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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작가 소개

수잔 스트라서 (Susan Strasser)는 스미스소니언(Smithsonian)재단, 래드클리프(Radcliffe)대학의 번팅(Bunting)재단과 하버드(Harvard)대학 경영대학원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이 책을 저술하였다. 100년 동안 일어난 소비자 제품의 마케팅 변화를 치밀하게 관찰,정리하였고 각 기업체의 자료실과 대학 및 공공도서관을 샅샅이 뒤져 찾아낸 자료와 100장이 넘는 사진을 수록, 현장감 있고 생생하게 기술하여 이 분야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Ⅱ. 본문 내용

(1) 미국의 파이 (American Pie)

식민지 시대 이후 부유한 도시 사람들은 영국의 공장에서 만든 도자기 그릇을 사용했고, 서민들도 대부분 공장 제품을 구입한 경험이 있다. 남북 전쟁 이전에 이미 기계로 짠 천이 수직물을 눌렀고, 대부분의 가정이 1880년 이전에 이미 주철로 된 난로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자기들이 먹을 음식은 스스로 재배하거나 농장에서 직접 구입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집에서 짠 천으로 의복을 지어 입었다.

그러나 그 후 30년 사이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인들은 그 어디에 살던 또 지위의 고하에 관계없이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먹고, 마시고, 입기 시작했고, 세탁기로 세탁을 하고 공장 제품을 깔고 앉기 시작했다.

치약, 콘 후레이크, 껌, 안전 면도날, 카메라 등은 가정이나 조그마한 가게에서는 차마 만들 꿈도 꿀 수 없었던 제품이었지만, 어느덧 이것들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1880년부터 1910년까지 30년 동안 인구는 두 배가 되었는데 반해 선철 생산량은 7배, 종이는 9배, 면실유는 14배가 되었다. 이러한 신제품들을 동서남북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화차는 거의 4배로 늘어났다. 이러한 제품들의 대부분은 일관된 생산 라인이란 원리를 적용한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대량 생산 제품에 이어 전국적인 마케팅을 위한 새 기술이 등장했다. 치약을 구경조차 못한 사람들마저도 그것을 꼭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새로운 제품의 생산자들은 가정에서 만들어진 제품이나 상표명이 붙지 않은 상품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을 표준화하고, 제품을 광고하고, 상표명이 있는 제품으로 바꿔야 했다.

1880년 이후 미국 회사들은 제품을 발명해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여 아주 빠른 시간 안에 이익을 창출해 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서로 상대방의 성공과 실패를 예의 주시했고, 막 등장하기 시작한 전문직으로서의 광고인들과 함께 광고 원리를 도출하여 마케팅 프로그램을 고안해 냈다.

프록터 앤드 갬블 (Procter&Gamble)은 크리스코(Crisco)라는 새로운 식물성 쇼트닝 제품을 선보일 때 주요 경쟁사인 N.K. 페어뱅크사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다. 비누와 분말세제를 생산하던 페어뱅크는 면실유와 동물 유지방의 합성제품인 쇼트닝을 출시했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비누회사에서 어떻게 안전한 식품을 만들 수 있냐며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종래 사용하던 돼지기름과 버터, 그리고 올리브기름과 닭기름 등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서 쇼트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프록터 앤드 갬블은 페어뱅크의 실패를 거울삼아 회사 밖의 실험실에서 제품 테스트를 하였고 과학자들과 가정 경제학자들을 크리스코의 순수성과 우수성을 증언하는 인물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7~8개의 판촉계획을 동시다발적으로 테스트했다. 한 도시에서는 신문광고만 집행하고, 다른 곳에서는 전차 광고, 옥외 광고, 점두 진열만 실시했다.

1911년 12월 최초의 전국적인 광고가 개시되기 전에 회사는 미국 전역에 있는 모든 식품점에 3개에서 6개의 캔이 든 제품을 일제히 보냈다. 그리고 주변의 가게에서 크리스코를 살 수 없는 사람이 그 가게의 명단을 써서 프록터 앤드 갬블사에 보내면, 단 한  개에 한해서 25센트를 내고 살 수 있도록 하였다. 첫 4년 동안 이 회사는 잡지에 전국적으로 광고를 싣는 것은 물론이고 유통 점포의 협조를 얻어내는 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도 지속적인 판촉 캠페인을 전개했다. 6명의 크리스코 요리사가 약 일주일씩 요리 강습을 실시하면서 전국의 도시를 순회하는 캠페인을 하였다. 이 밖에도 유태인과 이민 온 외국인 요리사 등 특수한 시장을 겨냥한 포장이 혁신적으로 개발되었다. 크리스코의 마케팅은 현대적 마케팅의 새로운 이정표로서 평가되었다.

(2) 딱지 위에 붙은 이름

1900년에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설탕과 식초를 동네의 식품점이나 잡화점에서 통이나 그릇에 담아 구입했고, 핀이나 못도 역시 양으로 달아서 구입했다. 그러나 브랜드가 붙여진 포장 제품이 마케팅의 새로운 방법으로 도입되자, 이 시대의 사람들은 이 방법을 모든 산업에 적용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법과 판례에 의해서 보호를 받았다.

제품명을 써 넣는 행위는 효과적인 광고 활동과 생산자, 도매상, 소매상, 소비자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연결과정에서의 힘의 균형을 변화시켰다. 그 결과 생산자에게 새로운 형태의 지배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고객들은 더 이상 최고의 비누를 고르는데 상점 주인의 의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도매상들도 역시 자기들의 요구를 더 이상 채워줄 생산자를 선택하지 않아도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아이보리 비누를 원했고, 그것은 오직 프록터 앤드 갬블사로부터만 구할 수 있었다.

생산자들에게 있어서 브랜드 전략은 성장의 필수 불가결한 성공요인이었고, 제품에 대한 진보적 개혁주의자들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성공적인 방어 수단이 되었다. 그들은 제품에 표시를 함으로써 그 제품에 대한 책임만 지면되었고 공정에서의 하자만 없으면 공격의 화살을 피해 나갈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의  새로운 기술 개발은 포장 재료와 포장의 공정에 적용되었다. 라벨이나 종이상자에 제대로 된 문장이 실려 있는 한, 그것은 광고매체가 아니라 그 제품의 중요한 한 부부이었다. 포장과 내용물로 이루어진 제품을 판 것이지 포장 안에 들어 있는 제품만을 판 것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내셔널 비스킷의 광고는 노란 우비를 입고 있는 소년과 제품을 부각시켜 외부의 습기를 완전히 차단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회사들은 어떤 경우든지 브랜드를 사용함으로써 표준화된 제품을 생산해야만 했다. 소비자들이 제품 품질의 일관성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되자 여기서 호의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다시 말해서 회사의 평판으로 인해 소비자 마음속에 자리 잡은 호의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1890년대 까지는 그것은 무형의 것이지만 법적으로 남에게 팔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재산 같은 것이 아니라는 논란이 심심찮게 일어났었다. 계속되는 논란 끝에 마침내 1890년에 시작된 재판에서부터 대법원은 재산권에 물리적 사물뿐 아니라 기대되는 판매력, 판매가치, 시장 접근력 등도 포함해야 한다고 판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결정적인 법적 재정의가 호의의 법적인 재산권으로 만들어 주었고, 이것의 발전을 부채질 하는 계기가 되었다.

(3) 분배와 유통의 체인망

19세기 초엽에는 소매상에게 물건을 공급하고 수수료를 받는 중개인이 있었다. 하지만 규모가 점점 커지는 생산 회사들은 중개인보다는 새로운 도매상들을 점차 선호하게 되었다. 그들은 물건을 일단 구입하기 때문에 생산 회사는 그 물건이 소매상에 판매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금을 해야 하는 불편이 사라졌다. 그리고 생산회사는 먼저 받은 돈으로 새로운 생산시설에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본격적인 중간 도매상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생산 회사들은 분배에 대한 재정적 책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도매상들은 상품을 생산하는 대부분의 회사들보다 재정적으로 더 안정되어 있었다. 그들은 제품의 취급은 물론, 수많은 소매상들에게 제품을 공급할 수 있는 복잡한 시스템을 조직하는 일에도 책임을 지고 있었다. 많은 도시에 지사를 가지고 있으며, 크고 합리적인 조직체를 지니고 있는 도매회사들은 소매상을 좌지우지 할 뿐 아니라, 그 지역의 재정 분야에서도 압도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도매상들은 철도의 발전과 함께 커갔다. 예를 들면 1872년에 미주리(Missouri)강에 다리가 건설되면서 오마하(Omaha)는 대륙간 열차인 유니언 퍼시픽(Union Pacific)으로 연결이 되었다. 1875년부터 1890년까지 15년 동안 오마하의 도매 회사는 6배로 늘어나서 306개의 회사들이 시카고, 세인트루이스, 캔사스 시티, 샌프란시스코의 회사들과 경쟁을 벌이면서 서부에 있는 소매상들을 유치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한 개척지역의 마을에까지 공장 생산품을 가져감으로써 도매상의 세일즈맨들은 새로운 판매지역을 개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한 시장은 판매를 통해서 생성된 것이지 광고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세일즈맨들은 미국의 소매 비즈니스를 지배하던 작은 독립 소매상들과 거래했다. 이런 중에 소매업의 혁신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소매점들이 등장했다. 도시의 상점들은 한 가지, 혹은 두 가지 종류의 상품만 전문적으로 취급했다. 작은 가게들은 경험이 없어도 적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작은 상점은 주인 부부와 아이들, 또 소수의 직원들의 도움으로 운영되었는데 20세기 초반까지 미국 소매업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었다.

작은 가게의 주인들은 그 공동체 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민 사회 내에서 상점 주인들은 편지를 써 주거나 번역을 해준다든지, 신용을 빌려주고, 자문을 해주었다. 또 돈을 보관하거나 직업을 알선해주고 집을 소개해 주는 등 모국 동포들을 위해 온갖 것을 다 대행해 주었다. 

가게에서는 고객과 소매점과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외상거래를 허용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 외상이 있음으로 해서 노동자들은 봉급날로부터 다음 봉급날까지 생활 할 수 있었다.  1918년 하버드 대학 조사 연구소에 따르면 연쇄점 형태를 갖추지 않은 독립된 식품점의 경우, 단지 전체의 10.5퍼센트만이 현금거래로 제품을 팔았다. 외상을 받아준 62퍼센트의 가게는 3분의 2 이상이 ‘외상장부’로 거래를 하고 있었다.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외상이 너무 밀린 나머지 망하는 작은 가게들이 상당수 있었다. 1874년부터 1933년까지 뉴욕 주 포우킵시(Poughkeepsie)에서 장사를 시작한 소매가게 중 4분의 1이상이 1년 안에 문을 닫았고, 단지 절반 정도만이 3년 이상 견뎠다.

  유통의 성패는 소매상이 도매상의 세일즈맨들과 형성한 인간관계, 그리고 그 지역 내의 고개들과의 인간관계에 의해서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고객들은 물건을 살 때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게 주인이나 종업원들로 하여금 상품을 건네주도록 요구했다. 이제야 막 소비자로 변화하기 시작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었다.

소비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생산자에게 신뢰를 가져야 하고 제품의 표지에 나온 말들을 믿어야 가능했다. 생산자들은 소매상들을 지원하겠다는 온갖 약속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구축하기 위해서 가게 주인들로부터 소비자의 신뢰를 빼앗아 와야만 했다.

(4) 새로운 제품, 새로운 습관

현대적인 미국 소비자 문화의 생성은 새로운 제품의 시장 도입과 시장 수요의 발생뿐 아니라 새로운 습관 및 활동의 생성과도 관련이 있다. 콘플레이크를 전혀 구입한 적이 없는 사람이 그것을 원하도록 교육되었고 식료품상의 큰 통에서 떠주는 귀리를 사는 것으로 만족했던 사람들이 상자에 든 퀘이커 오츠를 사야 하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포장된 아침 식사용 곡물이 왜 현대 도시 생활에 잘 어울리는지를 알게 되었고 그것이 편리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맞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학습을 기획, 조정하던 광고 산업은 19세기 말부터 엄청난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신문과 잡지는 식민지 시대부터 돈을 받고 상업 메시지를 실어왔다. 대개 이런 광고들은 잠재해 있는 소비자들에게 제품이 있음을 알리는 것에 불과했다.

20세기 시작과 함께 새롭게 출현한 대량 독자를 가진 잡지와 신문들은 광고 수입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광고 매체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광고물을 돋보이게 제작하였다. 광고물들은 크기가 커졌고 새로운 디자인 원리에 따라 여백도 시원하게 처리되었다. 광고의 목표가 당시까지는 정보 제공에 강조를 두었는데 가능한 수단은 모두 동원하여 구매자에게 영향을 시도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변하였다.

20세기로 막 접어들면서 많은 대행사들은 아티스트와 카피라이터를 고용하기 시작했고 옥외 광고나 교통 광고를 취급하는 대행사와 손을 잡고 자기들의 고객에게 서비스를 하였다. 그 중 선두적인 대행사들은 캠페인을 집행했는데 이것은 주의 깊게 기획된 작업으로 때로는 기초적인 시장 조사를 곁들여야 했고, 샘플링과 그 밖의 인쇄 매체를 이용하지 않는 판촉 활동도 집행했다. 점차로 광고 대행인들은 자기들의 업무가 무엇인지를 잘 아는 광고 전문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가장 효과적인 캠페인은 새로운 필요와 새로운 습관을 조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없는 것을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고 급속하게 나타나는 신제품과 사회 문화적 영역의 급속한 변화를 잘 연결시킴으로써 가능했다.

질레트(Gillette)는 이발소에 가서 남이 쓴 면도솔, 비누와 그 밖의 이발용 기구에 접촉하는 데서 올 수 있는 위험을 경고했다. “아무도 당신의 얼굴을 당신만큼 아는 사람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어느 누구도 당신만큼 당신 얼굴을 보살필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남자들에게 매일 사용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주장하면서 1909년에 나온 광고 헤드라인에서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당신은 매일 아침 면도를 해야 합니다.”
 
(5) 시장의 설계

대량 분배 시대에는 너무도 많은 신제품이 쏟아져 나왔으므로 마케팅의 목표는 전체 시장을 확대하는 것에 두었지 시장 점유율을 늘리는데 두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구매자들을 확보하고 현재의 구매자로 하여금 더 사도록 유도함으로써 청량음료와 안전면도기의 시장 영역을 자꾸만 넓혀야 했다.

새로운 구매자를 발견하기 위한 초기 단계의 노력에는 새로운 판매자를 발견해야 하는 일이 수반되었다. 한 지방에 국한된 분배로 시장해서 지역적, 전국적, 국제적 판매로 확대시켜 나갔다. 그들은 공인된 취급 점을 두거나 거의 모든 식품점, 잡화점, 약국 등에서 제품을 취급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지역에서의 분배를 확립해 나갔다.

새로운 분배를 조직하다 보면 때로는 경쟁자나 소구 대상을 고려해서 제품에 새로운 위치를 지어주는 이른바 오늘날의 위치 재정립(repositioning)이 필요한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1906년경 The Pacific Coast Condensed Milk Company는 시카고의 유명한 광고 대행사 사장, 존 마힌(John Mahin)에게 시애틀에 와서 카네이션 우유의 전국적 마케팅에 관해 자문을 부탁했다. 캔 우유 시장은 제한되어 있어 구급용이나 탐험 또는 캠핑 때나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마힌은 ‘The Modern Milkman’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해서 새로운 캠페인을 벌이자고 제안했다. 이 캠페인은 다른 회사들이 캔에 담아내는 가당 농축 우유를 카네이션의 경쟁상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불결하다고 당시 공격을 받고 있던 비가공 우유를 경쟁 제품으로 삼은 것이었다.

많은 회사들은 소비자들이 생각조차도 해볼 수 없었던 제품 용도를 소비자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이런 경우에는 완전히 새롭게 제품을 포지셔닝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고객을 끌어들이고 현재 사용자의 사용량을 증가시킬 목적으로 판촉물을 배포했다.
1880년대 후반에 나온 한 아이보리(Ivory) 광고는 말을 닦아 주는 비누로 보여주었지만 다른 광고는 ‘비누방울 파티’에 오라고 광고하였다. 이 파티는 아이보리 비눗물과 대롱을 사용해서 제일 큰 비누방울을 분 사람에게 푸짐한 상을 주는 휴일의 오락행사였다. 뿐만 아니라 세탁비누로 쓰기에도 좋고 놋그릇을 닦는 데에도 좋고, 식물의 해충방지는 물론이고, 카펫의 잉크를 없애는 데에도 적격이라고 주장하였다.

대형 회사가 상당한 판촉비용과 유명한 광고 대행사의 도움을 받더라도 시장을 형성, 확대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단 성공을 거둔 제품이라 할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쇠퇴한다는 사실은 시장 계획의 개념과 과정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오늘날의 마케터들이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life-cycl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대부분의 성공적인 회사들은 요즈음의 용어로 한다면 라인 확대를 위해 공장, 상표, 마케팅 조직 등을 최대한 활용했다. 라인 확대란 기존의 브랜드 이름을 쓰면서 새로운 모델, 새로운 크기, 새로운 향의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1909년 안전 면도날을 발명한 회사가 최신의 새로운 ‘우수작’을 자랑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질레트면도기의 ‘개정판’으로 이미 면도기를 가진 사람도 하나 더 사도록 유혹하는 제품이었다. 어떤 생산 회사들은 여러 가지 가격대의 제품을 개발, 소비자에게 도달시키기 위해 라인 확대를 이용했다. 1910년에 에디슨 축음기 라인의 앰버롤라(Amberola)라는 제품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파이어 바늘에, 스피커와 백여 장의 레코드를 넣을 수 있는 참나무와 마호가니 케이스로 된 것으로 200달러라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이는 철강 노동자 연봉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가장 싼 에디슨 축음기는 12달러 50센트에 팔렸다.

  시장 세분화와 목표 집단을 겨냥한 프로모션 등의 기술은 시장을 의도대로 변형시킬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태어난 것이고, 이런 기술은 소비자와 상인의 새로운 역할에 의해 자리를 잡게 되었고, 또 강화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판매 방식은 신제품들에 의해 지배되는 다양한 문화와 경제 내에서 마케팅의 문제에 대해 이론적으로 대응하기보다 실제적으로 대응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6) 판매와 판매촉진

  1891년 여름, 아메리칸 시리얼(American Cereal) 회사는 공장이 있는 아이오아 주 시다 래피즈(Cedar Rapids)에서 오레곤주의 포틀랜드(Portland)까지 화차 15대를 연결한 특별 열차에 12만 6천개의 2파운드짜리 퀘이커 오츠를 실었다. 포틀랜드에는 아직 그 제품을 팔고 있지 않았지만 각 가정의 우편함에는 이미 2분의 1온스짜리 소형 포장 품이 배달되어 있었다. 2년 후 이 회사는 시카고의 콜롬비아 세계박람회에 참가하여 전시관을 설치한 뒤, 그 전시관에서 현대적인 농장, 가공 장면, 유통 등을 보여주는 석판 인쇄의 책자를 나누어 주었다.

특별 열차와 세계 박람회는 제품들을 대중적인 흥미의 대상으로 만들었고 사람들은 거기서 기념 견본으로 받은 제품을 집으로 가져와 사용해 보게 되었다. 또 하나의 무료 증정품인 프리미엄도 횟수가 거듭될수록 브랜드 충성도를 높여 주었다. 연중 계속되는 판매사원들의 활동은 소매상과의 사이에 개인적인 인간관계를 확립시켜 마케팅 캠페인을 가게 안으로 끌어들이는데도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판매촉진의 전술은 시장을 창출하고 분배체제를 대량 생산 브랜드 제품에 적응시키는데 있어 특이하면서도 보완적인 역할을 했다.

원색으로 인쇄된 조그마한 카드를 모으는 것은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유행했던 취미였다. 아버클 브라더즈(Arbuckle Brothers)는 커피 포장 안에 카드들을 집어넣었는데 50개의 카드를 수집해서 연결, 조합시키면 동물이나 미국 역사 또는 세계 일주 여행 그림이 되도록 했다.

어린이는 판촉물의 특별한 목표 집단이었다. 한 카드는 ‘생기 있고 조그마한 카드 수집가’에게 그 카드를 어머니에게 보여주라고 종용했다. 장남감이나 종이인형, 퍼즐 등도 많았고 움직이는 기계도 어린이 주제로 되어 있는 경우가 흔했다.

장남감도 상표를 새겨 넣는 비싸지 않은 것들 중에 포함되었는데 이러한 물건을 ‘신안품 광고(specialty advertising)'라고 불렀다. 생산회사들은 쉽게 내버리는 신문이나 잡지에 내는 광고보다는 신안품에 새겨진 광고가 더 긴 시간 동안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부채는 여름 한철 동안 계속해서 쓰일 수 있었고, 달력이나 연감은 1년 동안 사용되었으며 주머니칼이나 병따개는 그보다 더 오래갔다.  

아메리칸 시리얼 회사는 제품 상자 안에 몇 개의 도자기를 집어 놓았다. 이러한 프리미엄들은 판매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접시 세트나 슬라이드를 모으려고 생각한 사람들은 다른 것으로 아침 식사용 식품을 바꾸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중복된 프리미엄을 상호교환하기 위해서 친구들에게 그 제품을 사라고 설득할 정도였다.

그 당시 상자에 프리미엄을 집어넣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반복 구매를 유도하려는 생산회사들은 쿠폰을 동봉하거나 아니면 소비자들에게 포장 물을 보내라고 요구했었다. 때로는 상표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상표를 잘라서 우편으로 보내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책과 잡지는 특히 인기 있는 프리미엄이었다.    

(7) 혁신적 소매업

1910년 까지 실제적으로 유통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직접적인 관계를 창조하고 구체적인 수요를 가지고 소비자가 상점을 찾게 만든 제조업자들의 새로운 마케팅 방법으로 인해, 소형 상점과 도매상인들까지도 아이보리를 팔게 되었다. 더욱이 영세소매상, 도매상과 생산자들은 백화점, 통신판매점, 연쇄점과 같은 아주 새로운 세 가지의 판매방식이 발전하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이들은 도매상과 같이 종종 생산과 유통을 결합시킨 대형의 강력한 회사였는데 생산자들의 힘에 대응하는 존재로 등장했다.

이들 매스 머천다이저(mass merchandiser)에게는 현대적인 판매의 기본 원칙이 된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로 이들의 고객은 구입하기 전에 파는 사람이 정해 놓은 가격에 상품을 구입했다. 그래서 마샬필드나 시어즈 백화점에서는 가격 흥정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백화점과 연쇄점은 단일 가격 체제 덕분에 경험이 적은 근로자들을 적은 보수에 많이 고용할 수 있었다.

둘째로, 상품의 가격은 상품을 회전시켜 이윤을 남길 수 있도록 계산된 수준에서 책정되었다. 교과서에서는 거리의 행상을 곧잘 예로 드는데, 행상이 4달러어치의 상품을 사서 하루를 마칠 무렵에 5달러에 팔았다면, 이 행상이 점심때까지 팔아 4달러를 재투자해서 하루를 마칠 무렵에 두 배를 팔았다면 원래 투자한 돈의 50%에 해당하는 2달러를 벌게 된 셈이다. 좀 더 복잡한 예를 들면, 임대료와 같은 고정비는 자주 회전되는 재고에 더 많은 이익을 발생시킨다.

대규모 소매업의 세 번째 특성은 부분화였다. 각 부문에 각기 다른 상품을 둠으로써 매스 머천다이저들은 어떤 특정 부문이, 심지어는 어떤 특정 상품이 기업의 이윤을 올리는데 기여하는지를 감시할 수 있는 회계체계를 고안해냈다. 이리하여 수익이 낮은 상품과 부문은 자연히 없어졌고, 종업원들도 성격뿐만 아니라 업무 능력의 계수적인 방법에 따라 평가될 수 있었다.

백화점에서는 부문별로 나누어진 각 코너는 자본과 노동력의 전문화와 합리화를 이루는 데 기여했다. 각각의 코너는 그들 나름대로의 고객, 재고관리 사원, 판매원이 있었고, 각기 다른 별도의 계정을 운영해서 수익을 올리고 각자의 상품과 노동력을 스스로 지불하여 연료비, 운영비 및 경비를 분담하도록 되어 있었다.

1920년 이전에는 시골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통신 판매 카탈로그로 인해 매스 머천다이징을 하게 되었다. 머천다이징 업체인 시어즈는 이미 1911년에 체계적인 방법을 머천다이징에 적용하여 각 고객이 구입한 상품, 주소 변경 여부, 가족에 대한 기타 정보를 담은 카드 인덱스 시스템을 유지했다. 또한 어느 고객이 어느 카탈로그를 받아야 할지를 알기 위해 고객을 분류하는 인덱스를 사용하기도 했다.

(8) 포장된 상품의 정치학

생산자들은 공공의 소요에 책임을 져야 했다. 즉, 상표가 붙여지고 포장된 상품들이 정치적 문제의 대상물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개혁가들은 포장된 내용물 즉, 식품과 약품의 건전성과 그 무게 등 측량의 정확도에 대한 책임을 생산자들이 지도록 하라고 정치가들에게 도전했다. 환상적인 라벨에 속는 소비자들을 염려하는 사람들은 포장 그 자체를 공적인 이슈로 삼았다.

식품과 약품의 개혁가들은 불량품과 해독이라는 두 가지 주요 문제들에 관심을 가졌다. 상품에 정직한 상표를 붙여 내용물을 표시하도록 요구하는 규정의 제정 없이는, 생산자들은 단풍 설탕 대신에 색깔과 향미를 첨가한 사탕수수 설탕을 썼던 것이다. 더욱이 주마다 다른, 다양한 규정 때문에 고생하던 전국을 상대하는 생산자들은 단일한 연방 정부 법안을 원했다.

생산업자들과 대량 구입 소매상들 간의 다툼이 계속되고, 몇 개의 대규모 소매업자들이 유수의 소비자 상품 생산회사와 나란히 미국의 거대 기업 명단에 오르게 되었지만, 19세기에서 20세기로 바뀌는 시대의 싸움에서는 생산회사들이 이겼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정책을 방어하기 위하여 법정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재정적인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이것 말고도 광고된 상표의 덕을 입어 자기들의 산업에서 상당한 힘을 지닐 수 있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미국인들은 발전하는 사회 속에 살게 되었다. 그것은 양으로 파는 제품에서 포장재 제품으로,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일일이 잉크를 찍어서 써야 하는 강철 펜에서 어디에나 휴대할 수 있는 만년필로, 이발관과 사진관에서 질레트와 코닥으로 발전하는 것을 의미했다. 진보란 내일만큼 현대적인 풍요로운 소비재 상품들로 특징 지워질 수 있다.

(9) 맺음말

  성공한 많은 제품들은 소비자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반면, 시장에서 사라져간 제품들은 그런 능력이 없음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비록 20세기의 수사(修史)는 민주주의와 소비자 제품의 풍요를 동일시하고 있지만 생산에 관한 근본적인 의사결정은 ‘1달러-1표’를 기초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선거권이 없다. 부유한 투자자들과 경영자들은 직접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린다.

사회학자 해리슨 화이트(Harrison White)는 “시장은 생산자들이 모여서 서로서로를 관찰하는 유형의 클럽이다. 구매자들의 압력은 생산자들이 소비자가 아니고 그들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그 거울을 바라보면서 회사의 간부들은 시장을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끊임없이 계속되고 발전되는 관계의 틀로 보는 것이 아니고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파이로 상상 한 것이다.

20세기가 저물어가면서 대부분의 생산 결정을 주도해온, 생산자가 결정하는 수요와 시장 위주의 생산이라는 근본적인 개념은 전에 없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산업재해, 의학적 폐기물로 덮힌 해변, 끊임없이 파괴되는 삼림과 오존층등 지구 생태계의 파괴와 관련된 문제들이 생산 문제를 결정짓는데 있어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고 있었다. 보다 넓은 의미로 이야기 하자면, 이러한 이슈들은 장기적인 안목을 무시한 채 제품을 생산하고 소비해온 생산자와 소비자를 바탕으로 세워진 경제와 문화를 시험대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마케팅 과정의 전반적인 목표는 ‘시장을 키우기’에 있다. 그런 목표는 새로운 제품이나 새로운 포장으로, 그리고 시장을 지역적으로 확대하거나 사람들로 하여금 기존 제품을 더 많이 사용하게 함으로써 달성 될 수 있을 것이다. 당국이나 화가 난 시민 단체들의 자극을 받아서 어떤 회사들은 산업공해를 경감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위기의 원천은 공해 통제의 필요성을 훨씬 넘어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 책에서 기술한 시장 창출의 역사적 과정의 중요성은 공적인 생활과 사적인 생활이 마주치는 교차로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의 구매 행동은 일견 개인적인 일이면서 전적으로 개인적인 행위일 수만은 없다. 그런 행동은 공적인 것이며 공적인 결과를 유발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새로운 종류의 대비책을 요구하고 있다. 이 문제는 개인 기업 차원에서 자기들의 이익에 맞게 해결하라고 밀어 둬서도 안 되고 전 세계 소비자, 기업인, 정부 등 모든 사람을 위한 새로운 정책과 전략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생산과 소비 ―경제활동과 일상생활의 습관의 문제인― 인간 생활 문화의 측면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고 맞물려 왔었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우리는 구매 습관이 ‘개인적 문제’라는 지금까지의 관념에 근본적으로 도전장을 던져야 할 것이다.


자료정리: 이진희 likethewell@hanmail.net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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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