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4

« 2024/4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2010. 11. 20. 16:41

나의생애와사상<독후감> 독후감2010. 11. 20. 16:41


나의 생애와 사상 감상문

 

슈바이처 박사는 많은 사람에게 봉사의 정신을 일깨워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슈바이처의 이런 행동의 뿌리가 된 사상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슈바이처 나이 56세이었던 1931년 쓰여진 이 책은 그의 삶에 대한 회고이면서 동시에 그의 사상에 대한 개괄서이기도 하다.

 

그의 사상의 요체는 [생명경외사상]이다. 1차대전을 통해 드러난 서양사상의 자멸적 몰락은 슈바이처로 하여금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재건하기 위한 철학적 기초를 다시 마련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주었다. 원래 신학이 전공인 그가 의사로서 살며 느낀 점이 있다. 그 것은 바로 살아있는 삶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의 생명이 소중하다고 느끼는 만큼 남도 귀중한 생명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생명에 대한 외경심]만이 인간의 운명과 세계에 대해 부정적이고 파괴적 견해로 치달을 수 밖에 없는 20세기의 세계관을 인간 긍정적, 세계 긍정적 세계관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의 신학은 철저히 19세기말의 자유주의적 신학 이해에 기초한다. 비록 교회전승적 예수가 아닌 역사적 예수를 찾고자한 당시의 독일신학,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교수에 이른 그이지만 슈바이처는 역사적관점에서의 예수 이해가 놓치고 있는 후기 유대적 메시야 사상과 초기 기독교의 재림 대망에 기초한 윤리관을 접목한다. 메시야로서의 예수의 자기인식과 이에 기초한 초대교회의 도래할 하나님나라의 주이신 예수 사상, 그리고 이 기다림 속의 윤리관으로서의 바울 신학을 발견한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이런 신학적 이해가 당시 사회에 구원이 되기 위하여 예수의 메시야 인식에 기초한 윤리가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내지길 원했다.

 

그는 그의 생각을 따라 실행에 옮긴 삶을 살았다. 그에게 인간적 결함이나 천재적 재능과는 별개로 참다운 진실과 끊임없는 노력과 열정을 바치는 한 인간을 본다. 그는 음악이든 철학이든 신학이든 의료이든 동료인간과 생명을 존중하기를 원했다. 반면 나 자신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나하고 의문을 가벼 본다. 생도 생활에서 얻은 풍부한 경험과 그 동안 주어진 모든 혜택은 베풀기 위함인데 더 많이 누리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본다. 의연히 그는 19세기의 신학적 방자함과 철학적 교만과, 경제논리적 파이프오르간과 폐쇄적 국가관과 계급에 갇힌 의사를 넘어섰다.

 

무엇이 그에게 이런 힘을 주었는가? 그것은 사랑이라고 그는 말한다. 지성으로 연결되는 신앙만이 인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사랑으로 채워진 진리만이 인류를 해하지 않을 수 있다. 사랑은 그의 이성적 도출인가? 그는 그의 안에 있던 신앙을 설명하려 하고 그 힘은 그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왔음을 내비친다. 그는 신학의 이단자로 비치지만, 남의 영역으로 넘어들어온 자가 아니라 진정 그의 관심이 신학에 있었던 사람이다. 메시야 인식과 바울의 그리스도 이해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속마음을 이 시대에 윤리적으로 도출하는 것이 세계에 대한 열매있는 봉사라고 여겼다.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다른 모습을 본다. 균형과 내적 힘은 믿음의 신앙이 훨씬 강하지만 지성의 신앙인 그에게서는 일관성과 세상에 대한 설득의 의지를 본다.

 

그는 스스로 사고하고 고민한 것을 선택하여 관심이 기우는 곳에 시선을 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시선은 슈바이처만의 독특한 세계관과 인생관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의 실천적인 생애에 있어서 토대가 되었다. 보통 종교적 사유는 광신에 이르지 못한 맹신에 머물고 있음을 보게 된다. 광신과 다를 바 없는 맹신임에도 흔히 그것을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곡해하여 수용하려 든다. 그러나 슈바이처의 경우에는 광신도 아니고 맹신도 아닌 지극히 이성적인 신앙으로 나아간다. 그러기에 인간에 대한 긍정에서 비롯된 휴머니즘을 바탕 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는 그가 스스로 고민하는 주체적 인간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이런 생각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 또한 슈바이처를 역할모델로 삼아 끊임없이 생활 속에 ‘작은 슈바이처’로서의 나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수양하여야 할 것이다.

 

:
Posted by 해토머리