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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

글랜 프랭클( Glenn Frankel)

워싱턴포스트의 선임기자이며 전 예루살램 지국장을 지낸 중동문제 전문가이다. 아래 내용은 2006년 7월16일자 워싱턴포스트 일요판에 실린 이스라엘 특집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이라크 전쟁과 같은 미국의 외교노선에 미치는 이스라엘의 영향력을 추적하면서 막강한 이스라엘의 로비의 현상과 힘의 배경과 사례등을 저널리스트 특유의 감각으로 기술하고 있다. 원래 이 특집은 아름다운 우정?(A beautiful Friendship ?)이라는 제목과 워싱턴에 미치는 이스라엘 로비의 힘,그 진실을 찾아서(In search of the truth about the Israel lobby's influence on Washington)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2. 내용

다비드 벤구리온이 간절히 원했던 것은 단 15분만이라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이자 20세기 불굴의 정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벤구리온은 미국 대통령을 직접 만나 유대 국가건설 문제를 협의키 위해 1941년 12월 워싱턴을 방문했다. 벤구리온은 K가에 있는 낡은 앰버서더호텔 14층에 월 1000달러의 스위트룸 2개를 빌렸다. 10주간 그 곳에 머무르면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편지를 쓰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대통령 비서인 미리암 코헨을 졸라댔다. 그러나 그는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채 돌아가야 했다.

그로부터 64년이 지난 2006년 5월, 백악관 이스트 룸에서 열리고 있는 공동기자회견장에 가보자. 부시 대통령이 연단에 오르고 그 옆에는 구리빛 머리에 주근깨가 있고 키가 크며 다소 긴장되어 보이는 이스라엘의 12번째 총리 에후드 올메르트가 서있다. 이 두 정치 지도자와 보좌관들은 대통령 집무실에서 약 2시간에 걸친 정상회담 후 곧바로 기자회견장으로 나왔다. 부시 대통령은 “이스라엘은 미국의 긴밀한 우방이자 동맹국임”을 재차 천명했고, 올메르트 총리의 "대담한 구상"과 평화를 향한 조치를 추켜세웠다. 기자회견 후 두 지도자는 단독회담을 갖기 위해 자리를 옮겼고 만찬을 함께 했다. 다음날 올메르트 총리는 미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을 했고 연설도중 16차례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네게브 사막이 내려다보이는 무덤에 잠들어 있는 벤구리온이 보면 기절할 일이다.

이것은 올메르트가 벤구리온 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다. 그가 환영받은 것은 바로 힘 때문이다. 그 힘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것이 아닌 친이스라엘 단체들의 로비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것은 20세기 후반에 결성된 유대계 미국인들의 조직들, 정치자금 기부자들, 그리고 싱크탱크들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힘이다. 기독교보수주의자들과 비유대인 후원자들의 지원을 받는 이들은 이스라엘의 이익만을 위해 일한다는 기본 목표를 가지고 있다.

로비활동과 미-이스라엘 동맹 덕분에, 이스라엘은 다른 어떤 국가보다 많은 연간  30억 달러에 이르는 원조를 받는다. 미 국무부의 문서함은 이스라엘과의 군대, 외교, 경제에 관한 양해각서로 가득하다. 이스라엘은 미국으로부터 군사문제에 있어서는 나토(NATO) 회원국과 같은 대우를 받고, 경제적으로는 캐나다·멕시코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 이스라엘과 미국사이에는 합동 군사전략 및 협력회의가 1년 내내  가득 차있다. 백악관 기자회견장에서 부시 대통령은 만약 이스라엘에 대한 어떤 공격에도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원할 것이라고 재차 확인했다.
이스라엘의 로비는 상원과 하원의 대부분의 의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민들은 이스라엘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으며 이런 의견은 9.11 이후 더 강해졌다. 현재 미국인들은 ‘이스라엘 사람은 선량하나 아랍인들은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이스라엘 로비 그룹으로 알려진 AIPAC(미이스라엘홍보위원회/American Israel Public Affairs Committee)의 대변인 조쉬 블락은 “요즈음 의회를 상대하는 일은 열린 문을 미는 것만큼 쉽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미국인들이 이것을 좋게만 보지 않는다. 2006년 3월 두 사람의 저명한 정치학자 -하버드의 스티븐 월트 교수와 시카고대의 존 미어샤이머 교수-는 주석이 가득한 42 페이지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부시 행정부의 이스라엘 정책과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려는 대중동정책이 이슬람 국가들을 분노에 빠뜨려 미국 안보를 위태롭게 한다고 주장했다.

두 교수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친밀한 파트너십은 전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다른 이익 단체들이 위험한 미국의 외교정책을 수정하려 애쓰지만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그들은 “이스라엘의 로비가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로비 단체가 모든 정치적 수단을 동원하여 미 행정부로 하여금 이라크에 대해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반대세력은 힘이 약해지거나 전복되고 이스라엘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전쟁, 파병, 정착촌 건설, 그리고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이득은 곧 미국의 손해

일부 로비 비평가들은 신선한 공기와 같은 이 논문을 환영했으며 두 교수의 용기와 당당함을 높이 칭송했다. 반전주의자이자 언론 비평가인 노먼 솔로몬은 이 볼티모어 선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수십 년 동안 금지되어온 논쟁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비평가들의 열렬한 환호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자신들이 아주 민감한 사안을 다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수십년에 걸쳐 유대인 전략가들은 국가의 이익을 빼돌려 유대의 이익에 전용함으로써 세계 곳곳에서 반유대주의를 불러 일으켰다. 이스라엘 지지자들은 두 교수의 논문이 반유대주의를 반영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유명한 작가 겸 변호사이자 하버드대 교수인 알란 더쇼위츠는 논문이 기괴한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면서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추방하려는 낌새가 있다고 평가절하 했다. 유대인명예연맹의 책임자인 아브라함 폭스맨은 본질적으로 이 논문은 이라크전쟁 책임을 유대인에게 전가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주미 이스라엘 대사 다니엘 아얄론은 우리와 인터뷰하는 동안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 논문을 ‘더럽고, 천박하며 조잡한 것이며, 허튼소리로 가득 찬 짜깁기일 뿐이며 없어져야 할 쓰레기’라고 비난했다.

월트와 미어샤이머 교수는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에 대하여 자신들이 주장하는 사실과 논점들은 여전히 정확하고 타당하며, 오히려 비판하고 욕하는 반응은 자신들의 핵심적인 주장을 확인시켜준다고 말한다. 즉 이스라엘의 로비는 신성한 소와 같아서 모름지기 그것을 비판하는 자는 반유대주의자라고 낙인찍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교수는 로비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그 힘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법이라고 주장한다.     

논문은 몇 가지 결점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의문들이다. 이스라엘 로비는 얼마나 강한가? 이라크 전쟁을 꾀하는데 어떠한 역할을 했고, 이란전을 위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이스라엘 로비는 부정적이기만 한가? 누구의 로비인가?

모리스 아미테이는 미소와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는 활기 넘치는 사람이다. 아미테이는 노스 캐피톨 거리의 모퉁이에 있는 빌딩의 작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그가 일하는 빌딩에는 36개국에서 온 로비스트들이 근무하고 있고, 미 국방성과 가스협회가 있다. 거기 근무하는 모든 사람들은 미 의회 의원과 후원자들에게 그들의 지식과 생각을 확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조그만 로비관련 법률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아미테이는 이곳에 아주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동료들 사이에서 그의 성공은 가히 전설로 기억되고 있다.

콜럼비아대와 하버드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아미테이는 미 국무부에서 외교관으로 7년간 근무했다. 1974년 동료들이 AIPAC의 상임이사직을 맡아달라고 그를 찾아 왔을 때는 국회 의사당 입법부 보좌관으로 6년째 일하고 있을 때였다. AIPAC는 다양한 유대인 단체로부터 기금을 모아 캐나다 태생 언론인 케넨이 1950년대 초에 세운 단체이다. 케넨은 1950년대와 60년대 초반까지 이스라엘의 이익을 위해 일했던 지칠 줄 모르는 활동가였다. 당시 AIPAC는 석유 이권에 맞물린 아랍권의 막강한  로비와 윌리엄 풀브라이트와 같은 인물에 맞서기 위해 돈과 표를 모아야 했다. 상원 외교위원회의 전설적 인물인 풀브라이트는 미숙한 유대 국가인 이스라엘을 미국이 지지하는 것은 중동의 안전을 위협하는 실수로 판단했다.

그러다가 1967년 발발한 ‘6일전쟁’은 전환점이 되었다. 아랍 지도자들이 비밀리에  유대인들을 바다 속에 빠트리자는 의견을 주고받으며 신판 홀로코스트에 불을 붙이려는 순간,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에 폭격을 감행하였고 결과는 대승리였다. 많은 유대계 미국인들은 본국의 형제를 지원하기 위해 단결했고, 비 유대인들도 이스라엘을 아랍 독재국가들의 바다에 떠있는 작지만 강력한 민주주의 섬으로 인식했다.

애당초 아미테이는 AIPAC의 상임이사가 되는 것을 꺼려했다. 왜냐하면 그곳은 유대인 파벌간의 끊임없는 싸움터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AIPAC에서 일하기로 결정하기까지 갈등이 아주 많았다. 최선의 판단은 아니었지만 한번 해보기로 결심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마침내 그는 AIPAC에서 일하게 되었고, 직원 규모와 예산을 세배로 늘려놓았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결정은 백악관으로부터 4블록 떨어진 G스트리트 13번지에 있던 사무실을 국회 의사당 옆으로 옮긴 것이었다. 아미테이는 미 국무부와 행정부를 이스라엘의 적으로 간주했고 반대로 의회를 동맹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계산을 했다. “행정부에는 대통령과 부통령이라는 오직 2명의 선출직 공무원이 있을 뿐이지만 의회에는 535명의 선출직이 있다.” 사무실을 의회 옆으로 이전함으로써 더 많은 로비대상과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AIPAC를 이끄는데 있어서 아미테이에게는 국회의 경험과 인맥이라는 유리한 점이 있었다.

한때는 CNN의 울프 블리처와 민주협회의 의장인 케네쓰 울락을 포함한 소수정예의 직원들이 일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자산은 수천 명의 회원들이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돕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가 아니라 하나의 신성한 사명이었다. “AIPAC가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회원들의 열정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동질감을 느끼며 그들은 지식과 정치적 의지에 힘입은 편지나 이메일을 통해 활동을 돕습니다. 그들은 기부금을 내며 의회 구성원들을 설득합니다.” 라고 아미테이는 말한다.

AIPAC는 주요한 미국 유대 조직들을 대표하는 ‘미국유대인위원회(AJC)’, ‘유대인 회의’, ‘반명예연맹(ADL)’ ‘유대조직대표자회의’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중요한 의제를 지지하는 몇 개의 단체 중 가장 유명하다. 워싱턴에서 AIPAC는 다른 단체보다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건국초기의 이스라엘은 미국 민주당의 양자나 다름없었고 재미유대인들은 대부분 민주당 후원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관계는 1970년대 말 처음으로 중도우파 출신의 메나헴 베긴이 이스라엘 총리가 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땅을 유대인들에게 주셨고, 그 땅을 통해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는 제리 팔웰 목사 및 기독교 보수주의자들과 동맹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이스라엘을 시리아와 이라크 같은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세력 균형 유지를 위한 냉전동맹국으로 간주했다. 건국초기 이스라엘인들은 미국유대인 사회가 제공하는 정치적 지원과 재정적 원조에 의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애증이 공존하는 관계였다. 미국유대인들은 기꺼이 고국을 위해 기부했으나 고국재건을 위해 이스라엘로 이사하거나 자녀들을 보내는 것에는 인색했기 때문이었다.

벤구리온의 목표는 2000년 전에 국외로 추방된 유대인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불러 모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한 그들의 절박한 요구는 유대계 미국인들로 하여금 정치적 성장을 꾀하는 단결력을 길러주었다. 랍비이자 역사가이며 미국유대인회의 의장이었던 고(故) 아서 허츠버그는 이스라엘이 생기기 전에는 유대인들이 개인자격으로 백악관 만찬에 참석했으나 건국 후에는 유대인 자격으로 만찬에 참석했다면서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과 관계되면서 재미유대인은 그들이 꿈꾸던 것보다 더 미국인이 되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일부 재미유대인들에게 있어 조국애는 부분적으로 죄의식에서 비롯되었다. 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재미유대인단체는 미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매우 느린 반응을 보였다. 전후 많은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런 범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들은 홀로코스트의 잿더미로부터 재기한 이스라엘을 돕고 동시에 자신들을 권익을 위해 단결했다.

이스라엘 지원세력이 결집하게 된 배경에는 흥미로운 심리적인 요소도 작용했다. 사실상 재미유대인들은 강해졌으나 스스로를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심지어 미국에서도 새로운 홀로코스트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유대인 사회를 조직하는 확실한 동력이 되었다”고 핸리 지그만은 말한다. 그는 한 때 미주유대연맹의 책임자였고, 지금은 외교부에서 중동 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이것은 희생자를 동정하는 의식을 자극했고, 자신들 또한 희생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만들었다.”

아미테이는 국방성 로비 변호 업무를 위해 1980년 AIPAC를 그만뒀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워싱턴홍보위원회(Washington Public Affairs Council)를 만들었다. AIPAC는 후계자인 토마스 다인의 지휘아래 계속 성장했다. 토마스 다인은 1980년대에 AIPAC의 규모와 영향력을 엄청나게 증가시켰고 이 기간 동안 상당한 정치적인 성과를 얻었다. 이 기간 친이스라엘 자금은 공화당 의원들을 낙선시키는데 동원되었다. 일리노이주 출신의 하원의원 폴 핀들리와 캘리포니아의 상원 의원 피트 맥클로스키가 낙선된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아랍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이스라엘에는 매우 적대적인 인물로 간주되었다. 

핀들리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정책을 비판하긴 했어도 이스라엘을 돕는 원조안에는 항상 찬성표를 던졌다. 그가 정작 잘못한 것은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를 정기적으로 만난 것과 언젠가 그를 ‘위대한 인권지도자’로 칭송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1982년 선거에서 이스라엘 로비단체의 표적이 되었다. 11선에 성공했던  핀들리는 12선 고지에서 실패를 맛보아야했다. 한편 2년 후의 선거에서 퍼시는 폴 사이먼에게 쓰라린 패배를 맛보아야했다. 이스라엘 후원자들이 약 180만 달러를 기부하여 독자적인 반(反) 퍼시 캠페인을 전개한 덕분이었다. 이제 당국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명확해졌다. ‘이스라엘에 맞서려면 위험을 각오하라’는 것이다.

핀들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낙선 후에야 나는 그들의 숨겨진 위협이 매우 확실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퍼시는 개인적으로 낙선 이유를 아미테이의 탓으로 돌렸다. “솔직히 그를 낙선시킬 만큼 대단한 인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라고 아미테이는 말한다. “우리는 그저 이 도시에 있는 다른 로비 집단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을 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친구를 후원하고 적을 낙선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은 무슨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IPAC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로비는 외교분야의 전미총기협회(NRA)로 간주될 만큼 명성이 자자하다. 전미총기협회는 특정인을 겨냥하여 공격하는 아주 날카롭고 호전적인 단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이스라엘 로비 집단은 그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전미총기협회는 주로 우파 공화당과 농촌지역의 민주당을 한정적으로 지원한다. 그러나 AIPAC의 지원은 민주 공화 양당 모두에 걸쳐 있으며 이념적 스팩트럼에서도 좌우 양쪽을 모두 파고들기 때문이다.

도를 넘어선 이스라엘의 로비

때는 1991년으로 조지 부시가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라크 군을 무찌르고  그들을 쿠웨이트에서 쫓아내자 부시와 측근 실세인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은 관심을 아랍-이스라엘 분쟁으로 돌렸다. 부시와 베이커는 아랍, 이스라엘 양측에 마드리드에서 열릴 역사적 중동평화회담에 나오도록 종용했다. 회담이 시작되기도 전에 어쩌면 결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깔려 있던 시기였다. 

당시 이스라엘 총리는 이츠하크 샤미르였다. 그는 규모는 작지만 가장 호전적인 시온당 강경노선의 지도자였다. 무너진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유대인 이민자 물결이 밀려오자 샤미르 정부는 가능한 빨리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다. 정착촌 건설을 위한 돈을 빌리기 위해 이스라엘은 100억 달러의 차관을 미국에 요청했다. 부시와 베이커는 이스라엘이 점령한 서안과 가자지구의 유대인 정착촌 확장에 그 돈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요구했다. 그것은 샤미르 총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부시 행정부의 반대를 돌파하기 위해 의회를 통해 차관을 얻어내도록 AIPAC에 요구했다.

그 해 9월 AIPAC는 의회 로비를 위해 의사당에 1,000명이 넘는 회원을 급파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이스라엘 로비 단체들을 직접 겨냥한 기자회견으로 맞섰다. 부시는 이렇게 말했다. “강력한 정치적인 힘에 대항해서........ 나는 오늘 우리 정부가 반대하는 현안을 밀어붙이기 위해 의사당에 1,000명의 로비스트들이 모였다고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들에 대항하여 미국을 위해 싸우는 외롭고 작은 한 사람을 보고 계십니다.”

AIPAC의 지도부는 샤미르 총리에게 그들이 상하원 의원 모두에서 대통령의 결정을 압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표를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부시의 회견은 양껏 부풀어 오른 풍선을 터뜨릴 수 있는 바늘과도 같았다. 며칠 후 상하원은 이스라엘단체에 후퇴를 권고했고 차관은 무위로 돌아갔다.

샤미르 총리에게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재미유대인동맹들의 급격한 이탈이었다. 그들은 미국대통령으로부터 자신들이 외국정부를 위해 숨어서 일하는 막강한 단체라는 인상을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건은 유대인 단체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고 미국유대인 지도자 한 사람은 고백했다.

샤미르 총리와 그의 측근들은 이탈한 미유대인 단체들을 소심하고 무기력한 겁쟁이라고 비난했다. 반면 이스라엘 유권자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샤미르 총리를 비난했다. 샤미르 총리는 다음 해의 선거에서 패배 했고 승리는 온건파의 이츠하크 라빈에게 돌아갔다. 부시 또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1992년 대선에서 뉴욕, 뉴저지, 오하이오, 그리고 플로리다처럼 유대인 세력이 큰 지역에서 표를 많이 얻지 못함으로써 빌 클린턴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줘야 했다.

라빈이 이스라엘의 총리로서 처음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그는 AIPAC의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매디슨 호텔에서 비공개 회의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라빈 총리는 백악관과 불필요한 긴장관계를 야기한 사실을 책망하면서, 향후 이스라엘 정부가 워싱턴과의 관계에서 전면에 나설 것이니 AIPAC은 보조 역할만을 수행하라고 주문했다. 

유대 지도자들은 로비 실패로 중요한 교훈 하나를 얻었다. 주이시 포워드의 노련한 저널리스트인 오리 니르는 이렇게 말한다. “그 일이 있고나서 유대인 단체들은 콜린 파월 독트린을 채택했고 그들이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일만을 대상으로 투쟁하게 되었다.”
“제국의 심장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홍보담당 이사인 조쉬 블락이 반겨주었다. 눈동자를 연신 굴리며 나를 뉴욕의 1번가에 있는 AIPAC의 분주하고 어수선한 사무실로 안내했다.

블락에게는 제국주의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유쾌하고 이제 겨우 삼십을 갓 넘긴 민주당의 선거전문가이기도 하다. 그의 부인은 얼마 전 첫 아이를 낳았다. 제국주의의 냄새가 나지 않기는 그의 사무실도 마찬가지다. 창을 통해 워싱턴 기념비가 보인다. 동시에 버려진 소파 등 잡동사니 폐기물 컨테이너로 가득한 주차장도 눈에 들어온다. 주차장은 노숙자들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하는 D.C. 센트럴키친 바깥에 위치해있다.

AIPAC의 본사가 위치한 그 곳은 전형적인 미국 스타일의 로비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작은 사무실들이 빌딩 안에 빽빽이 들어차 있고, 창문 없는 회의실이 두 층 에 걸쳐 마련되어 있다. 사무실에는 복사기, 산업용 철제선반, 푹 가라앉은 낡은 소파, 통일된 갈색 카펫과 칙칙한 황갈색의 벽이 있다. 에어컨 시설은 고온 다습한 6월 오후를 식히기에는 역부족인 듯싶었다. AIPAC는 내년에 조금 더 나은 건물로 옮길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한다.

언젠가 일본 기업 대표단들이 방문했는데, 행사 마지막에 가서 일행 중 한 사람이 정중하게 웃으며 가이드에게 “자, 그러면 이제 진짜 AIPAC 사무실을 보여주시겠습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AIPAC는 숨길게 아무 것도 없다. 조직의 규모, 세력 그리고 아젠다 등 조직 정보의 대부분은 홈페이지에 게시되어 있다. 거기에는 200명의 로비스트, 연구원과 조직원들, 4천7백만 달러에 이르는 한해 예산, 5년 전에 비해 약 2배 늘어난 10만 명의 풀뿌리 회원들, 그리고 300개의 대학 캠퍼스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신입사원 채용계획도 게시되어 있다.

최근 AIPAC는 조직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 몇몇 직원들과 결별했다. 최고위직 인물로는 외교담당 이사인 스티븐 로젠이었다. 로젠과 그의 동료 직원인 케이스 와이스맨은 작년에 해고당했다. 그들이 1917년 제정된 스파이 법에 의해 기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방부의 이란 정보책임자 로렌스 프랭클린으로부터 이란과 관련된 비밀정보를 얻었다. 재판은 늦여름으로 잡혀있다.

로젠과 와이즈맨의 변호사들은 그들이 워싱턴에서 상주하는 기자나 애널리스트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정보 수집을 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 말은 맞을 수도 있다. 다만 관심은 어떻게 이 스캔들이 터졌느냐는 점이다. 로젠과 와이즈맨이 먼저 프랭클린을 찾아가 정보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프랭클린은 평소 백악관이 이란의 핵문제를 더 강하게 다루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상관들은 의견을 달리했다. 프랭클린은 그의 상관들과의 꺾기 위해서는 백악관의 지지가 필요했고 백악관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AIPAC에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AIPAC는 자기분야에 전문지식인과 경험 많고 신념이 가득한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다. 정부정책담당 이사인 브래드 고든이 좋은 예다. 그는 의회 보좌관과 CIA의 분석관으로 일했다. 짧은 콧수염에 회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식사를 함께했던 봄베이클럽의 메뉴보다도 훨씬 긴 이력을 가진 매우 치밀한 사람이다. 현재 그는 AIPAC에서 모든 법제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그는 매우 신중하고, 겸손하며, 자신감에 차 있고, 조직과 자신의 역할에 있어 매우 정통해 보였다. 그는 “우리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확히 알고 있으며, 가능한 일만 한다”고 말했다.

한편 AIPAC는 시간에 쫓기고 처리해야할 안건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하는 의원과 보좌관들을 위해 필수적인 도구를 고안했다. 그것은 요약과 핵심전달의 기술이다. AIPAC는 테러리즘, 이슬람 국가의 군국주의화, 핵확산 문제에 관한 세미나를 자주 개최한다. 그리고 워싱턴이나 텔아비브의 전문가를 의회로 초빙해 온다. 이 세미나를 통해 의원들은 외교정책의 입법에 관한 연구 자료와 조언을 얻는다. 이런 활동과 더불어 의원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지역 풀뿌리 활동가로 구성된 방대한 조직망이 있다. AIPAC는 그들을 각종 사회이벤트에 초대하기도 하고 또 재선운동에 기여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정치 자금은 특정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요소이다. AIPAC는 정치 활동 위원회가 아니며 단체 자체로는 선거 후원금을 한 푼도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에는 의원들이 AIPAC의 핵심현안에 대해 어디에 투표했는지 상세히 나와 있다. 웹사이트와 함께 AIPAC 인사이더라는 정기간행물은 닥쳐올 선거에서 후보에게 불리한 정보를 다루고 있는데 수천 명의 잠재적 기부자들이 이런 정보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중립적 연구기관인 정치반응센터(Center for Responsive Politics)에 따르면 1990년 이래 친이스라엘 단체는 개인과 그룹의 이름으로 연방 정부 후보자와 정당에 5천6백80만 달러를 기부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친이슬람단체는 같은 기간 동안 297,000 달러만을 기부했다. 2000년과 2004년 사이에 치러진 선거에서 AIPAC 이사회멤버 50인은 1인당 평균 72,000달러를 선거자금과 정치후원금으로 기부했다. 이사회 멤버의 5명 당 한 명은 공화당의 부시 후보와 민주당의 존 케리 후보를 위한 최대의 후원금 모집책이었다.

AIPAC 회원들은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유명한 일부 친이스라엘 단체회원과 중복되기도 한다. 2002년 당시 총리였던 아리엘 샤론은 이스라엘 민간인을 대상으로 자살 폭탄 테러를 일으키는 팔레스타인에 맞서기 위해 서안지구에 있는 도시들을 포위 공격하는 이른바 ‘방패작전(Operation Defensive Shield)’을 펼쳤다. 친이스라엘 단체의 행동파들은 팔레스타인 희생자들에 관하여 왜곡보도를 일삼는 것으로 알려진 언론단체에 항의 편지를 보내고, 시위를 하며 보이콧 운동을 전개했다. 중동문제공정보도위원회(Committee for Accurate Middle East Reporting in America)라는 한 단체는 왜곡된 보도를 하는 33개 도시의 국영 라디오 방송국 밖에서 시위를 했고, 보스턴의 WBUR은 기부금으로 1백만 달러 이상을 썼다. 

AIPAC는 의원들과 보좌진들이 가급적 많이 성지에 가볼 수 있도록 연례 여행을 기획한다. 다수당 원내 총무인 미주리의 공화당의원인 로이 블런트는 AIPAC가 주최하는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네 번이나 다녀왔다. “미국과 이스라엘 간의 유대, 민주주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 이스라엘의 땅에서의 기적에 대한 이해 ....... 이것은 믿기 어려운 주목거리다”라고 블런트 의원은 조직의 연례 회의에서 말했다.

AIPAC의 전체 프로그램은 다른 민족그룹에 큰 자극이 되었다. 최근에는 인도계 미국인들이 재미유대인의 성공모델에 따라 조직, 싱크탱크, 그리고 정치활동위원회의 조직체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중도좌파 단체인 '평화실현을 위한 미국인모임'(Americans for Peace Now)의 루이스 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AIPAC가 의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직접적인 로비활동, 엄청난 풀뿌리 대중들의 후원, 그리고 후원자들이 기부하는 돈 덕분이다.”

AIPAC는 정확한 적도 알려준다.

브래드 고든은 9.11테러의 즉각적인 여파를 논의하기 위해 의사당의 복도를 지나가고 있을 당시를 회상했다. “한 명 이상의 의원이 나에게 다가와 말하기를 ‘브래드, 나는 당신이 말하던 것을 머리로만 이해했소.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되었소.”

9 .11 테러 이후 많은 미국인들이 이스라엘과 미국은 가치뿐만이 아니라 적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2월에 실시된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68%가 이스라엘에 호의적이고, 23%만이 부정적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스라엘을 지지한다는 의견이 59%, 팔레스타인을 지지한다는 의견은 15%로 집계됐다.

최근 이란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선거에서 이슬람 급진세력의 승리는 피아의 인식을 높여주었다. 이스라엘과 미국을 철저히 비난함으로써 대통령에 당선된 이란의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는 오사마 빈 라덴, 사담 후세인과 나란히 악한들의 집단에 합류했다. “아흐마디네자드를 잘 주시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모리스 아미테이는 말한다. “그는 무서운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두려운 점은 그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올해 AIPAC가 설정한 입법과제는 이란과 팔레스타인과 같은 적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첫 번째는 ‘팔레스타인 반테러법안’이다. 그 법안은 이슬람 무장 단체인 하마스가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강력히 제한하는 내용이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파괴를 요구하고 이스라엘 시민을 죽이기 위해 많은 자살 폭탄 테러를 일으킨다. 두 번째는 ‘이란 해방지원법령’이다.

이것은 이란이 핵폭탄을 개발하고 반정부 세력을 원조하는데 사용될 수 있는 외국 자금을 고갈시키기 위한 법안이다. 고든은 AIPAC의 누구도 이란에 대해 군사적 행동을 취하자는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AIPAC은 미국과 미국의 유럽동맹국들 그리고 러시아 및 중국 사이에 일어나는 강력한 외교적이고 경제적인 반응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AIPAC의 접근방식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가톨릭 주교연맹과 몇몇의 다른 자선단체들은 3개의 자유주의적 친이스라엘 단체(Americans for Peace Now, Israel Policy Forum, the Jewish Alliance for Justice and Peace)와 마찬가지로 미 상원이 후원하는 하마스 정책에 반대한다.  반대자들은 이 법안이 팔레스타인 온건파까지 고립시키며 인도주의적 차원의 지원을 방해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부시 행정부는 이 법안이 하마스의 손을 묶고 대외 원조가 하마스에게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3월에 열린 연례회의에서 AIPAC는 수백 명의 활동가를 450개 이상의 의원사무실에 보냈다. 가톨릭 연맹의 의견을 좇아 하마스법안에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진 미네소타주의 민주당 하원의원 베티 맥컬럼도 로비 대상이었다. 그녀는 늘 이스라엘에 유리한 투표를 해온 사람이지만 이번 법안만큼은 반대 입장이었다. 그녀의 보좌관인 빌 하퍼는 AIPAC의 미네아폴리스 지구 대표자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보좌관에게 맥컬럼 의원이 어느 쪽에 투표 했는지를 물었는데 이 일로 맥컬럼은 몹시 화를 냈다. AIPAC 대표자들은 보좌관에게 “맥컬럼이 테러리스트를 지지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제 이름과 명예는 지금까지 한 번도 더럽혀진 적이 없었는데 지난 주 처음으로 AIPAC 멤버에 의해 손상되었습니다.” 라고 맥컬럼은 AIPAC의 상임이사인 하워드 코(Howard Kohr)에게 보낸 편지에서 불평했다. 그녀는 ‘불쾌하고 비도덕적이며 무례하다’는 표현을 써가며 코에게 사과를 요구했고, 그가 사과할 때까지 AIPAC의 멤버들의 사무실 출입을 금지하겠다고 경고했다. 코는 그 일에 관해 협의하자고 제안했으나 AIPAC 지역대표는 어떤 설명이나 사과도 거부했다. 결국 맥컬럼 의원은 그 사건을 없었던 일로 하자고 했다. ‘팔레스타인 반테러법안‘은 올메르트 총리가 의회에서 연설하기 전날, 찬성361표로 반대 37표를 누르고 하원을 통과했다. 그리고 다소 온건하게 손질된 개정법안이 지난달 만장일치로 상원마저 통과했다.

의회와 마찬가지로 부시 행정부도 다루기 편안한 상대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텍사스 주지사 시절부터 샤론 전 총리와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이스라엘을 둘러보았다. 그 이후 이스라엘에 유대감을 느끼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주미 이스라엘 대사인 아얄론은 백악관에 전화를 걸어 국가안보 차석보좌관이자 이스라엘의 오랜 지지자인 엘리어트 아브라함과 협상을 하기도 한다. 샤론 총리의 외교보좌관인 아얄론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사저에서 만찬을 나누는 사이다. 또한 그는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인 스테판 하들리, 대통령 정책자문관인 칼 로브 그리고 새로 부임한 백악관 비서실장인 조쉬 볼튼과 매우 친한 사이다. 미 행정부와 이스라엘 양측 모두 더 이상 친해지지 못할 만큼 충분히 친밀한 관계라고 말한다.

이렇게 친밀한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에도 2002년 사소한 마찰이 있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이제 그만하면 됐다"며 샤론 총리에게 서안지구의 철군을 촉구했으며, 콜린 파월 국무장관을 현지에 보내 철군협상을 지휘 하도록 했다. 그러자 AIPAC는 의원들을 움직여 이스라엘 지지 결의안을 만들도록 했고, 결국 철군 불가를 고수하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결의안이 상원에서 94대 2, 하원에서 352대 21로 통과됐다. 유대인들은 4월 워싱턴에서 수 만 명이 참가한 '이스라엘 지지' 집회를 가졌다.

집회에 참석했던 유대인 군중들은 부시의 대리인 자격으로 집회에 온 폴 위포위츠 국방부 장관이 “무고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통 받고 많은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을 때 야유로 답했다. 반면에 개신교 정통파 토크 쇼 사회자인 쟈넷 파쉘이 “우리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는데 있어서 절대 꾸물거리지 않을 것이며, 절대 겁쟁이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이며, 절대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군중은 크게 환호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스라엘에 대한 철군요구를 철회했고, ‘이스라엘 지지’ 집회가 열린 뒤 나흘 만에 샤론을 "평화의 사람"이라고 말을 바꿨다. 파월 장관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 로비와 로널드 레이건 이래로 가장 보수적인 미-이스라엘의 친밀한 유대를 좋게 보지 않는다. 그들은 AIPAC와 이들을 지지하는 단체들이 지나치게 우경화경향을 보인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또 탐 드레이와 잭 아브라모프의 스캔들에서 나타났듯이 AIPAC가 공화당 지도부를 등에 없고 위세를 떤다고 비판한다. 미-이스라엘의 유대를 우려하는 사람들은 민주당을 왜곡하고 공화당에 표를 던지며 미심쩍은 눈으로 기독교 보수파를 바라보는 유대계 미국인들과의 접촉을 끊었다. 하지만 정작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 두 개의 명문대학 정치학자를 포함하여- 발을 돌리게 만든 것은 이라크 전쟁이었다.

하버드의 케네디스쿨에 위치한 스테판 월트의 사무실은 큰 책상과 탁자 주위에 소파가 놓여 안락하고 조용했다. 적갈색 벽돌과 놋쇠로 장식된 벽난로가 있었지만 월트 교수는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고 했다. 최근에는 논문의 공동 저자이자 동료 정치학자인 존 미어샤이머 교수가 만들어낸 열기로 인해 건물이 더욱 뜨거워져 난로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키가 크고, 팔 다리가 가늘고 길며, 부드러운 말투의 월트 교수는 비틀즈의 창의성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처럼 편안하게 미국 외교정책에 대해 설명하는 재능이 많은  학자다. 그는 대학교수 적격 심사에서 금상을 수상한 사람이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하버드 케네디스쿨의 국제관계학 교수이자 학장이 되기 전까지는 시카고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월트 교수와 시카고 대학의 학문적 동료였던 미어샤이머 교수는 실용외교정책연합(Coalition for a Realistic Foreign Policy)이라는 워싱턴을 본부로 하는 아카데미 그룹과 전직 정책입안자의 모임을 이끌고 있다. 그들은 부시의 으뜸가는 치적은 미국이 적국에게나 동맹국에게나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삼아 힘으로 설득한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라크 침공이 있기 전 2003년 1월 월트와 미어샤이머 교수는 ‘불필요한 전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포린 폴리시에 기고했다. 이 기사는 이라크 지도자 후세인은 세력이 약하기 때문에 군사력 동원 없이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두 교수와 뜻을 같이 하는 31명의 정치학자들은 뉴욕타임즈에 의견광고를 게재해 이라크전은 ‘낭비이며 큰 실수’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을 일으켰다. 월트와 미어샤이머 교수가 말했던 비참한 예언들 중의 상당부분은 현실이 되었다. 정부의 어느 누구도 학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이전 논문에서 월트 교수는 외교 정책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소수민족 로비의 역할을 다뤘다. 그의 견해는 로비가 나랏일을 망치기 쉽다는 것이다. 월트와 미어샤이머 교수는 이라크 전쟁에 관한한 이스라엘의 로비가 미국을 실패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라고 결론지었다.

‘런던 리뷰 오브 북스’에서 간행되고 케네디스쿨 웹사이트에 증보판이 실린 그들의 논문에서 두 학자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철저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냉전이 종식된 이후 이스라엘은 서구사회에 테러리즘을 불러오는 전략적인 기지가 되었고, 이스라엘로 인해 빈 라덴과 알카에다의 단결이 강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특별한 도덕적인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그럴듯하게 꾸며댄 이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항상 주변 아랍국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해왔으며 인종차별적이었다.

또한 타민족을 차별해왔고 팔레스타인인에 대해서는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논문은 “이스라엘의 건국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도덕적 범죄를 필요로 했다”고 거칠게 비판했다. 또한 미국에 대해서는,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의 팽창을 사실상 묵인해주고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공모자”라고 말한다.

왜 이스라엘은 무비판적인 미국의 지지를 얻고 있는가? 월트와 미어샤이머 교수는 로비의 힘이라고 답한다. “다른 음모나 부적절한 이유란 있을 수 없다. 로비를 하는 개인과 단체들은 다른 이익집단들보다 훨씬 탁월하다.”

월트 교수와 미어샤이머 교수에 따르면 의회에서 로비는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언론은 이스라엘 정책에 긍정적이므로 언론 또한 로비 활동에 일정 역할을 담당한다. 논문은 신보수주의자들(네오 콘)에게 가장 강한 비난을 퍼부었다. 친 이스라엘 이론가 집단이자 구성원 대부분이 유대계인 네오콘들이 부시정권을 이라크 전쟁으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네오콘들은 후세인을 전복시키고 그 지역에 민주주의를 전파함으로써 중동을 변화시키려고 했다. 그들은 이라크를 침공 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실은 이스라엘에게 도움을 준 것일 뿐이라고 논문은 비판한다. 네오콘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헌신, 이라크에 대한 강박관념, 그리고 부시 행정부에서의 영향력을 고려해볼 때, 많은 미국인들이 이라크 전쟁은 결국 이스라엘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의심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월트 교수의 말을 들으면 좀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는 총명한 엘리트들이라면 주저 없이 동의할 올바르고 객관적인 외교 정책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비열한 민족 이해집단이 정치에 참여하는 일이 없어져야 가능하다. 전쟁에 관해 묻자 그는 상아탑식의 견해는 거부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이 문제는 아주 단순하다. “이스라엘 로비가 없었다면 이라크와 전쟁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미국의 정치권력을 ‘납치’했다는 표현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정치는 그런 게 아니니까요. 무엇보다도 상당한 기간에 걸쳐 전쟁을 지지한 단체와 개인이 없었다면 이라크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다원적 민주주의사회에서 외교정책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자의 충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이스라엘 후원자들이 성공하는 이유는 미국에서의 이스라엘이 누리는 인기 또는 팔레스타인 자살폭탄 테러에 갖는 미국인들의 혐오감 때문이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는 듯 했다.  이란의 핵개발을 미국이 반대하는 것은 이스라엘과는 상관없이 오히려 미국의 이해와 관련될 수도 있다. 핵으로 무장한 아야톨라를 미국은 부담스러워 할 것이니까.

월트 교수는 이란은 염려해야할 대상이지만 이전처럼 위협적이지는 않다고 말한다. “만약 미국 내에 전쟁을 부추기는 강력한 이익집단이 없었다면 전쟁은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핵을 가진 많은 무능한 정권들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사용가능한 무기만으로도 그들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

월트 교수와 미어샤이머 교수가 논문을 발표했을 때, 그들은 수백 통의 이메일과 전화를 받았다. 논문에 대한 반응은 4대 1정도로 지지가 우세했다. 그들이 내켜하지않는 반응도 있었다. 백인 우월주의자인 데이비드 듀크는 이 논문이 백인 지상주의의 정당함을 입증했다고 말했다. 몇몇 극단적 논평가들은 유대계 미국인들의 음모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해주었다고 강조했다.

월트 교수는 이런 주장을 강하게 부정한다. “서구 크리스천 세계에는 오래되고 아주 나쁜 역사적 전통이 있습니다. 그것은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반드시 유대인 탓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저는 왜 몇몇 유대계 미국인들이 이 논문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핍박받던 역사적인 배경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국가의 이익을 배신하고 음모에 가담한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 이 논문을 쓴 게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그들이 어떤 비난 받을 행동을 했는지 밝히기 위해 썼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관련자들의 강한 감정이 개입될지라도 차분하고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오랫동안 밀실에서 은밀히 논의되었다면 이제는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치 친위대 장교가 두 명의 유대인을 총살하면서 그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묻습니다. 한 유대인이 손을 들어 말하려고 하는데, 다른 한 유대인이 말합니다. ‘그만해.  지금까지 우리가 일으킨 문제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글쎄, 난 손드는 게 무섭지 않아.’”

지금 손을 드는 사람은 마이클 오렌으로 미국태생의 유대인 역사학자이다. 그는 1970년대 말 뉴저지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주했다. 이스라엘 군대에서 복무했고 히브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베스트셀러인 ‘6일 전쟁’(Six Days of War)을 저술한 작가로 이 책은 미국의 성지 개입에 관한 역사 연구서에 해당한다.

그는 현재 하버드와 예일대에서 교환교수로서 계절학기 강의를 담당하고 있다. 그 또한 이스라엘 로비 논문에 대해 첫 비판자 중의 하나다. 캠브리지대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오렌과 마주 앉아있는 사람은 샤이 펠드만이다. 그는 이스라엘계 5세대로 브랜다이스 대학의 중동 연구기관인 크라운센터 책임자를 역임했다. 그전에는 이스라엘 최고 전략적 두뇌집단이자 텔아비브 대학의 전략연구 단체인 재피센터의 책임자를 지냈다. 펠드만은 월트과 미어샤이머 교수를 20년 넘게 알아온 가까운 사이다. 그래서 펠드만은 논문에서 오도되고 틀린 곳을 발견했음에도 공개적으로 논문을 비판하지는 않았다.

오렌은 우파에 가깝고 펠드만은 좌파에 가깝지만, 그들 모두 이스라엘의 주류에 속하는 인물이다. 이것은 그들이 언쟁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펠드만은 그의 두 친구가 잘못된 논문을 쓴 것에 대해 분노보다는 슬픔을 느낀다고 말한다.

“잘 들어보세요. 이스라엘은 이라크 문제에 사람들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네오콘과 이스라엘과 연계시키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펠드만은 감자튀김을 먹으며 말했다. “이스라엘은 이라크를 위험물로 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부시 정권의 민주주의 아젠다를 지지하는 것이 이스라엘에는 하등의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펠드만의 주장에 동의하는 한 사람의 저명한 이스라엘인이 있다. ‘민주주의 케이스’(The Case for Democracy)의 저자이자 전직 각료인 나탄 샤란스키이다. 부시 대통령은 샤란스키의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백악관으로 그를 초청하기도 했다. “내 말을 믿어요, 샤란스키의 민주주의론은 예루살렘에서보다 워싱턴에서 더 인기가 있어요”라고 펠드만이 말했다.
 
만약 이스라엘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직접적으로 종용하지 않았다고 친다면 유대계 로비스트들은 어떠했던가?
AIPAC는 이라크전쟁에 따라 얻게 될 이점에 대한 어떤 공식적인 입장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AIPAC 사무국직원들은 2002년 전쟁 결의안 통과를 위한 로비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다만 부시 행정부가 스스로 전쟁을 결정했으므로 곁에서 응원의 박수를 보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이스라엘 정부도 똑 같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2003년 4월에 열린 연례회의와 부시 대통령이 참가한 다음 해의 회의에서 행정부의 결정을 지지한 것을 빼고는 구경꾼 입장을 견지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이 분야를 연구해온 오렌은 이스라엘 로비에 대한 적개심이 정책 자체보다 더 깊어간다고 보고 있다. 그는 심지어 월트과 미어샤이머 교수가 반 유대주의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다.

“당신은 두 교수와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라고 펠드만이 대답했다. “비록 반유대주의자 논쟁에 빠질지라도 그들은 분명 반유대주의자가 아닙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논쟁은 이라크 전을 막지 못한 과실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오렌은 “그 두 사람이 유대인을 탓하는 독특한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습니까!”고 비판했다. 

오렌은 논문을 비난받아야 마땅한 악마로 간주했다. 하지만 펠드만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신뢰가 강하기 때문에 이 논문이 두 나라의 공조를 파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학자들이 미숙한 논문으로 박해를 자초할 경우라 하더라도 그들이 사실을 증명해 보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잠시 후 명백해진 것은 펠드만과 오렌의 차이가 좌파와 우파의 그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차이점은 이스라엘 사람이 된지 오래인가 아니면 신참인가에 달려 있었다. “1950년대 이스라엘 정국이 불안했을 때는 사정이 지금과 달랐습니다”라고 펠드만이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스라엘의 세력이 강해지자 이교도라고 인식될 만한 질문을 이스라엘 땅에서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으로 묘사하는 것으로는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오렌은 이민 1세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방과 후 뉴저지 웨스트 오렌지에 있는 학교로부터 쫓기듯 귀가하곤 했다. 그의 조국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취약하고 위태롭고 항상 주시의 대상이었다. 
“모든 탱크와 전투기를 동원해도 자살폭탄테러범을 막을 수 없어요.”라고 오렌은 말한다. “심지어 이란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츼약합니다.”

월트과 미어샤이머 교수의 논문에 가장 분노의 반응을 보인 사람은 로비스트로 지목된 더글라스 페이쓰이다. 그는 국방부의 전직관료였으며 이라크전을 강력하게 지지해온 네오콘이다. 논문은 그가 미국의 이익보다는 이스라엘을 위해 이라크 전을 지지했다고 기술하고 있어 그를 격분시켰다.  

그 다음으로는 부시 전 대통령과 클린턴 행정부의 중동 특사인 데니스 로스의 항의가 거세다. 그는 유대계 미국인으로서 이스라엘의 이익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할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법통성도 인정하는 인물이다. 로스는 2000년 7월에 열린 실패했던 캠프 데이비드 평화회담의 실무책임자였다. 클린턴은 이스라엘 총리였던 에후드 바라크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인 야세르 아라파트와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돌파구를 찾는데 실패했다. 요즘 데니스 로스는 워싱턴 중근동정책연구소의 초빙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두 교수의 논문에서 로비를 위한 두뇌집단 중 하나로 지목했다.  

로스는 이스라엘이 이라크 전을 부추겼다는 논문의 주장은 틀렸다는 펠드만와 오렌과 한 목소리를 낸다. 만약 전쟁을 부추길 수 있었다면 이스라엘은 오히려 더 위협적이고 에너지문제에 관련된 이란을 치도록 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반론이다. 상당수의 이스라엘인들은 후세인의 몰락이 결과적으로 인접한 이란의 세력을 더 강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어떤 주장이 맞던지 간에 이라크 전은 발발했다.

“두 교수가 사실을 좀 더 직접적으로 말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로스가 월트과 미어샤이머 교수에 대해 언급했다. “저는 그들이 반유대주의자라고 말하지 않겠으나  단지 그들이 무지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 이상이다. 로스는 중동 지역의 평화를 중개하기 위해 온 평생을 바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누군가의 로비를 하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을 몹시 싫어했고, 비평가 페이쓰와 같은 네오콘과 한편이라고 인식되는 것이 불쾌해서 화를 냈다. “제가 화나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것은 거짓말이겠죠. 그 논문은 오류가 많아요. 미국 외교 정책이 그릇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있습니다.”라고 로스는 말했다

3월 초의 어느 화요일, AIPAC의 연례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5000여 명의 사람들이 워싱턴 컨벤션 센터의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상원의원의 절반인 50여 명과 하원의원 100여 명 그리고 많은 정부 고관들도 참석했다. 딕 체니 부통령과 존 볼턴 유엔 주재 미국대사가 기조연설을 했다. 이스라엘 총선은 며칠 앞으로 다가와 있었고 이스라엘 세 다수당 지도자들은 위성중계를 통해 총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에후드 올메르트도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 정치인 특유의 감사인사를 시작했다. “여러분이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AIPAC이 있음을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상영되는 비디오는 먼저 가자지구로부터 철수하는 이스라엘 군인들을 보여주었다. 그 다음에는 분노한 팔레스타인 군중들이 버려진 거주지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는 모습, 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선거 승리 장면, 파괴된 이라크 모습, 빈 라덴의 초상, 런던, 이집트, 인도네시아, 요르단, 이스라엘에 이르는 연쇄 폭탄 테러사건,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이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지워져야한다”고 말하는 장면, 폭력, 불길, 갈색 피부의 어린 무슬렘들의 분노를 보여 주었다.

새로운 홀로코스트의 메시지인가? 그럴 수도 있다.

비록 다비드 벤구리온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지는 못했으나 그것이 벤구리온의  사명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1942년 미국을 떠난 벤구리온은 팔레스타인으로 되돌아와 이스라엘의 탄생을 지켜보았고 1948년 초대 수상이 되었다. 그는 그해 5월 14일 워싱턴 시간으로 오후 6시 이스라엘이 독립국가임을 선포했다. 11분 뒤 미국은 독립국 이스라엘을 인정한 첫 번째 국가가 되었다.

벤구리온은 이스라엘의 강력한 방위체제 구축을 감독했다. 그것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경제와 정치가 혼합된 체제였다. 그러나 그의 업적 중 가장 큰 한 가지는 그가 국가의 성공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간단한 기준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월트과 미어샤이머 교수 뿐 아니라 그들을 비판하는 사람에게도 이로운 것일 수 있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를 재는 척도는 비판의 자유다”라고 벤구리온은 썼다.

인터뷰를 끝마쳤을 때 모리스 아미테이는 말했다. “당신과 토론하는 것은 멋진 일이었습니다. 당신의 기사가 나간 뒤 편집장에게 매우 비판적인 편지를 보낼 작정입니다.”

번역 및 정리: 양소영(soyoung6670@naver.com
                   신승현(shincoool@naver.com)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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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