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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29. 16:41

엔트로피(제레미 리프킨) 요약 및 서평 독후감2010. 4. 29. 16:41

1. 작가소개

- 제레미 리프킨 (Jeremy Rifkin) : 1945~

  * 작가의 삶과 작품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넘나들며 자본주의 체제 및 인간의 생활방식, 현대과학기술의 폐해 등을 날카롭게 비판해온 세계적인 행동주의 철학자이다.
1945년 생으로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와튼 경영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터프츠대학의 플레처 법과 대학원에서 국제관계 학을 공부하였다. 그 후 자신이 설립한 경제동향연구재단(The Foundation On Economic Trends, FOET) 의 이사장인 그는 사회운동가의 면모뿐 아니라, 전 세계 8개국 대통령과 지도층 인사들의 자문 역을 맡을 정도로 제도권에서도 인정을 받는 면모를 지니고 있다. .
  15권의 책을 지었으며, 그의 책들은 16개국 언어로 번역될 정도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에 번역된 책으로는, 한국에서 출간된 순서대로 나열하면, [엔트로피], [노동의 종말], [생명권 정치학], [바이오테크 시대], [소유의 종말], [육식의 종말]이 있다. 그의 글이 따로 실린 책으로는 [거대한 전환]이라는 책도 있으며, 격월간지 [녹색평론]에 그의 글이 실리곤 한다.

리프킨은 직선적인 세계관을 거부하며(엔트로피) 생명권을 중심으로 놓는 정치학을 주장한다(생명권 정치학).
그는 생명공학 기술의 폭주 적인 발전과 그 성과를 기업과 국가가 독점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며(바이오테크 시대), 육식의 팽배가 얼마나 생명권을 파괴하는지를 고발한다(육식의 종말). 또한 정보화의 진행에 의해서 기존의 노동 양식은 '종말'할 것이며(노동의 종말), 소유에서 접속 중심의 자본주의의 재편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소유의 종말).

* 작가의 사상에 대한 평가

제레미 리프킨에 대한 평가는 항상 극단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너른 시야로 지구적 구조와 미래를 바라보는 탁월한 사상가이자 활동가로 추앙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과학계에서 가장 증오 받는 인물'이라는 「타임」지의 표현대로 그를 사이비 저술가, 기껏해야 영향력 있는 선동가로 본다.
  리프킨에 대한 이런 엇갈린 평가는 그의 30여 년간의 활동이 언제나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열렬한 것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77년 '경제조류재단'을 창설한 이후 리프킨은 십 수권의 논쟁 작을 썼고, 전세계 20개국 500여 개 대학에서 강연했으며, 미국정부의 각종 환경, 경제정책 방향에 입김을 넣었다.
  리프킨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주로 그의 과학적 엄밀성을 문제삼는다. 리프킨은 경제학과 국제관계 학을 전공했을 뿐 정식적인 과학 교육은 받은 적이 없다. 비판자들은 그 점을 꼬집으며, 리프킨이 몇몇 과학적 사실을 수집하여 망상적인 종말론을 구성한다고 지적한다. 사실 리프킨의 초기 저작들은 '사이비 과학'이라는 지적을 받기에 충분할 정도다. 영적인 세계관을 역설하여 저명한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로부터 "학문으로 가장하여 교묘히 짜 집어진 반(反) 지성적 프로파간다"라 비난받았다. 이후 <바이오테크 시대> 등에서 드러낸 유전자 공학에 대한 반감 탓에 '기술혐오 자' 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추종자나 비판자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대중설득가로서의 그의 역량. 우리 나라에서도 바람을 일으켰던 '종말' 시리즈를 비롯한 그의 책은 새롭지 않은 주장을 풍부한 실례로 뒷받침해 인상깊게 제시한다. 효과적인 선전 선동 술을 무기로 미국 정부의 정책결정에 참여해 목소리를 내고 그 과정을 통해 대중에게 자신의 주장을 퍼뜨린다.


2. 용어 정리

* 기계론적 세계관 - 발전이란 더 많은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는 것이고, 이것이 더욱 질서 있는 세계를 만든다. 과학과 기술은 이러한 작업을 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 엔트로피의 세계관 - 인류의 에너지 환경이 거의 종말에 다다름에 따라 기계론적 세계관의 해악을 지적하며 등장하였다.

* 열역학 제1법칙 - (에너지 보존의 법칙) 우주의 물질과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해서 생성하거나 소멸될 수 없고 오직 형태만이 바뀌는 것이다.

* 열역학 제2법칙 - (엔트로피의 원칙) 물질과 에너지는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부터 사용할 수 없는 형태로, 질서가 있고 값어치가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하고 값어치가 없는 상태로의 한 방향으로만 변할 수 있다.


3. 내용 요약

제 1부. 세계관의 변화

* 세계관

  엔트로피 법칙에 의하면 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바뀔 수 있다. 근본적으로 모든 것은 질서가 있고 값어치가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하고 값어치가 없는 상태로의 한 방향으로만 변할 수 있음을 뜻한다.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사용할 없는 형태로 얼마나 변했는가에 대한 척도가 바로 엔트로피이다. 엔트로피 법칙에 의하면 어느 한 곳에 질서가 더 생기는 것은 다른 곳에서 이보다 더한 무질서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엔트로피 법칙은 역사를 발전으로 보는 개념을 무너뜨릴 것이며, 과학과 기술이 보다 질서 있는 세계를 만든다는 생각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뉴턴의 기계적 세계가 중세 기독교 세계관을 대치하게 될 때처럼 이런 엔트로피 법칙은 현재의 세계관을 대치하게 될 것이다.
  열역학 법칙들은 모든 물리적 현상에 적용된다. 노벨상 수상자인 화학자 소디는 열역학 법칙이 모든 정치체제의 흥망성쇠, 국가의 자유나 속박, 산업의 움직임, 가난이나 부의 근본 그리고 모든 종족의 행복까지도 관장한다고 말했다.
  물리적 존재에 대한 기준을 세우는 데 열역학 법칙과 인간이 어떻게 조화해 나가느냐가 바로 인간의 정신이 번영할 것인가 소멸될 것인가를 결정 짓는다. 모든 정신적 발전이 출발하는 물리적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엔트로피 법칙의 완전한 이해가 필요하다.

* 그리스와 다섯 역사시대 : 순환과 소멸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역사는 5단계로 나누어지고 각 단계마다 줄곧 악화된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Hesiod는 황금시대, 은시대, 청동시대, 영웅시대, 철기시대로 구분했다.
  현대의 사람들은 일주일에 40시간만을 일하고 1년에 몇 주일의 휴가를 즐길 수 있다는 데 우쭐하지만, 채집사회에서는 이런 정도의 생활 환경은 견딜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실제로 채집사회에서는 일주일에 12시간에서 20시간 정도만 일을 하고 일 년에도 몇 달을 놀고 있다. 대신에 이들은 게임이나, 운동, 미술, 음악, 춤, 축제, 방문 등으로 여가를 보낸다. 일반적인 견해와는 상반되게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건강한 종족 가운데 들며, 음식물은 영양가가 높고 대개 예순 살 넘게 살고 있다. 대부분의 채집사회는 협동과 공유를 잘 꾸려 나가고 있으며 상호간 또는 다른 집단간에 싸우려고 들지 않는다.

  그리스 사람들은 세계가 신성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완전하기는 하지만 영원한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 따라서 역사는 황금시대의 완전한 질서에서 출발하여 차츰 붕괴되는 과정이 된다. 결국, 우주는 극한의 혼돈 상태에 이르게 되며 이때 신성이 다시 원래의 완전한 상태로 되돌려 놓는다. 그러면 이러한 순환이 다시 연속된다. 역사는 완전한 상태에 이르는 과정이 아니라, 질서로부터 혼돈에 이르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순환이다.
  역사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그리스가 사회를 구성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놓은 사회란 가장 적은 변화를 겪는 사회라고 생각했다. 계속되는 변화가 발전이라는 개념은 전혀 없었다. 발전이 세상에 가치라든가 질서를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그 반대라고 믿었다. 역사는 완전한 상태에서 시작해서 붕괴하는 과정이고 원래의 재산을 없애 버리는 과정이라고 하면, 이상적인 상태란 이러한 붕괴 과정을 가능한 한 늦추는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변화와 발전을 붕괴와 혼돈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들의 목적은 가능한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세계를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것이었다.

* 기독교의 세계관

  중세 유럽을 지배했던 기독교 세계관은 일생을 오로지 다음 세상을 위한 준비 단계로만 보았다. 기독교 세계관은 그리스의 순환에 대한 개념은 버리고, 붕괴하는 과정이라는 개념만으로 역사를 본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역사는 창조, 구원, 최후심판으로 못 박아져 있다. 역사는 순환되지도 않으며, 어떤 완전한 상태에 이르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역사는 악이 끊임없이 세상을 혼돈 시키고 붕괴시킨다고 본 것이다.
  또한, 인간이 보다 나은 상태로 개선될 수 있는 가능성조차 원죄설로 막아 버리고 있다.

* 현대의 세계관을 향하여

  튀고르는 역사의 순환성이나 지속되는 붕괴의 개념을 거부했다. 역사는 직선적으로 발전하며 항상 그 이전의 단계에 비해 나은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역사는 축적되며 발전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이스 철학자나 로마 교회의 신학자와는 달리, 지속되는 변화와 변천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했다. 튀르고는 발전이 어느 때는 멈추기도 하고 때로는 몇 단계 후퇴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역사는 완전한 상태로 다가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얼마나 대담한 생각이었던가! 그렇지만 세상은 이미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학교에서 쫓겨나지도 않았고 정부로부터 벌을 받지도 않았다.

* 기계적 세계관의 건축가

  기계적 세계관은 3명(Francis Bacon, Rene Descartes, Issac Newton)의 합작이다.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들의 생각 밑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베이컨은 고대 그리스의 세계관을 신랄하게 공격함으로써 기계적 세계관의 초석을 세워 놓았다. 베이컨은 세계를 다른 눈으로 보았다. 그냥 앉아서 자연을 명상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을 조종할 방법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있어 학문은 사물의 형이상학적인 왜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베이컨을 사물의 "어떻게"를 밝히는 것이 학문이라고 믿었다. "과학의 진실 되고 엄연한 목적은 이것 이외의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인간의 삶의 본래 새로운 발견과 능력을 지니고 있다." 고 주장했다. 세상을 다루는 새로운 방법은 질서 있는 것이며, 인간들이 다루는 영역을 확장하여 모든 사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이어야 한다고 천명하였던 것이다.
  베이컨이 새로운 세계관으로 향한 문을 조금 열었을 때, 전통적인 수학자였던 데카르트가 새로운 계획을 선언하면서 돌진하였다. 곧 이어 뉴턴이 데카르트를 따랐다. 뉴턴은 이러한 상점을 여는 데 소용되는 모든 도구를 가져왔다.
  혼돈과 붕괴로 역사를 보는 그리스의 견해는 비수학적이기 때문에 이제는 틀렸다.

  기계적 세계관은 운동하는 물질만을 다룬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기계를 위해서 만들어진 세계관이다. 양(물질)으로부터 생명의 모든 성질을 분리하여 제거함으로써, 기계적 물질로 구성된, 차고 무감각한 우주를 만들게 됐다.
  기계적 패러다임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이것은 단순하며, 예측 가능하고, 무엇보다도 잘 들어맞았다. 그러나 사회에서의 사람들의 행동은 왜 그렇게 우왕좌왕하고 혼란스러운지 알 수 없었다. 이러한 난점은 곧 해결되었다. 사회가 잘못 행동하고 있다면, 이것은 우주를 지배하는 자연 법칙에 따라 사회가 작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John Locke는 정부와 사회의 일들을 세계의 기계적 패러다임과 조화시켰고, Adam Smith는 경제에 대해서 그와 비슷한 작업을 하였다.
  로크는 왜 인간 세계는 이처럼 혼란스러운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의 결론에 따르면, 세상을 오랫동안 지배해 왔던 신 중심 사상에서 유래된 비논리적인 전통과 습관을 기초로 하여 사회 질서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의 자연 법칙이 어긋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종교가 개개인의 사적인 관심사는 될 수 있어도, 공적인 활동에 있어서 그 기초가 될 수는 없다."며 이전의 철학자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주장을 하였다.

   베이컨이 자연에서 신을 떼어놓듯이 로크는 사람들 일에서 신을 제거함으로써, 인간을 우주에 홀로 존재하게 만들었다.
  로크는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것은 물자가 부족하거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사회의 부를 계속해서 증대하기만 하면 사회적 융화는 자연히 향상될 것이다. 자연은 충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끼리 서로 다툴 필요는 없다. 자기 이익이 남의 이익과 상충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질 권리가 있다. 로크는 무한한 팽창과 물질적 풍요를 주장하는 철학자가 되었다.
  생태계에 관점을 둔 현대적인 눈으로 로크의 논문을 읽으면 아주 불안해진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강에 댐이 생길 때까지, 모든 광야가 광고판으로 뒤덮일 때까지, 모든 산이 모두 돌로 변할 때까지 로크는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크는 지독한 물질주의자, 생산성주의자였기에 그는 미국 인디언을 매도하였다. 소수의 인간들이 세계에서 가장 기름진 땅에서 살면서, 그 풍부함을 개발하기 거부하면서 놀고 있다고 욕했다.

  로크가 사회 관계에서 그랬듯이, 스미스도 경제에서 도덕성의 개념을 완전히 제거하였다.
  스미스 이론은 경제적 획득의 추구에 있어서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이기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물리적 요구를 만족시키는 물질적 풍요를 얻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욕망을 그 내용에 포함하고 있다. 윤리적인 선택의 여지는 없다. 개인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실리주의적인 판단만이 있을 뿐이다.
  기계적 패러다임에 대한 논리적인 결론을 간단하다. "사람이 물질적 행복을 더 많이 누릴수록, 세계는 더 질서 있게 된다." 따라서, 발전은 더 많은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는 것이고, 이것은 더 질서 있는 세계를 만든다. 과학과 기술이 이러한 작업을 할 수 있는 도구이다.

  기계 시대는 발전의 개념으로써 특징 지울 수 있다. 가장 간단하게 압축하여, 발전은 덜 질서 있는 자연 세계를 인간이 노력하여 더 질서 있는 물질적 환경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발전은 원래 존재하였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자연 세계로부터 창조하는 과정이다. 이와 관련해서, 과학은 하나의 방법론이다. 이 방법론을 사용하여 사람은 자연의 법칙을 배우고, 또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은 일정한 법칙이나 규칙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기술이란 각 경우에 이 법칙을 적용하여 자연의 일부를 개조하여, 원래 상태보다 더 큰 가치와 더 나은 구조와 더 좋은 질서를 만드는 것이다.
  미래 세대들은 세계를 기계로 보는 우리의 개념을 아주 원시적인 것으로 여길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 세대는 전혀 다른 세계 패러다임 하에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제 2부. 엔트로피의 법칙

* 엔트로피 법칙

  고고학자인 Max Gluckman은 "과학은 지금 세대의 바보가 이전 세대의 천재보다 똑똑해질 수 있는 분야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열역학 제1법칙을 제2법칙을 일반물리학에서 가르치고 있다.
  이 두 법칙은 다음의 한 문장으로 나타낼 수 있다. “우주의 전체 에너지 양은 일정하고 전체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에너지를 생성시키거나 소멸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시간의 시작부터 종말까지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다.  제1법칙은 보존 법칙이다. ”일정량의 열을 일로 바꾸었을 때, 열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장소로 이동하였거나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변했을 따름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절대로 에너지는 만들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열역학 제1법칙뿐이라면, 에너지를 계속해서 사용한다 해도 에너지는 바닥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열역학 제2법칙은 에너지가 어느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할 때에는 반드시 모종의 불리한 상황이 부과된다. 이 불리한 점이란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양에 대한 손실을 뜻한다. 이것에 대한 용어가 바로 엔트로피이다. 엔트로피는 더 이상 일로 바꿀 수 없는 에너지 양에 대한 척도이다.
  엔트로피 증가는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감소를 뜻한다. 에너지는 그 차이가 없어지는 방향으로 변화가 생긴다고 한다. 에너지가 차이남이 없는 상태를 "평형상태"라고 한다. 더 이상 유용한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이다. 평형상태는 엔트로피가 최대인 상태로써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에너지가 더 이상 없는 상태이다. 세상에서는 엔트로피는 항상 최대가 되려고 한다.

  다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지구에서 물질 엔트로피는 끊임없이 증가하며, 끝내는 최대에 이르게 된다는 점이다. 우주와의 관계에 있어서 지구가 닫힌 계이기 때문이다. 주위와 에너지는 교환 하지만 물질을 주위와 교환하지 않는 계를 닫힌 계라고 한다. "우주의 아무리 기묘한 기구도 에너지만으로 물질을 상당량 만들어 내지 못한다. 도리어 굉장히 많은 양의 물질이 에너지로 바뀌어지고 있다."

* 우주론과 제2법칙

  Benjamin Thompson은 1854년에 엔트로피 법칙을 우주 이론에 적용하였다. 2년 후에 Helmholtz가 엔트로피 법칙에 근거한 표준 우주이론을 제안하였다. 그의 열 종말에 대한 이론은 우주가 차츰 붕괴되어, 끝내는 최대 엔트로피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모든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소모되어 더 이상의 활동이 없을 대가 열 종말이다. 우주의 열 종말은 바로 영원한 휴식의 상태이다.
  우주의 생성과 발달에 관한 가장 널리 인정받고 있는 이론은 대 폭발 big bang이다. 이 이론은 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과 맞는 이론이다. 우주는 완전한 질서에서 시작하여 점점 무질서한 상태로 변한다는 것이 이 이론이다.
  물론 다른 이론들도 있다. '순환이론'이 그 하나다. 우주가 처음이나 끝이 없이 팽창과 수축을 계속해서 반복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이 순환이론이 옳거나 그르다고 증명할 아무런 실험도 없기 때문에, 이것은 그저 막연한 이론일 뿐인다. 아직까지는 태양계나 지구에 대하여 엔트로피 법칙이 자연법칙 중에는 가장 우위에 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 시간, 형이상학, 그리고 엔트로피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시간은 흐른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러한 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시간이 비가역적이라는 점이다. 시간은 오직 미래,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에너지가 항상 사용 가능한 상태에서 사용 불가능한 상태로 옮겨지기 때문에 시간은 미래로만 흐른다. 우리는 우리 주변 세상의 엔트로피 변화를 끊임없이 인식하고 있다. 세계에 시간이 없어지고 있다는 말은 세계에 유용한 에너지가 없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엔트로피는 시간의 화살이다." 라고 에딩턴은 말하였다.

  일할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가 있을 경우에만 시간은 존재한다. 소비된 시간의 진짜 양은 사용되어 버린 에너지의 양과 정비례한다. 우주의 유용한 에너지가 고갈되어 갈수록 일어나는 사건의 개수는 적어진다. 즉, 실제 시간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열 종말의 최후 평형상태에 도달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세계의 에너지가 소비되면 될수록, 일어날 일의 개수는 줄어들고, 따라서 세계에 남겨진 시간은 짧아진다. 더 많은 양의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시간은 절약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에너지가 사용될수록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한 셈이 된다.
  엔트로피는 시간의 방향을 지적해 주지만, 속력에 대해서는 정의하고 있지 않다. 실제로, 엔트로피 과정은 끊임없이 속력이 변한다. 엔트로피 과정이 움직이는 속력은 우리의 자유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다. 인간이 이 세계에서 행한 모든 행동이 엔트로피 과정의 속력을 빠르게 하거나 혹은 느리게 한다. 우리가 생활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따라서, 세상의 유용한 에너지가 얼마나 빨리 분산되느냐가 정해진다. 과학이 형이상학이나 윤리학과 만나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 생명과 제2법칙

  과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다른 물질처럼, 생명체도 제2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시간의 화살과 진화'라는 선구적인 책에서 Harold Blum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유기체의 생성으로 나타난 부분적인 엔트로피 감소는 우주 엔트로피의 더 큰 증가로써만 가능하다."

  주위 환경으로부터 자유 에너지를 흡수함으로써 생명체는 엔트로피 과정의 반대방향으로 변할 수 있다. 이러한 자유 에너지원은 바로 태양이다. 모든 식물과 동물의 생명은 태양에 의존하고 있다. 식물의 경우는 광합성을 함으로써 직접적으로, 동물은 식물이나 다른 동물을 먹음으로써 간접적으로 태양에 의존하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인 물리학자 Erwin Schrodinger의 말을 빌리자면, “주위로부터 음의 엔트로피를 계속해서 얻음으로써 모든 생물은 살아간다. 유기체가 먹고사는 것은 바로 음의 엔트로피이다. 생물은 주위로부터 질서를 흡수한다." 달리 말하면, 모든 생명체 내에는 평형을 향해서 움직이려는 자연적인 경향이 있다.

  생명체는 열린 계이다. 물질과 에너지가 주위와 교환된다. 생명체가 살아있는 한, 절대로 평형에 이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평형사태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위로부터 유용한 에너지를 계속해서 흡수함으로써, 생명체는 평형상태에서 동떨어진 상태를 유지한다. 이러한 상태를 정류상태 steady state 라고 한다.
  "모든 생명체는 주위 환경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자신이나 자신의 씨앗으로 바꾸려고 하는 일종의 제국주의자이다." 라고 럿셀은 말했다. 아주 작은 식물조차도 전체 환경에 더 큰 무질서를 만들면서 자신의 질서를 지킨다. 식물의 경우, 광합성에 의하여 태양 빛으로부터 음의 엔트로피를 흡수함으로써 살아간다. 정상적인 먹이 사슬로써 이러한 엔트로피 증가는 잘 나타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잘 나타내는 간단한 먹이 사슬을 화학자인 G. Tyler Miller가 제시한다. 이것은 풀, 메뚜기, 개구리, 송어, 그리고 사람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밀러의 표현에 의하면, 먹이를 먹는 과정에 있어서, 80~90%의 에너지는 그냥 낭비되어 열의 형태로 주위환경으로 나간다. 얻은 에너지의 10%에서 20%만이 다음 단계로 이전될 뿐이다. 따라서, 사람 한 명이 질서 있는 상태를 1년 동안 유지하기 위해서 2천 7백만 마리 메뚜기나 풀 1천 톤에 해당하는 에너지가 소비되어야 한다.

  여러 종들이 일정한 생태계의 서식처를 차지하게 되면, 이들은 작은 양의 에너지를 좀더 효과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주어진 환경의 능력과 조화하게 된다. 최대 흐름의 초기 단계를 식민(colonizing) 단계라 하며, 최소 흐름의 나중 단계를 절정(climactic) 단계라 한다. 전반적으로 인류는 아직 식민 단계에서 절정 단계로 옮겨가지 않았다. 특히, 고도 산업사회에서는 인간이나 사회 모두에 있어서 에너지 흐름이 증가하도록 사람들은 행동하고 있다. 오늘날의 전 세계적인 인간 위기는 일종의 전환 위기이다. 다음 세대에서 인류는 절정 단계로 정착할 것이다. 인간이나 사회 모두에 있어서 에너지 흐름을 최소로 하도록 행동하는 단계이다. 만약에 이러한 변환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인류는 과거에 이러한 변환을 못했기 때문에 멸종된 다른 종의 뒤를 밟게 될 것이다. 생물의 역사는 멸종된 종들의 역사이다. 한 종류가 더 첨가된다고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 신체 외적인 기구와 에너지

  모든 생물체는 주위로부터 유용한 에너지를 흡수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투쟁을 한다 오직 인류만이 이러한 과정을 용이하게 하도록 외부의 기구를 이용한다. 온갖 종류의 도구를 만듦으로써 인간의 기구를 증대하고 확장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우리가 타고 난 신체 내부의 기관과 구별하여 신체 외적인 기구라고 한다. 신체 외적인 기구에는 사람이 사용 가능한 에너지를 얻고, 변환시키며 가공하는 모든 종류의 기구를 다 포함시킨다. 주위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하기 위하여 기구와 기계를 발전시켜 왔다.
  위대한 사람들은 자연 법칙, 사회 계약, 생산 방법의 논리, 권력의 속성 등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고, 에너지 흐름이나 엔트로피 법칙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일어나고 있는 엔트로피 패러다임이, 그 영향을 모든 학문의 영역에 미치게 되면, 많은 정치학자나 경제학자는 상당히 불행해질 것이다. 장차 몇 년 후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정치학이나 경제학에서 오랫동안 신성시되어 왔던 근본 개념에 큰 변화가 올 것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허용해왔던 거짓이 이것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도 의심받고 있기 때문에 이런 과정은 절대적인 것이다.

제 3부. 새로운 역사관의 틀로서의 엔트로피 

* 역사와 엔트로피 분수령

  "행복한 사람은 역사를 만들지 못한다."라는 것은 프랑스의 격언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라는 미국 격언이 있다. 역사라는 퍼즐을 푸는 열쇠는 엔트로피와 이 두 가지 속담에 있다.
  역사의 여유 또는 잉여 이론은 이렇게 주장한다. 사람들이 행동 양식에 중요한 변화가 생기는 것은 이들이 풍요의 결과 잉여를 충분히 축적해서 생각하고 실험할 수 있는 여유 시간이 생겼을 때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들은 주위의 일들이 잘 되어 갈 때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현재 살고 있는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 엔트로피 법칙에 의하면, 이러한 종류의 전환은 전 시대보다 유능한 에너지의 양이 점점 더 줄어들기 때문이다. 세계의 무질서의 정도는 항상 증가한다. 사용 가능한 에너지 양은 항상 줄어든다. 인간은 사용 가능한 에너지에 의존하여 살아가기 때문에, 점점 악화되는 환경 조건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따라서 복잡한 기술 등을 도입하여 존재를 유지하게 된다.

  뉴턴 패러다임의 신봉자들은 이러한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새롭고 복잡한 기술은 비효율적인 인간 에너지를 효율적인 기계에너지로 대치함으로써 보다 큰 가치를 창출하여 사람의 짐을 덜어 준다고 주장할 것이다. 기계에너지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문명의 척도를 삼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제 이러한 어리석은 생각을 버려야 할 때가 왔다. 기술이 발달되면, 에너지를 추출하거나 흐르게 하는 과정이 일반적으로 빨라진다. 에너지는 창조되거나 소멸될 수 없고, 다만 한 방향으로만 변화할 수 있음을 명심하라. 따라서, 이른바 효율성의 증가는 에너지의 분산과 세계의 무질서의 정도를 촉진시킬 따름이다.

  우리가 지구라고 부르는 이 닫힌 계의 물리적 한계를 양심적으로 인정하고 나서 계속해서 살아남기 위한 파격적인 조정을 해야만 한다. 인간과 다른 생물의 존속 여부는 우리가 자연과 얼마나 잘 조화를 이루고 생태계와 얼마나 잘 협동해서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가 이렇게 함으로써 자연의 재 순환 과정이 우리가 입힌 상처를 치료하게 되면 인간과 모든 생명체들은 오래 살고 건강한 생활을 지구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

* 최후의 에너지 분수령

  경제발전과정에서 인간은 자원과 이 자원을 이용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바꿀 수밖에 없었다.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자원에서 차츰 어려운 자원으로 바뀌어 가기 때문에 인간은 점점 더 복잡한 공정과 생산기술을 사용하게끔 되었다. 넓게 생태관계를 살펴보면, 경제 발전은 자연환경을 더욱 심하게 이용하는 방법의 발전이다.

* 기술

  인류의 천재들이 구상했던 모든 기술은 자연으로부터의 에너지를 변환시키는 변환기에 불과하다. 우리의 기술이 빨리 발달할수록, 변환 과정은 빨라지고, 사용 가능한 에너지도 더 빨리 분산된다. 따라서 무질서는 더 많이 쌓이게 된다. 세계가 더욱 혼돈 속으로 빠져 들어갈수록 사람들은 문제의 근원을 확인하려 들지 않는다. 그 대신에, 사람들은 자신을 기술의 갑옷으로 더 단단히 무장하고는 문제의 근원을  모든 비판으로부터 방어한다. 우리가 만든 세계의 무질서한 파편에 의하여 자신이 차츰 더 벗겨지고 또 위험해지고 있지만, 우리는 잘 입고 있으며 또 안전하다는 착각에 지금 매달려 있는 것이다.

* 외부 비용

  모든 기술은 주위의 더 큰 무질서로써 일시적인 질서를 창조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술의 이익이 항상 그 손해보다 더 크다고 믿어 왔다. 가끔 바라지 않던 부작용이 일어나면, 그 잘못을 덮어줄 새로운 기술을 발견해서 해결하면 되었다. 그러나 자쿠 엘룰(Jacques Ellul)은 “모든 기술은 시작부터 일종의 예견치 못한 부작용을 가지고 있으며, 이 부작용은 그 기술이 없었던 것보다 더 큰 손실을 가져온다. 이는 역사가 증명한다." 라고 하였다. 이전의 기술은 또 다른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더욱 무질서해지고 있다. 결국 어떤 문제에 대하여 새롭고 더 복잡한 기술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용 가능한 에너지는 더 빨리 소비되고, 분산과 무질서는 더욱 빨리 가속된다.
  현대인의 모든 활동에 기술과 질서를 도입하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엔트로피 과정을 가속화시킬 뿐이다. 과학자 슈와츠(Eugene Schwartz)는 <과잉기술 Overskill>이라는 저서에서 기술 사회를 만들어 내려는 우리의 노력을 평하여 이것을 회전하는 거대한 ‘다람쥐 쳇바퀴’의 다람쥐에 비유하였다. 문명 전체에 기술을 전파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사회는 점점 와해되어 간다.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문제는 커지면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따라서 무질서도 늘어난다. 이 모든 과정을 지수 함수적으로 진행된다.

* 기술의 수확 체감

  기술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힘을 가진 그 어떤 것이 아니다. 다만 에너지의 변환기일 뿐이다. 기술의 방법이 많아지고, 계에 많은 에너지가 흐르게 되면, 환경의 엔트로피는 꾸준히 최대치를 향하여 옮겨간다. 그리고는 에너지 흐름을 따라서 수익성이 감소하기 시작한다. 산업은 환경, 건강, 그리고 안전 규정을 지키는데 더 많은 돈을 투자할 수밖에 없다.
  에너지 환경이 거의 엔트로피 분수령에 도달하게 되면, 그 에너지에 관한 기술은 결국 끝장 나고 만다. 예전의 에너지 흐름에서 생겨난 모든 기술은 급격히 변하게 되거나, 혹은 예전 에너지 양이 줄어들게 됨에 따라서 그냥 위축되어 버린다. 사회의 에너지 기반이 나무에서 석탄으로, 석탄에서 석유로, 석유에서 전기로 에너지 근본을 바꾸었을 때 발생한 기술적, 제도적 변화만 살펴보아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 제도의 발달

  문명이나 분화의 발달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다양한 경제적 혹은 정치적 활동을 중앙에서 조절할 수 있도록 통합하려고 한다. 더 이상의 통합이 불가능한 지점에 이르면 그 문명이나 문화는 붕괴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점에 도달하기 전에 계속되는 위기를 중앙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한다. 모든 산업 국가가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 근본 이유는 엔트로피 법칙 때문이다.
  사회가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복합 기관(사회의 경제 조직과 정치 조직)은 매우 확대되고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기관 자체를 유지하는 데 엄청난 에너지가 소비된다. 마지막에 이르면, 복합 기관들조차도 필요한 에너지를 얻지 못하여 유지가 불가능해져 전체 조직이 해체되기 시작한다. 그 사회는 차츰 외부로부터 침략이나 내부의 반란 또는 혁명에 대해 더욱 취약해진다.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로마 문명의 흥망이 모두 다 위에서 언급한 과정들에 대한 좋은 본보기이다.
  에너지의 흐름이 낮은 수준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면 사회체제를 통해 에너지를 변환하는 역할을 맡은 기구도 팽창속도를 아주 느리게 묶어둘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회가 주변환경으로부터 더욱 많은 에너지를 얻어내려고 할 때에만 제도도 이에 따라서 그 복잡성과 통제 기능이 강화된다. 그러므로 절정 상태에서는 작고 분권화 된 기구가 선호되며, 식민화 상태에서는 크고 중앙 집중적인 기구가 선택되는 것이다.

* 전문화

  과도한 전문화는 한 종을 멸망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라고 생물학자들은 말한다. 한 종이 특정한 형태의 생태계에 과도하게 전문화되면, 이 종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할 수 없게 된다. 전환에 필요한 융통성이나 다양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날, 사람들은 너무 과도하게 전문화되어 있는 현재의 에너지 환경에 적응되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에너지 환경으로 전환할 때 필요한 융통성을 대부분 잃어 버렸다.

* 세계관과 에너지 환경

  뉴턴의 기계론적 패러다임은 17세기로부터 18세기에 걸쳐 유럽의 여러 문화가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에 입각한 환경에서 사상 최초로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원에 입각한 환경으로 옮아가는 시대에 형성되었다. 이렇게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원으로 이동함에 따라 인간은 순환과 흐름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물량과 비축이 중요성을 띠는 사회로 이동하는 것이다. 세계관의 변화도 그만큼 엄청난 것이다.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로 태양까지도 껐다 켰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태양을 지금의 두 배나 오랫동안 머무르게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축적된 태양을 땅에서 꺼내어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다고 확신했고, 세계를 뜻대로 조직할 수 있다고 믿었다. 분산, 붕괴, 무질서에 대한 염려를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었다. 시간은 조절될 수 있고, 에너지도 창조될 수 있으며, 물질적인 발전도 보장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뉴턴의 패러다임은 도전에 직면해 있고 이제 곧 포기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인간은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원을 떠나 다시 한번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으로 옮겨가려는 시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제 4부.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와 다가오는 에너지 분수령

* 에너지 위기

  에너지 왕국인 미국의 놀라운 실태를 보자. 에너지 소비를 비교해 보면 미국이 일인당 년간 소비는 석탄으로 환산하여 1만 419킬로그램, 아이티의 소비량은 연간 31킬로그램으로 거의 비교가 되지 않는다.
  현실은 우리가 사용 가능한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가 바닥이 나면서 엔트로피 분수령에 위험하게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이다. 통계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싸고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 시대가 끝난다는 데는 모두 일치하고 있다.

* 합성 연료

현재의 석탄 액화 기술로는 1톤이 넘은 석탄을 높은 온도까지 올린 다음 고압을 가해서 겨우 3~4배럴의 기름을 얻는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투입될 뿐만 아니라, 합성연로를 만드는 공정에는 엄청난 양의 물이 필요하다. 열역학 법칙에 의하면, 에너지를 변환하는 데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얻어지는 에너지는 생산하는 데 사용한 에너지를 원래 에너지에서 뺀 만큼이다. 그래서 합성연료는 그 효율이 형편없다.

* 핵분열 에너지

  최근까지 원자력이 대체 에너지의 희망이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희망이 차츰 희미해지고 있다. 원자력 산업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평화로운 원자"에 대한 미래는 어두워 졌다. 한 발전소를 건설하는 데 20억불이 소요된다는 사실 이외에도,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비용 때문에, ‘값싼 에너지'라는 원자력의 신화는 깨졌다.

* 핵융합

  융합 에너지의 제안자들은 이 과정이 분열보다 훨씬 더 효율이 높고, 방사능 폐기물을 더 적게 생산하며, 미래에는 수소를 연료로 사용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로빈스는 “우리가 하기를 원치 않는 일을 하는 길이다. 전기를 만들기 위해서 복잡하고, 비싸고, 한 곳에 집중되어 있고,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길이다." 그는 모든 핵 기술은 버터를 자르는 데 전기톱을 사용하는 격이라고 말한다.

* 광물

  에너지 자원의 고갈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여러 물질적인 한계 중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고도로 산업화된 경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주요 광물이 차츰 메말라 가고 있다.

* 대체와 재생, 그리고 보전

  대체물은 전반적으로 대체된 물질보다 비효율적이다. 따라서 주어진 작용을 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재생 역시 열역학 제2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광물이 재생될 때마다, 이중 일부는 어쩔 수 없이 손실하게 된다. 대부분 금속의 재생 효율은 약 30%정도이다. 재생과 마찬가지로 , 절약도 의심할 바 없이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도 부분적인 해결책에 불과하다.

제 5부. 엔트로피와 산업시대

* 경제학

  만일 엔트로피 법칙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유용한 물질과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 다음 두 가지 사항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첫째 개인, 제도, 단체, 사회 모두가 생산물을 사용하여 얻는 가치보다는 그 생산물을 만들 때 생기는 무질서에 대하여 결국은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둘째, 미래의 다른 사람과 생물이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가 감소한다.
  이러한 현실은 과거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생각했던 세계관과는 정반대이다. 계몽적 세계관은 뉴턴 역학, 수학, 베이컨의 과학 방법론 등을 기초로 하여 성립되었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모두 다 이러한 기본 개념들을 근본으로 하여 세계를 체계화하려 한 것이다. 이런 것들의 중심 개념은 관측의 절대적인 재현성(과학적인 방법)과 모든 과정의 절대적인 가역성(보편 타당한 수학과 역학적 과정)에 대한 개념이다. 그렇지만, 실제 세계에는 그 어떤 상황도 꼭 같이 재현되지 않으면 가역 적이지도 않다. 엔트로피 법칙에 의하면, 모든 물리적 실제는 한 방향으로만 전개된다. 인간이 세상을 떠날 때, 살고 있는 동안 소모한 만큼 더 고갈된 세계를 남기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높은 에너지 생산을 축복하는 것은 실제로는 지구의 일정한 에너지 자원을 더 많이 소비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국민총생산(GNP)은 국민총비용(Gross National Cost)이다. 자원을 소비하면, 미래에는 그것을 다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농업

  미국 농업의 기술은 전 세계의 선망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도끼와 쟁기만을 가진 농부가 현대 미국의 기계화 농장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과거의 농부는 1칼로리 당 약 10칼로리를 생산한다. 그러나 미국의 현대 농업은 1칼로리 생산에 10칼로리를 소비하고 있는 상황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농업에 사용할수록 전체 환경의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오염과 땅의 파괴로 나타나는 무질서의 축적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는 자꾸 증가한다. 증가하는 비용 때문에 농업을 관장하는 경제 제도들은 자꾸 비대해지고 집중화된다.

* 수송
  모든 수송 수단은 재생 불가능한 화석 연료를 사용한다. 미국 소비자는 25%의 돈을 자동차에 소비한다. 식품보다 더 많은 돈을 자동차에 소비한다.
  한 사람이 자동차를 몰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동차 배기 가스 때문에 수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어린애의 뇌에 이상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 도시화

  오늘날 도시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총인구의 80%에 달하며, 게다가 인구의 절반 이상이 전 국토의 불과 1%의 지역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대다수의 미국인은 더욱 소규모의 거리에 살기를 원하고 있다.
  도시화가 확대된다는 것은 에너지의 흐름이 높아지고 무질서가 증가되는 것을 의미한다. 도시가 아무리 스스로를 유지하려고 노력해도 실상 그 도시 경제는 쇠퇴해 갈 뿐이다. 세금 부담이 많아지면 기업뿐만 아니라 부유층이나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도시를 떠난다. 이렇게 되며 그만큼 시의 세금 수입은 줄어들어 도시의 사업은 적어진다. 그리하여 실업자가 많아지고 범죄가 증가된다. 한편 억제하기 위해 시 당국은 다시 여기에 돈을 투입한다. 이런 악순환은 언제까지나 되풀이되게 마련이다.

* 군대

  아무리 군비를 늘려도 부와 안전은 지키지 못하며 군사비의 증가는 실업과 인플레를 일으킬 뿐이다. 언뜻 역설적으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 돈에 의해 생겨나는 일의 성질을 생각해 보면 곧 납득이 간다. 요컨대 군사면의 일에는 필연적으로 고도의 에너지와 자본이 투입됨으로써 병기 생산에서 인간의 노동력이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지는 미사일 같은 것 때문에 소비자 시장이 제약을 받게 된다고 논평하고 있다. 즉 근로자의 손에 돈이 들어가도 사들일 물자의 공급이 확대되지 않기 때문에 가격이 상승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전쟁과 군비는 인간의 활동 중 가장 많은 엔트로피를 증대시키는 활동이다. 우리는 후손들이 쓸 쟁기를 빼앗아 칼을 만들고 있는 꼴이다.

* 교육

  정보 과다에는 막대한 에너지 소비가 따른다. 현대인은 날마다 무수한 정보가 광고, 매스 미디어, 교육제도를 통하여 홍수처럼 밀어닥치고 있으며 시달림을 받고 있다. 밀어닥치는 에너지가 많을수록 우리가 흡수하고 보존하고 또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은 적어진다. 이미 사회에서의 에너지의 흐름 전반에 걸쳐 무질서가 늘어 그 결과 증대되는 통신 정보 시스템의 유지비로 충당되어야 할 에너지가 더욱 필요하게 되고 있다.
  컴퓨터화에 의해 과정이 효율적으로 되어 가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컴퓨터화된 사회는 서서히 복잡해져 가며, 그 복잡성의 그늘에는 언제나 고장의 가능성이 따르게 마련이다.

* 보건

  시약과 검사가 점점 엔트로피를 증대시키고 있으며 의원병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의사에게 보였기 때문에 병이 낫게 된 경우도 물론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환자의 건강의 중대한 영향을 받는 경우가 또한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의사를 찾는 모든 환자의 병중에서 75~80퍼센트는 언젠가는 나을 병이거나 혹은 최신의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사실로도 이것은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

  현대 의학이 가져다 준 공적의 하나로서 흔히 내세워지는 것은 평균 수명의 연장이다. 하지만 미국에 있어서 평균 수명의 연장은 1950년까지는 상승되고 있었으나, 이 해가 지난 후에는 변동 없는 상태에 있다. 현재로서는 적어도 남성에 관한 한, 평균 수명은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의학이 고도의 기술을 구사하여 치료하기 시작한 무렵부터 평균 수명이 저하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점에 관해서는 정부에서도 1950년이래 병이 발생하는 비율의 상승과 석유화학 경제에 의한 공해 또는 고 엔트로피 폐기물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결국 사회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갈림길에 놓인다. 하나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에 기반을 둔 저 에너지 소비사회로 회귀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마구 창궐하는 역병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제 6부. 새로운 세계관으로서의 엔트로피

* 새로운 경제이론을 향하여

  영원한 물질적 번영이라는 전제에 입각한 기계론적 세계관으로부터 유한한 자원을 보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초를 둔 엔트로피 세계관으로 옮겨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시대를 향해 옮겨가기 위해서는(단기적으로는) 몇 가지 핵심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 제 3세계의 발전

  미개발의 재생이 불가능한 자원의 대부분은 가난한 제3세계 여러 나라의 수중에 있다. 우리가 세계 자원의 대부분을 계속 먹어치우고 이 자원의 대부분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동안 제3세계 사람들은 끼니를 얻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면 우리는 남들에게 경제발전을 어떤 식으로 하라고 훈수할 권리가 없다. 그러므로 전세계가 거대한 산업의 쓰레기통으로 변하는 것을 막는 데 진정으로 관심이 있다면 지금 당장 자진해서 미국 같은 에너지 과소비 국들은 물질적 부를 대폭 줄여 희생을 감수할 용의가 있음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 부의 재분배

  재생 불가능한 자원에 대해서 점점 많은 비용을 지불한다는 것은 미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위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 질서가 정상적으로 유지되기를 기대한다면 에너지 흐름의 절대량을 줄이고 적은 양의 에너지를 사회 구성원 전체에게 좀 더 균등하게 분배해야 한다. 근본적인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에너지의 흐름을 줄이고 지구의 생물학적 한계를 지키자는 주장은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영원한 노예상태로 묶어두는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

* 태양에너지 시대의 새로운 인프라

  사람들은 태양에너지의 시대가 지금과 똑같고 단지 더 깨끗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태양에너지의 시대로 옮겨가려면 사회 모든 측면에서의 경제활동이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집중적이고 정체적인 개념(화석 연료)에서 분산된 흐름의 개념(태양에너지)으로 에너지의 기반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가를 일단 이해하면 기존의 산업구조가 태양에너지 시대와는 걸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태양 에너지가 갖는 흐름의 성질 및 현재의 기술면에서 보아 태양 에너지가 가장 적합한 것을 소규모 시스템, 예를 들어 각 가정에 열과 더운물을 공급하는 장치의 경우이다. 대규모의 생산이나 도시 생활에는 태양 에너지는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태양에너지 기술을 주로 화석연료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 자원에 의존하는 태양에너지 기술은 “숙주”가 살아있을 동안만 존재할 수 있다. 지상에 도달하는 태양에너지의 집중도는 매우 낮기 때문에 이것을 수집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시설이 필요하다. 이 문제는 극복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태양에너지의 강도는 고정된 것으로, 인간이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엔트로피 사회의 가치와 제도

  저 엔트로피 사회에서는 “보다 적은 것은 보다 풍부한 것이다”라는 말이 가장 중요한 진리가 될 것이다. 특히 동양의 노자나 석가는 함부로 물질을 소비하고 소유하며 거기에 집착하는 것을 거듭 경고하고 있다. 위대한 예지를 설파한 사람은 모두 저 엔트로피 생활에 고유의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마호메트, 이스라엘의 예언자 그리고 인도의 마하트마 등은 모두 검소한 생활을 보내며 스스로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저 엔트로피의 문화는 지금보다 훨씬 순박하고 간소하지만 생활은 더욱 즐거울 것이다. 경제적 및 정치적 형태에 대해서는 ‘가장 적게 통치하는 지배 형태가 최고’라는 사고방식이 강조된다.
  저 엔트로피 사회라고 해서 그 엔트로피를 내릴 만큼 내리면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이 내리면 질서는 회복될지 모르지만, 경직화되어 부자유스러운 사회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엔트로피의 한계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 인류가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남아 있는 기계적 세계관의 유물을 매장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변혁하는 것이 첫째로 해야할 작업이다. 과거의 생각과 행동을 영원히 버리고 새로운 세계관을 택하고 난 뒤에야 인류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과학의 개혁

  우리는 고전 물리학에 의지하여 면밀하게 생명을 계통화하는 방법을 고안해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 고전 물리학의 가정은 큰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물을 수학적인 공식으로 정확하게 측정하여 계량화할 수 있는 객관과 그렇게 할 수 없는 주관으로 나눈 것이 데카르트의 사고이지만 미세한 입자를 발견하게 되면 연이어 다시 미세한 것이 발견되는 등 끝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이젠베르크가 주장한 ‘불확실성의 원리’의 발견으로 물리학에 암흑시대가 찾아왔다. 물질을 정확하게 계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주어진 순간에 어떤 대상의 속도와 위치를 동시에 측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로서 지난 400년 가까이 물리학의 법칙을 일관해 온 완강한 결정론(세계의 운동, 인간의 의지는 어떤 외적인 힘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이론)을 타파했다고 할 수 있다.
  보른은 모든 현상은 그 자체가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말하였다. 즉 어떤 현상이 생기면 그 현상은 다른 모든 현상과 구분된다. 즉 “현상은 그것이 일부를 이루고 있는 우주에서 다른 부분을 떼어놓을 수 있고, 이어서 다른 동떨어진 현상과 일종의 ‘순수한’ 인간관계 속에서 관련을 갖고 있다”고 말한 뉴턴의 사고방식은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프리고지네는 비평형 열역학이론으로 1977년에 노밸상을 수상했는데, 그에 의하면 고전 물리학의 기본인 인과율 및 정확한 측정이라는 개념은 현재 열역학의 모든 법칙에 의거한 과학에 의해 재 수정되고 있다고 한다.
  엔트로피가 뉴턴의 역학을 대신하여 과학의 지배적인 규범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이미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 교육의 개혁

  우리의 교육과정은 산업사회의 필요를 충족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산업사회는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원에 의존해서 돌아가도록 짜여져 있다. 우리가 태양에너지 환경으로 옮겨감에 따라 오늘날의 교육방식과 연구방식은 점점 더 낡은 것이 될 것이다. 뉴턴 식의 학문은 교육에 대한 엔트로피적 접근방식에 밀려날 수밖에 없다. 새로운 교육과정은 형성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쪽으로 이리저리 방향을 전환하기도 하겠지만, 이 세계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고 갈 원칙은 열역학 제 1법칙 및 제 2법칙이다.

* 제 2의 종교개혁

  수 백년간 자연을 굴복시켜 생산성을 높이는 것에서 구원을 찾았던 기독교인들은 신의 피조물들을 보전하고 보호하는 데서 구원을 찾는 새로운 기독교인들의 도전을 받고 있다. “기독교적 노동윤리는 기독교적 보전윤리로 대치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중꾼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새로운 종교개혁과 새로운 약속이라는 비전의 주춧돌이 된다.

* 엔트로피 위기에 처하여

  엔트로피 법칙을 벗어날 길 은 없다. 우주를 지배하는 이 물리법칙은 우리존재의 모든 측면으로 파고든다. 분명하고 굳건한 진실이었던 것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거울 속의 세계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엔트로피 법칙의 결말을 부인하면 중력을 부정하는 사람처럼 최후의 따끔한 맛을 보고 파멸할 것이다. 기존의 세계관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대략 세 가지 유형의 반응을 보인다. 첫째, “낙관주의자” 들이다. 이들은 갑자기 어떤 기술적인 해결책이 나타나 우리의 생활방식을 계속 유지하게 해줄 것이라는 희망에 매달리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 유형의 반응은 “실용주의”라고 부를만하다. 엔트로피적 세계관의 의미를 일부나마 반영하려고 하지만 본질적으로 세계관의 시야가 한정되어 있다. 이들은 기존 시스템의 결함들은 기꺼이 시인하겠지만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곧 덧붙여 말할 것이다. 세 번째 유형은 “향락주의자”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 절망으로부터 희망으로

  우리는 좋든 싫든 어쩔 수 없이 저 에너지 사회를 향해 걸어가야만 한다. 우리 자신이 원하고, 스스로 살아나가기 위한 필요성과, 보다 나은 생활에의 큰 기회를 인식하여 저 에너지 사회로 나아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필사적으로 현재의 세계관에 매달려 결국 고통에 시달리면서 저 에너지 사회로 밀려갈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다.
  우리는 무한한 과거와 미래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되도록 에너지의 소비를 적게 하는 것이 최상의 도덕규범이 된다. 우리에게 남겨진 유한한 재산을 되도록 잘 간수하고 생성 과정을 지배하는 자연의 리듬을 되도록 존중하려면,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고 또 나중에 존재할 모든 생명에 대해 본원적인 사랑을 나타내야만 한다. 이 두 가지 책임과 의무를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에너지를 ‘식민형태’에서 ‘절정형태’로 인도하고 사회를 크게 전환시키기 위한 첫걸음이다. 즉 우리 각자가 세계의 ‘보호자’라는 자각이 필요한 것이다.


자료정리:이민아 catchon21@hanmail.net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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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