 같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밝음이 있으면 언제나 어둠이 있고, 기쁨이 있으면 언제나 슬픔이 있게 마련이다.
여섯 번째, 자기 손가락을 기준 삼아 남의 손가락을 평가하지 말라. 사람들은 이것저것 수많은 뜻을 만들어 서로 다툰다. 천지 만물에는 원래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 아름다운 것도 없고, 추한 것도 없다.
일곱 번째, 하늘은 언제나 공평하다. 착한 사람의 밭에도 비를 뿌려주고, 약한 사람의 밭에도 비를 뿌려준다. 하늘은 누군가를 특별히 편애하지 않는다.
여덟 번째, 최고의 지혜를 지닌 사람들은 언제나 자연 그대로 살아간다. 자연과 나를 구분 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성인은 얕은 재주나 능력을 뽐내는 사람을 천하게 생각한다. 자연에 스스로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
아홉 번째,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항상 그대로 있는 게 아니다. 이 세상은 여관이고, 만물은 하룻밤 묵고 가는 손님일 뿐이다.
열 번째, 도에는 경계가 없다. 도는 원래 무한한 것이다. 도는 설명할 수 없다.
열한 번째, 열린 마음으로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
열두 번째, 사람들은 당연히 자기 위주로 생각한다. 남자들이 미인이라고 하는 모장과 여희를 물고기와 새들이 보면 기겁을 해서 도망을 간다. 모장이나 여희는 사람 중심으로 판단해서 아름다운 것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다.
열세 번째,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이 세상에 있을까? 우리의 삶은 크게 보아 한바탕 꿈이다. 인간은 꿈을 꾸고 있으면서 자기가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어떤때는 다시 꿈속에서 또다시 꿈을 꾸고 있으며, 깨어나서야 비로소 자기가 꿈을 꾼 것을 안다. 그러니 굳이 옳고 그름을 따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모든 것은 대자연의 힘이며 대자연의 지배를 받으므로 옳고 그름을 따진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열네 번째, 그림자가 본체를 따르듯이, 그림자의 그림자가 그림자를 따르듯이 상황에 따라 편안하게 움직여라. 자기 의지를 빼라.
열다섯 번째, 끝으로 장자의 꿈을 이야기한다. 장자는 꿈을 꾸어 나비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나비가 꿈을 꾸어 장자가 된 것인지 모르겠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순간순간 변하고 있으니 무엇인가를 구분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그저 변화를 즐겨라. 도를 깨달은 사람들은 대자연의 변화를 유유자적하게 즐기면서 살아간다.

3.  양생주(養生主)

장자는 「제물론」에서 만물의 평등과 상대적인 자세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 실제로 어떻게 하면 생활 속에서 이것을 실천할 수 있을까. 포정의 이야기는 바로 타고난 천성에 내맡겨 살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포정은 소를 잡는 사람이다. 소 각 뜨는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상상을 초월했다. 포정은 무리하게 소의 살이나 뼈를 자르지 않는다. 그저 소가 생긴 대로 각을 뜰 뿐이다.

포정이 이렇게 될 수 있기까지는 세 단계를 거쳤다. 처음에는 눈앞에 소만 보이는 단계, 다음에는 소가 소로 보이지 않는 단계, 마지막에는 마음으로 소를 보는 단계이다. 이것은 마음을 텅 비우고,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원래 가지고 있는 천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을 우화로 빗댄 것이다.

못가에 사는 외발 꿩이 있다. 외발로 살아가는 일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먹이 한 톨 쪼기 위해 열 걸음을 걸어야 하고, 물 한 모금 마시기 위해 백 걸음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도 꿩은 새장에 갇혀 사람한테 먹이를 받아먹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먹이보다 소중한 것은 육체적 자유이고, 육체적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정신적 자유이기 때문이다.

또한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도 그렇다. 사람이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은 자연의 도리를 어기는 것이다. 손가락으로 장작을 지피고 난 뒤에 손가락이 없어도 장작불은 계속 타오른다. 사람이 죽어도 이 세상은 계속되며, 사람이 살고 있어도 이 세상은 계속된다.

4.  인간세(人間世)

장자의 시대에는 재주가 있는 지식인이라면 벼슬하기 위해 우선 어느 제후국의 임금을 찾아가서 유세를 해야 했다. 거기서 자칫 말을 잘못하다가는 임금한테 목숨을 잃기 십상이었다. 안회, 섭공, 자고, 안합은 험난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의 어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안회는 공자 밑에서 배우고, 자기의 뜻을 펼치려고 위나라고 가려고 한다. 공자는 안회가 뜻하지 않은 재난을 당할 수도 있다고 충고한다. 안회는 겉모습을 단정히 하고, 겸손하게 일을 하고, 임금을 공경하고, 자기 말만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하지만 공자는 그런 방법으로는 자기 목숨을 구할 수는 있어도 임금을 바꿀 수는 없으니 차라리 같이 일하겠다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한다. 마음을 비우고 기를 키우면서 남을 다스리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마음을 텅 비게 하는 편이 낫다고 충고한다.

자고 역시 마찬가지다. 자고는 초나라 임금의 명령으로 제나라에 가서 말을 전하는 일을 맡았다. 제나라 임금은 우유부단하기로 유명했다. 자고는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공자는 자고에게 피할 수 없는 일은 자기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 말을 전하면 재앙을 피할 것이라고 충고한다. 

안합은 위나라 태자를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그 태자는 완전히 폭군이었다. 폭군을 가르치는 일에 어려움을 느낀 안합은 거백옥을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거백옥은 자기 몸을 바르게 하고 중심을 지키어 어떤 일을 당해도 흔들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태자가 하는 대로 같이 따라 주면서 자연스럽고 조심스럽게 태자를 잘 이끌어 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장자가 보기에 안회나 섭공, 안합은 재능이 있어 고통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장석이라는 유명한 목수는 엄청나게 큰 가죽나무가 쓸모없다고 생각해서 지나치지만, 사실 목수의 입장에서 쓸모없는 것이지 가죽 나무 입장에서는 오히려 자기가 크게 자라고 나무로서의 수명을 다 누리는 가장 큰 쓸모임을 보여준다. 그렇듯 능력이 없어야 아무 탈 없이 오래 산다. 안회 등과 같은 지식인들은 조그만 쓸모가 있어 그 쓸모 때문에 목숨을 내 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개오동나무, 잣나무, 뽕나무 같은 사람들이다.

지리소와 같은 꼽추는 꼽추이기 때문에 전쟁에 나가지도 않고, 부역에 끌려가지도 않는다. 오히려 불구자이기 때문에 나라로부터 구호품을 듬뿍 받아 재주와 덕이 온전하지 못해도 아주 편안하게 살아갔던 것이다. 그러니 장자는 미치광이 접여의 입을 빌려 공자와 같은 사람들에게 쓸모 있는 것의 쓸모는 알아도 쓸모없는 것의 쓸모는 모른다고 비판하고 있다.

5.  덕충부(德充符) 

「덕충부」는 내면의 덕이 가득하여 외면의 불구를 덮어 주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지리소처럼 불구자이지만, 내면의 덕이 뛰어난 훌륭한 사람들이다. 왕태나 신도가, 숙산무지는 형벌을 받아 외발이 된 불구자들이다. 그리고 애태타와 인기지 리무신은 타고난 추남에게 불구자이다. 그들은 모두 사람들이 싫어하고 경멸하는 외모를 지녔다. 그러나 거울처럼 맑고 온전한 덕을 갖춘 덕인 들이다.

왕태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 사람으로 사물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본다. 천지가 개벽해도 꿈쩍하지 않고 아주 의젓하다. 또한 모든 것을 구분하거나 차별하지 않으며, 그야말로 거칠 것 없이 자유롭게 살아간다. 장자가 주장하는 소요유를 하는 사람이다.

신도가도 마찬가지다. 정나라 재상으로 공자가 매우 존경했던 자산이 신도가와 같이 있는 것을 창피해하자 신도가는 거울이 맑으면 먼지가 끼지 않는데, 자신의 마음이 맑지 않아 신도가의 외발을 의식한다고 지적한다. 사람이 병신이 되고 안 되고는 예의 화살을 맞는가, 안 맞는가의 차이밖에 없다. 즉 운명이라는 이야기다. 몸이 성하다고 남을 깔보는 일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순산무지는 자신을 꾸짖는 공자를 명성에만 집착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하늘로부터 수갑과 쇠사슬에 채인 것과 같다고 했다.

반면, 애태타와 인기지리무신은 타고난 추남들이었다. 그런데도 한번 만나면 누구나 그들에게 감동한다. 그들은 타고난 아름다운 마음을 간직하여 사람들이 그들을 대하면 자신의 본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마음이 훌륭하면 겉모습은 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흉하게 생겨도 덕이 깊은 사람은 그것을 충분히 가릴 수 있다. 그러니까 마음을 닦는 일이 중요하다. 대자연과 한 몸이 되어 순수한 마음을 갖춰야 한다.

6.  대종사(大宗師)

「대종사」편에서는 크게 으뜸으로 본받아야 할 스승을 이야기한다. 그는 진인이며 성인이다. 진인은 하늘의 법칙과 사람을 다스리는 법칙을 잘 아는 사람이다. 우쭐대지 않으며 기회만 좇지 않는다. 잠을 자도 꿈을 꾸지 않으며 깨어나도 근심이 없다. 욕심이 없어 자연의 힘을 그대로 간직하다. 삶을 즐기지 않고, 죽음도 싫어하지 않는다. 마음에 도를 간직하고 자연을 간섭하지 않는다.
남의 나라를 쳐도 그 나라 백성들의 인심을 잃지 않는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지만, 그렇다고 자연을 해치고 사람들만 편애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정해 준 이치이다. 조물자는 나를 만들고 살아가는 수고로움을 겪게 하고, 늙어서 편안해지도록 해 준다. 죽어서는 나를 쉬게 한다. 그렇기에 살아 있는 것도 좋고, 죽어 있는 것도 좋은 것이다.

도는 마음으로 느낄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다. 도는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는다. 도는 이 세상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있었다. 귀신과 상제를 신으로 만들었다. 하늘과 땅의 근원은 모두 도이다. 그래서 희위씨, 복희씨, 북두칠성, 서왕모, 팽조 등은 모두 이 도를 터득하여 신이 되고 신선이 되었으며, 장수하고 천하를 평정했다.

그렇다면 도는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 글을 읽어도 글자의 뜻에 매이지 말고 읽는다. 그것을 오랫동안 외우고 그 뜻을 잘 살펴보고, 그 속에 있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깨닫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고 거기서 나오는 즐거움과 감격을 노래한다. 그러면 조용하고 텅 빈 경지를 체험한 다음 시초의 도와 하나가 되는 단계에 들어간다.
이렇게 도를 깨달은 사람은 삶과 죽음을 한 몸으로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슬픔도 삶에 대한 기쁨도 느낄 필요가 없다. 죽음이란 하나의 변화에 불과하다. 가난도 하나의 운명일 뿐이다. 다만 끊임없는 변화에 자기의 몸을 내맡기지만, 그 변화를 잊고 텅 빈 하늘로 들어가는 것이다.

특히 도를 터득하는 수양의 마지막 단계는 좌망인데, 좌망은 앉아서 모든 것을 잊는 것이다. 인의를 잊고, 예약을 잊고, 몸에서 힘을 빼고 일체의 감각을 잊고, 몸과 마음이 완전히 텅 빈 상태가 된다. 그 상태에서 도와 하나가 되는데, 그 때는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이라는 구별에 사로잡히지 않고, 도와 함께 무궁무진하게 변화한다. 그러면 무한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7. 응제왕(應帝王)

「응제왕」편에서는 장자가 생각한 가장 바람직한 임금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하고 있다. 바람직한 임금이란 성인의 자질이 있어야한다. 백성을 다스릴 때는 되도록 이것저것 꼬치꼬치 간섭하지 않고 사람들이 자기의 타고난 성품에 따라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이것은 무심의 다스림, 가만 놓아둠의 다스림이다.

반대로 권모술수를 쓰고, 지나치게 많은 법률을 만들어 백성들을 구속하는 것은 바람직한 다스림이 아니다. 또 공자처럼 인의를 숭상하고 덕으로 다스리는 것도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 참된 임금은 억지로 무언가를 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일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인위가 조금이라도 개입되면 대자연을 그대로 죽이는 결과를 가져오며, 백성들의 삶과 행복을 파괴한다. 마지막에 있는 혼돈 이야기는 바로 인위적인 다스림에 대한 장자의 경고라고 할 수 있다.


Ⅳ. 인상 깊은 내용

* 매미와 새끼 비둘기
북명에 물고기가 있었다. 이름은 곤이다. 곤은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이 물고기가 변해 새가 되었는데 새의 이름은 붕이다. 붕의 등 넓이도 몇 천리에 달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붕이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을 가득 뒤덮은 구름을 연상시킨다.
붕은 바다 기운을 타고 남명으로 옮아가려 한다. 남명은 바다이다.

붕이 남쪽 바다로 옮아갈 때 파도는 삼천리나 솟구치고 붕새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위로구만리까지 날아오르는데 6월의 바람을 타고 간다.
매미와 비둘기가 붕을 비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날아도 박달나무나 느릅나무에 부딪힌다. 게다가 종종 나무에도 이르지 못한 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 일쑤지. 그런데 어찌하여 붕은 구만리나 솟구쳐 남쪽으로 가는 것일까?

교외로 나가는 사람은 세끼 식사만 하고 돌아와도 여전히 배는 부르다.
백리 길을 가려는 사람은 밤새도록 식량을 찧어야 하고, 천리 길을 떠나는 나그네는 세달 동안 식량을 모아야 한다.
이 두 벌레가 어찌 이를 알겠는가
<내편 소요유中>

* 사람과 미꾸라지
이제 자네에게 한번 물어보겠네.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허리 병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죽게 되지만 미꾸라지도 그렇던가? 사람은 나무 위에 있을 경우 벌벌 떨지만 원숭이도 무서워하던가?
셋 가운데 어느 쪽이 바른 거처를 알고 있는 건가? 사람은 초식 동물의 고기를 먹고 순록은 풀을 뜯고 지네는 뱀을 맛있게 먹고 올빼미는 쥐를 즐겨 먹지. 넷 가운데 어느 누가 올바른 맛을 아는 것일까? 원숭이는 편저를 짝으로 하고 고라니는 사슴과 교배하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함께 놀지. 모장과 여희는 세상 사람들이 미녀라고 칭송하지만, 그들을 보면 물고기는 물속 깊이 달아나고 새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순록과 사슴은 결사적으로 달아나지.

넷 가운데 누가 천하의 미인을 아는 것일까? 내가 보건대 사람들이 인의仁義와 시비를 어지럽게 주장하는데 나라고 어찌 그것들을 가려낼 수 있겠나!
<내편 제물론中>

* 포정의 소 각 뜨기
소 잡는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있다. 그때 손을 잡은 일이 있다. 그때 손을 놀리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밝고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에 따라 휙휙 울리는 뼈 발라내는 소리, 칼로 가르는 소리가 절도에 모두 맞았다. 포정의 몸놀림은 상림桑林에 합치되고 칼을 움직이는 소리는 경수經首의 리듬에도 들어맞았다.
이를 본 문혜군이 말했다.
" 참으로 훌륭하구나. 소 잡는 기술이 어떻게 해서 이런 경지에 이르렀는가?"
포정이 칼을 놓고 대답했다.
" 제가 즐기는 바는 道입니다. 도를 소 잡는 데 응용했을 따름입니다. 처음 제가 소를 잡을 때에는 보이는 소밖에 없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가 온전한 모습 그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소를 마음으로 만나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눈의 감각 기능을 멈추고 마음의 눈에 따라 손을 놀립니다. 天理에 따라 큰 틈새를 열어 제치고 빈 곳을 쳐 나갑니다.
소가 생긴 대로 칼을 움직이므로 저의 칼날은 뼈와 살이 연결된 곳을 다치게 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가 무슨 장애가 되겠습니까! 재주 있는 소 잡이가 해마다 칼을 바꾸는 것은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소 잡이가 다달이 칼을 교체하는 것은 뼈를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저의 칼은 지난 9년 줄곧 사용했고 소 수천마리를 잡았어도 칼날이 지금 막 새로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은 두께가 없을 정도로 날카롭습니다.
두께 없는 칼로 벌어져 있는 뼈마디 사이에 삽입하므로 공간이 널찍해서 칼날을 방금 숫돌에  간 듯합니다. 하지만 칼날이 근육과 골반이 연결된 곳에 이를 때마다 어려움을 절감합니다.

저는 근심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고서 눈길을 고정시키고 손놀림을 천천히 하면서 칼날을 매우 세심하게 움직입니다. 어느 결에 뼈와 살이 확연하게 갈라져 흡사 흙덩이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일을 마친 뒤에는)칼을 들고 일어나서 사방을 둘러보고 머뭇거리면서 만족한 기분으로 흔쾌히 칼을 잘 닦아 둡니다."
이에 문혜군이 말했다.
" 훌륭하구나. 내가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의 이치를 얻었도다."
<내편 양생주中>

* 천하를 천하에 감춰라
세상 사람들은 배를 골짜기에 감추고 산을 연못에 감추고는 이를 든든하게 여긴다.
하지만 한밤중에 힘 있는 자가 몰래 배를 짊어지고 달아나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한다. 작은 것을 큰 데 감추는 것은 마땅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무릇 천하를 천하에 숨기면 잃어버릴 염려는 전혀 없어진다.

바로 이것이 실상의 진리이다. 그저 사람의 몸을 받으면 그대로 즐길 뿐이다. 사람의 육신은 온갖 변화가 끝이 없으므로 그 즐거움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은 어느 것도 잃지 않는 경지에서 소요하면서 만물을 그대로 놓아둔다. 그는 요절해도 좋고 천수를 다해도 좋다. 태어남도 죽음과 똑같아 즐긴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본받으려 하는데, 하물며 만물이 의지하고 온갖 변화가 나오는 大道에 있어 서랴!
<내편 대종사中>

* 구멍 뚫린 혼돈(渾沌)
남해의 帝는 숙이고, 북해의 제는 홀(忽)이며, 중앙의 제는 혼돈이다.
어느 날 숙과 홀이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이 후한 대접을 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환대에 보답하기 위해 논의를 했다.
" 사람에게는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호흡할 수 있다.
하지만 혼돈 에게는 구멍이 없으니 그에게 구멍을 뚫어 주자."
이에 둘은 날마다 구멍 하나씩을 뚫었는데,
7일이 되자 혼돈은 죽고 말았다. 
<내편 응제왕中>


자료정리:곽미희 mihee1984@hanmail.net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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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